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선조의 묘소(墓所),단사(壇祀),재실(齋室) |
밀성대군, 도평의사공
|
밀양시에는 밀양박씨 시조인 밀성대군 휘(諱) 언침(彦忱)의 유적과 단사(壇祠), 재실(齎室)이 있다. 밀성대군 유적지로 전하는 밀양 영남루가 있고 영남루 바로 북정(北庭)에는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이 있다. 또 밀양시 내일동에는 밀성재, 익성사가 있으며 무안리에는 만운재 / 경덕단(萬雲齎 / 景德壇)이 있는데 밀성대군과 대군의 아들 욱(郁), 손자 란(瀾)를 모시는 곳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구룡리)에는 원덕사(遠德祠)가 있는데 밀성대군을 주벽으로 밀성박씨 12중조(中祖)외 9위의 신위를 종향한 곳이다. 원덕사에 돈재공파의 직계선조 도평의사공 휘 언상(都評議事公 諱 彦祥)께서 12중조의 한 분으로 배향되어 있다. 아래 도표에서 보라색 글씨의 휘자가 해당된다. |
01세 -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 |
02세 |
|
03세 |
|
04세 |
|
05세 |
|
06세 |
|
07세 |
|
08세 |
|
09세 |
|
10세 |
|
11세 |
|
|
|
|
|
|
|
|
|
||||||||||
욱(郁) |
|
란(瀾) |
|
영정(永禎) |
|
기세(基世) |
|
시주(施做) |
|
찬행(讚行) |
|
언부(彦孚) |
|
효신(孝臣) |
|
공필(公弼) |
|
육경(育慶) |
|
|
|
|
|
|
|
|
|
||||||||||
|
|
|
|
|
|
|
|
|
|
|
|
|
|
의신(義臣) |
|
|
|
|
|
|
|
|
|
|
|
|
|
||||||||||
|
|
|
|
|
|
|
|
|
|
|
|
언상(彦祥) |
|
양신(良臣) |
|
직 (直) |
|
인경(仁卿)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의경(義卿)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신경(信卿) |
|
|
|
|
|
|
|
|
|
||||||||||
|
|
|
|
|
|
|
|
|
|
|
|
언인(彦仁) |
|
직신(直信) |
|
창 (昌) |
|
인수(仁壽)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정 (晶) |
|
양필(良弼)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경 (炅) |
|
충필(忠弼) |
|
|
|
|
|
|
|
|
|
||||||||||
|
|
|
|
|
|
|
|
|
|
|
|
|
|
장 (璋) |
|
원순(元淳) |
|
혁공(赫公) |
|
|
|
|
|
|
|
|
|
★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
|||||
이 건물은 밀성대군의 유적지라고 전해오는데 보물 제147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조선시대의 밀양군 객사(客舍)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로서 밀양 강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다. 건물 기둥이 높고 사이를 넓게 잡아 웅대하다. 좌우의 부속건물들과는 층계로 된 월랑(月廊)과헌랑(軒廊)으로 연결하여 건물 전체 배치에 변화를 주었으며 규모도 더 커졌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렸고,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으며 연회를 베풀기에 알맞은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다. 공포(뱀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표현한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내부 둘레의 고주(高柱) 위에 이중량(二重樑)을 짜고, 외부 둘레의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 충량은 용신(龍身)을 조각하였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되자 고려 공민왕 14년(1365)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조선 세조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 37년(1542) 밀양부사 박세후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헌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 누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 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 건물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의 양익루를 비롯하여 사주문, 일주문, 객사인 천진궁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석화가 깔려있다. |
|||||
밀양 박씨로 본 영남루 <선조 님의 얼이 닮긴 영남루> 밀성대군
언침은 신라 경명왕(시조의 29세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밀성대군에
봉군되었다. 밀성대군 부에 있는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은 신라왕 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이라 한다. 이궁대는 본래 신라의 어진 사람들이 백성을
덕화함으로 동경(경주의 옛지명)이 태평성사에 젖었으니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의 이름이 당시의 풍속과 민요에서 나온 것이다. 1925년 을축에
또 단을 밀양 영남루 언덕에 모시고 그 후 1928년 정묘년에 제단을 밀양
무안리에 밀성대군 휘 언침, 삼한 벽공도 대장군 휘 욱, 요동 독포사
란을 아울러 3대 할아버지를 제사하니 이곳을 경덕단. 만운재 각유경
이라고 한다. 또 밀성 박씨는 전국 박씨의 종가이며 밀성 박씨에서도
태사공파(휘 언부)의 주 손인 은산부원군(휘 영균)파가 대종손이다.
