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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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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성왕(逸聖王) 능(陵) - 사적 제173호 (경주시 탑동 산 23)

 

나정과 양산제를 뒤로하고 다시 남산 북쪽 자락에 위치한 일성왕 능을 향해 달렸다. 좁은 포장길로 두어 마을을 지나 산골로 들어가는데 민가가 몇 채 있는 곳에서 길이 끊겼다. 갑자기 길을 잃어 근처 절간의 스님에게 일성왕릉 가는 길을 물으니 밖에 나와서 일러주었다

마지막 민가를 돌아 남산쪽을 바라보니 멀리 일성왕 능이 보이는데 능은 낮은 산록에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길은 막다른 길로 겨우 승용차 한 대가 갈 수 있었다. 식구들을 다시 차에 태우고 가파른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일성왕릉 앞에 다다랐다. 일성왕은 신라 시조왕 4세요 신라 7대 왕이시다.

▲ 일성왕릉(근경)

일성왕 능에 대한 안내문을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았다. 그리고 능 앞에 다가가 일성왕 능이라는 비문을 확인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짙푸른 송림 속에 1,800여 년 동안 잠들어 계신 선조 임금의 능을 가족들과 함께 찾아왔다 싶으니 신라오릉 참배에 이어 감회가 새로웠다.

▲ 일성왕릉(원경)

다음은 왕에 대한 인터넷 자료 일부를 게재한다. <큰골과 장창골이 합치는 지점에 우거진 송림이 있다. 그 송림 안에 일성왕릉이라 전해오는 옛 무덤이 있는데, 이곳은 남산성 서쪽 기슭으로서 강당못을 앞에 낀 아름다운 자리이다.

큰 편에 속하는 능은 아니며 능 둘레에 나지막하게 자연석으로 호석을 둘렀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

일성왕은 신라 7대 임금으로서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왕은 농토를 늘이고 제방(堤防)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 은, 주옥(珠玉)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농사의 개발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여러 곳에 제방을 쌓아 농업의 증산에 힘을 쏟았으며 흉년이 든 곳에는 농사가 잘된 곳의 쌀을 보내는 등 선정을 베푸신 임금이다.>

일성왕 능을 뵙고 차를 돌려 13시 30분 경에 시내로 들어갔다. 식구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기에 점심을 들기 위해서다. 경주 시내도 차량이 붐벼 주차하기가 힘들었다. 시내에서 한식집 하나를 찾았다. 식구들은 숫불갈비로 점심을 배부르게 들었다. 그리고 충분히 휴식을 쉬했다. 다음은 삼릉을 뵈러 가는데 가는 길에 포석정과 지마왕 능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다.

   

  포석정(鮑石亭) - 사적 제1호 (경주시 배동 454-3)

 

경주 시내에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한 후 가족을 차에 태우고 포석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곧 바로 나정 입구가 나오고 거기로부터 1km 정도내려가니 좌회전하여 포석정 가는 입구가 나왔다. 식구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다가가 보니 포석정 안에 그 유명한 굴곡진 수로가 거북이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주위는 아름드리 고목으로 둘러 싸여 있고 옆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였다.

포석정을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매우 적어 보였다. 그렇게 좁은 곳에서 어떻게 왕이 백관을 대동하고 연회를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아무튼 포석정의 굴곡진 수로를 곡수거(曲水渠)라고 한다. 신라왕들이 이 곳에서 연회를 할 때 남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을 이 곳 곡수거로 끄러 들여 술잔을 띄우고 취흥을 했던 것 같다.

▲ 포석정(근경)

역사적으로 포석정과 가장 밀접한 왕은 신라 55대 경애왕이다. 경애왕은 갈산문중의 직계인 경명왕의 동생으로 포석정에서 취흥을 하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흘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 인간의 영욕이란 덧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탄식이 나오고 슬픈 과거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다음은 포석정에 대한 인터넷 자료의 일부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란 수로(水路)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로, 그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曲水渠)라 한다. 이 놀이의 유래는 천년전 중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에도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어, 이곳 포석정(飽石亭)의 곡수거(曲水渠)가 매우 중요한 연구자료(硏究資料)가 되고 있다.

포석정(飽石亭)과 곡수거(曲水渠)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나 축조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곡수거(曲水渠)는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축이 약 5m 크기로, 깊이는 50cm 가량되는 도랑이 나 있다. 모두 63개의 석재(石材)로 조립(組立)되었다>

▲ 포석정(원경)

 

 

   지마왕(祗摩王) 능(陵)- 사적 제221호 (경주시 배동30)

 

포석정으로 가서 관광을 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지마왕 능을 찾았다. 지마왕은 신라 6대왕이다. 나의 직계 선조는 아니지만 박씨 왕임으로 찾아간 것이다. 가는 길에 사과나무와 단풍나무 숲이 이채로웠다. 지마왕릉 역시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주변의 경관이 깨끗하고 푸르며

또한 울창하였다.

다음은 지마왕에 관한 인테넷 자료 일부다.

<지마왕은 신라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112년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무덤의 외형은 비교적 규모가 큰 원형 봉토분으로 남산에서 뻗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단 높은 곳에 만들었을 뿐 아무런 특징이 없는 무덤이다>

▲ 지마왕릉

     

     삼릉(三陵)- 사적 제221호 (경주시 배동73-1)

지마왕 능을 살펴 본 후 되돌아 나와 다시 포석로를 타고 남쪽으로 1km 남짓 달리니 역시 좌측으로 삼릉 입구가 나왔다. 거기에는 주차장도 넓고 매점과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식구들과 함께 목을 추긴 후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삼릉이 나왔다. 여기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직선조 왕능을 참배하였다. 삼릉은 신라의 박씨 왕인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능이 있는 곳이다.

