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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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新羅 始祖王 朴赫居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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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박씨는 신라 시조왕인 휘(諱) 혁거세(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하여 모두 한 가닥에 근원(根源)을 두고 있으며 민족 가운데에서도 귀화족(歸化族)이 없는 가장 순수한 혈통이기도 하다. 박씨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박씨선원대보(朴氏璿源大譜)등에 무려 300본(本)이상이 기록되어 있으나 중시조(中始祖)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후손이 현존하는 본관(本貫)은 70여 본 정도라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김씨, 이씨 다음으로 박씨가 많으며 우리나라 전체인구 45,985,289명 중 3,895,121명으로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박씨중에서는 밀양(밀성)박씨가 946,307명으로 제일 많아 전체 박씨의 77.8%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2005년 현재는 국내외 약 500만명이 가까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조왕 탄강> ㅇ시조
왕이 탄생하실 무렵인 서기전(BC) 69년(壬子)7월에 시조왕의 성모(聖母)가
선도산(仙挑山-신선세계)에서 양산 (陽山)의 나정에 내려와 시조왕을
탄강 하실 때 신이 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고허촌장 소벌공(高墟村長
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것이
있어 이를 갈라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성숙하였다. <왕비 알영 탄강> ㅇ어느 날 용이 알영정(閼英井-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에서 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이를 본 노파가 이상이 여겨 기르며 우물 이름을 따라 "알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알영씨는 자랄수록 덕용(德容)이 뛰어났다. <신라의 건국> ㅇ6촌 사람들은 아이(시조왕)의 출생이 신이 함으로 우러러 받들었는데 13세가 되자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 성을 박(朴)으로 삼고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한편 재위 5년째인 무진년(戊辰-기원전 53년) 1월에 알영씨 (閼英氏)를 왕비로 삼았다. 시조 왕은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과 전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잠(農蠶)을 권하는 등 생산증가에 힘써 백성 들이 두 분을 이성(二聖)이라고 칭송하였다. 박씨 상세내역 보기 ☞ - 클릭 |
신라 시조왕과 왕비 알영에 대한 사서(史書)와 설화(說話)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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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삼국유사 |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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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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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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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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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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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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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 -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 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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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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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 ]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부(涿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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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는 - 자산(貲 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 ]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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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는데 이가 바로 한지부 배씨(漢歧部裵氏) 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다.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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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은- 명활산( 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촌장(村長)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또는갈곡( 葛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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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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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전(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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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끓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 ]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 [이 혁거세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 한다. 또 계룡(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 거서간(閼英 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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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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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 [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편집자 주註 : 계정(鷄井)은 곧 나정(蘿井)이다. >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
삼국사기 원문 |
삼국유사 원문 |
○始祖 ,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 曰 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金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孀 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歲, 岐祥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嵓 峰. 是爲及梁部李氏祖. [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 [梁讀云道. 或作涿 . 亦音道]鄭氏祖 .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置也. 下例知.] 三曰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 [一作 涿]部. 又牟梁部孫氏 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四曰觜山珍支村. [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金山加里村. [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
長曰祗.沱 [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部. 又作韓歧 部裵氏祖 .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 六曰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仍仇旀 村闕谷 [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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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前漢地節元年壬子 [古本云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 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詭 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 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 [盖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 [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一起.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沙梁里閼英井 [一作娥利英井]邊. 有 雞龍現而左脇誕生童女. [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 將浴於月城北川. 其觜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 [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雞井. 故或云雞林國以其雞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得金閼智. 而雞鳴於林中. 乃改國號爲雞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 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
신라 시조왕과 왕비는 실존인물 이었는가?
