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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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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를 찾아 밀성대군의 자취를 -1차탐방기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 보물제147호 (밀양시 내일동 밀양강가)

2002년 여름 휴가는 밀성박씨 시조 밀성대군 휘 언침의 유적이 있는 밀양 영남루와 밀성제를 살펴보고 부산을 들러 관광하는 계획으로 세웠다.

아내와 단 둘이서 휴가를 떠나 먼저 나주시 용강면 대지리에 계시는 장모님을 뵙고 하루를 쉰 다음 8월 9일 아침에 처가를 나왔다.

나주에서 화순군 읍을 지나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경상도 쪽으로 갈수록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비속에 차를 달려 가다가 진주시내로 들어갔다. 밀양가는 길에 촉석루를 보려고 진주성에 당도하니 비가 그쳤다. 그 유명한 촉성루는 남강을 굽어보며 장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촉성루 관광을 끝내고 다시 차를 몰아 밀양으로 향했다.

남강휴게소에서 오뎅국물로 식사를 하고 밀양으로 향하는데 다시 빗줄기가 거세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잠시 쉬어갔다. 16 : 50에 진영인터체인지를 통과하여 하남읍을 지나 밀양으로 접어들었다. 밀양시내는 좁았다. 밀양강 가운데에 여의도처럼 섬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이 번화가였다.

▲ 장마 비에 촉촉히 적신 밀양 영람루

밀양시청 문화체육과에 들러 관광 안내도를 얻고 직원으로부터 영남루와 밀성대군을 모시는 밀성제에 대하여 자세한 안내를 받았다. 영남루에 차를 대고 사진으로만 보던 영남루를 빗속에서 직접 둘러보았다. 영남루는 비 내리는 밀양강가에 수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나는 밀성대군의 39세손이다. 폭우를 해치고 대군의 1천년 유적지를 찾아 왔다싶으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날이 어둡고 비가 심하게 내리므로 자세한 답사는 내일 하기로 하고 아내와 나는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8월 10일 아침에 숙소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 날씨가 잔뜩 찌푸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08 : 30에 숙소를 나와 영남루로 향했다 영남루 경내를 자세히 둘러보고 누에

▲ 영람루와 밀양강

올라 나의 먼 조상인 밀성대군을 흠모하며 신라 천년문화를뇌리에 그려보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밀성대군의 먼 후손인 내 자신이 스스로 대군의 사적지에 와서 영남루 붉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천고의 감회에 젖어 밀양강을 내려다보는데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 낙동강을 향하여 파도처럼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 곳의 수많은 사연들이 저 강물을 따라 남해로 흘러갔으리라.

누에서 내려와 말로만 듣던 밀성대군지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밀성대군지단의 건립일자는 <신라기원 1982년 乙丑 9월2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춘추로 대군께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또 영남루 안에 천진궁이 있는데 단군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를 봉안했다. 건물이 마침 수리 중이어서 안은 보지 못했다.

영남루는 진주 촉성루, 평남 강선루와 더불어

▲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

우리나라 3대 명루의 하나다. 관리인으로부터 소개문을 받아보니 영남루는 능파각과 침류각을 양익루로 배치하고 본루와 침류각 사이에 층층각을 연결한 독특한 구조라고 되어 있다. 영남루를 세밀히 둘러본 후 영남루 출입문을 나오니 밀양부사의 외동딸 윤동옥의 일화가 서린 아랑각이 바로 있었다. 또 영남루 바로 곁에 박시춘 작곡가의 생가 터가 있어서 아내와 함께 들어가 잠시 쉬었다. 상고하면 밀성(밀양)박씨의 시조 밀성대군은 신라 54대왕

▲ 녹음 속의 영람루(인터넷자료)

경명왕의 왕자 중 첫 왕자이시다. 또 신라 시조왕으로부터 30세손이시며 휘(諱)는 언침(彦 )이시다. 밀성대군으로부터 이하 대군의 16세 박승봉(朴承奉)에 이르도록 배위(配位)와 묘소가 전하지 않는다.  대군의 8세손 박언상(朴彦祥)께서 고려조에 도평의사(都評議事)를 하시고 그 역사적 사실이 문헌으로 고증되는데도 공과 그 후손들의 배위와 묘소가 전하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밀성대군으로부터 17세손이요 시조왕으로부터 46세손인 덕명(德明)께서 조선 태종 3년(1402년)에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신 이래 이하 후손들의 배위 및 묘소가 확실하게 전해 오니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은 영남루에 대한 안내문이다. <이 건물은 밀성대군의 유적지라고 전해오는데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되자 고려 공민왕 14년(1365)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조선 세조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 37년(1542) 밀양부사 박세후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헌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 누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 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 건물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의 양익루를 비롯하여 사주문, 일주문, 객사인 천진궁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석화가 깔려있다.>

 다음자료는 박씨문중의 인터넷 자료다.

