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o m e         

밀양(밀성)박씨 돈재공파(遯齋公派)상세보

 

삼국 및 통일신라-고려시대

 

 <삼국 및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1세 시조왕 / 2세 남해왕 / 3세 유리왕 , 내(나)로 / 4세 일성왕, 파사왕 / 5세 아달라왕, 지마왕

/6세 벽방7세 무영 / 8세 판득 / 9세 광흠10세 미일11세  내물 / 12세  상건13세  인엽/ 14세 계 / 15세 명신 /16세 정환 / 17세 로겸 / 18세 남선 / 19세 금산 / 20세 응찬 / 21세 덕흥  / 22세 대녕 / 23세 니순 / 24세 융검 /25세 지곤 / 26세 성순 / 27세 선성왕, 추신 / 28세 신덕왕 ,희복, 희천 / 29세 경명왕, 경애왕, 효렴 / 30세 밀성대군 및 형제들 /

<고려시대>

31세 욱 / 32세 난 / 33세 영정,영희,영기,영돌,영지 / 34세 기세 / 35세 시주 / 36세 찬행 / 37세 언부, 언상, 언인 / 38세 양신 / 39세 직 / 40세 인경,의경,신경 / 41세 검 / 42세 열 / 43세 창밀, 흥밀 / 44세  거인 / 45세 문봉, 승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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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世

 

신라 시조왕

新羅 始祖王

 

①휘(諱): 혁거세(赫居世)이신데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 이다. 또 휘를 향언왕(鄕言王)이라고도 한다.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서기전 69년에 탄생하시고 서기 4년에 돌아가셨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 이시고 현재의 능은 경주 시 탑동(塔洞)에 소재한 5능(陵)이다. 이곳은 시조왕, 시조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능이 함께 있어 소위 "5능" 이라 부른다.

<경주오릉>

④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시조 왕이시며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휘(諱)를 향언왕(鄕言王)이라고도 한다. 서기전(BC) 69년에 탄생하여 서기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6촌장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어 왕위에 올라 국호를 서라 벌(徐羅伐)이라 정하고 나라를 다스렸는데 재위 일자는 전 한(前漢)의 선제(宣帝) 오봉 원년(五鳳,元年)으로 갑자(甲 子)년이요 4월 병진(丙辰)일이었으며 시조 왕은 서기 후 4 년(甲子년) 3월에 73세로 돌아 가셨다.

ㅇ시조 왕이 탄생하실 무렵인 서기전(BC) 69년(壬子)7월에 시 조 왕의 성모(聖母)가 선도산(仙挑山-신선세계)에서 양산 (陽山)의 나정에 내려와 시조 왕을 탄강 하실 때 신이 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고허촌장 소벌공(高墟村長 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있었다. 이상 히 여겨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것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성숙하였다.

ㅇ6촌 사람들은 아이의 출생이 신이 함으로 우러러 받들었는 데 13세가 되자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 성을 박(朴)으로 삼고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ㅇ한편 재위 5년째인 무진(戊辰) 기원전 53년 1월에 알영씨 (閼英氏)를 왕비로 삼았다.

어느 날 용이 알영정(閼英井-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 에서 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를 본 노파가 이상이 여겨 기르며 우물이름을 따라 "알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알영 씨는 자랄수록 덕용(德容)이 뛰어났다. 시조 왕이 이 말을 듣고 알영씨를 왕비로 삼으신 것이다.

ㅇ시조 왕은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과 전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잠(農蠶)을 권하는 등 생산증가에 힘써 백성 들이 두 분을 이성(二聖)이라고 칭송하였다.

⑤ 역사(歷史)

ㅇ왕4년(丁卯) 째인 서기전 53년 4월1일에 일식이 있었고 왕 8년(辛未)서기전 50년에 왜인들이 군사를 이끌고 변경을 침 범하려 하였으나 시조 왕의 신덕(神德)을 듣고 물러갔다

ㅇ왕 17년(庚辰) 서기전 41년에 왕과 왕비는 6부의 민정을 살 피러 행차하셨다.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는 한편 토지를 잘 다루어 생산에 힘쓰도록 하시었다.

ㅇ왕 19년(壬午), 서기전 39년 정월에 삼한의 하나인 변한(弁 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했으며, 왕 21년(甲申), 서기전 37년 에 서울에 성울 쌓아 금성(金城)이라 이름했고 이해 고구려 시조 동명왕 주몽(周蒙)이 나라를 세웠다.

ㅇ왕 30 년(癸巳), 서기전 23년 4월 그음에 일식이 있었고 이 때 낙랑(樂浪)이 침입하였으나 지방 사람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노적가리를 그대로 들에 쌓아 둔 것을 보고 이 나라는 도의(道義)가 있는 나라라 여기고 군사를 물려 되돌 아 갔다.

ㅇ왕 38 년(辛丑), 서기전 20년 2월에 호공(瓠)을 마한(馬韓) 의 일부인 경기, 충청, 전라지방으로 파견하여 수교했는데 마한 왕이 조공을 보내지 않는다고 꾸짖자 서라벌은 두 성 인(二聖)이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있음을 들어 반박하였다.

ㅇ왕 39 년(壬寅), 서기전 19년에 마한 왕이 돌아갔을 때 신 하들이 마한을 정벌하자고 했으나 "남의 불행한 일을 다행 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어질지 못한 일이로다"하시고 사신 을 파견하여 그들을 조위 하였다.

ㅇ왕 40년(癸卯), 서기전 18년에 백제시조 온조(溫祚)가 나라 를 세웠다.

ㅇ왕 51년(甲戌), 서기전 7 년 9월에 개국공신(開國功臣)6부의 장과 거장전(擧章殿)에서 만복연(萬福年)을 열어 군신들의 공업을 송축(頌祝)하고 돌아갔는데 신라세보의 명위 거장보 (明衛 擧章譜)에 있는 기록이다.

ㅇ왕 61년(甲子), 서기 4년 3 월에 73세로 임금이 돌아가시자 사능(蛇陵)에 장사지냈는데 경주 남쪽 남천 10리며 운암사 (暈岩寺)옆 남정수(南亭藪)안에 묘좌(卯坐))로 모셨다. 왕께 서 돌아가신 지 7일 후에 왕비 알영씨(閼英氏)가 돌아가셨 다.

⑤ 사적(史跡)

ㅇ시조묘(始祖廟)

-신라 남해왕 2년, 서기 5년(丙寅)에 시조 묘를 세워 제사지 내고 왕의 친누이 아로(阿老)를 제주로 삼았다.

-3대 유리왕께서 즉위 원년 시조 묘를 배알(拜謁) 하시고 죄 수들을 대사면으로 풀어 주었는데 이후 새 임금이 즉위 하 면 시조 묘를 배알하고 사세(赦世)하는 것이 상례(常禮)로 되었다.

ㅇ신 궁(神 宮)

-신라 소지왕 9년, 서기 487년(丁卯)에 내을신궁(奈乙神宮) 을 설치하였다. 내을은 시조 왕이 탄생하신 곳을 뜻하며 이 후로부터 새 임금은 이 신궁에서 친히 제사 하였다.

ㅇ묘 전(廟 殿) ── 숭덕전(崇德殿)

-서기 1429년(조선 세종 甲戌)에 5능 옆에 묘전(廟殿)을 창 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고 서기1723년(경종 癸卯) 에 왕이 숭덕전(崇德殿)이란 호를 특사(特賜)하여 비로소 전액 (殿額)을 써서 달았고 참봉(參奉)두어 수호하게 하였 는데 참봉 벼슬은 박씨에 한하여 제수 되었다.

<숭덕전>

-서기 1746년(영조 22 丙寅)에 본도 감사 김상노(金尙魯)가 장계를 올려 신라시대의 모든 능을 수봉 하게 하였고 능 근처의 개간(開墾)을 금하고 사사로운 묘를 일체 삭평(削平 -평평히 깎음)하였다.

또 각 능에 수호군 2 - 3인을 두었으며 춘추로 지방장관이 봉심해서 돌아 살피게 하였다.

-서기1761년(영조 37 辛巳)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을 새웠고 서기1803년(순조:癸亥)2월에 본전 참봉 박광검(朴光儉)이 라정옆에 비를 세웠다.

또 서기 1832년(순조壬辰)에 선도산(仙桃山) 성모사에 비를 세웠다.

-서기 1963년 전 참봉 박화준의 주선으로 인근 제종(諸宗)들 의 협력을 얻어 선도산 성모사를 중건하였다.

 

  2 世

 

신라 남해왕

新羅 南解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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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주

①휘(諱): 민해(愍解) 또는 희해(熙解)이시다.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서기전 50년(辛未)에 탄생하시고 서기 24년(甲申) 9월에 74세로 돌아가셨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운제부인(雲梯夫人)이시고 능은 선능동원(先陵同原:경주 5릉)에 묘좌(卯坐)로 모셨다.

④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2대왕(제위:서기4년 - 24년) 이시고 왕호는 차차웅 (次次雄) 또는 방언왕(方言王)이시다.

시조왕의 장남이시며 왕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후하며 지 략이 뛰어났고 제위 2년째인 서기 5년(丙寅)에 시조왕 묘 (廟)를 세우고 사시(四時)에 친히 제를 모셨다.

*특(): 청평군(淸平君)이며 개국훈신(開國勳臣)이다. 부인은 김씨(金氏)이고 묘는 동관(東 關)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민(): 좌명공신(佐命功臣)과 양부대인(梁部大人)을 지내셨다.

*공주(公主):이알평(李謁平)과 혼인함.

⑤역사(歷史)

ㅇ재위 원년인 서기4(甲子)년 7월에 낙랑의 군사들이 국상(國喪) 중임을 틈타 금성으로 쳐들어왔으나 그냥 갑자기 물러갔다.

ㅇ왕 5년인 서기 8년에 석탈해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로 아내를 삼 게하고 서기 10년 7월에는 탈해에게 대보(大輔 -재상)라는 벼슬을 주 고 군국정사(軍國政事)을 맏겼다.

ㅇ재위 11년인 서기 14년 왜인들이 병선 수백 척으로 해변을 침범하여 민가를 약탈함으로 6부의 군사를 뽑아 이를 막았다. 이때 낙랑에서 서라벌의 국세가 허약하다고 침입하여 금성을 포위했으나 밤에 유성 이 적의 진영으로 떨어짐으로 두려워 돌무더기 20을 쌓아놓고 도망 했는데 6부의 군사 100명은 이를 추격했으나 돌무더기를 보고 멈추었 다.

ㅇ제위 21년째인 서기24년(甲申) 9월에 74세로 돌아가셨는데 선릉동원 (先陵同原) 즉 사능원(蛇陵園 - 경주 5릉)안에 장사하였다.

 

  3 世

 

신 라  유 리 왕

新 羅  儒 理 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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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奈    老

-

아효부인

阿孝夫人

-

공 주公 主

①휘(諱): 치리(治理) 이시다.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탄생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전 20년경으로 추정하며 서기 57년(丁巳) 10월에 제위 34년만에 돌아가셨는데 중국 후한 광무제 때이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왕비 김씨로 명선왕후(明宣王后) 시고 왕의 능은 선 능동원(先陵同原)에 묘좌(卯坐)로 모셨으며 왕비 능은 동산 (東山)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선릉동원은 시조왕의 능과 같은 위치다.

④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3대왕 (제위: 24년-57년) 이시고 왕호는 이사금(尼 師今)이다. 남해왕의 태자로 부왕이 돌아가시자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 하셨다.

유언으로 석탈해(昔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여동생 아효부인(阿孝夫人)이 탈해에게 시집감으로서 탈해는 유리 왕의 부왕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었다.

*내로(奈老): 기록이 분명치 않음

*아효부인 :공주로 석탈해에게 출가하여 왕후가 되었다. 석구추(昔仇鄒)를 낳았으며 손자는 벌휴왕(伐休王)이고 증손자는 석이매(昔伊 買)며 현손은 나해왕(奈解王) 이시다.

*공주(公主): 상장군 김명옥(金鳴玉)에게 출가함.

⑤ 역사(歷史)

ㅇ재위 5 년인 서기28년 11월에 국내를 순행하다가 늙은이가 얼어죽을 지경이 된 것을 목격하고 이를 자신의 부덕한 죄로 여겨 옷을 벗어 덮어주고 음식을 제공했는데 이후 백성풍속이 권강(勸康)하여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부르니 가악(歌樂)의 시초였다.

ㅇ재위 9 년인 서기 32년(壬辰)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내렸는

데 양부(梁部)에는 이씨(李氏) 사량부(沙梁部)에는 최씨(崔氏), 점양부 (漸梁部)에는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는 정씨(鄭氏), 한지부(漢祗 部)에는 배씨(裵氏), 습비부(習比 部)에는 설씨(薛氏)등이다.

ㅇ또 그해 관직을 17등급으로 제정하여 국가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왕녀 두 사람으로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7월 16일부터 8월 15일 까지 편 을 짜서 길쌈을 했는데 진 편은 이긴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가무 를 하였으며 이를 가배(嘉俳)라 했다. 또 진 편은 한 여자가 춤추며 " 회소(會蘇), 회소(會蘇) "하며 탄식을 하였는데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 다워 회소곡(會蘇曲)의 연원이 되었다.