▲ 삼릉 정면

나는 아달라왕으로부터는 1,800년, 신덕왕과 경명왕으로부터는 1,000년의 후손이다. 아득히 먼 후손으로 가족과 더불어 삼릉을 대하니 이곳 역시 감회가 깊었다.

경명왕께서는 아홉 왕자를 두셨는데 그 첫 아들 언침은 밀성대군으로 밀성(밀양)박씨 시조가 되며 나의 직계 선조이시다. 상고해 보면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은 시조왕 5세다. 그리고 신라 제53대 신덕왕은 시조왕 28세요 아달라왕 24세다. 아달라왕과 신덕왕 사이 22대는 족보에만 기록이 되어 있고 그 유적을 알 수가 없다. 안타가운 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찾아본 왕릉은 계통을 따라 돌이켜보면 오릉원에서 1세 시조왕, 2세 남해왕(2대왕), 3세 유리왕(3대왕) 능을 뵙고 남산에서 4세 일성왕(7대왕) 능을 뵈었다. 그리고 삼릉에서 5세 아달라왕(8대왕), 28세 신덕왕(53대왕), 29세 경명왕(54대왕)을 뵘으로서 종료된다. 아달라왕부터 신덕왕에 이르는 22대 선조는 사적이 없어서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갈산문중의 직계가 아닌 지마왕릉과 경애왕릉을 추가로 더 찾아 뵐 수 있을 뿐이다.

  다음은 삼릉에 대한 인터넷 자료의 일부다.

<경주 배리삼능(拜里三陵)은 남산 서쪽 기슭에 신라 박씨왕(朴氏王)인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53대 신덕왕(神德王),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능이 나란히 있어 삼능이라 한다.아달라왕은 일성왕(逸聖王)의 장자로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장지(葬地)에 관한 기록이 없다.

신덕왕은 이름이 경휘(景暉)였고 6년

▲ 삼릉 우측면

동안 왕위에 있었다.

장지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죽성(竹城)이라 하고 <삼국유사>에는 화장하여 유골을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 한다. 경명왕은 이름이 승영(昇英)이고 신덕왕의 태자였으며 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황복사지(皇福寺址)에 장사지냈다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황복사에서 화장

▲ 삼릉 좌측면

하여 유골을 성등잉산(省等仍山)에서 산골(散骨)하였다 한다. 능의 형식은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표식물은 하나도 없다. 상석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연도를 갖춘 석실분이다.

석실 내부에는 회칠을 하였고 밑에서 1.4m 높이까지 2단으로 방형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황, 백, 주, 청의 채색을 하였다 한다. 능의 제도는 모두 초기 형식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경주 남산을 오르는 곳은 여러군데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삼릉을 통해 남산을 오른다. 삼릉을 통해 남산을 오르다 보면 많은 불상을 접할 수 있고, 50 분쯤 산을 오르면 상선암 마애대불을 볼 수 있다.>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 (경주시 배동73-1)

 

삼릉 바로 곁 남쪽으로 조그만 개천이 흐르는데 외나무다리를 건너니 바로 경애왕릉이 나왔다. 능에 다가가 뵈니 왕릉치고는 규모가 왜소하였다. 경애왕은 경명왕의 동생분으로 신라 55대왕이다.

포석정에서 취흥을 하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마치셨다. 경애왕릉을 돌아보고 삼릉을 지나 주차장으로 나오니 어느덧 석양이 되었다. 이로서 신라 박씨 왕릉을 찾아보는 일이 모두 끝났다.  8월 염천에 정장을 하고 다니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웃옷과 넥타이를 풀고 간소 복으로하니 한 결 시원하고 간편했다.

다음은 경애왕에 대한 인터넷 자료다. <경애왕(景哀王)은 신라 55대왕으로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위응(魏膺)이다. 4년간 재위했는데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유연(遊宴)할 때 불의에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자살하였다. 경애왕릉은 평범한 원형봉토분으로 겉에는 아무 시설이 없다.

▲ 경애왕릉

능 앞에 상석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봉토가 일반묘 보다 크므로 왕릉이라 전하나 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다. 원래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로 호석을 쌓고 5각형 돌기둥을 둘러 가면서 받쳐 놓은 민애왕릉과 같은 양식의 능이었는데 지금은 흙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 능 앞에 서면 권력도 영화도 한 순간의 꿈이라던 옛 성현들의 말씀이 실감난다. 무덤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높이가 4.2m, 지름이 13.8m이며 별다른 장식이 없다>

경애왕릉을 살펴보고 차를 몰아 보문관광단지로 향하는데 아내가 이의를 제기 하였다. 박씨왕릉만 찾아보고 왜 김씨왕릉은 찾아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김씨임으로 자기의 조상인 김씨왕릉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씨왕은 수가 너무 많으니 다음 기회에 찾아보자고 하고는 보문호로 차를 몰고 가 어둠이 밀려드는 호수 가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휴식시간을 가졌다.

 

신라 박씨 왕릉 답사지도

 

 ● 오릉

 나정

일성왕릉

포석정지

지마왕릉

삼왕릉

경애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