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朴氏)신라선원세계도(新羅璿源世系圖)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에서 국상공 교순을 경애왕의 왕자라고 하며  경애왕은 왕자가 둘 있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 경애왕 - 제 1 왕자 금성대군 교순(金城大君 交舜)  - 제 2 왕자 계림대군 입순(鷄林大君 立舜)    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돈재공파에서는 금성대군 교순을 경명왕의 제9왕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다른 일가님의 자료를 옮겼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 - http://cafe.daum.net/parkproud

      밀양박씨는 신라 제54대왕 경명왕(景明王: 赫居世王의 29세)의 첫째 아들이신

      密城大君 諱 朴彦忱(밀성대군 휘 박언침, 밀양박씨관향조-관향조란 분적한 박씨의

      시조를 뜻함)할아버지를 관향조로 하는 후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밀성대군의 형제가 8분인지 아니면 9분인지에 대해서 인터넷에서나 심지어

      족보에서도 다르게 나오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彦忱(언침,密城大君,밀성대군) 彦成(언성,高陽大君,고양대군) 彦信(언신,速咸大君,속함대군)

      彦立(언립,竹城大君,죽성대군) 彦昌(언창,沙伐大君,사벌대군) 彦華(언화,完山大君,완산대군)

      彦智(언지,江南大君,강남대군) 彦儀(언의,月城大君,월성대군) 


      위와같이 8분인지 아니면 8분에 交舜(교순,金城大君,금성대군,울산박씨)할아버지가 포함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금성대군은 경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경명왕의 동생인 경애왕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인터넷이나 족보에 금성대군이 경애왕의 아들이 아니라 경명왕의 아들로 올라있

      을까? 생각해봤는데 인터넷은 분명히 족보를 보고 기록했을 것이고 문제는 족보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인터넷 정보들이 경명왕의 아드님을 9분으로 기록하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우리

      집에 있는 족보(1985년발행, 복야공후 문림랑공파세보)에도 9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성대군을 경애왕이 아닌 경명왕의 아들로 기록함과 동시에 족보에 경명왕에 대한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이 금성대군이 경명왕의 9번째 아들로 족보에 등재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王妃昔氏 誕八男一女 陸西火山子坐 事實載史譜 王弟 景哀王 王立

      (왕비석씨 탄팔남일녀 륙서화산자좌 사실재사보 왕제 경애왕 왕립)

      왕비석씨는 팔남일녀(주-공주는 尙和公主)를 낳았고 서쪽땅 화산자(?)에 안장되셨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었고 왕의 동생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大韓光武 三年 崇德殿 刊行 己亥譜 諱 交舜 爲 景明王 弟九子 騰載 然無考證

      (대한광무 3년 숭덕전 간행 기해보 휘 교순 위 경명왕 제9자  등재 연무고증)

      대한광무3년(1899년) 숭덕전에서 간행된 기해년(1899년) 족보에 휘 교순을 고증 없이

      경명왕의 아홉째 아들로 휘 교순을 족보에 올리게 되었다.

      *崇德殿(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묘(廟).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塔正洞)에 있다. 1429년(세종 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가을에 중사(中祀)의 예로 제사할 것을 정했다. 1723년(경종 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명을 두어 관리하게 했으며, 52년(영조 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肅宗四十六年 長城 刊行 庚子譜 記載 考證 確實 依此 景哀王 子 是正

      (숙종46년    장성 간행 경자보 기재 고증 확실 의차 경애왕 자 시정)

      숙종46년(1720년) 장성에서 간행된 경자(1720년)년 족보에서 경애왕의 아들이란 것이

      확실한 고증에 의하여 시정되어 기록되었다.


      결론적으로 경애왕의 아들 금성대군이 경명왕의 아홉 번째 아들로 기록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숙종때 장성에서 간행된 족보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하여 경애왕의 아들이신 금성대군이 족보에 경명왕의 아들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경애왕의 아들임을 밝힙니다.

      울산박씨의 세계도를 보시면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울산박씨의 세계도를 곧 올리겠습니다.

       

      일가님들의 족보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알려주세요 

       복야공후 문림랑공파 29세손(시조66세) 첨정공자손 박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