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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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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에서 박씨 신라왕들의 숨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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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14일 경주로 휴가 떠날 준비를 완벽하게 하였다.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를 점검하니 지난번 수해 때 물에 잠겨 쓸 수가 없음으로 수리를 부탁하고 영등포 백화점에 가서 새로 구입하였다. 약국에서 구급랑과 상비약을 마련하여 집으로 오니 아내는 떠날 채비를 다해 놓고 있었다. 부모님께 휴가출발 인사를 드리며 아버님께 면도를 하고 계시라고 말씀드리니 아버님은 나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아내와 딸 보름이, 아들놈 도일 이를 차에 태우고 12시 45분에 집을 출발하였다. 이번 휴가는 경주에서 신라 시조왕릉과 기타 박씨 왕릉들을 살펴보고 포항에서 동해안을 거슬러 설악산까지 가는 것으로 정했다. 물론 휴가의 주목적은 나의 조상인 신라왕릉들을 배알하는 것이다. 13시30분 경에 서울 서초동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보름 이는 자동차 앞에 타고 아내와 도일 이는 뒤에 탔다. 난생 처음 가족 모두가 휴가를 떠나는 즐거움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경주를 향해 달렸다. 추풍령에서 평사휴게소 까지 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자동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다. 그 구간의 경치는 산세가 움푹움푹 한 가운데 아담하고 푸르러 마치 사진에서 보았던 중국의 계림풍경 같았다. |
☆ 신라오릉 20시30분 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시내로 진입하여 불국사가는 길 근처에 있는 경주리조트에 당도하니 주인이 나와 주차안내를 하여 주었다. 나는 주인에게 이틀을 묵고 가겠다고 말하고 거기서 1박을 하였다. 다음날 08시에 일어났다. 아이들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내와 함께 근처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이날은 말복 날이자 광복절이다. 11시경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숙소를 나왔다. |
▲숭의문(오릉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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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 같은 무더위에 정장을 하고 나선 것은 나의 직계 선조이신 신라 시조왕이하 박씨 왕릉들을 찾아 뵙기 위해서다. 생전 처음 조상의 능을 뵈는데 간소복 차림으로 가는 것은 예가 아닌 것 같아서다. 먼저 신라 오릉원을 찾았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마자 입장권을 사서 오릉원으로 들어갔다. 넓디넓은 잔디밭이 푸르고 깨끗하다. 좌측으로는 오릉이요 우측은 숭덕전이다. 오릉 기념사업비를 지나 시조왕릉이 있는 오릉을 먼저 갔다 |
▲ 오릉 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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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 출입문인 숭의문을 지나 웅장하면서도 잘 가꾸어진 신라 시조왕릉을 대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시조왕으로부터 2,000년간에 일본천파(一本千派) 수 백만 후손이 번창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시조왕 68세 손이 된다. 아득히 먼 후손인 샘이다. 오릉은 분묘가 5개다. 시조왕 박혁거세와 시조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5명의 분묘라 전해지는 곳이다. 분묘가 너무 커서 5개가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가까이 수 천년을 지내온 모습들은 다정다감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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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릉 우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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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의 다른 이름은 사릉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명칭은 시조왕이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는데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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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왕릉을 경건한 마음으로 배알한 후 가족과 함께 오릉을 한 바퀴 돌며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아이들에게 신라 시조왕에 대한 설화도 이야기하여 주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풀벌레 소리 요란한 가운데 잔디가 참으로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내가 찾아보고자 하는 박씨 신라왕릉은 아래 도표와 같이 10기이다. 그 중 5대 파사왕, 6대 지마왕, 55대 경애왕은 갈산문중의 직계는 아니다. |
▲ 오릉 뒷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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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내가 찾아보고자 하는 순서는 첫째 오릉에 모셔져있는 1세 시조왕(1대왕)과 왕비 알령부인, 2세 남해왕(2대왕), 3세 유리왕(3대왕), 4세 파사왕(5대왕)이고, 둘째는 4세 일성왕(7대왕)릉이며, 셋째는 삼릉으로 일컫는 8세 아달라왕(8대왕), 28세 신덕왕(53대왕:아달라왕의 24세손), 29세 경명왕(54대왕)릉이다. 비록 나의 직계는 아니지만 5세 지마왕(6대왕), 29세 경애왕(55대왕:경명왕의 동생)릉도 살펴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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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해보면 박씨가 신라왕이 된 것은 초기가 7명이고 후기가 3명으로 모두 10명이며 233년을 지냈다. 한편 일성왕은 파사왕의 형님이나 파사왕이 먼저 5대왕위에 오르고 파사왕의 아들이 6대 지마왕이 되었으며 후에 일성왕이 7대왕이 되고 그 아들이 뒤를 이으니 8대 아달라왕이다. 우리 갈산문중은 아달라왕의 후손인 것이다. 오릉을 돌아본 다음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숭덕전으로 향했다. 다음은 경주 오릉에 대한 공식소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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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 사적 ◈ 지정번호 : 0172-00-00-00 ◈ 문화재명 : 신라오릉 (新羅五陵) ◈ 분류 : 능 ◈ 수량 : 89,550㎡ ◈ 지정일 : 1969.08.27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탑동 67 ◈ 시대 : 신라시대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경주시 |