▲ 천진궁을 들어가는 만덕문

▲ 아랑각(인터넷자료)

 

        문화적으로 본 영남루

 

보물 제147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조선시대의 밀양군 객사(客舍)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로서 밀양 강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다. 건물 기둥이 높고 사이를 넓게 잡아 웅대하다. 좌우의 부속건물들과는 층계로 된 월랑(月廊)과헌랑(軒廊)으로 연결하여 건물 전체 배치에 변화를 주었으며 규모도 더 커졌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렸고,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으며 연회를 베풀기에 알맞은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다.

▲ 영람루를 뒤로한 필자

▲ 명경지수 그래로인 밀양강

공포(뱀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표현한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내부 둘레의 고주(高柱) 위에 이중량(二重樑)을 짜고, 외부 둘레의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 충량은 용신(龍身)을 조각하였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창건 연대는 고려 말이라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때 불탄 것을 2년 후인 1844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밀양 박씨로 본 영남루

<선조 님의 얼이 닮긴 영남루>

밀성대군 언침은 신라 경명왕(시조의 29세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밀성대군에 봉군되었다. 밀성대군 부에 있는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은 신라왕 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이라 한다. 이궁대는 본래 신라의 어진 사람들이 백성을 덕화함으로 동경(경주의 옛지명)이 태평성사에 젖었으니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의 이름이 당시의 풍속과 민요에서 나온 것이다. 1925년 을축에 또 단을 밀양 영남루 언덕에 모시고 그 후 1928년 정묘년에 제단을 밀양 무안리에 밀성대군 휘 언침, 삼한 벽공도 대장군 휘 욱, 요동 독포사 란을 아울러 3대 할아버지를 제사하니 이곳을 경덕단. 만운재 각유경 이라고 한다. 또 밀성 박씨는 전국 박씨의 종가이며 밀성 박씨에서도 태사공파(휘 언부)의 주 손인 은산부원군(휘 영균)파가 대종손이다.

▲ 영남루의 계절변화(인터넷자료)

     

밀성재(密城齋)와 익성사(翊聖祠)- 밀성대군 언침이 배향된 재실(경남 밀양시 내일동)

 

밀양 영남루를 뒤로하고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밀성재로 차를 몰았다. 밀성대군과 대군의 아들 삼한 벽공도 대장군 휘 욱(郁). 대군의 손자 요동 독포사 휘 란(瀾)을 배향하는 곳이다. 차를 몰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찾아가니 비탈진 언덕에 기와 집으로 된 밀성재가 나왔다

밀성재는 여러 층의 돌계단 위에 우뚝 서있었다. 출입문은 솟을 삼문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대문좌측에 밀성박씨대종회(密城朴氏大宗會)란 현판이 있고 우측에는 밀성박씨청년회(密城朴氏靑年會)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문중앙 천장에 돈경문(敦敬門)이라 써서 액자를 하여 놓았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니 머리위로 밀성재가 자태를 드러냈다. 밀성재의 중앙 천장에 밀성재(密城齋)라고써 붙인 액자가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밀성재 안을 둘러보니 행랑채가 있어서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없었다. 밀성재 문을 열고 참배하려 했으나 밀성재 안에 사람이 없어서 하지 않았다. .

밀성재 대청마루에  아내와

▲ 밀성재 돈경문

▲ 밀성재

함께 앉아서 건너편 영남루를 바라보니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밀양시를 찾아 밀성대군의 자취를 - 2 차탐방기

 

영남루(嶺南樓)와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

2005년 4월 3일 오전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원덕사 탐방을 마치고 밀양시로 차를 몰았다. 밀양시에 있는 밀성대군의 유적을 2차로 탐방하기 위해서다. 간간이 내리는 빗줄기를 해치며 경부 고속도로를 달렸다. 대구를 지나  창령 IC를 빠져나와  밀양시에 접어드니 13시가 넘었다.

