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덕사(遠德祀) 탐방기 -충북 옥천 

 

2005년 4월 3일 아침 일찍 전주시에서 경기전(慶基殿) 탐방을 마치고 충북 옥천군에 있는 원덕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경기전 탐방을 한 것은 돈재공 5세손 수온(守溫)께서 학식과 덕망이 있어 경기전 참봉(參奉)에 제수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원덕사는 1922년(壬戌)에 8도의 후손들이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세웠는데 밀성대군의 후예인 19중조를 배향 했다고 우리의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용방리를 찾아가는데 날씨는 흐리고 간간히 비가 내렸다. 대전에서 부산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옥천 IC에서 이원면으로 향했다. 늘봄 휴게소를 지나니 칠방리가 나오기에 그 마을로 들어가 농부에게 밀양박씨 제사 모시는 원덕사를 물었다. 농부가 원덕사는 용방리가 아니고 윗동네 구룡리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구룡리에 들어가니 좁은 길이 야산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데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지나간 자국처럼 느껴졌다. 동네 한 복판에 우암 송시열 유허비가 있어서 둘러보고 동네 언덕 아래에 있는 원덕사를 찾았다. 길목 언덕에 비석이 서있는데 밀성박씨세장지지(密城朴氏世葬之地)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을 지나쳐 대밭으로 둘러 싸인 원덕사로 내려가니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태극문양의 출입문이 서있는데 바로 원덕사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우측으로는 유연당이라 편액한 건물이 있었다.

출입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로 원덕사 본당이 나타났다. 신라 55대 경명왕의 첫 왕자 밀성대군파의 중조들을 모시고 있는데 나의 직계는 고려 문종 때 도평의사를 하신 박언상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다. 뜰 아래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경내를 돌아 보았다. 오래 전부터 원덕사를 찾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 날에 비로소 원덕사를 돌아보니 감회가 깊었다.

원덕사 처마에 비치한 편액을 보니 원덕사 건립에 관한 글이 있고 액자 글씨 말미에 "신라시조왕 탄강 1993년 갑자(甲子) 3월 원손 성엽 관수 근서(遠孫 性燁 手 謹書)"라고 써있었다. 원덕사에 한참을 머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원덕사 일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구룡리를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밀양시로 향했다.

  

 

한편 원덕사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 보니 밀성대군과 대군의 8세손 7명의 신위 및 그 후예 14명의 신위를 모셔 모두 22 중조를 모셨다. 당초 밀성대군외 19위를 모셨으나 2회에 걸쳐 2위를 추배 함으로서 22위가 되었다.

☆ 제향일 - 음력 3월1일 제향

☆ 관리책임자 : 박 덕 보

☆ 원덕사 밀성박씨 종친회

☆ 고려조의 중시조(中始祖) 밀성대군을 주벽(主壁)으 로 21위를 봉안(奉安)하 고 있음

원덕사에 배향된 열선조는 다음과 같은데 그 중 청색으로 표기한 분은 밀성대군파 12중조 이시다.

언침(彦沈): 밀양박씨 시조. 신라 54대 경명왕의 큰아들

언부(彦孚)

 

 

고려 문종조(1046년~1083년)에 최충과 더불어 태사 중서령, 도평의사 등을 역임하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다. 종파인 은산부원군파, 행산부원군파의 중 시조 이시다.유지는 풍각화산 이라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태사공파조]

 

[元]

언부→의신(義臣)의 아들]: 사문진사를 역임하였다. [사문진사공파조]

부(父) 의신(義臣)은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내셨다. 고려조 인종조에 사문진사를 지냈으며 또는 국자진사( 國子進士)라고도 한다. 유지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라 하나 전하지 아니한다.

