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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 1. 박 수량 묘지명(朴 守良 墓誌銘) 2. 무서백비(無書白碑) 3. 박 수량 유품(朴 守良 遺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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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명) 중에서 -울산 후인 하서 문정공 김인후 찬(蔚山後人 河西 文正公 金麟厚 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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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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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는 수량(守良)이고 자(字)는 군수(君遂)이며 아곡(莪谷)은 호(號)다. 본관은 태산[泰山 -현재는 밀성(密城)으로 복관(復貫)됨]이다. 어려서 향리에서 김개(金漑)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울 때 어찌나 침착하고 영특한지 글자 한자 한자를 놓치지 않고 금방 배워 장옥(場屋-과거 보는 곳)을 드나들 때쯤에는 한권의 책도 끼고 다니지 않았다.
* 주(註) - 태산(泰山)은 태인(泰仁)과 같음. 본래 태산현과 인의현을 합하여 태인현이라 했음
지으신 글 문장마다 법도(法度)가 담겨져 있었으므로 정덕(正德) 8년 서기 1513년에 진사(進仕)에 합격하고 다음 해인 9년(1514년)에 을과(乙科)에 2인자로 합격, 성균관(成均館) 분교인 광주주학(廣州州學)에 들어갔다.
○공(公)은 평생을 통해 그의 몸가짐이 간결(簡潔) ․ 엄중(重)․ 신중(愼) ․ 치밀(密) 하였으며, 모든 행동을 예법에 맞게 하되 자신을 극복하는 데 더욱 힘썼다. 공(公)의 성품은 얌전 겸허하여 행동에 근신하였고, 체질은 의복무게를 감내치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뛰어난 문체를 지녔으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고, 주량은 한정이 없었지만 자제하여 지나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같이 하였고, 고향에 있을 때에는 오직 겸허한 자세로 언제나 출입을 삼갔다.
○공(公)이 담양(潭陽) 부사(府使)로 재임해 있을 때 어머니께서 심한 이질로 고생하고 계셨는데 공(公)은 그 바쁜 공무 중에도 몸소 수십 일간 약을 달이며 허리띠 한번 제대로 풀지 않았고,
어머니의 곱똥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구분하셨다. 공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어머니의 병원은 회복되었다. 그 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였고, 발걸음을 시묘(侍墓) 막 밖엘 내딛지 아니하였다.
○공(公)은 자신이 갈고 닦은 학덕을 정사에 옮겨 부임하는 곳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천거 등용하였지만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가는 데는 그 누구도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 공께서는 천재지변이나 변방 수호에도 남달리 마음을 썼으며,
조정에서 벼슬한 지 38년간 그의 직책은 경상(卿相)에 까지 올랐으나 초가삼간 하나 없었다[공이 돌아가신 후 국가에서 예장(禮葬)으로 장사지내고, 99칸 집을 지어 후손을 구원토록 하였으며, 무서백비(無書白碑)를 하사하여 공의 청백(淸白)을 세상에 천명(闡明)하였다.]