|
|||||
|
|||||
|
|||||
|
|||||
★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
|
|||||
밀성대군의 단(密城大君之壇)을 왜 영남루 북정(北庭)에 세우고 봄 가을로 향사(享祀)를 하게되었는가? 그 연원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예로부터 밀양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왕자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근처에 있다고 하였다. 임술(壬戌-1922년) 윤 5월 13일, 영남루 일원에 큰 비가 내렸다. 폭우로 영남루의 흙이 유실되자 영남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나타났다. 누 아래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서보니 과연 오래된 묘 자리였다. 대군의 묘인지 학인 할 만한 유물은 없었으나 전통(傳統)하는 바에 따라 밀성대군의 유지(遺址)임이 믿을만 하여 설단(設壇) 협의가 이루어졌다. 그해 당국에 단지(壇地) 대여를 신청하여 1923년(癸亥) 3월 7일 무상으로 영남루 북정(北庭) 유허(遺墟)에 12평을
허락(許諾)받아 사업 추진이 구체화 되었다. 제향일(祭享日) |
|||||
|
|||||
|
|||||
|
|||||
★ 밀성재 / 익성사(密城齎 / 翊聖祠)
|
|||||
밀성재(密城齋)는 密城大君 朴公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978년 대군의 재단이 상망(相望)하는
이곳 삼한벽공도대장군 욱(郁)의 익성사 치재소(致祭所)인 추화재 옛터에 창건하여 정당(正堂)을 밀성재, 서사(西舍)를 세루정(洗陋亭),
동사(東舍)를 추화재(推火齋)라 편액(扁額)한 집이다. 동사(東舍)인 추화재는 밀성박씨대종회 사무실로, 서사(西舍)의 세루정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하며 활발한 종사 활동을 하고 있다. |
|||||
익성사는 밀양시 내일동(密陽市 內一洞) 아북산(衙北山)기슭에 밀성재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말(羅末)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은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의 소상(塑像)과 그 두 부인(夫人의 소상(소상)을 봉안하고 공(공)의 아들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 諱 瀾)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다. |
|||||
밀성재 연혁 익성사 연혁 |
|||||
|
삼한벽공도대장군 욱(郁)의 익성사 치재소(致祭所)인 추화재 옛터에 창건하여 중앙의 정당(正堂)을 밀성재(密城齋), 서쪽 건물을 세루정(洗陋亭)이라 하고 동쪽 건물은 추화재(推火齋)라 부르는데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서기 1925년(乙丑)에 13도 대종회의 공의로 영남루 북정(北庭)에 발현된 대군 유지에 제단을 설립하게되어 부대사업(附帶事業)으로 재사(齋舍)건립을 위해 밀양시 소재 아북산 산하 토지 수천평을 대지용으로 매입 *1937년(乙丑)에 교동 추화산정(推火山頂)의 추화사를 내일동 대지 동쪽에 신축(新築)하여 삼한벽공도대장군과 두 부인의 소상(塑像)을 옮길 당시 사우를 익성사로 고쳤으며 서쪽 아래에 재사를 신축하여 추화재라 편액하고 단소와 사우의 재숙(齋宿)을 겸하니 밀성박씨 재소의 시창(始創)이며 추화재는 곧 밀성재의 옛집임. *추화재 건립 후 근20년이 지난 1965년(乙巳) 춘계제향후 재청에서 확장하여
고쳐 지을 것을 공론으로 결의 1965년~1971년까지 오천여만원의 기금을
조성 1971년 辛亥 춘향후 정당의 위치를 봉무산(鳳舞山) 아래 구릉(丘陵)을 대응하여 영남루
북정(北庭)의 밀성대군단을 서로 마주 보도록 방위를 정하여 건축설계와 배치를 하고 공사의 규모를 확정
1972년 (癸丑)에
정당의 정초(定礎)를 기공하여
1978년(戊午)에 준공하고 정당에 밀성재(密城齋)라 편액함
|
익성사는 신라말(羅末)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은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의 소상(塑像)과 -그 두 부인(夫人의 소상(소상)을 봉안하고 -공(公)의 아들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 諱 瀾)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다. *문헌에 의하면 원래는 밀양부(密陽府)의 성황사(城隍祠)로서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있었는데 그 성황사 주신(城隍祠主神)으로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과 그 두부인 그리고 삼중대광사도 광리군 손긍훈(三重大匡司徒 廣理君 孫兢訓: 밀양 손씨의 上祖) 등 사위(四位)의 소상(塑像)을 봉향하여 관부(官府)에서 제향을 올렸다. *1580년(선조13庚辰)에 부사 하진보(府使 河晋寶)가 연로(年老)하였는데 산정(山頂)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하여 성내(城內 內一洞 신당마을)로 이건(移建)하였고 *1674년(현종15甲寅)에 부사 이희연(李喜年)이 다시 남림중(南林中: 三門洞)으로 이설(移設)한 일이 있었다. *1875년(고종12乙亥)에 고을 유생 안인원(安仁遠)등이
도백(道伯)에게 진정하여 성황사(城隍祠)의 원위치를 찾아 추화산정(推火山頂)으로 복원재건하고 추화사(推火祠)라