 

[陟]

언부→의신→윤→창연→지형(之瑩)의 아들]: 고려 충선조 밀성군으로 분봉되었다.시호가 충헌공 이시다. [충헌공파조]

고려 26대 임금 忠宣王(서기1308~1313년)때 내부시승(內密部城侍君承)이며 (절충동찬화공신(絶忠同贊化功臣)으로 삼중대광 밀성군이며 시호를 충헌이라 증하고 증사패지(贈賜牌地)하야 공신자손으로 하여금 세수질록(世受秩祿)하였다.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경모재에 단을 세우고 음10월 3일에 향사하다.

 

중미[中美]

언부→ 의신→윤→호연 5 대손] 고려 공민조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밀직부원 군으로 분봉되었다. [밀직부원군파조]

고려 29대 임금 충목왕(忠穆王1344~1348년)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였고 고려 31대 공민왕 恭愍王(1351년~1374년)때 이방실등과 함께 홍건적난(紅巾賊亂)을 평정 보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輔理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를 추증받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등극하여 삼징(三徵)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졸(卒)하니 왕이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했다. 증하다.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옛이름-묘봉리) 묘소아래 묘봉재(妙峰齋)가 있어 음 10월 7일 향사하다.

 

[鉉]

언부→공필→윤공→광례 4대손]: 사헌부 규정이시며 규정공 파의 시조이시다.

[규정공파조]

고려조에 문과에 급재하여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正三品)에 이르다. 노후에 향리에 돌아와 팔십칠세에 졸하다. 문장이 탁월하고 덕행이 높아 우리나라 유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묘소는 알수없으나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박릉동 두매산 아래 자좌라 하였다.

언상[彦祥]

 

 

 

 

 

 

 

도평의사 밀직 부원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도평의사공파조]

[출처 고려사] - 이 분은 우리 돈재공파의 직계선조 이시다. 신라 시조왕 37세 손이 며 밀성대군 8세손이요 도평의사공 1세이시다. 공의 뒤를 이어 2세 양신(良臣)→ 3세 직(直) →4세 인경(仁卿) → 5세 검(儉) → 6세 열 (說)→7세 창밀(昌密) →8세 거인(居人) →9세 승봉(承奉 : 여기까지 는 고려시대임)→ 10세 덕명 (조선 태종2년 무을과 합격)으로 세계 가 내려오고  있다. 원덕사에는 고려시대 공의 후예가 배향되어 있지 않으니 도평의사공파의 불찰이 아닌가 싶다.

태사공(太師公) 언부(彦孚)의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하였다.

유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라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언인[彦仁]

밀직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 [복야공파조]

아우로 고려때 벼슬이 벽상삼중대광평장사(壁上三重大匡平章事와 상서좌복야(尙書 左僕射)를 역임하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해졌다.

 

☆시용(時庸)

대제학(大提學 )

 

양언[良彦]

밀직부사공 이시다. [밀직부사공파조]

 

원광[元光]

밀직부사(密直副使) 양언(彦良)의 6세손이다. 휘(謚)은 양혜공(襄惠公)이요 고려조에 벼슬이 영동정에 이르고 행재중서령(行 宰相中書令)을 지냈다. 공민왕조에 홍건적이 서경 함락시에 안유 이방실과 함께 격퇴하였으며 신축년에 박문거가 전몰한즉 홍언박과 함께 대가호종(大駕扈從)하여 평란에 공을 세워 보리공신보국숭록대부에 이르고 밀직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지는 전하지 아니하다.

천익[天翊]

판도판각공 이시다. [판도판각공파조]

을재[乙材]

삼사좌윤공 이시다. [삼사좌윤공파조]

고려 명종조 정사(丁巳)에 문과 벼슬이 삼사좌윤 밀직부사(三司左尹 密直副使)에 이르다.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수덕제의 경현사에 봉안하며 음3월15일 음9월15일 향사하다.

 

☆인우[麟祐]

전법판서공(典法判書 公) 을재의 7대손이시다

 

 

[葳]

 

 

 

      

을재의 8대손]:정국군(靖國君)고려 말에 극성했던 왜구를 격퇴 한 무관으로 이성계(李 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 도순문사(都巡問使: 외관직으로 주. 부의 장관을 겸함)가 되어 쓰시마 를 공격해 전선 3백여 척을 불태웠으며 뒷날 이성계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그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 지면서 충신이 되었다.