4 世

 

신라 일성왕

新羅 逸聖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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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왕 

破娑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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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公主

-

공주 

公主

①휘(諱): 확인되지 않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서기 42년(壬人)에 탄생하셨으며 서기 154년(甲午) 2월에 돌아 가셨는데 재위 21년 만이요 수는 112세를 누리셨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왕비는 석씨(昔氏)와 허씨(許氏)인데 이중 허씨는 정안왕후 (正安王后) 이시다.

능은 경주 남쪽 7리 해목령(蟹目嶺)아래 장전동(醬田洞)에 묘좌(卯坐)로 모셨는데 경주시 탑동에 소재하며 일성왕릉은 사적 제173호다. 왕비 석씨의 능은 금서문(金西門) 밖에 자 좌(子坐)로 모셨다.

* 종중요람에는 계비 허씨는 正安王(정안왕)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왕릉의 소재지를 의전동(醫田洞)으로 적고 있다.

④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7대왕(제위:134년-154년)이시고 왕호는 이사금(尼師 今)이다. 서기 42년(壬寅년)에 탄생하였으며 서기 134년(甲 戌)년에 6대 지마왕(祗摩王)의 뒤를 이어 왕이 되셨다.

ㅇ왕께서는 유리왕의 맏아들이신 데 말갈족 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소모되었으나 농사를 장려하고 민간의 사치품 사용 을 금했다.

ㅇ4대 신라왕 석탈해의 뒤를 이어 일성왕의 동생이 5대 파사 왕(婆娑王제위: 80-112)이 되고 파사왕의 아들 지마(祗摩) 가 6대왕(제위:112-134)이 되고 일성왕이 7대왕이 되고 일 성왕의 아들 아달라(阿達羅)가 8대왕이 되었다. (이 대목은 자칫 혼동하기 쉬우니 유념해야 한다)

∴4세 신라 일성왕(逸聖王)------------ 신라 7대왕

  └─→ 5세 아달라왕(阿達羅王)------- 신라 8대왕

∴4세 신라 파사왕(婆娑王)------------ 신라 5대왕

  └─→ 5세 지마왕(祗摩王)----------- 신라 6대왕

* 파사왕(婆娑王): 휘(諱)는 검(檢)이시다. 신라 4대 석탈해왕의 뒤를 이어 신라 5대왕이 되었다. 서기 80년-112년까지 재위했으며 능은 경주 5능에 있다. 왕비는 김씨와 석씨며 김씨는 사성왕후(史省王后)인데 갈문왕(葛文王) 허루(許屢)의 여식(女息)으로 1남 1여를 두었다. 한편 왕비 석씨의 능은 동산(東 山)에 자좌(子坐)이다.

       * 지마왕(祗摩王) : 파사왕의 아들로 시조왕 5세이며 신라 제6대왕으로 서기 112년- 134년까지 재위 했다. 왕릉은 국도(國都)남쪽 10리 포석정(鮑石亭) 건지동(乾芝洞)에 을좌(乙坐)임. 왕비는 김씨며 애례왕후(愛禮王后)인데 갈문왕 마제(摩帝)의 따님이다. 능 은 영산땅 자좌(子坐)이다.

              * 남 1 : 지마왕의 장자로 휘(諱)는 이비(伊非) 또는 이칠(伊漆)이며 갈문왕(葛文王)                        에 추봉되었다.

              * 남 2 : 지마왕의 차남으로 갈문왕(葛文王)에 추봉되었고 배(配)는 변한국(卞韓國)                        천인(天人) 김씨, 대아손(大阿飱) 유(儒)의 따님이다.

              *공주 1 : 지마왕의 딸로 대아손(大阿飱) 석양을(昔良乙)과 혼인 함.

              *공주 2 : 지마왕의 딸로 좌익위 대장군(左翊衛 大將軍) 김사의(金思義)와 혼인 함.

      * 공주: 파사왕의 딸로 김 허명(金虛明)에게 출가함. 김허명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준하는 벼슬을 함

* 공주 1 : 석 마복(昔摩福)에 출가하였다. 마복은 사벌군(沙伐軍) 벼슬을 함.

* 공주 2 : 석 탈문(昔脫文)에 출가하였다. 탈문은 진골(眞骨)이요 관위가 4등급인 파진찬(波珍瑗) 벼슬을 함.

⑤ 역사(歷史)

ㅇ제위 5 년째인 서기138년(戊寅) 2월에 정사당(政事黨)을 금성에 설치 하고 7월에는 알천서쪽에서 군비 검열을 실시하였다.

10월에는 북변(北邊)을 순행하여 친히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ㅇ제위 6 년째인 서기139년(己卯) 7월에 서리가 내려 콩이 모두 상하고 8월에 말갈이 쳐들어와 백성과 재물을 약탈해 갔는데10월에 또 침입 하였으나 우뢰가 심하게 울리어 적들은 그만 퇴주 하였다.

ㅇ제위 13년째인 서기146년(丙戌) 10월에 압독(押督)이 모반함으로 이를 토벌하고 그 무리들 남쪽지방으로 옮겼다.

ㅇ제위 20년째인 서기153년(癸巳) 10월에는 궁성문에 화재가 있었고 혜 성이 나타났다.

 5 世

 

신 라  아 달 라 왕

新 羅  阿 達 羅 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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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휘(諱) :확인되지 않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탄생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24년경으로 추정하며 제위 31 년째인 184년(甲子) 3월에 돌아가셨는데 한나라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의 일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왕비는 석씨(昔氏)이시며 왕의 능은 경주남쪽 15리 배일산 (拜日山)에 묘좌(卯坐)로 모시고 왕비는 금서문(金西問)밖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8대왕(제위:154-184) 이시고 왕호는 이사금(尼師今) 이신데 즉위 원년인 154년은 한나라 환제(桓帝) 영흥(永 興)2년 갑오(甲午)년이다.

ㅇ왕은 일성왕의 장자로 키가 7척이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용 모가 기이하였다.

ㅇ박씨왕은 일단 여기서 중단되고 728년 후 53대 신덕왕으로 이어져 55대 경애왕까지 계속된다. 아달라왕의 뒤를 석씨 벌휴왕이 이었고 먼 후일 효공왕(김씨)의 뒤를 박씨인 신덕왕이 이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초기 기록에 아달라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위가 석씨로 넘어갔다고 했다가 후기 기록에 신덕왕이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말했다.

김부식의 역사기록에 차질이 있음을 밝혀 둔다.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어서 석씨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父<乂兼>[一云<銳謙>.], 事<定康大王>爲大阿湌. 母, <貞和>夫人. 妃<金>氏, <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 卽位.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다. 그는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元年, 五月, 追尊考爲<宣聖大王>, 母爲<貞和太后>, 妃爲<義成王后>, 立子<昇英>爲王太子. 拜伊湌<繼康>爲上大等.

원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⑤ 역사(歷史)

ㅇ이때는 시기적으로 중국의 후한(後漢)말기다. 삼국지 연의에 유명한 유비, 조조, 손권등이 등장하여 쟁패전을 벌려 관우, 장비, 조자룡, 재 갈량, 여몽, 주유, 노숙, 하후돈, 원소, 원술, 유표, 공손찬, 여포, 마초

등 수 백명의 영웅, 걸사들이 출몰하는 시대다.

ㅇ한반도 역시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 잦았다. 왕께서는 즉위 후 감물 (甘物), 마산(馬山) 두 현을 설치하고 죽령(竹嶺)등의 도로를 개설하며 내치에 힘 쓰셨다.

ㅇ제위 12년째인 서기 165년(乙巳)에 아찬(阿粲)벼슬을 하던 길선(吉宣) 이 모반하여 백제로 도망가자 그 송환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군사를 일으켜 백제에 쳐들어갔다. 백제는 성을 굳게 닫고 싸우지 않 았으며 아군 또한 군량이 다하여 철군하였다.

ㅇ제위 20년째인 서기 173년(癸丑)에는 왜국의 여왕 히미꼬(卑彌呼)와 사신을 교환하였다.  

6 世

 

갈문왕

葛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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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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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휘(諱) : 벽방(碧芳) 이시다.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탄생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54년경으로 추정하며 신라 제 9대왕 벌휴왕(伐休王) 원년인 서기 184년(甲子)에 돌아가셨 다. [ 부왕 아달라왕이 돌아간 해와 같은데 일찍 돌아가셨 다 ]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김씨이시며 왕의묘는 금서문(金西門)밖에 자좌(子 坐)로 모셨고 부인 김씨도 동원(同原)에 자좌(子坐)로 모셨 다.

④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갈문왕은 신라시대에 왕이 근친(近親)에게 주던 봉작(封爵) 인데 혈통을 달리하여 왕을 이은 왕의 생부나 장인 등에게 추봉(追封)하던 것으로 조선시대 대원군, 부원군과 흡사하 다. 벽방(碧芳)의 사촌동생 이칠(伊漆)도 갈문왕에 추봉 되 었다. 여기서 벽방(碧芳)께 갈문왕을 추봉한 왕은 신라 제 9대왕으로 184년에서 196년까지 재위한 벌휴왕(伐休王)이 다.

ㅇ벌휴왕은 석씨(昔)인데 박씨를 아내로 맞은 석탈해의 손자 임으로 벽방께 갈문왕을 추봉한 것이다.

왕은 벌휴왕 원년(184)에 돌아 가셨으니 부왕 아달라왕이 돌아가신 해이고 갈문왕에 봉한지 얼마 안되어서다.

* 공주 1 : 신라 10대 석씨 나해왕(奈解王)비다. 나해왕의 휘(諱)는 엽(燁)인데 신라 9대 벌휴왕(伐休王)의 손자다. 나해왕은 아버지 석 이매(昔伊買)를 추존 하여 헌성왕(憲聖王)에 봉하였다.

⑤역사(歷史) : 5세 아달라왕과 중복으로 생략함.

  7 世

 

무    영
武    英

-

 아    도

 阿   道

 

 

①휘(諱):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80년-240년 사이로 추정한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이씨이시며 묘는 동원(同園)에 자좌(子坐)로 모셨 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0대 나해왕(奈解王:석씨,196-230년) 때 전산군(前山 君)을 지내셨다.

* 아도(阿道) : 갈문왕(葛文王)에 추봉되었다.

⑤역사(歷史

ㅇ197년 고구려는 고국천왕(故國天王)이 죽고 10대 산상왕(山上王)이 즉 위하여 이듬해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ㅇ199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고 가락국(駕洛國) 에서는 2대 거등왕(居登王)이 즉위했다.

ㅇ203년 말갈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고 고구려의 국상 을파소(乙巴 素)가 죽었으며214년, 백제 구수왕(仇首王)이 신라 요차성(腰車城)을 치고 신라는 백제 사현성(沙峴城)을 쳤고 218년, 222 년, 224년등 양

국은 자주 싸웠다.

ㅇ한편, 이 시절은 삼국지 연의에서 유명한 유비, 조조, 손권 등이 중원 에서 쟁패전을 하던 때다. 184년 황건적 난이 일어 난 이래 196 조조 (曹操)가 한나라 황제를 모시고 수도를 허도로 옴긴 후 208년에 조조 의 80만 대병이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 3만여 명에게 적벽의 결전에서 대패하여 달아났다.

220년에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獻帝)를 폐하고 위 (魏)나라 황제가 되었으며 221년에는 유비(劉備)가 촉한(蜀漢)의 황제 를 칭했고 222년에는 오(吳)의 손권(孫權)이 왕이라 칭함으로서 중원 은 3국이 정립하여 천하통일을 위한 쟁패전의 불길은 거세어져만 갔 다.

  8 世

 

판     득

判     得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05년 - 275년 사이로 추정한 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金씨이시며 묘는 전산동원(前山同園)에 자좌(子坐) 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1대 조분왕(助賁王:230- 247년) 때 조리군(朝里君)을 지내셨다.

⑤역 사 ( 歷 史 )

ㅇ231년 감문국(甘文國)이 멸망하고 238년 고구려(동천왕12년)가 위(魏) 의 사마의를 도와 요동태수 공손연을 격파 하였다.

ㅇ246년 위의 유주자사로 있던 관구검(관丘儉)이 고구려(동천왕18년) 환 도성을 치고 247년 고구려 는 평양성를 쌓았다.

  9 世

 

광     흠

光     欽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225년 - 295년 사이로 추정한 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는 석(昔)씨이시며 묘는 전산동원(前山同園)에 자좌(子 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2대 점해왕(沾海王:석씨,247-261년) 때 정후(正候)이 며 13대 미추왕(味鄒王)때 대탄군(大誕君)이시다.

⑤ 역 사 ( 歷 史 )

ㅇ249년 7월에 남당(南堂),즉 정청(政廳)을 지었고 251년 정월에 왕이 처음으로 정사를 남당에서 청취하였는데 청빈, 강직한 부도(夫道)를 아찬(阿瑗)으로 삼아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

  10 世

 

미     일

美     一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250년 - 31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가락김씨(駕洛金氏)이시며 묘는 전산동원(前 山同園)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김씨,261-284년)때 도령위(都領位) 이시다.