○명왈(銘曰), 금빛처럼 아름답고 옥처럼 단아한 자태, 안으로는 학문을 쌓고 밖으로는 행동을 자제했네, 몸가짐은 검약하고 낮춰 남을 받드니 사귐에 해로움이 없었네, 무궁한 조상의 영광을 위해 이 몸 바쳐 끝까지 진력하리니 힘써 이 경사 이어받아 길이길이 변함없이 보전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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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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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명) 중에서 (蔚山後人 河西 文正公 金麟厚 撰)
○ 公諱守良 字君遂 莪谷號也 泰山縣人(密城後人) 少愛學於鄕先生 공휘수량 자군수 아곡호야 태산현인(밀성후인) 소애학어향선생 金學士漑 沈潛勤敏 未嘗一字放過 出入場屋 不挾一卷書 爲文詞有法度選 김학사개 침잠근민 미상일자방과 출입장옥 불협일권서 위문사유법도선 正德八年(一五一三)進士 九年中(一五一四) 乙科第二名 정덕팔년(일오일삼)진사 구년중(일오일사) 을과제이명 入成均館分校 廣州州學 입성균관분교 광주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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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 簡重愼密 以禮律自居 自勝愈强而退然 如不勝衣 공 간중신밀 이례율자거 자승유강이퇴연 여불승의 有文而不露 酒無定量 剛制不亂輿人 不爲翕翕交 居鄕 惟謹 常以知足 爲戒其 유문이불로 주무정량 강제불란여인 불위흡흡교 거향 유근 상이지족 위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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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潭陽 母夫人 患痢 且劇 躬自湯藥 衣不解帶者 數十日 取嘗糞甛苦 疾以瘳 服喪 勤禮 재담양 모부인 환리 차극 궁자탕약 의불해대자 수십일 취상분첨고 질이추 복상 근례 步不出 墓廬之外 보불출 묘려지외
○行成政修而移治 于官所在 無不擧其職 非其義也人 不敢以一毫及之 有天災 邊警 恒以爲憂 행성정수이이치 우관소재 무불거기직 비기의야인 불감이일호급지 유천재 변경 항이위우 立朝 三十八年 以至卿相 無數椽之宅(公 死後 國家禮葬 厚恤其家蓋 無書白碑下賜) 입조 삼십팔년 이지경상 무수연지택(공 사후 국가예장 후휼기가개 무서백비하사)
○銘曰 金精玉栗 畜內制外 約奉卑牧 不交于害 榮窮祖先 명왈 금정옥율 축내제외 약봉비목 불교우해 영궁조선 數異身後 勖哉, 承慶, 勿替, 永久. 수이신후 욱재, 승경, 물체, 영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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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을 쓰신 하서 문정공 김인후 ( 河西 文正公 金麟厚) 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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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기하(畿下)의 김안국(金安國), 호남의
김인후(金麟厚), 조광조(趙光祖), 영남의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조식(曺植)등을 이 시대 사림(사림)의 우두머리로 꼽는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1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하서는 병을 이유로 옥과현감마저 사퇴하였다. 그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문득 집 남쪽의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 한결같이 하여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 죽은 후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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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의 청백한 생활은 아무래도 그의 묘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에 감동한 명종은 어명을 내려 서해바다 암석에서 곱고 하얀 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을 알면서 비에다가 새삼스럽게 결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함에 흠이가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며 <비문없이 그대로 세우라>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백비<白碑>라 하는 것으로, 비에다 글자를 쓰서 <청백한 생활상을 말한다> 하는 것은 자칫 그의 청렴을 잘 못 아는 결과가 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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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良之墓(수양지묘)-시조왕 51세손(청백리) 밀성대군 22세.도평의사공 15세손.돈재공5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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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良之墓(수양지묘)-정면 가까이서 바라본 백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
▲守良之墓(수양지묘) - 좌측면에서 바라본 백비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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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비(淸白碑) :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새삼스럽게 그 청백을 표현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뜻을 그 르칠지 모른다" 하면서 명종임금이 하사하신 청백비다. <사진을 클릭 하면 큰 화면을 볼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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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배(鸚鵡盃) : 명종이 청백리 녹선시(錄選時) 앵무배에 술을 부어 하사한 술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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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朴守良)의 호박(琥珀) 갓끈 : 명종(明宗)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 임명시 하사(下賜)한 호박으로 만든 것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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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貞惠公) 박수량 신도비(神道碑) :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산재 아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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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朴守良)의 시호장(諡號狀) :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직(職)을 역임한 사람이 죽은 후 그 행적(行蹟)에 따라 주는 호(號).-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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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朴守良)의 교지(敎旨) : 資憲大夫 議政府右參贊兼 知經筵 義禁府春秋館事 五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겸 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 오위 都摠府 都摠管 朴守良 贈諡 貞惠, 淸白守節 曰 貞, 愛民好與 曰 惠, 嘉慶11年 2月 日. 도총부 도총관 박수량 증시 정혜, 청백수절 왈 정, 애민호여 왈 혜, 가경11년 2월 일. <註 : 가경11년은 1806년이며 순조 6년(丙寅)에 해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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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곡박선생실기(莪谷朴先生實記) : 표지에 청백리 아곡 박선생실기(莪谷朴先生實記)라 쓴 책인데 정혜공에 관련된 글들이다. 그리고 책은 85년 정혜공파보 부록으로 나온 것으로 박래욱 종친이 편집감수를 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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