 

☆천[]

을재 8 대손]: 구산군(龜山君)

 

☆령(齡]

을재→입기→정분]:昌原君(창원박씨)

 

☆원의[元義]

을재→덕기→준]: 泰安府院君(태안박씨)

 

 

☆수[粹]

이조정낭(吏曹正郞)           

 

☆근[瑾]

수사(水使)

 

☆치온[致溫]

군수(郡守)

 

 

 ☆태익[泰益]

부호군(副護君)

 

     

 

 

원덕사 사실에 대한 번역문

원덕사는 밀성대군의 신위를 봉안한 집으로 十九중조의 종향한 곳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중구봉 아래에 있으니 곧 승지 박인령(밀성군 휘 척의 후)묘 아래요 재실의 남쪽이다. 뒤에는 선산곽씨 세거촌이 있고 앞에는 적벽강이 임하니 그 근원은 남쪽 무주 금산 등지로부터 시작되고 동쪽은 상주 영동등 군으로 부터 시작하여 심천강에 이르러 합류되어 금강으로 들어가니 남에는 월이산이 있어 구부러지고 팽박하여 심히 웅준하고 북으로는 용문서당이 수리(數里)밖에 있고 산 아래에는 송수옹갑조의 유허비와 송우암 시열의 태어난 집이 있고 서로는 옥천읍이 三十리 허에 있고 이원역이 십리 밖에 있다. 신라기원 천九백七십九년 임술년(1922년) 봄에 승지공 후손 박만구가 멀고 가까운 성손과 같이 사우지을 것을 상의하고 같은 해 동짓날에 대군의 신위를 봉안하고 이듬해 계해(1923년) 六월十九일에 十九중조를 종향토록 하고 월五十九년 임자十一월 七일 추배 일위 하고 또 十四년 갑자 十一월 동지일에 다시 추배 일위 하여

 

청색부분의 의미는 임자년(1972년)과  갑자년(1984년)에 1위씩 더 봉안했다는 의미인데 위에서 59년과 14년의 의미는 알 수가 없다. <越五十九年 壬子十一月 七日 追配 一位 又十四年 甲子 十一月 冬至日後追配一位>

* 이 문제와 관련하여 후일 종친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1988년 간행된 원덕사지에 의하면 "월49년 임자 11월7일 추배 일위하고 또 12년 갑자 11월동지일에 다시 추배일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1923년(계해) 19중조 종향후 49년후인 1972년임자년에 1위를 추배하고(판서 초암공 휘 인우) 또 12년후인 1984년에 1위를 추배(정랑공 휘 수)하였다는 뜻입니다. 59년과 14년은 오기인 듯합니다. 참고바랍니다.
2005. 9. 4
전남 나주시 송월동
시조왕 68세 돈재공후 백우당공 16세손 박 지현

원덕사라 액호를 거니 대개 임종을 삼가히 하고 원대토록 추모하면 인심이 순후하다는 뜻을 취함이다. 매년 춘三월 一일에 합하여 제례를 행하니 축홀과 제의의식은 문묘의 석전의 의와 비슷하고 사계 명절이나 삭망에는 유사를 정하여 분향하고 위판은 대군이 주벽되고 무를 양쪽으로 나누어 중조를 차례로 모시고 년대 서차대로 종향토록 되었으니 동벽이 十一위이고 서벽이 十위이다.

 

 

옥천 송우암 유허비(沃川 宋尤庵 遺墟碑)

충청북도 기념물 45호

소재지 :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구룡리>

이 비석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하고 살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2년(1778)에 세운 것이다.

단칸 8작지붕의 비각 안에 있다.송시열(1607-1689)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노론의 영수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반청(反淸)의 기치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며 현종 때에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15년(1689)에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양 갔다.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에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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