ㅇ신라 14대 유예왕(儒禮王:석씨 284-298년)때에도 생존하신 것으로 사료되는데 유예왕 원년은 중국 진나라(晉)나라 무 제(武帝) 태강(泰康)5년에 해당된다.

역 사 ( 歷 史 )

ㅇ266년에는 백제(고이왕 33년)가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쳤고 285년 에 선비족의 모용암(慕容庵)이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 慮)가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도주하였다.

ㅇ이때 중국에서는 263년에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이 위(魏)에게 멸망 하고 265년엔 사마염(司馬炎)이 위(魏)의 황제를 폐하고 진(晋)왕조를 세웠다. 280년에는 손권이 세운 오나라가 진(晋)에게 멸망함으로서 위 (魏)를 이은 진(晋)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98년간의 쟁패전을 마감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즐겨 읽는 소설 삼국지연의(나관중 작)가 서기 184년 후한 말 황건적이 일어난 해부터 서기 280년까지를 기록한 역 사소설인데 꼭 98년간의 드라마인 것이다.

  11 世

 

내    물

乃     物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285년 - 360년 사이로 추정한 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정씨(丁),석씨(昔)이시며 묘는 전산동원(前山 同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5대 기림왕(基臨王:석씨,298-310년)때 수도후(水道候) 이시고 16대 흘해왕(訖解王310-356년)때를 지나 신라17대 내물왕(奈物王:김씨.356-402년)때 도후사(到候司)이시다.

역 사 ( 歷 史 )

ㅇ302년 고구려(미천왕3년)가 현도군을 치고 백제가 낙랑군 서현을 쳐 서 병합했다.

ㅇ307년에는 국호를 서라벌(徐那伐)에서 신라(新羅)로 고쳤으며 313년 고구려(미천왕)가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이듬해는 대방군을 쳤다.

  12 世

 

상     건
相    建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320년 - 415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⑦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이씨와 김씨이시고 묘는 전산동원(前山同原) 에 자좌(子坐)로 모셨는데 김씨의 묘는 해목령(解目嶺)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8대 실성왕(實聖王:김씨.402-417년) 때 서산 후(胥山 候)이시다.

⑤역 사 ( 歷 史 )

ㅇ369년 9월 고구려가 치양(雉壤)에서 백제에게 패하고 372년에 중국의 전진왕(前秦王) 부견이 사자와 중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 불교를 전래하고 고구려에 태학(太學)을 세웠다.

ㅇ383년 중국에서는 강북에 위치한 전진(前秦)의 부견과 강남에 위치한 동진(東晋)의 안석(安石)이 비수에서 싸워 부견이 지자 요장)이 부견 을 해하고 후진(後秦)을 세웠다

ㅇ405년에 왜병이 신라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410년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64 성 1,400 촌을 얻었으며 413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죽고 장수왕이 즉위하였다.

  13 世

 

인    

仁     燁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355년 - 43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김씨와 추씨(秋)이신데 공(公)과 김씨의 묘는 낭산(浪山)에 축좌(丑坐)로 모시고 추씨는 전산동원(前山同 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김씨.417-458년)때 대천군(大川君) 이시다. 부인 김씨는 원래 9남을 낳았으나 8남은 계통을 잃 어버리고 1남만 전(傳)한다.

역 사 ( 歷 史 )

ㅇ눌지왕은 고구려에 불모로 갔다가 돌아와 417년 5월에 실성왕을 죽이 고 왕이 되었다. 눌지왕 때부터 21대 소지왕(炤知王)때까지 왕호를 이 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칭했다.

ㅇ439년 중국에서는 그 혼란하고 어수선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는데 남조(南朝)는 170년 동안 오- 동진-송(宋) -제(齊) - 양(梁)- 진(陳)으 로 왕조가 교체되고 화북에서는 5호 16국을 거쳐 북위(北魏)가 통일 하였다.

ㅇ455년 9월 백제 비류왕 죽고 21대 개로왕이 즉위했으며 10월엔 고구 려가 백제를 치자 신라가 백제를 구하고 고구려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14 世

 

     보      

啓    輔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390년 - 485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산서조씨(山西趙氏)와 석씨이신데 묘는 역시 전산동원(前山同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20대 자비왕(慈悲王:金氏,458-479)때 대사도(大司徒)벼 슬을 하시고 21대 소지왕(炤知王:479-500)때는 태호가(太湖 邊)에서 귀양살이(謫居)를 하셨다.

*대사도(大司徒) : 조선시대 호조판서나 지금 재경부장관(財經部長官) 격인 관직으로 신라 초기 17등급 관직 중 최고인 1품관직으로 이벌 찬, 각간(角干)급이 아닌가 여겨진다. 원래 중국 주나라 때부터 내려 오던 관명(官名)인데 전한(前漢) 때 당초 사도인 것을 대사도로 개칭 했고 호구(戶口), 전토(田土), 재화(財貨),교육(敎育)을 관장했다고 전 하며 우리 나라 고려 때 비로소 관명이 등장하는데 태위(太尉), 사공 (司空)과 더불어 3공의 하나로 정1품 벼슬이었다.

역 사 ( 歷 史 )

ㅇ자비왕 원년(458 戊戌)은 송나라 효무제(孝武帝) 대명, (大明) 2년이 다.

ㅇ469년 신라가 서울의 행정구역인 방(坊)과 이(里)의 명칭을 정했다. 475년 고구려가 백제서울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왕 개로(蓋鹵)를 죽 였다. 백제는 문주왕이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했다.

ㅇ479년 신라 백결(百結)선생이 대악(대樂)을 지었으며, 494년 1월에는 부여가 고구려에 항복하고 7월에는 살수에서 신라가 고구려에 대패하

자 백제가 구원병을 보냈다.

  15 世

 

 명      신
明     信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430년 - 45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강씨(康氏)와 김씨이신 데 강씨는 낭산에 자 좌(子坐)로 모시고, 김씨는 동산(東山)에 해좌(亥坐)로 모셨 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22대 지증왕(智證王:金氏,500-514)때 상조(上條) 벼슬과 23대 법흥왕(法興王:金氏514-540)때 수후(水候) 벼슬을 하 셨다.

⑤역 사 ( 歷 史 )

ㅇ신라에서는 임금의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 렀는데 지증왕부터 왕이라 불렀다.

ㅇ법흥왕 원년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천감(天監) 13년인데 이 당시 중국은 여러 나라가 5호 16국으로 난립하여 어수선했다가 534년부터 는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ㅇ502년 2월 신라 순장법(殉葬法)을 금하고 우경법(牛耕法)을 썼으며 11 월에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ㅇ520년에는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527 년에는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16 世

 

정     환

貞     環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470년 - 550년 사이로 추정한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추씨(秋氏)이시며 묘는 낭산동원(浪山東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24대 진흥왕(眞興王:金氏,540-576)때 낭후(浪候) 벼슬을 하셨다.

⑤역 사 ( 歷 史 )

ㅇ541년(辛酉) 신라가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하고 544년 (甲子)에 흥륜사(興輪寺)를 이룩하고 545년에는 거칠부(居柒夫)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수찬(修撰)케 하였다.

ㅇ552년(壬申) 신라가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으로 하여금 우 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ㅇ554년(甲戌)에 백제의 부흥을 위해 심혈을 기울던 성왕(聖王)이 신라 의 관산성(管山城)을 치다가 전사하였다.

ㅇ555년(乙亥)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봉강(捧疆)을 척정(拓 定)했다.

 17 世

 

로     겸

露     兼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510년 - 60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문백김씨(汶払金氏)이며 묘는 자좌(子坐)인데 위치는 불명(동산이나 낭산으로 추측됨)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25대 진지왕(眞智王:金氏,576-579)때 낭군(浪君)을 하시 고 26대 진평왕(眞平王:金氏,579-632)때 은일군(隱逸君)을 하셨다.

⑤역 사 ( 歷 史 )

ㅇ서기 581년(辛丑)은 진평왕 3년인데 중국 북주(北周)의 양견(楊堅)이 북주를 멸하고 수(隨)를 세우더니 589년에 남조와 진(陳)을 멸하여 중 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ㅇ서기 610년(庚午) 고구려의 중 담징(曇徵)이 일본에 건너 가 금당벽화 를 그렸고 611년(辛未)에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으며 612 년(壬申)에 수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살수(薩水)에서 섬멸 당했다. 그후 2년에 걸 쳐 수는 고구려를 정벌했으나 실패하고 그로 인한 국력 낭비로 패망 의 길을 걸어 수의 양제는 결국 이연에게 패하였고 618년(戊寅)에 이 연이 수의 공제로부터 제위를 선양 받아 당(唐)을 세우니 수는 멸망 하고 이후 907년까지 중국은 천하 통일 상태에 있게 된다.

  18 世

 

       남       선
       楠       善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560년 - 65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산서이씨(山西李氏)이시며 묘는 자좌(子坐)로 모셨는데 위치는 불명이다.(동산이나 낭산으로 추측됨)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金氏, 632-647)때 낭후(浪候) 를 하시고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金氏, 647-654)때 는 거산대군(擧山大君)을 하셨다.

역 사 ( 歷 史 )

ㅇ선덕왕 원년(632년)은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6년의 일이다. 수 백년간 전란으로 어수선했던 중국이 당 태종에 이르러 안정되었다.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꽃 씨를 보냈는데 여왕은 그 모란꽃씨를 심어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을 것을 미리 알았고 당태종은 그러한 꽃 씨를 보냄으로서 왕의 후사가 없을 것을 예견한 일화는 유명하다.

ㅇ서기 641년(辛丑) 백제 의자왕이 즉위하고 642년(壬寅) 고구려 연개소 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를 세웠으며 644년(甲辰)에 당나라가 고 구려를 침입했으나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패하였으며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철군한 후 죽었다. [중국사에는 당 태종이 양만춘을 칭찬하여 비단 100필을 주고 갔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오류다]

  19 世

 

금      산

金     山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590년 - 67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포주이씨(浦州李氏)이시며 묘는 낭산(浪山)에 축좌(丑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29대 무열왕(武烈王:金氏,654-661)때 예시군(禮始君)을 하시고 30대 문무왕(文武王:金氏,661-681)때 승조 (升條)벼 슬을 하셨다.

역 사 ( 歷 史 )

ㅇ이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다.

ㅇ서기 660년(庚申)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끄러 들여 백제를 치는데 황 산벌에서 계백(階伯)장군을 격파한 신라군이 동에서 쳐들어오고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황해를 건너 금강으로 쳐들어와 도성(사비성)을 포 위 공격하니 의자왕과 태자가 항복하고 당나라에 압송됐는데 이로서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한편 당에서는 이해 그 유명한 여자황제 측 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하게 된다.

ㅇ한편 고구려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건과 남산이 권력 다 툼을 하는 사이에 668년(戊辰)에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쳤다. 그해 9월 평양성이 함락되니 보장왕은 항복하였으며 여기서 고구려 또한 멸망하게 된다.

ㅇ신라삼국통일이 민족의 통합은 가져왔으나 반면에 우리 민족이 광활 한 대륙무대를 버리고 한반도에 안주하여 약소 국가로 전락하는 계기 가 되었다.

  20 世

 

응      찬

應     燦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620년 - 71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문씨(文氏)이시며 묘는 추산 (秋山)에 축좌(丑 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31대 신문왕(神文王:金氏,681-692)때 부산대군(府山大 君)을 지내시고 32대 효소왕(692- 702) 다음 33대 성덕왕 (聖德王:金氏 702-737)때는 발해군(渤海君)이 되셨다.

역사(歷史)

ㅇ고구려가 망한 후 699년(己亥)에 고구려의 유장(流將) 대조영이 고구 려 유민을 모아 발해를 세워 200년간 지속되면서 해동성국을 이루었 으나 신라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21 世

 

덕       흥

德       興

 

 

①휘(諱) : 상동(上同)                        <top>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660년 - 75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연산조씨(延山趙氏)이시며 묘는 추산(秋山)에 축좌(丑坐)로 모셨다.

④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34대 효성왕(孝成王:金氏,737-742)때 혜후(惠候)을 지내 시고 35대 경덕왕(景德王: 金氏,742-765)때는 안정대군(安 定大君)이 되셨다.

역 사 ( 歷 史 )

ㅇ효성왕 원년은 당나라 현종(玄宗)개원(開元)25년이다.

ㅇ751년(辛卯)에는 신라의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755년(乙未) 에는 당나라의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을 함락하였고 당 현종은 양귀비와 더불어 피난길에 올랐으며 756년(丙申)에 발해가 도읍을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에 옮겼고 이해 당나라 현종의 비 양귀비의 오라버니 양국충 에게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반란의 기미를 보이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양귀비를 목매 죽였다. 또한 당의 현종이 퇴위하고 숙종이 즉위했으며 이듬해 안록산의 난은 평정되었다.

  22 世

 

대      령

大      寧

 

 

①휘(諱) : 상동(上同)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700년 - 780년 사이로 추정한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단주이씨(丹州李氏)이시고 묘는 낙산동(洛山 洞) 동원(同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36대 혜공왕(惠恭王:金氏,775-780)때 평후(萍候)를 지내 시고 37대 선덕왕 (宣德王 :金氏,780-785)때는 은일군(隱逸 君)이 되셨다. 배(配) 이씨는 3남을 두셨다.