신라 시조왕과 왕비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신화적으로 기록 하였음은 같다. 그러나 두 글을 대조해 보면 내용이나 글의 양적측면에서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서 3대 유리왕 때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한 기록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다름을 알 수 있다. ○九年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
○유리왕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삼국사기>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내용을 종합해보면 6촌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양부(梁部)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사량부(沙梁部)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점양부(漸梁部) (삼국사기에는 4번 진지촌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본피부(本彼部) (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한기부(漢祇部)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습비부(習比部)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신화로 처리됨으로서 일제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그동안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그 신빙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홈페이지 운영자도 신라 초기 기록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글을 보자! <신화의 내용이 황당무계 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사건들이 신화의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개된다. 신화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상상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신화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 신들이 만들었다는 세계가 있고 인간이 있으며 산천초목도 있다. 제도가 있고 풍습이 건재한다. 따라서 신화의 내용이 황당하다고 부정할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신화를 신빙성 없다하여 무시하면 않되는가? 다음 신문 기사와 방송내용을 보면 그 대답은 자명해 진다. |
"박혁거세는 실존인물" 신라초기 유적 발견 |
[조선일보 2004-03-25 03:3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지난 2002년부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700의 1번지 나정(蘿井·사적
245호)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 초기 우물과 건물의 흔적인 구상유구(溝狀遺構·고랑 모양 유적) 등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직경 14m, 너비 2m, 깊이 2m로 훌라후프처럼 한 줄로 연결된 원형 유구와 이 유구 바깥을 두른 목책의 흔적
유구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8각 건물지와 우물지 부속건물·우물의 흔적 등과 두형(豆形) 토기 등의 토·자기류, 기와, 철기류 등의
유물이다. 원형 유구에서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둥 구멍이 발견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기원전 69년 사로국의 6촌장이 나정 근처에 하늘로부터 신기한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가니 큰
알이 하나 있었고, 알을 깨고 사내아이(박혁거세)가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또 제2대 남해차차웅 3년(서기 6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제21대 소지마립간 9년(487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나정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연구원측은 “원형 우물과 건물은 나중에 세워진 제사시설인 8각형 건물보다 앞서 지어진 것”이라며 “출토된 두형 토기가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볼 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인 박혁거세 사당·신궁의 건립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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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건국의 수수께끼 나정(蘿井)은 알고 있다. KBS HD 역사스페셜[ 2005년 6월 24일 방송] - 대 본 - |
신라건국신화가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신화 이것을 사실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존재와 신라건국역사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학계를 깜작 놀라게 하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주 나정(蘿井)이 발굴되면서 신라건국의 미스터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정에서 출토된 대형 건물터와 수많은 유물들로 그 비밀을 풀어 본다. |
1.신라의 건국신화가 사실로 밝혀지다. 문화재정비사업차 시작한 나정(사적 245호) 보수공사중에 뜻밖에 놀라운 발굴이 이루어 졌다. 깊은 도랑과 날카로운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우물지, 그리고 신궁으로 추정되는 90여평의 대형 팔각건물지가 그것이다. 유적의 모습과 유물연대를 분석한 결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거의 일치하였다. 그동간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신화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정발굴 성과를 토대로 묻혀져 있던 건국신화의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다. |
2. 박혁거세 어떻게 왕이되었나.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큰 알이 있었다"는 박혁거세 신화 , 그런데 기원전 1세기 조양동 고분에서는 철제무기와 기마관련 유물이 다수 발굴, 박혁거세 집단이 철기와 기마의 선진 문화를 갖고 온 이주민 세력이 아닐지 추정케 한다. 그렇다면 신화에 나오는 말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인가. 이와 관련 국제관에서는 로마의 건국신화를 살펴보면서 신화와 역사의 관련성을 조명한다. |
3.최초확인 박혁거세 왕국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6촌장의 추대로 왕이된다. 실제로 경주에는 6촌의 지명이 남아 있고 6촌자의 후손들은 지금도 제를 올리며 조상을 기리고 있다. 경주지역 위성사진을 통해 신라의 모태가된 6부의 실체를 확인, 그 규모와 인구를 추정해 본다. 또한 박혁거세의 왕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창림사터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분석 그곳이 박혁거세 왕궁의 터였음을 최초로 확인했다. |