밀양시청 당직실에 들러 관광안내도를 받아들고 밀양강가 언덕에 있는 영남루로 향했다.

목적지에 이르니 낮익은 영남루가 나를 반기는 듯 싶었다. 수려한 영남루 처마에  부착된 현판글씨가 여전히 유려하고 힘차 보였다. 영남루 앞에 있는 "밀성대군지단도" 여전하였다. 밀성대군을 배향하는 제단이다.  영남루 일원은 밀성대군의 유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밀성대군부에는 이궁대(離宮臺) 풍류현(風流峴) 세루정(洗陋亭)이 있었다는데 이궁(離宮)에서는 신라왕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으로 신라의 문화행사가 행하여 졌다고 한다. 밀성대군지단 앞에서 읍배를 하고 간곡하게 심고를 드렸다. 지긋이 눈를 감고 대군으로부터 나까지 1천 여년의 새월을 그려보는데 다시금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도 새로웠다.

내가 대군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내 스스로 밀양 영남루를 두 번씩이나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영원히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별자리 처럼 멀고 먼 선조의 편린을 찾아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새로운 체험을 하게되니 대군의 후손인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한 동안 침잠 속에 젖어 있던 나는 이윽고 평상심으로 돌아와  영남루 일원을 둘러 보았다. 밀양강가에 우뚝 서서 푸른 대나무 숲으로 둘러 싸인 영남루는 화사한 새봄의 꽃들과 어우러져 승지강산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옛날의 시인묵객이었더라면 누에 올라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일필휘지로 장쾌한 싯귀를 지어 냈을지도 모른다. 누의 양날개와 같은 능파당과 침류각을 돌아 보았다. 신비로운 정취 속에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건축물들이라 여겨 졌다. 마침 영남루는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관련 기사를 잠깐 싣는다.

    <영남루 보수작업 >

국내 대표적 누각인 밀양 영남루(보물 147호)가 대대적인 보수작 업으로 새롭게 단장된다.

3월 29일 밀양시에 따르면 누각 기둥의 부식 등으로 안전에 위험이 있 는 영남루에 대해 국비와 시비 등 모두 3억6천여만원의 예산을 들 여 이달말 보수작업에 착수,오는 8월말 완공할 계획이다.

이번 보수작업에서는 누각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고주 및 기둥 인 누화주(높이 3m,둘레 64㎝)와 마루바닥,귀마루 등 일부 시설을 해체한 뒤 새로운 자재로 교체한다.

진주 촉석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영 남루는 지난해 1월 진주시와 문화재청이 한국건설안전기술원에 안 전진단용역을 의뢰한 결과 해체보수가 시급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전에는 평남 강선루, 진주 촉성루와 함께 조선 3대누각이라고 했는데 이 기사에는 강선루 대신 평양 부벽루를 넣고있으니 웬일인가?

밀성대군지단 바로 옆에 천진궁이 있다. 1차 탐방 때는 보수작업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이 번에는 자세히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만덕 문을 통과하여 천진궁 안을 들여다 보니 단군이래 역대 8왕조 시조를 봉안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누천년의 역사가 일순간에 주마등 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그 주마등 속에 신라 시조왕이 있고 경명왕과 밀성대군이 있었고 또 내가 있었다. 천진궁 뜰에는 신상(神像)을 조각한 석상이 있고 바로 곁에 비석이 있어서 가보니 비석중앙에 칠원성군(七元聖君)이라 새겨져 있고 그 좌측에 태상노군(太上老君), 우측에는 삼신상제(三神上帝)라 새겨져 있었다. 우리나라 신교문화(神敎文化)의 한 면을 엿보게 하며 다분히 도교적(道敎的) 냄새가 풍기는 정경이다.

영남루 인근지역을 둘러보려고 누의 경내를 나왔다. 출입구 바로 앞에 "날좀보소~" 로 시작되는 '밀양 아리랑'비가 맨 먼저 눈에 띄었다. 근처에 작곡가 박시춘 생가터가 있는데 초가집이 개나리 벚꽃 등과 어울려 옛 시골의 이른 봄 풍경을 그립게 했다. 또 박시춘 기념비 안에서는 그가 작곡한 음악이 은은히 흘러나와 세월의 무상함 속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실감케 하였다.  