역 사 ( 歷 史 )

ㅇ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 위했는데 이때부터 통일신라는 융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게 되며 그가 하대의 첫 왕이 된다.

ㅇ이후 통일신라 멸망까지 155년 동안 20여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하극 상에 의한 왕위 쟁탈전이 극심했고 1년 미만의 왕도 4명이나 되었다.

23 世

 

이    순

尼   淳

-

이  수

尼  秀

-

이   국

尼   國

 

 

휘(諱) : 상동(上同)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730년 - 80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정포최씨(汀浦崔氏)이시며 묘는 낙산동(洛山 洞)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38대 원성왕(元聖王:金氏,785-798)때 낭후(浪候)를 지내 시고 39대 소성왕 (昭聖王:金氏,798-800)때는 승후(升候)가 되셨다.

* 승후: 임금의 기거와 안부를 묻는 벼슬인데 종친이나 외척이 한다 고 되어있다.

* 이수(尼秀) : 소성왕(昭聖王)때 대사도(大司徒)벼슬을 했다. 배(配) 는 출산 김씨(出山金氏)이시고 묘는 원산동원(元山同原)에 자좌(子坐)다.   

                 * 대수(大守) : 이수(尼秀)의 아들로 애장왕(哀莊王: 김씨 800-809년)때 대사도(大司徒) 벼슬                          을 하셨다. 배위(配位)는 소곶홍씨(所串洪氏) 묘는 삼원산(三元山) 자좌(子坐)이다.

 * 이국(尼國) : 소성왕(昭聖王)때 담대후(淡大候)를 지내셨다. 배(配)는 추라이씨(秋蘿 李氏)이시고 묘는 원산동원(元山同原)에 자좌(子坐)이다.

역 사 ( 歷 史 ) : 생략

  24 世

 

융    금

隆    劒

-    

 

 

 

휘(諱) : 상동(上同)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760년 - 84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정포최씨(汀浦崔氏)이며 묘는 낙산동(洛山洞) 동원(同原)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41대 헌덕왕(憲德王:金氏,809-826)때 승조(升條)가 되시 고 42대 흥덕왕 (興德王: 金氏,826-836)때는 벽산군(碧山君) 이 되셨다.

역 사 ( 歷 史 ) : 생략

  25 世

 

지     곤

之    坤

-

    형    일

    亨    一

 

 

휘(諱) : 상동(上同)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780년 - 86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낙산김씨(洛山金氏)이시며 묘는 상동(上洞)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43대 희강왕(僖康王:金氏,836-838)때 조후(條候)가되시 고 44대 민애왕 (閔哀王 :金氏,838-839)때를 지나 45대 신 무왕(神武王: 金氏 839년)때 승조후(升條候)가 되시고 46 대 문성왕(文聖王 :金氏,839-857년)때 수포대군(水浦大君)이 되셨다.

* 형일(亨一) : 42대 흥덕왕(826-836)때 중무장(中武將)벼슬을 하시고 배(配) 는 월포이씨 (月浦李氏)이시며 묘는 불암사(佛岩寺)에 모셨다.

⑤ 역 사 ( 歷 史 )

ㅇ이때의 시대상황은 신라국운이 말기로 접어드는 때인데 사회가 어수 선하고 왕위가 하극상의 난에 의하여 자주 바뀌었다.

ㅇ이 무렵 장보고(張保皐)의 해상활약이 두드러졌는데 그는 흥덕왕 (826-836년)때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 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해(淸海 - 지금의 莞島)에 진을 치고 스스로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들을 완전 소탕, 해상권을 장악하였 다. 839년에는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옹립하여 감의군사(感義軍 使)가 되었으며 신무왕이 곧 죽고 46대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 (鎭海將軍)이 되었고 840년에는 일본과 당나라와 더불어 3각 무역 을 했다.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다 실패한 후 그의 세력을 겁 낸 조신들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는데 서기 846년이요 문성왕 8년(丙寅)의 일이다.

  26 世

 

성       순

成      順

 

 

휘(諱) : 상동(上同)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00년 - 880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이 분의 묘소와 배위는 불분명하여 기록할 수 없는데 안타 까운 일 이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47대 헌안왕(憲安王:金氏,857-861)을 지나 48대 경문왕 (景文王:金氏,861-875)때 조후(條候)를 하시고 49대 헌강왕 (憲康王: 金氏 875-886년)때 동산대군(東山大君)을 지내셨 다.

역 사 ( 歷 史 )

ㅇ당나라와 연대를 이쯤에서 비교하면 서기 861년은 경문왕 원년이요 신사(辛巳)년인데 당의 연호 의통(懿通) 2년에 해당하며 875년 헌강왕 원년은 을미(乙未)년인데 당의 희종(僖宗)때 연호 건부(乾符) 3년에 해당한다.

  27 世

 

추     신

秋    信

-

선   성  왕

宣   聖  王

 

 

          ↓                        <top> 

          ◎28세 희복(僖福)

          ◎28세 희천(僖川)

 

휘(諱): 예겸(乂兼)이시다.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20년 - 915년 사이로 추정한 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함흥이씨 (咸興李氏)며 정화태후(貞和太后)로 추존 되었고 묘는 월파정(月波亭)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대아찬(大阿찬) 벼슬을 하셨고 26세 성순(成順)의 둘째 아 들이시며 추신(秋信)의 동생이시다.

ㅇ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金氏,886-887년)과 51대 진성여왕 (眞聖女王 :金氏 887 - 897년) 을 지나 52대 효공왕 (孝恭 王 :金氏 897-912년)때 신영대군(神靈大君)이 되셨다.

ㅇ아들 경휘(景暉)가 왕위에 오르자 선성왕(宣聖王)으로 추존 (追尊)되셨다.

* 추신(秋信) : 정강왕(定康王886-897년)때 사현대군(思顯大君)을 지내셨는데 김씨 원년이요, 중국 희종(僖宗) 2년이다.

                  * 희복(僖福) : 추신의  큰아들로 효공왕(897-912년)때 낭후(浪侯)를 하셨다. 배위(배위)는 김씨                                        요 묘는 낙산동(洛山洞)이다.

                  * 희천(僖川) : 추신의 작은 아들로 역시 효공왕(897-912년)때 낭후(浪侯)를 하셨다. 배위(배위)                                         역시 김씨요, 묘는 낙산동(洛山洞)이다.

 

역 사 ( 歷 史 ) : 생략

  28 世

 

신 라   신 덕 왕

新 羅   神 德 王

 

 

휘(諱) : 경휘(景暉)이시다.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탄생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40년으로 추정하며 917년(丁 丑) 7월에 붕어 하셨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왕비 김씨로 의성왕후(義城王后)이시며 왕릉 은 경주 남쪽 15리 배일산(拜日山)의 아달라왕릉과 같은 언 덕에 묘좌(卯坐)로 모셨고 왕비의 능은 영산(靈山)에 자좌 (子坐)로 모셨다.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53대왕(在位: 912-917)이시고 신라 제 8대 임금 아달라왕(阿達羅王)의 24세 원손(遠孫) 이시다.

ㅇ부인 김씨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딸이자 52대 효공왕의 여 동생인데 의성왕후(義城王后)에 올랐으며 왕비는 3남 1여를 낳으셨다.

ㅇ효공왕(제위 897-912년) 이 후사 없이 죽자 912년(壬申) 4 월에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서기 184년에 아달라왕을 끝으 로 왕권이 타성(他姓)으로 넘어간 후 728년만에 원시반본 (原始返本)하여 박씨가 왕위를 다시 계승하게 됐는데 제위 6년만인 917년(丁丑) 7월에 붕어 하셨다.

ㅇ밀성박씨 습독공파세보에는 신덕왕비가 신라 52대 효공왕 의 딸로 되어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ㅇ8대 아달라왕에서 중단된 박씨왕은 728년 후 53대 신덕왕으로 이어져 55대 경애왕까지 계속된다. 아달라왕의 뒤를 석씨 벌휴왕이 이었고 먼 후일 효공왕(김씨)의 뒤를 박씨인 신덕왕이 이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초기 기록에 아달라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위가 석씨로 넘어갔다고 했다가 후기 기록에 신덕왕이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말했다.

김부식의 역사기록에 차질이 있음을 밝혀 둔다.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어서 석씨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父<乂兼>[一云<銳謙>.], 事<定康大王>爲大阿湌. 母, <貞和>夫人. 妃<金>氏, <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 卽位.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다. 그는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元年, 五月, 追尊考爲<宣聖大王>, 母爲<貞和太后>, 妃爲<義成王后>, 立子<昇英>爲王太子. 拜伊湌<繼康>爲上大等.

원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역 사 ( 歷 史 )

ㅇ이때는 신라국운이 크게 쇠퇴하여 회생이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으 며 군웅이 할거하여 후삼국의 틀이 잡혀가던 시기다. 이 무렵 역사무 대에서 활약했던 주인공들을 언급함과 더불어 시대상황을 잠깐 그려 보고자 한다.

* 한반도

통일신라의 사회적 안정과 전제적 관료제는 귀족세력의 대두를 유발 하였고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780년에 혜공왕을 살해 하 고 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신라 하대(下代)의 첫 왕이 된 이래 155년간 왕위의 쟁탈전이 격심하여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왕권은 불안정하여 귀족 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 사회적 혼란 이 가중되었으며 급기야는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궁예 (弓裔) : 양길의 부하로 있던 궁예(弓裔)는 892년 양길을 타 도하고 송악(松 岳)을 근거로 898년(신라 효공왕 2년)에 자립하여 '후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

901년에는 국호를 마진(摩辰),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방탕 안일 한 생활과 폭정을 하다가 부하들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던 중 평강(平康)에서 피살되었다.

-왕건 (王建) : 877년에 나서 943년에 돌아갔다. 태봉의 왕인 궁예 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경명왕 2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高麗)의 시조가 되어 후 삼국을 통일하였다.

-견훤 (甄萱) : 성은 이(李)요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892년 (진성여왕 6년)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여러 성을 공략하여 900년(효공왕 4년)완산(完山- 全州)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세워 신라를 압박하였다. 후에 왕위를 4자인 금강(金岡)에게 물려주자 큰아들 신검(神劍)이 모반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견훤은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순, 왕건과 함께 신검 을 공격하니 936년 신검은 항복하고 견훤은 황산의 불사(佛舍)에 서 등창으로 죽었다.

-발해멸망 : 916년에 만주지역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글안 (契丹)을 세워 점차 강성하여져 926년에는 225년간 번성 해오던 발해를 침입하여 멸하니 14대 애왕(哀王) 26년(丙戌)의 일이었다.

* 중국

동방문화를 집대성하여 번성하던 당나라가 875년 황소(黃巢)의 난을 계기로 국운이 급격히 기우러 907년 주전충(朱全忠)이 당(唐)을 멸하 고 후량(後梁)을 세워 태조가 된 후 중원에는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후주(後周)의 다섯 나라가 들어서고 주변의 10국이 할거하 여 혼란하였다. 960년에 후주(後周)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이 송 (宋)나라를 세운 이래 997년에 가서야 90년만에 안정되었는데 이때를 5대 10국(五代十國)시대라 칭한다.

29 世

 

신라 경명왕

新羅 景明王

-

경애왕

景哀王

-

효  염

孝  廉

-

공  주

公  主

휘(諱) : 승영(昇英)이시다.                    <top> 

생몰년대(生沒年代)

ㅇ탄생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60년으로 추정하며 924년에 붕어 하셨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왕비 석(昔)씨이시며 왕의 능은 국도(國都) 남15리(南十五里)에 있는 배일산(拜日山)에 묘좌(卯坐)로 모 시고 왕비의 능은 서화산(西火山)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ㅇ배일산(拜日山)을 3능이라 부르는데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능과 53대 신덕왕 능과 경명왕 능이 함께 있어서 그렇다.

<삼릉>

왕위(王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 54대 왕(在位: 917-924)이시다.

ㅇ917년( 宋帝,貞明 3년, 丁丑)에 즉위하시어 924년(後唐의 莊 宗, 同光 2년 甲申)에 돌아가시니 재위 8년이다. 왕비 석 (昔)씨는 9명의 왕자를 낳으셨다.

ㅇ경명왕은 후삼국이 정립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 즉위하여 즉위 2년째 되던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이를 기존 국가로 인정하여 사신을 보내 수호를 하였다.

쇠잔한 국운을 건지려고 많은 노력을 하며 중원의 후당(後 唐)에 구원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견훤의 압박이 심해지자 고려 왕건의 도움으로 견훤의 대야 성 침공을 격퇴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지만 끝내 국세를 회복하지 못한 체 돌아가 니 동생 위응(魏膺)이 55대 왕에 오르니 바로 경애왕 이다.

◎왕께서는 9명의 왕자를 두셨는데 밀성박씨 습독공파세보 (密城朴氏 習讀公派世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국사기(東國史記)에 경명왕이 8공자를 두었다고 했는데 세보(世 譜)에는 9 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8번째까지의 公子는 대군(大君)에 봉(封)하여 져서 역사에 나타나지만 아홉째 아들은 은 퇴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연고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 9男은 交舜) 동국사기(東國史記)에 (9남 교순이) 대(代)를 잇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저술(无嗣之文誤著)이요 그전의 동사(東史)인 동국총목 (東國總目)엔 대를 잇지 못했다는 기록이 없다.

