열선조의 묘소(墓所),단사(壇祀),재실(齋室)

 

신라(新羅) 십대왕(十代王), 선도성모(仙桃聖母)

 

 

★ 신라5릉(新羅五陵)

 

◈ 종 목 : 사적

◈ 지정번호 : 0172-00-00-00   

◈ 문화재명 : 신라오릉 (新羅五陵)

◈ 분류 : 능

◈ 수량 : 89,550㎡

◈ 지정일 : 1969.08.27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탑동 67

◈ 시대 : 신라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경주시

       

오릉정면

오릉전경<인터넷 자료>

이 곳에 있는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과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초기의 네 박씨 임금과 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으로 전해 온다.  오릉의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경주시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이다. 능의 주인공에 대하여 밝히면,

1릉은 신라 시조왕릉(재위 61년)이요, 2릉은 신라 시조왕비릉, 3릉은 제2대 남해왕릉(재위 20년), 4릉은 제3대 유리왕릉(재위 33년),

5릉은 제5대 파사왕릉(재위 32년)이라고 한다.

오릉(五陵>은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제1릉<第1陵> -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 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 -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 -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 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 -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 이는 약 3.6m이다.

제5릉<第5陵> -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 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의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 남해왕(南解王) · 유리왕(儒理王) · 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오릉에 이르면 먼저 숭의문(崇義門)이 나온다. 숭의문을 지나면 아름답게 지어진 일자제각(一字祭閣)을 만나다. 제각은  1세 시조왕(1대왕)과 왕비 알령부인, 2세 남해왕(2대왕), 3세 유리왕(3대왕), 4세 파사왕(5대왕)을 모시는 곳이다. 일자제각 뒤로 가면 바로 오릉 정면이 보이는데 잘 가구어진 묘역은 주변의 소나무 숲과 어우려져 신라 천년의 찬한했던 문화를 그립게 한다.
매년 추분절(秋分節)에 전국의 성손들이 이곳에 모여 한 핏줄 한 일가로서 릉향제를 봉향하면서 뜨거운 혈연의 정을 다지고 있다.

 

 ☞  신라오릉 탐방기

 

             

 

 ★ 선도성모(仙桃聖母)

천년 고도 경주 서쪽에는 선도산이 있다. 해발 381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오악산왕(五嶽山王)의 응감을 위해 신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서악(西嶽)의 지위에 있었고 여러 신이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서악 주봉의 큰 바위 아래 마애삼존불이 있고 사소(娑蘇)라는 별명을 지닌 성모(聖母)를 배향하는 성모사(聖母祠)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성모사(聖母祠)는 성모(聖母)를 모신 사당인데 성모는 바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와 왕비 알려의 어머님 이시다. 성모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1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도산을 오르려면 선도리(仙桃里) 마을길을 지나야 한다. 정상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성모사(聖母祀)가 있다. 사당 안에는 황원단(皇原壇)이 있다. 임금의 근원을 모신 제단이다. 제단 옆에는 선도산의 산신들을 모신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다>고한다.

신라 사람들은 경주의 서족인 선도산(仙道山) 정산부근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생각하고 이곳에 아미타 삼존불(阿彌陀 三尊佛)을 새겼다.

바로 성모사 옆 절벽인데 조각하기 힘든 암석에 높이 6.85m나 되는 거구의 여래입상(如來立像)을 돋을 새김 하였다. 아미타여래 입상을 본존으로 하여 왼쪽에는 불상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상(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있는데 이 두 보살상은 옮겨온 화강석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선도산 성모사 탐방기

 

                         

 

 ★ 숭덕전(崇德殿)

 이 건물은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를 봉사하기 위한 제전이다. 1492년(세종 11)에 건립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 34)에 관제사 이시발(李時發)이, 1618년(광해군 10)에는 관제사 박경신이 각각 중건하였고 1704년에는 경주부윤 여필용이 중수하였다. 1723년에는 묘를 고쳐 숭덕전이라 게액하였는데, 현재의 모습은 1735년(영조 11) 석빙고 개축시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숭덕전은 오릉 남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외삼문을 중심으로 건물들을 에워싼 1곽의 담장밖에 다시 담장을 둘러 동쪽과 남쪽에 삼문을 건립하였다. 남쪽의 삼문을 들어서 30여m를 지나면 홍살문이 나타나며 여기서 다시 50m를 가면 외삼문인 영숭문이 나온다.

영숭문과 외삼문인 숙경문, 숭덕전은 동일축선상에 놓여져 있는데 숭덕전의 우측에는 향축실과 전사청을 두었다. 숙경문과 영숭문 사이에는 좌, 우로 상현재와 동재를 두었다.

영숭문의 좌측에는 시조왕의 신도비가 안치된 숭성각이 있으며, 숭성각의 우측 담장밖에는 중수비각을 세웠다. 동재의 우측에는 별도의 공간이 구성되 어 있는데 참봉이 거처하는 추보헌 뒤에는 방형의 연못이 있고, 연못의 뒤에 난 협문을 지나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신라始祖王妃誕降遺址)'라 음각한 비가 있는 비각과 알영부인이 태어났다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추보헌의 우측에는 12칸 규모의 장재를 세웠는데 장재사이에 있는 중문을 지나면 최근에 지은 T자형의 귀빈실이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이 맞배집인데, 전면의 반 칸을 퇴칸으로 개방시키고 내부는 통칸으로 하였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상부는 외일출목의 삼익공으로 장식하였다. 내부천장은 소란반자로 마감하고 금단청하였다. 그리고 매년 3월 춘분일에 춘분대제를 봉향하고 있다.