다음은 근처에 있는 사찰 무봉사를 찾았다. 무봉사는 영남루와 함께 밀양강을 굽어보며 일자형으로 늘어선 사찰이다. 경내를 둘러보니 마냥한가로워 보이는데  그림처럼 운치가 있다. 문듯 삶의 질곡 속에서 솟아 나는 모든 번뇌를 저 무심한 밀양강에 흘러보내 버리고픈 심정이 들었다. 경내에 소재한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물 제493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밀양박물관도 관람하고 밀양도서관에도 가보았다. 우리 선조들의 행록이 밀주지라는 책에 기록이 있다고 세보에 언급되어 있어서 도서관에 밀주(밀양)지라는 책이 있는지 알아보니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아랑사를 찾아갔다. 밀양부사의 딸이 통인 주기(通引 朱旗)로부터 정조를 강요당하게 되자 죽음으로서 항거하여 정절을 지켰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후인들이 세운 사당이다.

무봉사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사당인데 안을 둘러보니 아랑의 영정은 애처로움과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교차하는성 싶었다. 아랑의 영혼은 관광객들과 더불어 밀양강을 굽어보며 인고의 한을 강물에 띄워보내고 있는 것일까!  

상당한 시간을 영남루 일원에서 보내고 다음은 영남루 건너편에 있는 밀성재와 익성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

밀성대군의 단(密城大君之壇)을 왜 영남루 북정(北庭)에 세우고 봄 가을로 향사(享祀)를 하게되었는가? 그 연원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예로부터 밀양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왕자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근처에 있다고 하였다.

임술(壬戌-1922년) 윤 5월 13일, 영남루 일원에 큰 비가 내렸다. 폭우로 영남루의 흙이 유실되자 영남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나타났다.

누 아래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부근에 사는 박씨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서보니 과연 오래된 묘 자리였다. 대군의 묘인지 학인 할 만한 유물은 없었으나 전통(傳統)하는 바에 따라 밀성대군의 유지(遺址)임이 믿을만 하여 설단(設壇) 협의가 이루어졌다.

그해 당국에 단지(壇地) 대여를 신청하여 1923년(癸亥) 3월 7일 무상으로 영남루 북정(北庭) 유허(遺墟)에 12평을 허락(許諾)받아 사업 추진이 구체화 되었다.
서기 1924년(甲子) 음 5월 3일 팔역(八域-전국13道) 밀성박씨대종회를 영남루상에서 열어 개최하여 밀성대군 단을 서기1924년(甲子) 음 9월내로 준공하기로 했다.

서기 1925년(乙丑) 10월 18일(음9월 초일) 오후 2시에 대종회를 영남루상에서 개최하니 각 군 종원 300여인이 참석하였고 이어서 10월19일(음 9월 2일) 오전 12시(午時) 정각에 본손과 사림일동이 단비(壇碑)를 봉립하고 일제히 신고식을 장엄하고 성대히 거행하였다.

 

천진궁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17호

단군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중앙 수좌(首座)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동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락의 시조왕, 고려 태조왕을 모시었고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고왕, 조선태조의 위패를 차례로 봉안하고 있다.

천진궁은 현종 6년(1665)에 부사 홍송구(洪聖龜)가 창건한 요선관(遼仙館)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부사 이인재(李寅在)가 크게 보수하였다. 고종 연간에는 군수 이도재(李道宰)가 중수하여 장전폐한 객사건물로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 국치를 당하여 전패는 땅에 묻혔고 객사의 기능은 해체된 체 일본 헌병들에 의하여 강점당하여 옥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발족한 단군 봉안회가 1956년부터 단군봉안전으로 사용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御天大祭), 10월 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로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올리고 있다.

천진궁옆 비석

*좌측 - 태상노군(太上老君)   * 중앙 -칠원성군(七元聖君)  *우측 -삼신상제(三神上帝)

아랑사

아랑사가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78(고종년)에 밀양부사로 재임한 연서 신석균(蓮西 申奭均)의 영남루 제영(題詠)에 노승원(老僧院)과 열녀사(烈女祠)라는 단편저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그 이전부터 지역민들이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여 영남루 아래 죽림속에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아랑사는 제향을 올릴 수 있는 사당으로 중건한 것이며 아랑 영정(影幀)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솜씨를 빌어 제작하여 직접하사한 것이다. 아랑제향은 매년 밀양아리랑 대축제 행사를 통하여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祭官)이되어 음력 4월 16일 제(祭)를 올리고 있다.