즉 마지막 왕자 교순께서는 후손을 이어 갔다는 것인데  교순의 후손은 울산(蔚山) 등으로 관적(貫籍)되어 나갔다.

○경애왕(景哀王)- 신라 55대왕(재위:924-927년, 4년간)이시며 경명왕 의 동생이시고 휘(諱)는 위응(魏膺)이시다. 능은 배일산(拜日山) 3왕 능의 왼쪽 기슭에 묘좌(卯坐)로 모셨고(三王陵左麓卯坐) 왕비는 석 (昔)씨다. 습독공파 박씨세보에 이르기를 경순왕이 김봉휴(金封休)를 고려에 보내 항복한 것으로 기록하고 한편 효염은 견훤의 난 때(927 년) 재신(宰臣) 이영경(李英景)과 포로가 되었기에 그 돌아간 곳을 알 수 없다고 하였고 공주는 대전문하시중(大轉問下侍中)인 석목(昔 穆)의 아들 석빈(昔彬)에게 출가 한 것으로 되어있다.

* 문하시중 : 고려 때 문하성의 최고관리로 종1품 관직

역 사 ( 歷 史 )

ㅇ경애왕은 917년(경명왕 1년) 이찬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된 후 신라 말기 국세가 쇠퇴한때 즉위하여 견훤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이찬: 2품 벼슬이며 상대등은 신라 최고관직이다.

ㅇ927년 10월( 중국 後唐 明宗, 天成 2년 丁亥)에 포석정(飽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취흥 할 때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ㅇ경주 포석정을 습격했던 견훤은 비빈(妃嬪)을 겁탈하는 등 갖은 만행 을 저지르고 퇴군(退軍)하니 왕비가 왕의 표제(表弟) 김부(金傅)를 신 라 56대 왕에 앉혔는데 이가 바로 경순왕(敬順王) 이다. [표제를 족제 (族弟)라고도 하는데 외사촌 동생을 말함]

ㅇ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국토가 줄며 민심이 고려로 향

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義)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 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절차를 밟 으니 재위 9 년이요 935년(중국 潞王,淸泰,2년, 乙未)이며 고려 태조 18년의 일이다.

ㅇ이로서 신라는 건국한지 56대 992년만에 사직을 닫았는데 박씨가 10 왕에 235년 간 통치하고 석씨가 8왕에 173년간 통치했으며 김씨가 38 왕에 584년간 통치하였다.

ㅇ후백제 견훤은 아들들의 권력다툼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하여 왕건과 더불어 오히려 아들을 타도하게 되니 후백제는 신라 가 망한 이듬해( 936년) 멸망했으며 왕건이 고려를 세운지 19년만에 한반도는 재통일을 보게 되었다.

30 世

 

밀성대군

密城大君

-

언성-언신-언립-언창-언화-언지-언의 -교순

彦成-彦信-彦立-彦昌-彦華-彦智-彦義 -交舜

○밀성대군(密城大君) 1 世                       <top> 

①휘(諱) : 언침(彦 )이시다. 다른 이름은 원생(元生)이라고도 한다.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880년 - 940년 사이에 생존 하신것으로 추정 해본다.

* 고려 초의 대군으로부터 고려말까지 계보의 생몰 년대를 알 수가 없으나 이하 대군으로부터 16대까지를 1대에 25년내지 45년으로 하여 생몰 년대를 추정하였다.

배위(配位)및 묘소(墓所)

ㅇ배위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신라 제 29대 경명왕이 9왕자를 두셨는데 그 중 첫 왕자 이시며 밀성군에 봉(封)하였음으로 밀성대군이라 칭한다.

<밀성(밀양)박씨의 본관 사용유래>

-신라 35대 경덕왕(서기742-765) 16년(757년)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칠때에 추화군을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밀주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을 두었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첫 왕자 박언침께서 밀성군에 봉해지셨음으로 우리의 본관조 밀성대군 후손은 지명을 따라 본을 밀성박씨로 정하였다. 그 후 밀성군의 명칭은 밀주군 - 밀성현 - 밀성군으로 변천했고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2년(1390)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그때부터 지명이 밀성에서 밀양으로 변경되었으므로 신지명인 밀양으로 쓰고 있는데 밀성박씨로 하든 또는 밀양박씨로 하든  다 같은 본관이다. *推火郡 - 현재 밀양시 내동 밀성재의 東齋가 추화재임

ㅇ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는 경주 숭덕전(崇德殿- 시조왕의 사당)에서 편찬한 보첩(譜牒)에 의거하며 경명왕이 대군을 봉한 밀성 고을은 지금의 밀양(密陽)이다.

밀양에 있는 영남루(嶺南樓)가 대군의 유적지라고 전해지며 그곳에 이궁대(離宮臺) 풍류현(風流峴) 세루정(洗陋亭)이 있었다는데 이궁(離宮)에서는 신라왕들이 거동하여 놀던 곳으로 신라의 문화행사가 행하여 졌다고 한다. 이궁대(離宮臺) 풍류현(風流峴) 세루정(洗陋亭)의 이름은 당시의 풍속과 민요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신라 전성기의 태평성대를 엿 보게 한다.

이 기록은 양촌집(陽村集)에 보이는데 이 책은 조선시대 권 근(權近)이 1672년(현종 13년 壬子)에 우리 나라 유사를 모 아 간행한 책이며 양촌은 권근의 호다.

ㅇ대군은 경명왕의 왕자로서 왕위를 이어가지 않고 밀성 고 을 하나를 받아 유유자적하며 산수를 즐겼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때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수긍 가는 면이 있다.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상태 에 있었으며 한반도는 후삼국이 정립하여 치열한 쟁패 전 으로 인해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쇠퇴해진 신라의 국운은 되살리기 어려웠으며 대군께서는 천명이 이미 신라를 떠나 있음을 간파 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견훤으로부터 당한 재앙 같은 것을 피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대군은 시류를 냉철히 잘 내다보시고 난세의 영웅이나 제왕보다는 차라리 은둔의 길을 택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 경덕단(景德壇)

대군의 능묘와 배위가 전해지지 않아서 후손들이 밀양군 하서면(下西面) 무안(武安) 마을에 대군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단(壇)이다. 경덕단 옆에 비(碑)도 세웠었는데 그 비 (碑)에는 경덕단을 세운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다.

-서기 1634년(조선 인조 12년 甲戌)의 일이다.

밀성대군의 외손 이유달(李惟達)이 밀성부사(密城府使)로 부임하여 대군의 본손(本孫)들과 향토 사림(士林)으로 더불어 밀양 영남루에서 제사를 올리고 이런 말을 했다. " 대군의 사자(祀字)를 세워 봉안하자는 의론이 대대로 발의 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홍문관 시독(侍讀)이신 해철거 선생(海徹居 先生)이 대중에게 맹세하여 말하되 '공덕있는 조상을 제사 올리지 않음은 불가하며 부조(父祖)들이 론(論)한 바를 이루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대군의 사자(祀字)를 세워야 한다는 뜻 임] 그후 을축년(乙 丑)  한겨울에 착공하여 정묘년(丁卯) 한 겨울에 기성을 마치자 단을 경덕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위의 년대는 을축(乙丑)은 →을해 (乙亥)로, 정묘(丁卯)는 → 정축(丁丑)으로 수정함이 옳다]

한편 습독공파세보에는 "이유달이 국담춘수씨와(菊潭春壽氏)와 현령들과 더불어 대군의 사당을 기공했으나 준공을 보지 못했고 다 만 제사시 축문에 대군의 성덕을 칭송하고 체연동근(체연同根)이 라고 하여 대군의 형제를 차례로 모셨다고 했다.[ 즉, 단은 세웠으나 사당은 세우지 못했다는 뜻이다]

* 원덕사(遠德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있다. 1922년(壬戌)에 8도의 후손들이 대군의 후예인 19중조를 배향 했다.

* 밀양의 역사문화

다음은 대군이 봉해진 밀성고을이 역사문화적으로 어떠한 곳인지 간단히 알아본다.

-밀양군(밀양시) : 경남 동북부에 있는 군으로서 원래 삼한 시대에 는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다. 신라 법흥왕때 병합된 후 밀성군으로 개칭되고 1390년(고려 공양왕 때) 밀양부가 되었으며 조선말 1896년 갑오경장으로 13도를 실시 할 때 밀양군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로 모직공업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며 1989년 1.1 밀양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2읍 9면 6동에 면적 은 799.3㎢요 인구는 131,000여 명이다.

<밀양시 상세연혁>(출처☞ 밀양시청 자료)

삼한시대
-변진 24개국 중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추정되고 변한의 땅으로 가락국에 속하였다.
신라시대
-지증왕 6년(505)에 “미리미동국”을 신라에 병합하여 “추화군”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밀성군”이라 하고 밀주의 관내에 소속시키면서 5개의 속현을 두었다
.
고려시대
-성종14년(995)에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할 때 경주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했으며, 밀성군의 격을 높여 “밀주군”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2군(창녕군, 청도군) 4현(현풍현, 계성현, 영산현, 풍각현)을 관하에 두었다.
-현종9년(1018) “밀성군사”로 칭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 조천의 반란으로 계림부에 속하다가 후에 “밀성현”으로 승격되었다.
-충렬왕11년(1285) “밀성군”으로 승격되었다.
-공양왕2년(1390)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태조 원년(1392) “밀성군”으로 칭하다 태조 3년(1394) “밀성부”로 다시 환원되었다.
-태종 원년(1401) “밀성군”으로 되었다가 태종 15년(1415) 주민의 호수를 기준하여 천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 “밀양 도호부”로 되었다.
-고종 32년(1895) 칙령 제98호에 의거 23부제 실시로 소지역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도이하의 부 · 목 · 군 · 현도 폐지되고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 때 “대구부 밀양군(시지역은 부내면)”으로 되었다.
-
고종 33년(1896) 칙령 제36호로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되었다.
근대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관제의 공포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가 공포되고 면제의 실시에 따라 1910년 10월 1일부로 “밀양군 밀양면”으로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면의 명칭 및 구역이 합병되어 12면을 두었다.
-
1931년 4월 1일 읍제 시행에 따라 부령 제103호로 대전, 순천, 안동등과 함께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63년 1월 1일 법령 제1177호로 삼랑진면이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66년 7월 15일 군조례 제103호로 삼랑진읍 “임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하남면이 “하남읍”으로 승격되었다.
-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로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시(6동 28통 316반)와 밀양군(2읍, 9면)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밀양시, 밀양군 통합으로 “도 · 농 복합형의 밀양시”(2읍, 9면, 6동)가 설치되었다.
-1998년 9월 21일 지방자치법 제4조 5항에 의거 인구 5,000명 미만 과소동 통합으로 “행정동 용활동을 내일동에 통합”(2읍, 9면, 5동)이 되었다.

-영남루(嶺南樓)

경북 월성에서 발원하여 경주 →청도 → 밀양 →낙동강으로 흐르는 96 km의 강이 있는데 이 강을 밀양강 이라고 한다. 이 강가의 절벽 에 장엄한 누각이 있어 보물 제147 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데 바로 유명한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이며 밀성 대군의 사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영남루는 정면 5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기둥이 높으면서 사이가 넓은 것이 특징이며 좌우 부속건 물과 연결되어 웅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밀양군 객사(客舍) 였던 밀양관의 부속건물 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건축물 이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밀양 영남루>

- 문화축제

밀양아리랑제 : 밀양부사의 외딸인 아랑이 젊은 관노(官奴)의 요구 를 뿌리치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여 " 아 랑, 아랑"하고 노래 부른데서 비롯되었는데 매년 5.16 - 20까지 열린다.

밀양백중놀이 : 백중날 노는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 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

밀양문화예술제 : 매년 10월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ㅇ밀성대군외 8 왕자들의 계파

─밀성대군(密城大君):휘(諱)는 언침(彦 ) : 오늘의 밀양박씨(密陽朴氏)다

─고양대군(高陽大君):휘(諱)는 언성(彦成) : 오늘의 고령박씨(高靈朴氏)다

─속함대군(速咸大君):휘(諱)는 언신(彦信) : 오늘의 함양박씨(咸陽朴氏)다 .     대군의 호칭을 일함대군(逸咸大君)으로  쓰는 문중도 있음.

─죽성대군(竹城大君):휘(諱)는 언립(彦立) : 오늘의 죽산박씨(竹山朴氏)다

─사벌대군(沙伐大君):휘(諱)는 언창(彦昌) : 오늘의 상주박씨(尙州朴氏)다

─완산대군(完山大君):휘(諱)는 언화(彦華) : 오늘의 전주박씨(全州朴氏)다

─강남대군(江南大君):휘(諱)는 언지(彦智) : 오늘의 순천박씨(順川朴氏)다

─월성대군(月城大君):휘(諱)는 언의(彦義) : 오늘의 경주박씨(慶州朴氏)다

─교 순(交 舜):고려때 국상공(國相公)이시다.

 

* 마지막 왕자 교순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싣는다.