▲오릉 좌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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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시조 왕릉 재위 61년 2. 신라시조왕비릉 3. 제2대 남해왕릉 재위 20년 4. 제3대 유리왕릉 재위 33년 5. 제5대 파사왕릉 재위 32년 신라의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전하는 오릉<五陵>은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봉토분<封土墳>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되어 있다. |
▲ 오릉 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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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릉<第1陵> -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基> 가운데 가 장 높고 크다. 제2릉<第2陵> -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第3陵> -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로 표형쌍분<瓢 形雙墳>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圓形墳> 2기<二基>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第4陵> -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 이는 약 3.6m이다. |
▲오릉과 숭덕전 전경(인터넷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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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릉<第5陵> -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 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와 같이 5기<基> 중 1기<基>는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의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後世>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赫居世王>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 오릉 추분제(인터넷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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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오릉<五陵>을 사릉<蛇陵>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娑王> 등 박씨 사왕<朴氏 四王>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혁거세왕<赫居世王>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이변<異變>이 있어 각각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
▲ 오릉 좌측 |
▲ 오릉 우측 |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赫居世王>이 재위 62년만에 승천하였다가 그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王后>도 따라 승하하니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北陵>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
▲ 오릉원 관광 출입문 |
지금 담암사<曇巖寺>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五陵>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 앞의 홍전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五陵> 옆에 사찰<寺刹>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담암사<曇巖寺>의 유물로 믿고 있다. |
▼ 오릉 정화사업 기념비 (오릉원 안에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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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오릉 탐방기(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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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4일 오전에 경주 선도산 성모사 탐방을 마치고 오후 2시에는 신라 시조왕이 모셔져 있는 경주 오릉원을 찾아갔다. 이 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서늘한 바람결 속에서 따사로운 태양빛을 온 몸에 받으며 오릉원에 들어섰다. 초 봄의 오릉원 정취는 경건하면서도 신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싶었다. 오릉원 안에 길쭉한 연못은 그 물결이 맑고 잔잔한데 개나리, 철쭉, 벚꽃, 목련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길손의 마음을 취하게 하였다. 오릉을 감싸고 있는 나무 숲은 종용하여 그윽한 멋을 풍기는데 군데군데 고목의 고색창연한 모습이 애환과 영욕의 신라 2천년사를 뇌리에 아른거리게 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가로운 걸음으로 숭의문(崇義門)에 이르러 살펴보니 지난 날의 모습이 아니다. 옛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히 지어서 단청을 했는데 아담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숭의문을 지나니 시조왕릉 앞에 새로 지은 큰 제각이 들어서 있었다. 목조 기와 지붕인데 신선하고 엄숙해 보였다. 재각에는 현판이 없기에 검은 제관복을 입은 종친 어른에게 물으니 그냥 일자제각(一字祭閣)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는 정자제각(丁字祭閣)을 지었는데 지금은 일자(一字)로 한다고 했다. 건물의 모양이 "―"자면 일자제각이고 "T"자면 정자제각이라는 말에 그저 조용히 웃었다. 제각은 1세 시조왕(1대왕)과 왕비 알령부인, 2세 남해왕(2대왕), 3세 유리왕(3대왕), 4세 파사왕(5대왕)을 모시는 곳이라고 했다. 제각안을 살펴보니 아직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지는 않은 상태였다. 일자제각을 지나니 신라 오릉을 바로 뵐 수 있는데 잘 다듬어진 황금빛 잔디로 빛나고 있었다. 엄숙한 자세와 경건한 마음으로 박혁거세 시조왕릉을 향해 읍배를 하였다. 13세의 나이에 6촌장들이 왕으로 추대하여 '서라벌'이라고 국호를 정해 나라를 연 이래 신라 천년사직이 흘렀고 다시 천년이 더 흘러 왕의 핏줄은 나에게 까지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2천년을 거슬러 나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는데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조왕의 혈통을 통해 천지간에 태어나서 50 중반까지 살아 온 자신을 되돌아볼 때 아쉬움과 회환이 너무도 많기 때문인 듯하다.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치켜들고 눈물을 닦았다. 문듯 누런 잔디로 감싼 오릉 위로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창공에 파문을 그리며 바삐 날아 간다. 그 모양을 지긋이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섯릉 주위를 다른 관광객들과 더불어 천천히 돌아 보았다. 능 가장자리 잔디밭에서 제관들이 모여 앉아 오릉관리와 제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다가가 인사를 하니 모두 박씨 종친들이었다. 그들을 기념촬영 한 후 오릉을 나와 숭덕전으로 향하는데 신라문화와 종족혈통에 관한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가슴 속에 물결쳐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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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사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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