아랑전설(설화)

조선조 명종때 (1545-1567) 밀양부사 딸로서 윤동옥(윤동옥) 혹은 윤정옥(윤정옥)이라고 부르는 규수가 있었다. 방년 18세에 재예(才藝)와 자식(姿色)이 빼어난 규중처녀로서 태어난지 겨우 수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품에서 자라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 외동딸이었다. 어느 날 유모의 꾀임에 빠져 보름달을 구경하러 영남루에 갔다가 통인 주기(通引 朱旗)로부터 정조를 강요당하게 되자 죽음으로서 항거하여 정절을 지켰다. 외동딸을 잃은 윤 부사는 실의에 빠져 서울로 돌아간 후 후임 부사들이 부임해 오는 첫날밤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자 아무도 밀양부사로 오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기개가 높은 사람이 고을 부사로 자청해 옴에 다라 그의 지혜를 빌어 원한을 풀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아랑의 원혼이 부사에게 나타나 자신이 죽게된 원인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통인 -지방관청의 우두머리에 딸려 잔심부름하던 사람> 

 영남루 일원 사진보기

 

 

 

  

 

 

 

밀성재(密城齋)와 익성사(翊聖祠) 탐방기-2차

 

2005년 4월 3일 오후 영남루 일원을 다 돌아 본 후 밀성재로 향했다.

밀성재는 밀양시 내1동 331번지 아북산(衙北山) 남쪽 산록(山麓)에 위치하는데 바로 동편에는 익성사가 자리하고 있다. 3년 전 밀성재를 찾았을 때는 관리인이 없어서 익성사 경내는 출입을 못했지만 이 번에는 다행이 밀성재를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있어서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 밀성재는 밀양(밀성)박씨의 재소(齋所)이며 밀양박씨 대종회 총본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밀양박씨 대종회 책임자는 만나보지 못했다. 전화를 하여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세한 탐방자료는 얻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따끈하게 커피를 끓여 주어 고마웠다.

밀성박씨 대종회와 관련하여 몇가지 물어 봤으나 깊은 내막은 모른다고 하였다. 대종회 간부를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하고 내려오라고 하였다. 물논 지당한 말씀이다.

아주머니는 4월 11일에 밀성춘향대제를 지낸다고 알려주었는데 먼데서 찾아 온 길손에게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어 고마웠다. 밀성재를 세세히 돌아 보고 밀성재 서편에 있는 세루정(洗陋亭)과 동편의 추화재(推火齋)도 유심히 돌아 보았다. 이윽고 밀성재 편액을 바라보며 신라와 고려가 교체되는 혁명기를 살다가신 밀성대군을 흠모하는데 역사 변천의 필연성 속에서 덧없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밀성재 경내를 살펴 본 후 익성사 경내로 접어들었다. 누런 잔디가 깔린 마당이 나오고 좌측으로 익성사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성사는 고려 삼한벽공도 대장군 휘 욱(諱 郁)과 공(公)의 두 부인(夫人)의 소상(塑像)을 모시고 자(子) 요동독포사 휘 난(諱 瀾)의 위판(位版)을 함께 모셔  봄과, 가을로 제향(祭享)을 하는 곳이다.

익성사에 다소곳이 다가가 정면에서 먼 조상 님들께 경건한 마음으로 읍하며 음덕을 기리고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체 익성사 뜰을 천천히 오가며 까마득한 상념에 젖어드는데 "이 아득한 우주공간에 나라고 하는 의식체는 왜 존재하는가? 조상신과 나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천지간의 삼라만상이 향하는 종국처는 그 어디이며 그것들을 담고 맹목적적으로 그저 운행하는 듯한 우주의 창조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한 물음들은 평생을 살며 자주 해 온 물음들이지만 결코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접고 다시 소박한 현실로 돌아와 밖으로 나왔다. 잔디 마당 동편에는 비각 하나와 두 비석이 있는데 다가가서 비문을 살펴보았다. 비각은 삼한벽공도대장군 박공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朴公 諱 郁)의 비석을 모신 것이요 두 비석은 밀성재와 익성사 건립 기념비였다.