<<습독공파 세보>>에 이르기를 .... [麗太祖三徵不起 定宗三顧草廬 拜 國相公 誰不顯 擧章譜 有諱 故刊行] 로 기록했다. 즉, "공은 고려 태조가 3번 (벼 슬길에 나오라고)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고려 정종(定宗 949-975)이 삼고(三顧:3번 찾음)의 예로 국상공(國相公) 벼슬을 주었다. 공이 비록 (사적에) 현저하지 않으나 거장보(擧章譜)에 공 (公)의 휘(諱)가 있어 간행한다" 라고 했다. 국상(國相)은 고려시대 정2품 벼슬로 고위직이다.

다른 문중의 자료에는 대군이 경애왕의 아들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 문중의 자료대로 하였다.  경명왕의 아들에 대하여 인터넷 자료마다 상이하다. 어떤 사이트는 8분이라 하고 혹은  이사이트 처럼 9분으로 게재하고 있다.  
즉 국상공 교순은 경명왕의 동생 경애왕의 첫째 왕자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직계인 경명왕은 8왕자와 1공주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문중을 포함해서 여러 자료에  국상공 교순을 경명왕의 9번째 왕자로 기록하고 있다. 홈 운영자도 아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실제 국상공의 후손이 있다고 하는바, 다른 문중의 기록을 여기에 게재하여 후일 고증하고자 한다.

* 경애왕 ---- 1왕자 금성대군 교순(金城大君 交舜)

                     2왕자 계림대군 입순(鷄林大君 立舜)

 

 

고려시대

  31 世

 


 

 

○밀성대군(密城大君) 2 世                       <top> 

휘(諱) : 상동(上同)

②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905년 -970 년 사이로 추정 하 며 신라 효공왕 - 고려4대 광종(光宗) 무렵으로 본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 태조(918 - 948년)때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 控都大將 軍) 이시다.

ㅇ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이 정립하여 전쟁이 계속되었고 특히 고려 태조 왕건 재위 초는 아직 국가 체제가 정비 되 지 못한 상태였는데 민족통합 내지는 융합정책을 배경으로 벼슬을 받으신 것이다.

ㅇ공(公)과 같은 분을 진무공신(鎭武功臣)이라 하는데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지가 오래지 않으니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 功 臣) 또는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이라고도 한다.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 고려때 관직은 문산계(文散 係)와 무산계(武散係)로 대별 되는데 이 벼슬은 문산계의 최고 관직 에 해당하며 서정을 총괄하는 상서. 문하성의 종 1품인 벽상 삼중 대광 평장사(壁上三重大匡平章事)와 같은 직위다.

*진무공신(鎭武功臣) : 진(鎭)을 진(振)으로도 쓴다.

공신의 종류는 많으며 조선 인조때 이괄의 난을 평정한 1품벼슬의 공신을 진무공신(振武功臣)이라 했다.

따라서 공의 벼슬도 평난(平亂)에 대한 공적으로 제수 된 듯 하다.

ㅇ공(公)의 묘소와 배위는 전하지 않지만 밀양 경덕단(景德 壇)에 배향(配享)되었고 사당(祀堂)은 추화산(秋火山)에 지 어 밀성주신(密城主神)으로 모셨다.

ㅇ고려말 문신이며 명문장가인 이재현 (李齊賢)이 저술한 책 에 공(公)의 기록이 보이는데 " 밀성박씨들의 파가 많지만 모두가 공(公)의 자손이다" 라고 했다 한다. [李益齋云 密 城之朴派 流甚蕃然原其本則皆出於公矣] 그의 호는 익재(益 齊)요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익재집"을 저술했다. ☞이재현 (1287년-1367년)

역 사 ( 歷 史 )

ㅇ이 시대 946년에 글안이 후진(後晉)을 멸하고 국호를 요(遼)라고 고치 는 등 강성해졌으며 고려 3대 정종은 947년에 광군사(光軍司)를 두고 30만의 광군을 선발하여 글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ㅇ중국에서는 960년에 후주(後周)의 절도사 조광윤이 송(宋)나라를 세우 고 태조라 칭했으며 962년에는 고려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32 世

 


 

 

○밀성대군(密城大君) 3 世                       <top> 

휘(諱) : 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930년 -990 년 사이로 추정 하 며 고려 태조13년- 6대 성종(成宗)9년 무렵으로 본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 초기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벼슬을 하셨으며 배위와 묘소는 전하지 않지만 밀양 경덕단에 배향 되었다.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 독포대장(督捕大將)과 같은데 독포사(督捕 使)는 반란군 등을 진압하기 위한 임시 군대조직의 수장이다.

ㅇ신라세보(新羅世譜)가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에 자세히 실 려 있고 고려조 세계에도 분명한 기록으로 실려 있는데 고 려 초부터는 계통이 거장보(擧章譜)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거장보의 유래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 거 장 보

-신라에서 고려조로 넘어오며 상하 500여년 동안 10대왕 세계 만 쓰고 시조왕계에 24세의 사적이 누락되어 있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시대가 요원하여 아는 이가 없어서 매양 한탄하였 다. 누군가 그것을 한탄 하다가 유래진장(留來珍藏)이란 책을 열람하면서 거기서 하나의 거장보(擧章譜)를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시조왕께서 즉위 51년째인 서기전 7년(甲戌) 9월에 개국공신 20인과함께 거장전(擧章殿)에서 만복연(萬福宴)을 개최한 사실의 기록이 있었으며

-또 하나는 시조왕의 6대손 정시(定是)라는 분이 계통을 다시 기록했는데 그것을 고려 2대 혜종(惠宗)이 가지고 있다가 후 손에게 전해 주었다.

혜종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며 신라 끝 왕인, 경순왕의 백부 억겸(億兼)의 외손이기에 신라 왕계인 박씨와 김씨 세계(世 系)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전해준 것이다.

-또 이러한 계통은 조선중기 문신이요 한학자인 이정구(李廷 龜1556-1635)의 가계(家系)에 소장되어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천 여 년이 넘게 내려온 박씨의 계통과 벼슬, 생졸(生卒), 배 위 및 묘소가 정확히 기록되어 알 수 있었고 이정구는 거기 에 서문을 지어 붙였으나 애석하게도 서문은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년보(年譜)에 전하며 외손개증(外孫改證)과 월성 김씨보(月城金氏譜)에도 분명한 기록으로 전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 천년 사이의 세계(世系), 휘함자위(諱銜字位), 생졸 (生卒), 배위(配位), 묘소(墓所)를 소연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 나 연구가 미흡하고 병화가 빈번하여 전하는 계통이 많지 않 아 심히 통탄할 일이라고 했다.

-대동보(大同譜)기록에 이를 한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전한다.

[此下譜牒失傳 譜宗分派皆不得接系 豈非吾宗之欠歟 按或云四 世或云二十四世 今不可攷]

(32세 난에 이르러) 이하에 보첩이 전하지 않아 계보의 갈려 나감이 모두 이어지지 않으니 이 어찌 우리 종파의 흠결이 아니리요. 살피건 데 혹은 4세가 실전 되었다고 하고 혹은 24세가 실전 되었다고 하나 지금에 이르러 가히 헤아려볼 수 없다.

* 이정구 : 조선 인조때 문신으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조선중 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월사(月沙)로 서 68권22책으로 되어있는 월사집을 발간했다. 그 책에는 시(詩), 강화(講話), 정문 (呈文), 계(啓), 의(議), 상량문(上樑文), 서(序), 기(記), 묘지, 교서 (敎書) ,표(表), 조천기사(朝天紀事), 소(疏), 교명문(敎命文)등이 실 려있다.

-대동보에는 공(公)의 2세 영정(永禎)→3세 기세(基世)→4세 시 주(施做)→5세 찬행(讚行)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빠져 있다. 76년 보에서부터 계통이 분명해 졌다.

역 사 ( 歷 史 )

ㅇ이 시대 979년에 송나라가 북한(北漢)을 멸하여 혼란스럽던 중국이 다시 통일되었으며 그 무렵 화약과 나침반이 발명되었는데 이 기술이 서양으로 넘어가서 의아스럽게도 서양의 열강들이 19세기말에 동양을 제압하는데 사용하게 된다.

ㅇ993년(성종12년)에 거란이 대병을 투입 고려를 침범하자 서희(徐熙)장 군이 중군사(中軍使)로서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령과 담판하여 고 려에 유리한 강화를 맺고 성보(城堡)를 쌓아 국토방위에 힘써 지금의 평북일대를 회복하였다.

ㅇ982년에는 고려에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1002년에는 글안이 사신 을 보내 자기나라 지도를 바쳤다.[ 고려와 주변국의 외교관계가 복잡 미묘함을 뜻한다]

33 世

 

영     정

永    楨

-

영희

永禧

-

영기

永基

-

영돌(영구)

永乭(永垢)

-

영지

永址

○밀성대군(密城大君) 4 世                       <top> 

휘(諱):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950년 -101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 4대 광종(光宗)1년-8대 현종(顯宗) 1년 무렵으로 본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 벼슬을 하셨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때 한림원(翰林院)의 정 4품 벼슬이다. 주 로 왕명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서 했다. 학사원→문한서 →사림원→예문춘추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때 모든 서정을 총괄하는 중서 문하성의 종 2품 벼슬이다.

ㅇ공(公)은 5형제인데 우리 세보에는 네분의 휘(諱)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박씨신라선원세계도(朴氏新羅璿 源世系圖)에는 나타나 있어서 여기에 기록한다.

*둘째 영희(永禧) : 공의 현손 양언(良彦)은 밀직부사(密直府使) 벼슬을 했다.

*세째 영기(永基) : 공의 현손 천익(天翊)은 판도판각(版圖判閣) 벼슬을 했다.

*네째 영돌(永乭 또는 永垢) : 공의 현손 을재(乙材)는 삼사좌윤(三 司左尹) 벼슬을 했다.

*다섯째 영지(永址) : 공의 현손 병국(秉國)은 벼슬이 없다.

위 양언, 천익, 을재 세분은 각 계파의 중조(中祖)로서 우리 파의 중 조 언상(彦祥)과 행(行)이 같고 원덕사(遠德祀)에 배향 되었다.

[ 우리 세보에는 시조왕 35세 박시주(朴施做)편에서 위 형제분들의 휘를 밝히지 않은 채 벼슬만 추상하였고 특히 다섯째는 밀성부원군 (密城府院君) 종우(從愚)파로 추정 했는데 오류라고 본다 ]

역 사 ( 歷 史 )

ㅇ이 시대 고려의 내치(內治)를 약술하면 4대 광종(949-975)은 노비안 검법, 과거제도, 공복제도 등을 실시했으며 5대 경종(975 - 981)은 토 지제도를 정착시켰는가 하면 6대 성종(981 - 997)은 유교적 정치사상

에 입각한 3성 6부의 지방관서를 시행했고 11대 문종(1048 - 1083)에 이르러 율령(律令), 관제(官制), 병제(兵制)를 완비하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34 世

 

기     세

基    世

 

 

○밀성대군(密城大君) 5 世                         <top> 

휘(諱):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970년 -103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 3대 광종(光宗) 21년- 8대 현종(顯宗) 21년 무렵으 로 본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합문지후(閤門祗侯)벼슬을 하셨다.

*합문지후(閤門祗侯): 합문(閤門)은 고려 때 조회(朝會)의 의례(儀禮) 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정3품 판사(判事)가 장(長)이고 공(公)은 그 관아의 정7품 벼슬인데 요즈음 의전비관과 같은 것이다.

ㅇ우리 습독공파세보에 공(公)은 5형재인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나머지 4형제는 휘(諱)가 전하지 않는다. (失傳 ?)

역 사 ( 歷 史 )

ㅇ서기 1010년에 또 글안의 침입이 있었고 고려에서는 사신을 보냈다. 1018년(현종9년)에 글안의 소배암(蘇排押)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 강 감찬(948 - 1031)장군이 흥화진(興化鎭)에서 성동(城東)의 큰물(大河) 을 막아놓고 매복해 있다가 거란군을 대패시켰으며 다시 돌아가는 거 란군을 구주 싸움에서 크게 무찔렀다.

ㅇ또한 강감찬 장군은 동양 천문학상 9성의 하나인 문곡성의 정기를 타

고 났다는 전설이 있다. 봉천동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성지다.

  35 世

 

시      주

施      做

 

 

○밀성대군(密城大君) 6 世                      <top> 

휘(諱):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990년 -105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 6대 성종(成宗) 9년-11대 문종(文宗) 4년 무렵으로 본다.

③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경주 최씨요 평장사(平章事)벼슬을 한 최겸 (崔謙)의 여식(女息)이시다.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평장사(平章事) : 고려때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보문각 대제(寶文閣 待制)를 지내셨다. 이부시랑(吏 部侍郞)벼슬을 하시다가 중국에 다녀오셔서 이부상서(吏部 尙書)를 하셨다.

*보문각 대제(寶文閣 大制) : 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아의 장(長)으로 정 3품 또는 종 3품이다. 당초 고려 문종때 동문 원(同文院)이던 것을 예종 11년(1116년) 보문각으로 고쳤다. 장(長) 다음 부(副)는 5품 등급으로 보했다. 지금의 국립도서관장 업무를 겸직한 격이다.

*이부시랑:고려때 관리의 인사를 총괄하는 이부의 정4품 벼슬이다.

*이부상서:고려때 관리의 인사를 총괄하는 이부의 정3품 벼슬이다.