하였다. *1910년(순조4庚戌) 이후로 관에서 제사하던 것이 폐지되어 후손들에 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12년에 향우(享宇)가 심히 퇴락(頹落)하여 이를 후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수(重修)하였다
<자료 ☞ 밀성박씨 청년회>
|
|
||
|
|||||
|
|||||
|
|||||
★ 만운재 / 경덕단(萬雲齎 / 景德壇)
|
|||||
만운재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72호로,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다. 이 재사(齋舍)는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 )을 경모하고자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밀성대군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남이며, 밀양박씨의 상조(上祖)로 받들여지고 있는 인물이다. 재사(齋舍)는 홍문관 시독(弘文館 侍讀)을 역임한 교리 박해철(校理 朴海澈)에 의해 1927년에 세워졌다. 현재 경내에는 재사 외에도 경덕단(景德壇)과 외삼문(外三門)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경초재(景肖齋)와 유경각(逌敬閣) 및 영정각(影幀閣) 등이 있다. 경초재는 박해철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이다. 만운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앙경문(仰景門)으로 불리는 외삼문은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
|||||
|
|||||
경덕단은 만운제(萬雲齋)의 경내에 있는 것으로 밀성대군과 그 아들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박욱(朴郁), 박욱의 아들이며 고려 개국공신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지낸 박란(朴瀾) 등 3위를 모신 곳이다. *단(壇)을 만드는 이유>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조묘(祖廟)가 없어지면 단(壇)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묘(墓)가 없을 때 단(壇)을 하는 것은 비단 옛적의 일만은 아니다.그리고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부칠 곳이 없을 때 단(壇)을 만들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은 먼 조상을 추모(追慕)하는데 해(害)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후대(厚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조고(祖考)의 기(氣)는 곧 자손(子孫)의 기(氣)이니 이 한가지 기로써 감응(感應)하는 정성을 쌓은 즉 신(神) 또한 이에 존재(存在) 할 것이니 장차 어찌 이 땅에 제사(祭祀)를 지내지 안으리요. |
|||||
|
|||||
★ 원덕사(遠德祠) |
|||||
원덕사 사실에 대한 번역문 원덕사는 밀성대군의 신위를 봉안한 집으로 十九중조의 종향한 곳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구룡리)에 중구봉 아래에 있으니 곧 승지 박인령(밀성군 휘 척의 후)묘 아래요 재실의 남쪽이다. 뒤에는 선산곽씨 세거촌이 있고 앞에는 적벽강이 임하니 그 근원은 남쪽 무주 금산 등지로부터 시작되고 동쪽은 상주 영동등 군으로 부터 시작하여 심천강에 이르러 합류되어 금강으로 들어가니 남에는 월이산이 있어 구부러지고 팽박하여 심히 웅준하고 북으로는 용문서당이 수리(數里)밖에 있고 산 아래에는 송수옹갑조의 유허비와 송우암 시열의 태어난 집이 있고 서로는 옥천읍이 三十리 허에 있고 이원역이 십리 밖에 있다. 신라기원 천九백七십九년 임술년(1922년) 봄에 승지공 후손 박만구가 멀고 가까운 성손과 같이 사우지을 것을 상의하고 같은 해 동짓날에 대군의 신위를 봉안하고 이듬해 계해(1923년) 六월十九일에 十九중조를 종향토록 하고 월五十九년 임자十一월 七일 추배 일위 하고 또 十四년 갑자 十一월 동지일에 다시 추배 일위 하여 |
|||||
|
|||||
|
|||||
원덕사라 액호를 거니 대개 임종을 삼가히 하고 원대토록 추모하면 인심이 순후하다는 뜻을 취함이다. 매년 춘三월 一일에 합하여 제례를 행하니 축홀과 제의의식은 문묘의 석전의 의와 비슷하고 사계 명절이나 삭망에는 유사를 정하여 분향하고 위판은 대군이 주벽되고 무를 양쪽으로 나누어 중조를 차례로 모시고 년대 서차대로 종향토록 되었으니 동벽이 十一위이고 서벽이 十위이다. |
|||||
|
|||||
* 한편 원덕사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 보니 밀성대군과 대군의 8세손 7명의 신위 및 그 후예 14명의 신위를 모셔 모두 22 중조를 모셨다. 당초 밀성대군외 19위를 모셨으나 2회에 걸쳐 2위를 추배 함으로서 22위가 되었다. ☆ 제향일 - 음력 3월1일 제향 ☆ 관리책임자 : 박 덕 보 ☆ 원덕사 밀성박씨 종친회 ☆ 고려조의 중시조(中始祖) 밀성대군을 주벽(主壁)으 로 21위를 봉안(奉安)하 고 있음 원덕사에는 돈재공파의 직계선조 도평의사공 휘 언상(都評議事公 諱 彦祥)께서 12중조의 한 분으로 배향되어 있다. ☞ 원덕사 탐방기 |
|||||
|
|||||
|
|||||
Copyright(c) 밀성(밀양)박씨 돈재공파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