익성사 중건기적비를 보니 <밀성주신 욱(郁)은 군흉토평(群凶討平)으로 대한(大患)을 방어(防禦)하여 여태조(麗太祖)로부터 직첩(職牒)을 수여 받았다. 밀양인들이 봉명하여 사당을 건립했는데 임진왜란 때 공이 현신하여 적병을 퇴거함으로서 어육의 화를 면했다. 이재현(李益齋)왈 밀성박씨가 많으나 그 근본은 욱(郁)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는 등의 글이 있고  밀성재 건립기적비는 밀성대군에 대한 글과 건립과정 등의 글이 있었는데 1978년 이숭녕 문학박사가 비문을 썼다는 내용이 이채로웠다.

밀성재와 익성사를 돌아보는 동안 어느덧 해는 서천으로 많이 내려가 있고 간간히 부는 바람결이 옷깃에 서늘한 기운을 불어 넣었다. 밀성재를 나오면서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밀성대군 제향 때는 자주 참석 할 것이라고 말하고 밀양시 무안면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문화재로서의 삼한벽공도대장 목상(三韓壁控都大將 木像)

 

삼한벽공도 대장은 시조왕 31세요 밀성대군의 아드님인 박욱(朴郁)이시다. 공(公)의 목상이 문화재로서 전해짐으로 반가운 마음으로 여기에 싣는다.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213호

☆소 유 자 : 밀성 박씨 문중

☆소 재 지 : 밀양시 내일동 329-1(익성사 내)

☆수     량 : 1기·시대 : 미상

이 목상(木像)은 라말려초(羅末麗初)의 인물인 밀성 박씨의 상조(上祖) 박욱(朴郁)의 상(像)인데, 그는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건국사업에 공이 많아서 삼한벽공도대장군이 된 사람이다

목상이 만들어진 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원래 밀양부의 추화산성에 있던 성황사에서 성황신으로 받들던 것인데, 후손들이 고종 31년(1894년)에 익성사를 창건하여 옮기고 그의 아들인 요동독포사(遙東督捕使) 박란의 위패와 함께 봉안하고 있다.


 밀성재 연혁

익성사 연혁

삼한벽공도대장군 욱(郁)의 익성사 치재소(致祭所)인 추화재 옛터에 창건하여 중앙의 정당(正堂)을 밀성재(密城齋), 서쪽 건물을 세루정(洗陋亭)이라 하고 동쪽 건물은 추화재(推火齋)라 부르는데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서기 1925년(乙丑)에 13도 대종회의 공의로 영남루 북정(北庭)에 발현된 대군 유지에 제단을 설립하게되어 부대사업(附帶事業)으로 재사(齋舍)건립을 위해 밀양시 소재 아북산 산하 토지 수천평을 대지용으로 매입

*1937년(乙丑)에 교동 추화산정(推火山頂)의 추화사를 내일동 대지 동쪽에 신축(新築)하여 삼한벽공도대장군과 두 부인의 소상(塑像)을 옮길 당시 사우를 익성사로 고쳤으며 서쪽 아래에 재사를 신축하여 추화재라 편액하고 단소와 사우의 재숙(齋宿)을 겸하니 밀성박씨 재소의 시창(始創)이며 추화재는 곧 밀성재의 옛집임.

*추화재 건립 후 근20년이 지난 1965년(乙巳) 춘계제향후 재청에서 확장하여 고쳐 지을 것을 공론으로 결의 1965년~1971년까지 오천여만원의 기금을 조성 1971년 辛亥 춘향후 정당의 위치를 봉무산(鳳舞山) 아래 구릉(丘陵)을 대응하여 영남루 북정(北庭)의 밀성대군단을 서로 마주 보도록 방위를 정하여 건축설계와 배치를 하고 공사의 규모를 확정 1972년 (癸丑)에 정당의 정초(定礎)를 기공하여 1978년(戊午)에 준공하고 정당에 밀성재(密城齋)라 편액함
*1979년(乙未) 건립기적비를 세우고 이어서 위토답 조성사업과 익성사 중건사업을 진행했으며 1991년(辛未)에 대종회 이사회의에서 공궤청(供饋廳-식당)을 신축하기로 결정 1992년(壬申)에 공궤청을 완공하고 1995년(乙亥)에 전사청(典祀廳)을 완공

 

 

 

익성사는 신라말(羅末)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은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의 소상(塑像)과

-그 두 부인(夫人의 소상(소상)을 봉안하고

-공(公)의 아들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 諱 瀾)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다.