ㅇ우리 세보에는 시조왕 35세 박시주(朴施做)편에서 5형제라 기록하고 형제분들의 휘를 밝히지 않은 채 벼슬만 추상하 였고 특히 다섯째는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종우(從愚)파 로 추정했는데 오류라고 본다]

⑤ 역 사 ( 歷 史 ) : 생략

 

  36 世

 

찬       행

讚      行

 

 

○밀성대군(密城大君) 7 世                  <top> 

① 휘(諱):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010년 -107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 8대 현종(顯宗) 1년-11대 문종(文宗)24년 무렵으로 본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중서 문하성(조선의 의정부)의 종2품 벼슬인 정당문 학(政黨文學)을 지내시고 종1품 벼슬인 검교 태전명하시중 (檢 校太傳明河侍中) 벼슬을 하셨는데 사적은 신라사와 명 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당문학 : 고려와 조선초기 종2품 관직이다. 고려 때는 내사문하성 소속이며 조선 초에는 문화부 소속이었다.

*검교 태전명하시중(檢校太傳明河侍中) : 여기서 검교 (檢校)란 관작 앞에 붙는 이름으로 임명대기 상태 또는 직위는 있으나 실제 사무는 보지 않는 벼슬자리를 뜻하며 고려관직은 18등급인데 시중은 최고의 지위를 가리킨다.

*태전(太傳):왕세자의 스승을 말하는데 태전(太傳)은 태사(太師)의 다 음 자리 품계이다.

⑤ 역 사 ( 歷 史 )

ㅇ만주의 여진족이 강성해져 1049년에 고려를 침입한 사실 이있고 중 국 북송에서는 당. 송 8대가의 한사람인 구양수(歐陽修)가 1060년에 신당서(新唐書)를 이룩하였다.

37世

-

언       부

彦      孚

-

언      상

彦      祥

-

언     인

彦     仁

○밀성대군(密城大君) 8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 世 ─→ 중조(中祖)

휘(諱):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040년 -110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10대 정종(靖宗)6년-15대 숙종(肅宗)5년 무렵으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公)은 도평 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1세 이시며, 공의 11세 돈재공(遯齊公) 연생(衍生)이하는 돈재공파를 이루게 된다.

ㅇ고려 11대 문종(1047-1083)때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지내셨으며 밀직군(密直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고려사, 여지승람(與地 勝覽) 신라 2천 년사 등에 기록이 분명하다.

*도평의사(都平議事) : 국방 최고회의 기구이며 합의 기관으로 문종 때 정착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몽고의 영향으로 충렬왕 5년(1279)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고쳐졌으며 나중엔 국방뿐만 아니라 일반정치와 서무(庶務)도 관장 하였다. 여기서 도평의사(都平議事)란 관직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 고려 후기의 최고정무기관으로, 전기에 설치되었던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설치하고 중앙에서 이들을 지휘하기 위한 판사(判事)를 둔 데서 유래하며, 현종 초를 전후한 시기에 설치되었다. 문종 때 관제가 정비되면서 판사(判事)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중에서 겸하고, 사(使)는 6추밀과 직사(職事) 3품 이상 중에서 겸했다. 부사 6명은 정4품 이상의 경(卿)·감(監)·시랑(侍郞)이 하며, 판관 6명은 소경(少卿;종4품) 이하로 했다. 또 녹사 8명은 갑과권무(甲科權務)로 했다. 이속(吏屬)으로는 기사(記事)가 12명, 기관(記官)이 8명, 서자(書者)가 4명, 산사(算士)가 1명이었다.  도병마사는 판사 이하 판관까지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양계의 축성 ·둔전 ·군사의 상벌, 국방과 군사문제 등을 주로 담당하고, 때로는 주진민(州鎭民)의 진휼 등 민생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현종 초에 설치된 도병마사는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집권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고종 말 이후 재추(宰樞)의 합좌기관으로 변질되어 종래의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양부(兩府)의 재추가 모두 모여 국방과 군사문제뿐만 아니라 국사 전반을 의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naver-백과사전>

* 세보에는 공(公)께서 도평의사(都評議事)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 내용으로 볼 때 공(公)의 생존시에는  공식적인 도평의사(都評議事)란 명칭의 관직이나 관청은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국방최고회의 기구로인 초기 도병마사가 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되었고, 최고 관직 명은 판사(判事)이며 이는 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중에서 겸한 것으로 보아 공(公)은 위 벼슬 중의 하나를 하고 계셨던 것으로 추상된다. 따라서 도평의사(都評議事)란 명칭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라는 관청과 그 관청의 수장인 판사(判事)의 합성어로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수장(首長)을 의미하는 뜻으로 도평의사(都評議事)라 한 것으로 사료된다. 세보에 나오는 고려 초기에서 중기까지 조상님들의 관직명은 고려말에서 조선왕조 초의 관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손들이 족보를 편찬할 때 관직명을 현실감있게 표현한 때문인 듯 하다. 즉 조선때 영의정을 오늘날 국무총리로 풀어서 쓴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도평의사에 관하여 의견있는 분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다른 문중에서는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파를 도평의사사공(都評議使司公)파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는 관청명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다. 어느 명칭으로 하든 박언상 할아버지를 지칭함은 같다. 그러나 우리문중은 세보의 기록대로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파로 통일할 것을 권한다. 또 공(公)의 휘(諱) 언상(彦祥)의 상(祥)자를 商이나 尙자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상(祥)자로 통일 할 것을 권한다.

*밀직군(密直君) : 공(公)께서 봉군(封君)된 것을 보면 공은 정1품의 관직을 역임하신 것으로 사료되며 또 당시 고려조에서 공이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이 매우 컷던 것으로 본다. 한편 밀직(密直)과 관련된 관청을 알아보면 고려말 밀직사(密直司)가 있었다. 이는 왕명 출납관계를 관장하는데 문종때 중추원(中樞 院)이던 것이 공민왕 5년 추밀원(樞密院)으로 고쳤으며 다시 11년 밀직사(密直司)로 고쳤다.

ㅇ공(公)은 충남 옥천(沃川) 이원면(伊院面 ) 용방리(龍坊里)에 있는 원덕사(遠德祀)에 밀성(밀양)박씨 12중조의 한 분으로 배향(配享)되어 있으며 유적지는 풍각화산(豊角化山)에 있다. 전국 각지(各地)에서는 이분을 중심으로 종친회를 만들어 족의(族誼)의 정을 나누고 있다. (세보에는 용방리로 되어 있으나 실제 답사시는 구룡리로 가야한다) 

 

[참고]

*군(君), 부원군 - 선시대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 또는 정1품 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 받는 사람의 본관(本貫)인 지명(地名)을 앞에 붙였으며, 같은 호칭이 여럿 생길 때에는 연고(緣故) 있는 지명 또는 다른 함자를 넣어 불렀다. 일반적으로 딸이 궁중에 들어와 정실 왕후가 되면, 왕비의 부친은 자동적으로 부원군이 되었다. 초기에는 국구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많은 폐단을 낳았다.

*파명(派名)을 정할 때 - 출처 : http://kr.blog.yahoo.com/scpark04

일반적으로 정2품 이상 오르신 분들만 시호를 받을수 있기 때문에 호나 관직명으로도 부르고 관직이 같은(군수나 현감등) 분이 많을 경우 지역명을 쓰기도 했으며 호나 관직이 없으면 학생공파 또는 처사공파라고도 한다. 또, 때에 따라서는 공신아니면 받기가 힘든 봉군에 오르신 분들은 봉호로써 호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호나 관직명을 쓸 때에는 뒤에 공(公)을 붙이지만 봉호를 쓸적엔 공(公)이 아니라 부원군(府院君)이나 군(君)을 붙여 쓰는것이 맞는 말이라고 하며, 공(公)보다는 군(君)이 군(君)보다는 대군(大君)이나 부원군(府院君)이 높은 호칭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부(彦孚) : 공(公)의 장형으로서 고려 11대 문종(1047-1083)때 문 과에 급제하시고 해동공자라 칭하는 최충(崔沖 984-1068))과 함께 왕세자의 스승인 태사(太師)를 지낸후 중서성(中書省)의 장(長)인 중서령(中書令)과 문하성(門下省)의 장인 시중(侍中)을 하셨으며 이어 도평의사(都平議事)를 하시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封) 해졌다.

이 분을 중조(中組)로 태사공파(太師公派)가 갈라지며 후손 중 규 정공파(糾正公派)가 나온다.

*언인(彦仁) : 공(公)의 동생으로서 공과 같은 무렵 고려 관직 중 문 산계(文散階)에 속하며 서정 총괄 기구인 중서 문하성의벽상삼중대광평장사(壁上三重大 匡平章事)를 지내셨는데 종 2품 벼슬이다. 또 조정의 백관(百官)을 총령하던 상서성(尙書省)의 정 2품 벼슬인 상 서좌복야(佐僕射)를 지내시고 밀성군(密城君)에 봉(封) 해졌다. [射 - 벼슬이름야]

-이 분을 중조(中組)로 좌복야공파(佐僕射公派)가 갈라지게 된다. 한편 위의 삼 형제분들을 삼언(三彦)이라고도 한다.

역 사 ( 歷 史 ):생략

  38 世

 

양      신

良     臣

 

 

○밀성대군(密城大君) 9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 世

휘(諱):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067년 -1127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11대 문종(文宗)21년 -17대 인종(仁宗)5년 무렵으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 때 소감(少監)벼슬을 하셨다.

* 소감 : 신라 때부터 있던 관직인데 고려의 군기감(軍器監), 비서성 (秘書省)의 사재감(司宰監) 사진감(司津監), 사천대(司天臺)의 소부 감(小府監) 등의 감(監) 다음 벼슬로 4품 -5품까지이며 동반(東班) 에 속한다.

역 사 ( 歷 史 )

ㅇ이 시대 서기 1069년 중국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신법을 내어 개 혁을 단행했으나 1076년에 실각했으며 1084년에는 송의 명신 사마광 (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완성하였다. [사마광은 명심보감(明 心寶鑑)책에 사마온공(司馬溫公)으로 등장한다]

ㅇ고려는 1084년(문종 34)에 정주성(定州城)밖의 여진족을 토벌했으며 1086년(12대 순종 3)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요, 송, 일본으로부터 4천여권의 서적을 구입, 간행하였다.

 

  39 世

 

 직

 

 

○밀성대군(密城大君) 10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3 世

휘(諱) : 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104년 -1164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15대 숙종(肅宗) 9년 -18대 의종(毅宗)18년 무렵으 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감무(監務)벼슬을 하셨다.

* 감무: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작은 고을의 원으로 현령(縣令)을 둘수 없는 작은 현(縣)의 감독관인데 품계로는 7품에 해당하며 현감(縣監)과 같다.

역 사 ( 歷 史 )

ㅇ서기 1102년(숙종 7년)에 해동통보(海東通寶) 15,000관을 주조 하여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107년(예종 2년)에는 윤관(尹 瓘) 장군이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였으나 그들은 강성하여 져서 1114년에 요(遼)나라를 격파했으며 1115년에 여진의 아골타(阿骨打)가 금(金)나라를 세우고 태조(太祖)가 되었다.

이에 요나라는 고려에 금나라를 협공할 것을 청했으나 이루어 지지 않았고 이듬해 금나라에서도 고려에 외교사절을 보내왔다.

ㅇ서기 1124년(인종 2년) 중국 북서부에 있던 서하(西夏)가 금(金)에게 굴복하고 1125년에 금나라와 북송(北宋)의 협공으로 요(遼)나라가 멸 망되었으며 요의 왕족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로 달아나 서 요(西遼)를 세웠다. 요를 멸한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 요하기에 이르렀고 1127년 그 유명한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북송 (北宋)이 금나라에 멸망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났고 송의 고종이 난징(南京)에 가서 남송(南宋)을 일으키니 이때 부터 남송 시대가 열렸다.

ㅇ고려 11대 문종의 문치정책은 문운을 크게 떨쳤으나 문(文)을 숭상하 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문종 이후 17대 인 종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 이 호, 이자겸은 7대에 걸쳐 80년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했다. 1126년 이자겸은 왕위를 찬탈하고자 난을 일으켰고 이어 척준경(拓俊 京), 정지상(鄭知常), 김부식(金富軾)이 차례로 귀족정치를 펴는 동안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하여 고려는 점차 내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ㅇ서기 1129년(인종 7년)에 묘청(妙淸)이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상주하 였는데 묘청은 중으로서 정지상의 추천으로 왕의 고문이 되었다. 그 후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등 진취적인 국가 주체사상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135년(인종13년) 에 서경(평양)에서 모반을 꾀하였으며 이듬해 김부식에 의하여 평정 되었다.

ㅇ서기 1139년(인종17년) 남송과 금나라가 일시적 화친을 맺었으나 1140년에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가 금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그 러나 송의 진회(秦檜)는 화의(和義)를 주장하여 악비를 투옥한 후 살 해하여 결국 금과 송은 화약을 맺게되었다.

40世

 

인     경

仁     卿

-

의   경

義   卿

-

신   경

信   卿

 

 

○밀성대군(密城大君) 11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4 世

휘(諱) : 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141년 -1200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17대 인종(仁宗)19년 -20대 신종(神宗)4년 무렵으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문림낭(文林郞)벼슬을 하셨다.