 선숭덕전 탐방기

 

             

 

★ 나 정(蘿 井)

 

 

경북 경주시 탑동(塔洞)에 있는데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우물로 사적 제245호 이며 면적은 0.59ha 이다. 신라 오릉()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 남동쪽 소나무숲 가운데 조그만 비각이 있다.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건국되기 전 경주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부촌장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전 69년 어느 날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이곳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끓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말이 있던 곳에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 하나가 있었다. 이 알을 깨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으므로 하늘이 보낸 천자라 여기고 잘 길렀다. 이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57년에 6부촌장이 모인 자리에서 왕으로 추대되니 이 이가 곧 신라 시조 임금이다.

왕이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성을 박이라 하였고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 하게 되었다. 그 뒤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 나정은 돌 뚜껑으로 덮혀 있고 비각에는 내력을 새긴 비석이 있다. 조선시대 순조 2년(1802)에 세운 것이다.

* 나정에 대하여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2천년전 우물의 실체가 들어났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사실로 나타남에 따라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와 과 왕비 알영은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요, 실존 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나정-                         

 

 ★ 알 영 정(閼英井)

 

 

신라 시조왕의 왕비께서 탄강하신 곳이다.
오릉원 경내에는 박혁거세의 왕비로 알려진 알영(閼英)이 태어났다고 하는 우물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알영정의 위치는 혁거세왕의 제향을 모시는 제전인 숭덕전(崇德殿) 내부에 있다.
시조왕께서 탄강하시던 그날에 알영정에서 계룡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홀연 오른쪽 옆구리에서 한 여아를 탄생하고 용은 간곳이 없었다. 때마침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구가 있어 북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시조왕의 탄생과 영이함을 방불하기에 육부의 촌장들이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두 성아를 지금의 남산 옛 창림사 터에서 봉양하여 탄생 후 13년 만에 육부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 시조왕과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알영정                                           알영각                                         연   당

 ★ 일성왕릉(逸聖王陵)

 큰골과 장창골이 합치는 지점에 우거진 송림이 있다. 그 송림 안에 일성왕릉이라 전해오는 옛 무덤이 있는데, 이곳은 남산성 서쪽 기슭으로서 강당못을 앞에 낀 아름다운 자리이다.

큰 편에 속하는 능은 아니며 능 둘레에 나지막하게 자연석으로 호석을 둘렀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 일성왕은 신라 7대 임금으로서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왕은 농토를 늘이고 제방(堤防)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 은, 주옥(珠玉)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농사의 개발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여러 곳에 제방을 쌓아 농업의 증산에 힘을 쏟았으며 흉년이 든 곳에는 농사가 잘된 곳의 쌀을 보내는 등 선정을 베푸신 임금이다.

 

★ 지마왕릉(祗摩지마王陵)

 지마왕은 신라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112년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무덤의 외형은 비교적 규모가 큰 원형 봉토분으로 남산에서 뻗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단 높은 곳에 만들었을 뿐 아무런 특징이 없는 무덤이다.

 

★ 삼왕릉(三王陵) - 아달라왕(阿達羅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경주 배리삼능(拜里三陵)은 남산 서쪽 기슭에 신라 박씨왕(朴氏王)인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53대 신덕왕(神德王),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능이 나란히 있어 삼능이라 한다. 아달라왕은 일성왕(逸聖王)의 장자로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장지(葬地)에 관한 기록이 없다.

신덕왕은 이름이 경휘(景暉)였고 6년동안 왕위에 있었다.

경명왕은 이름이 승영(昇英)이고 신덕왕의 태자였으며 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능의 형식은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표식물은 하나도 없다. 상석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연도를 갖춘 석실분이다. 석실 내부에는 회칠을 하였고 밑에서 1.4m 높이까지 2단으로 방형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황, 백, 주, 청의 채색을 하였다 한다. 능의 제도는 모두 초기 형식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 경애왕릉(景哀王陵)

경애왕(景哀王)은 신라 55대왕으로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위응(魏膺)이다. 4년간 재위했는데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유연(遊宴)할 때 불의에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자살하였다. 경애왕릉은 평범한 원형봉토분으로 겉에는 아무 시설이 없다.능 앞에 상석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봉토가 일반묘 보다 크므로 왕릉이라 전하나 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다. 원래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로 호석을 쌓고 5각형 돌기둥을 둘러 가면서 받쳐 놓은 민애왕릉과 같은 양식의 능이었는데 지금은 흙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 능 앞에 서면 권력도 영화도 한 순간의 꿈이라던 옛 성현들의 말씀이 실감난다. 무덤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높이가 4.2m, 지름이 13.8m이며 별다른 장식이 없다.

 

 ★ 포석정(飽石亭)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塔正洞:拜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구(石構)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7,432㎡이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이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처음 쓰여졌으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이궁원(離宮苑) 내에 유연(遊宴)을 위한 자리로 만든 이 석구는,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를 벌일 수 있도록 특이한 구조로 만들었다.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없어졌고,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개 자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이다.

  신라 왕릉 탐방기

 

       

         일성왕릉                               지마왕릉                             삼왕릉                                    경애왕릉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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