*문헌에 의하면 원래는 밀양부(密陽府)의 성황사(城隍祠)로서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있었는데 그 성황사 주신(城隍祠主神)으로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과 그 두부인

그리고 다른 한분 등 사위(四位)의 소상(塑像)을 봉향하여 관부(官府)에서 제향을 올렸다.

*1580년(선조13庚辰)에 부사 하진보(府使 河晋寶)가 연로(年老)하였는데 산정(山頂)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하여 성내(城內 內一洞 신당마을)로 이건(移建)하였고

 *1674년(현종15甲寅)에 부사 이희연(李喜年)이 다시 남림중(南林中: 三門洞)으로 이설(移設)한 일이 있었다.

 *1875년(고종12乙亥)에 고을 유생 안인원(安仁遠)등이 도백(道伯)에게 진정하여 성황사(城隍祠)의 원위치를 찾아 추화산정(推火山頂)으로 복원재건하고 추화사(推火祠)라 하였다.

*1910년(순조4庚戌) 이후로 관에서 제사하던 것이 폐지되어 후손들에 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12년에 향우(享宇)가 심히 퇴락(頹落)하여 이를 후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수(重修)하였다

 

<자료 ☞ 밀성박씨 청년회>

 

밀성재 / 익성사 사진보기

 

 

 

 

 

 

만운재(萬雲齋), 경덕단(景德壇) 탐방기 - 1차

 

2005년 4월 3일 밀성재, 익성사 탐방을 마치고 한참을 달려 부안면 무안리에 도착하니 17시 반이 넘었다. 무안리는 관광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국가에 길흉사가 있을 때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가 있고 사명대사 생가터, 홍제사, 대법사, 영산정사, 와불 등이 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를 찾아가니 마침 여직원들이 있어서 경덕단과 만운재 위치를 물으니 잘 몰랐다. 면사무소에서 나와 무안마을 뒷산 자락을 바라보니 사진 속의 경덕단과 비슷한 건물이 보여 곧은 길로 찾아갔다. 경덕단에 이르기 전에 만운재가 먼너 나를 반겼다. 만운재 출입문은 솟을 삼문(三門)인데 앙경문(仰景門)이라 편액하여 있었고 문 바로 앞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안내문이 있었다.

안내문을 읽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만운재(萬雲齋)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72호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이 재사(齋舍)는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 )을 경모하고자 그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밀성대군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남이며, 밀양박씨의 상조(上祖)로 받들여지고 있는 인물이다. 재사(齋舍)는 홍문관 시독(弘文館 侍讀)을 역임한 교리 박해철(校理 朴海澈)에 의해 1927년에 세워졌다. 현재 경내에는 재사 외에도 경덕단(景德壇)과 외삼문(外三門)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경초재(景肖齋)와 유경각(敬閣) 및 영정각(影幀閣) 등이 있다.

경덕단에는 밀성대군과 자 박욱(子 朴郁), 손 박난(孫 朴瀾) 등 삼위(三位)가 모셔져 있으며, 경초재는 박해철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이다. 만운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앙경문(仰景門)으로 불리는 외삼문은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만운재는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854번지에 소재하며 1988년 11월 13일 문화재 지정이 되었고 소유 및 관리자가 밀양박씨 정국군파 종중으로 되어 있는데 깨끗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만운재를 돌아보고 경내에 있는 경덕단으로 향했다. 세보에 이르기를 경덕단이 무안파출소 옆에 있다고 했는데 확인 결과 무안파출소는 무안면 소재지 어귀 쪽으로 옮겨 갔고 그 전 파출소 곁에 있던 고목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경덕단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봄풀이 돋아나는 중앙로를 걸어 가며 출입문을 바라보니 마치 커다란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문을 통과하자 정면에 경덕단이 나타났다. 경덕단은 밀성대군과 아들, 손자 3대를 모시는 곳이다. 중앙에는 밀성대군이요 좌측에는 아들 박 욱을 모셨고 우측에는 손자 박 난을 모셨다. 이 분들의 후손이 300만 명이 넘고 나도 그 중한사람이다. 세 분을 참배하고 비석에 있는 글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비석은 신라기원 1985년 무진(戊辰) 윤( 閏) 2월에 건립했다고 쓰여있고

  *중앙은 - 신라왕자 밀성대군 휘 언침 제단(新羅王子 密城大君 朴公 諱 彦忱 祭壇 )