4.나정발굴은 사건이다. 나정발굴 결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6월초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모임에서 이미 논쟁이 시작 학계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제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그동안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그 신빙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점에서 나정의 발굴은 풍납토성과 함께 일제가 부정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복원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고대사를 다시 써야할 획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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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근거자료 처럼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은 실존인물이며 선진 문물인 철기 문화를 가진 집단으로서 철기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청동기 문화를 가진 지배 세력들을 통합하고 신라를 건국했다. 혁거세 집단이 경주에 이주했을 때 6촌 사람들처럼 이런 지석묘를 축조하는 세력이랄까 권력 구조가 없었다면 아마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권력 구조 위에 혁거세 세력은 한단계 더 높은 권력 구조를 만들고 최고의 권력 구조를 혁거세의 이주민 세력이 장악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게 됐던 것이다. <kbs자료 인용> * 이부분에 대하여는 홈 운영자의 주관적 견해를 최대한 배제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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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왕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
천년 고도 경주 서쪽에는 선도산이 있다. 해발 381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오악산왕(五嶽山王)의 응감을 위해 신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서악(西嶽)의 지위에 있었고 여러 신이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서악 주봉의 큰 바위 아래 마애삼존불이 있고 사소(娑蘇)라는 별명을 지닌 성모(聖母)를 배향하는 성모사(聖母祠)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성모사(聖母祠)는 성모(聖母)를 모신 사당인데 성모는 바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님 이시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있는 성모에 대한 기록이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성모사 ☞ 클 릭 |
박씨 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
박씨의 세계(世系)는 시조왕 4세인 일성왕과 파사왕대에서 큰 줄기로 갈라졌다. 파사왕계(破娑王系)는 뒤에 영해(寧海),면천(眄川),강릉(江陵),해주(海州),비안(比安),이산(尼山),구진(邱津),계림(鷄林),노성(魯城)으로 분적(分籍)되었다. 일성왕계(逸聖王系)는 시조왕 5세 아달라왕(阿達羅王)에서 28세 신덕왕(神德王)에 이어진후 29세 이르러 경명왕계(景明王系)와 경명왕 동생 경애왕계(景哀王系)로 갈라졌으며 이중 밀성박씨는 경명왕계에 속한다. 박씨 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는 신라 시조왕부터 29세 경명왕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말한다. 즉 신라 건국 시부터 신라 56대 경순왕(김부)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함으로서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까지이다. 시조왕(朴赫居世)이 서기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6촌장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이래 신라 초기에는 박씨들이 왕위를 세습했다. 2세 남해왕(신라2대왕), 3세 유리왕(신라3대왕)까지 세습되다가 유리왕이 유언으로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탈해가 신라 4대왕이 되었는데 그는 유리왕의 여동생 아효부인의 남편이기도 하다. 5대왕에는 다시 박씨인 유리왕의 둘째아들 검(檢)이 오르니 바로 파사왕(시조왕 4세)이다. 6대왕에는 파사왕의 아들이 올라 지마왕(시조왕 5세)이 되고 7대왕에는 유리왕의 장남이 올라 일성왕이(시조왕 4세) 되었으며 8대왕에는 일성왕의 아들이 오르니 바로 아달라왕(시조왕 5세)이다. 왕위에 오른 순위가 뒤바뀌어 있음에 유의하여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시조왕 6세부터 27세에 이르기까지는 박씨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석씨에 이어 김씨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비록 오랜 기간 박씨가 왕위를 있지 못했으나 22대에 걸쳐 모두 신라의 왕손으로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등 관위(官位) 내지는 작위(爵位)를 받았다.
신라 52대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시조왕 28세손이요 아달라왕(阿達羅王)으로부터 24세손인 휘(諱) 경휘(景輝)께서 912년에 53대 왕위에 추대되니 바로 신덕왕(神德王)이다. 이때부터 다시 박씨계보가 역사에 명확히 나타나며 신라왕위가 타성으로 넘어간지 728년 만이다. 왕비 의성왕후(義城王后)는 효공왕과 남매지간이었고 신덕왕은 아버지를 선성왕(宣聖王)으로 추존하였다. 신덕왕 때는 신라의 말기로서 후삼국이 난립하여 국운이 극도로 쇠퇴 한 시기였다. 신덕왕이 국운을 만회하지 못하고 917년에 붕어하자 아들 휘(諱) 승영(昇英)께서 왕위에 오르니 시조왕 29세손이요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이시다. 경명왕은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였으며 쇠잔한 국운을 돌리려고 중국 후당(後唐)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격퇴하는 등 심혈을 기우렸으나 끝내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붕어 하니 동생 위응(魏膺)이 55대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경애왕인데 927년 10월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취흥 할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견훤은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신라 56대왕에 앉히고 철군하니 그가 마지막 왕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국토가 줄고 민심이 고려로 향하자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고려의 서울 개경으로 가서 절차를 밟았다. 박혁거세 시조왕이 신라를 건국한 이래 신라는 BC 57년~AD935년 까지 56대 992년간 계속되었으며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박씨(朴氏)는 10왕이 233년간 왕위에 있었고 석씨(昔氏)는 8명의 왕이 162년간을 김씨(金氏)는 38왕이 587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박씨 신라선원세계도 ☞ 클 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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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박씨분파도 신라박씨 분파도는 문중마다 다소간에 차이가 있다. 특히 금성대군 교순을 경명왕의 제 9왕자로 표기하는 문중이 많은데 여기서는 교순을 경애왕의 제1왕자로 표기한 도표를 사용하였다. 차후 연구에 의해서 바로하여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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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註)>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가 밀성박씨 사문진사공파 지길(之吉)의 자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반남문중의 주장을 수용하여 삭제한 바있음 <본 도표는 돈재공 19세손 박형구(박수창)님이 보내신 자료를 재편집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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