  *우측은 - 고려 요동독포사 박공 휘 란 제단(高麗 遼東督捕使 朴公 諱 瀾 祭壇)

  *좌측은 - 고려 삼한 벽공도 대장군 박공 휘 욱 제단(高麗 三韓 壁控都 大將軍 朴公 諱 郁   祭壇 )이라고 각인 되어 있었다. 무안 경덕단 향사일은 음력 9월 10일 임을 상기하며 경내를 돌아보는데 어느덧  해가 서산에 지면서 황혼이 밀려왔다. 경덕단 탐방을 마치고 어둠 속에서 무안마을로 내려 가는데 인근 나무숲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또한 이채로웠다. 무안에서 저녁을 들고 1박하려 했으나 생각을 바꿔 경주시로 차를 몰았다. 성모사와 오릉원을 탐방하기 위해서다.

 

<단(壇)을 만드는 이유>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조묘(祖廟)가 없어지면 단(壇)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묘(墓)가 없을 때 단(壇)을 하는 것은 비단 옛적의 일만은 아니다.그리고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부칠 곳이 없을 때 단(壇)을 만들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은 먼 조상을 추모(追慕)하는데 해(害)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후대(厚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조고(祖考)의 기(氣)는 곧 자손(子孫)의 기(氣)이니 이 한가지 기로써 감응(感應)하는 정성을 쌓은 즉  신(神) 또한 이에 존재(存在) 할 것이니 장차 어찌 이 땅에 제사(祭祀)를 지내지 안으리요

 

 

  다음은 밀양시 무안면에 있는 표충비가 예사롭지 않음으로 여기에 그 안내문을 싣는다

 표충비(表忠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泗冥堂) 송운대사(松雲大師 1544-1610)의 높은 뜻을 기린 것으로 영조(英祖) 18년(1742)에 대사의 5대 법손(法孫) 남붕(南鵬)선사가 경산(慶山)에서 벌석(伐石)한 흑납석(옥돌)으로 건립한 것이다. 일명 땀흘리는 비석(汗出碑)으로 더욱 유명한 이 비석은 국가에 길흉사(吉凶事)가 있을 때마다 사전에 계절(季節) 날씨에 관계없이 땀을 흘려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바 이는 법력(法力) 높은 사명대사의 애국 애족 중생구호의 호국자비불교(護國慈悲佛敎)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사명대사는 선조(宣祖)때 고승으로 속성은 임(任)씨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이다. 명종 13년 (1558)에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서 선(禪)을 받았다. 명종 16년(1561)에는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선조 8년(1575)에는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서산대사(西山大師)로부터 성종(性宗)을 강론 받고 크게 깨달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순안(順安)에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僧軍)을 통솔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국서(國徐)를 받들고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건너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담판하고 이듬해 포로 3,500명을 대리고 돌아 왔다.

경덕단 / 만운재 사진보기

 

 

 

 

충효사(忠孝祀)-(경북 울주 상북 길천 후리마을)  

 ▲ 충효사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후리 마을에 있다. 선조25년(l592)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다같이 순사한 박언복. 박인립부자를 모시고 있다. 헌종(憲宗) 6년(庚子1840)에 언양면 반곡리에 반곡사(盤谷祠)를 세웠다가 얼마 후에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여 길천 후리(後里) 이곳에 옮겨 세웠다. <상북면 자료>

 

박언복(朴彦福) 공(公)은 신라시조왕 53세요, 밀성대군 24세며, 도평의사공 17세요, 돈재공(遯齋公) 7세 손 이며 정혜공(貞惠公)의 손자가 되신다. 임진(壬辰)년 7월 아들 박인립(朴仁立)과 함께 의병으로 나아가 왜적을 대항하여 싸우다가 부자가 모두 전사 했으니 그 추상 같은 절개와 태양같은 충의로움 앞에 그저 옷깃을 여밀뿐이다.   

 

* 길천리의 유래 -이마을 중앙에 행화정이란 조그마한 우물이 있어 그 우물에서 흘러가는 내가 물이 맑고 좋아서 좋은 내라하여 "길천리"라 호칭함. 본래 언양군 상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화, 후리, 안마을, 갠달, 순정, 원제를 합하여 길천리라 하고 1928년 상남면과 하북면이 병합하여 상북면으로 개칭함에 따라 상북면에 편입됨. 길천국민학교가 있다. <상북면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