* 문림낭: 문산계(文散係)의 종 9품 이며 뒤에 통사랑(通仕郞)으로 바뀌였다. 공의 후손은 주로 전남장성, 영광 등 전남지방과 전북 고창, 부안, 남원 등이 세거지 이다.

* 의경(義卿) : 공(公)의 동생으로 고려때 창승(倉丞)벼슬을 하셨다. 충남 옥천 용방리 풍각화산(豊角花山)에 유적지가 있으며 여지승 람에 기록이 전한다. 공의 후손은 주로 경상도 지방이 세거지이다.

-창승(倉丞): 고려 대창서(大倉署)의 종 8품 벼슬이다.

* 신경(信卿) : 공(公)의 둘째 동생으로 고려때 소감(少監)벼슬을 하 셨다. 공의 후손들의 세거지는 주로 전라남도 지방이다.

-소감(少監): 고려 때 4 - 5품 관직이다.(신라 때는 무관직 이며 조선 때는 종4품)

ㅇ위 인경, 의경, 신경 3형제의 손이 호남, 영남을 비롯 하여 전국 각지에서 살고 있다. 전남 광주의 종친회 모임인 인의 신회(仁義信會)는 위 삼조(三祖)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 이다.

역 사 ( 歷 史 )

ㅇ서기 1145년(인종23년)에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 50권을 지어 바쳤으며 인종의 뒤를 이어 1147년에 의종(毅宗)이 즉위하여 문신관 료와 더불어 향락만을 일삼아 정사를 소흘히 함으로서 무신들의 불만 이 고조되어 갔다.

ㅇ한편 서기 1161년에 중국에서는 남송(南宋)이 금(金)을 격파하여 금나 라는 변경(변京)으로 천도하고 해릉왕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 10년 뒤 남송의 주희(朱熹)가 사창(社倉)을 세웠다.

ㅇ서기 1170년(의종24년)에 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켰다. 과거부터 의종의 향락과 문신들에게 불만이 많던 무신들이 의종의 보 현원(普賢院) 행차 때 문신들이 무신들에게 횡포를 부리자 이에 격분 한 정중부, 이의방(李義方) 등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의종과 태자는 유배 보내고 명종을 옹립하였다. 1173년에 김보당(金 甫當)이 의종 복위를 위해 난을 일으키자 정중부는 이를 토벌하고 아 예 의종을 죽였으며 1174년에는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 으키자 역시 토벌하고 스스로 문하시중이 되었다.

ㅇ이후 무신간에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1179년(명종9) 같은 무신 경대 승(慶大升)이 정중부의 전 가족을 몰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41 世

 

 

 

○밀성대군(密城大君) 12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5 世

휘(諱) : 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178년 -1238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19대 명종(明宗) 8년 -23대 고종(神宗) 25년 무렵으 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내부시승(內部侍丞) 벼슬을 하셨다.

*내부시승 : 내부시는 고려, 조선시대 궁중의 재화(財貨)의 관리, 복 식(服飾), 동촉(燈燭), 포진(鋪陳)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승 (丞)은 종5품- 9품까지 벼슬로 다양한데 여기서는 정6품이다. 내부 시는 문종때 대부시(大府寺)였던 것을 외부시(外部寺여), 대부감(大 府監)등 여러 차례 명칭변경 끝에 공민왕 때에 이르러 내부시(內府 寺)로 되었다.

⑤ 역 사 ( 歷 史 )

ㅇ이 때는 무신집권 시대다.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한 경대승이 죽자 1183년 이의민이 집권하였고 1196년(명종26년)에 최충헌(崔忠獻)이 이 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이 우(瑀), 항(沆), 의(의)까지 4대에 걸쳐 60년간 지속되었다.

이 때는 또한 토지제도인 전시과가 붕괴되고 천민과 농민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 사회질서가 문란하여 졌다. 1176년 공주 명학소(明鶴所) 의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난, 1182년 전주 관노(官奴) 죽동(竹 同)의 난, 1193년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1198년(신 종1년)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 1217년 최광수(崔光秀) 의 난 등이 그것인데 "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냐 ?"는 것이 다.

ㅇ한편, 1188년(명종 18년) 중국 북방에서 몽고족을 통일한 태 무진(징 기스칸)이 몽고족의 칸(왕)이 되었다. 1200년(신종3년)에 남송의 성리 학자 주희가 죽고 1206년(희종2년)에 태무진이 징기스칸이 되어 몽고 제국을 세웠다.

1208년 몽고군이 서하(西夏)를 침범하더니 1211년에는 금 나라의 서 북 변경으로 침입하여 금은 난징(南京)으로 천도하고 이해 고려의 사신 김양기(金良器)가 금나라에 가다가 몽고병에게 잡혀 피살되는 사 건이 일어났다.

  42 世

 

 

○밀성대군(密城大君) 13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6 世

①휘(諱): 위와 같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시다.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215 -1275년 사이로 추정하며 고려23대 고종(高宗) 2년 - 25대 충렬왕 1년 무렵으로 본 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시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벼슬을 하셨으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시다. 대동보에서 이르기를 공은 밀주사에 배향되고 여지도서 밀주지 등에 언급되어 있다고 했다. (享于 密州祀出與誌 見與地及密州誌 建院密陽)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고려초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문하 시랑 평장사를 뜻하며 문하시중 다음자리다. 충렬왕 2년(1276)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고쳤으며 공민왕 18년(1369)에 문하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고쳤다.

* 내사문하성 : 고려 최고 중앙의정기관(中央議政機關)이다. 981년(성 종1년) 내의성(內議省)을 고친 이름인데 원래 조칙(詔勅)에 관한 일 을 담당하던 내사성과 왕명의 하달과 중신의 건의를 담당하던 문하 성을 합친 것이다. 뒤에 내사성을 중서성(中書省)으로 고침에 따라 중서문하성이 되었다. 한편 공은 문하성 소속이셨다.

-시호(諡號): 제왕(帝王), 경상(卿相),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 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추증(追贈)하는 칭호다.

           공(公)의 시호에 대하여           

공(公)의 시호에 대하여 그간 문중에서는 이정공(夷靖公)이신지 문정공(文靖公)이신지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문중의 흠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홈페이지 운영자도 공의 시호에 대하여 입장정리를 못한체 다음과 같이 기록했었다.

ㅇ공(公)의 시호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밀주지(密州 誌), 밀성박씨세보(壬申: 1872년), 계사보(癸巳譜: 1893년), 경술보(庚戌譜: 1910년) 등에 이정(夷靖)으로 되어 있다. 그 러나 1899년(己亥)에 발간한 밀성박씨세보, 1931년(辛未)의 태인박씨보, 최근의 밀성박씨 습독공파 세보 등에는 문정 (文靖)으로 되어 문정공(文靖公)이라 칭한다.

보다 객관적인 자료는 동국여지승람과 밀주지라고 볼 때 공의 시호는 이정(夷靖)이 옳다고 본다. 종중요람도 공의 시호를 이정(夷靖)으로 통일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夷) 자 보다는 문(文)자 시호가 좋아서 바꾼 것이라면 이는 할 아버지는 물론 본 손들까지 욕먹게 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밀성박씨 계통도에는 일단 문정공(文靖公)으로 표시하였으니 양지바란다.>

그러나 다행히도 돈재공(遯齋公) 19세손이요 청백리 정혜공(貞惠公) 15세손인 박형구(朴亨求 - 譜名) 일가님께서 우리문중과 이 홈페이지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끝에 열(說) 할아버지의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임을 밝혀 주셨다.

따라서 시호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향후 문정공(文靖公)으로 통일하기를 바란다.

<<다음은 박형구 일가님이 밝힌 자료다.>>

汎朴을 망라한 "朴氏文獻錄"에
아래와 같이 文靖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박씨문헌록은 仁.義.禮.智.信.으로 나누어 총 십이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지일은 제왕 / 권지이는 봉군. 상신. 장신. 충신. 유일./ 권지삼은 유현一./권지사는-유현二. / 권지오는 경사 / 권지육은 절의. 공훈. / 권지칠은 은둔. / 권지팔은 문행. /권지구는 효행. 열녀. /  권지십은 별록一 -국혼. 종묘배향. 문묘배향. / 권지십일 별록二 -시호. 호당. 한림. 명환. 연원. 사원. 예문. 문집. / 권지십이는 별록二 -씨족.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회가 닿는데로 전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文靖公 朴說"에관한 기록내용 전문 抄

                          문정공   박열  에관한 기록내용   전문 초
朴氏文獻錄 卷之三   儒賢 - 密城大君派

박씨문헌록 권지삼   유현   밀성대군파

朴說

박열
          弟 成廟朝 文科重試 弘文大提學 左贊成 御筆賜 "淸白傳家" 四字 諡夷靖.

          인제   성묘조  문과 중시 홍문관대제학 좌찬성  어필사   청백전가    사자  시이정

          ▷홈운영자 주(註) - 박 열은 조선 성종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대체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                                                렀고  왕이 淸白傳家 네자를 친히 써내려 시호를 이정으로 하였다.
**위는 사문진사공파의 이정공 박열에 관한 기록입니다.

 

         ▷추가로 보낸 자료

           박열-1464(朝鮮朝 세조 10) ∼ 1517(중종 12) 자는 열지(說之), 시호(諡號)는 이정(夷靖), 사옹원첨정            (司饔院僉正) 사동(思東)의 아들.1483년(성종 14) 생원(生員)이 되고, 14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서 감찰(監察)·수찬(修撰)등을 거쳐 1497년 이조 좌랑            (吏曹佐郞)으로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예조·이조의 판서,대사헌·좌참찬(左參            贊)을 역임한 후 1516년(중종 11)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朴氏文獻錄 卷之四  卿士 - 密城大君派

박씨문헌록 권지사  향사   밀성대군파
朴說

박열
彦祥後 內府寺丞 儉子 文科 贊成 諡文靖 見密州誌

언상후 내부시승 검자 문과 찬성 시문정 견밀주지
**위는 우리 직계선조이신 文靖公 說祖에 관한 기록입니다.

                                               문정공  열조

        ▷홈운영자 주(註) - 박 열은 (고려문종때 도평의사를 하신 ) 박언상의 후손이요.  내부시승벼슬을                                             한 박검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찬성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靖)                                             이며 밀주지에 기록이 있다.

...........................................................................................................................

한편
朴氏文獻錄 卷之十一 別錄二  諡 號欄에도

박씨문헌록 권지십일 별록이  시 호란
"高麗朝 文靖 贊成 朴說"이라 명기되어 있습니다.

 고려조 문정 찬성 박열

         ▷홈운영자 주(註) - 고려조에 시호는 문정이며 찬성사 벼슬에 이른 박열

...........................................................................................................................

所見 : 우리 직계 說조의 諡號가 "夷靖"이냐 "文靖"이냐에 관하여 혼란을 가져왔던 것은 소장문서에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공적인 문헌상으로는 아무런 하자없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우리 내부에서만 끝까지 추적확인하지 않고 안이하게 접근했기 때문에 종가계의 夷靖公 박열과 우리 文靖公 박열을 혼동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제 앞으로 이를 우리 열조 후손들 뿐만 아니라 각 사이트에도 이쪽인지 저쪽인지의 불분명한 부분을 바로 잡도록 홍보해 주시는 일을 귀식님께서 맡아주셔야겠다는 어려운 말씀을 드려봅니다.
마지막으로 합심하여 할일은 與地勝覽이나 密州誌의 기록을 확인마무리하는 일입니다. 추적조사과정에서 다소 불안감도 없진 않았으나 이젠 우리의 선대를 믿습니다.

2005년 3월 16일

 

諡法上 선정된 "文"자의 釋義는 아래와 같습니다..
휘법상         문     석의
經天緯地. 道德博聞. 道德博文. 博學多聞. 勤學好問.
경천위지  도덕박문  도덕박문  박학다문  근학호문
博學多識. 博學多見. 敏而好學. 敬直慈惠. 慈惠愛民.
박학다식  박학다견  민이호학  경직자혜  자혜애민
忠信接禮. 忠信愛人. 剛柔相濟. 愍民惠禮. 錫民爵位.
충신접례  충신애인  강유상제  민민혜례  석민작위
修德來遠. 施而中禮. 修治班制.

수덕래원  시이중례  수치반제

 

2005년 3월 17일

박열 祖에 대한 증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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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문헌록-義

義-조선시대 박열

박씨문헌록-禮

禮-고려시대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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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세계보-1

밀성박씨 세계보-2

박씨숭현록

종가계 이정공 휘열

(박씨 숭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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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직계 문정공 휘 열

(박씨 숭현록)

 시호고(諡號考)상의

문정공(文靖公) 朴說

 시호고(諡號考)상의

이정공(夷靖公) 朴說

 

⑤ 역 사 ( 歷 史 )

ㅇ이 때는 몽고의 힘이 폭발적으로 강성해 지는 시대다.

1215년(고종2년)에 몽고군이 금의 연경(燕京)을 점령했으며 1216년에 는 몽고군에 조낀 글안병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서북계에 침입하였 다. 1218년에 몽고가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강화를 청하는 한편 서아시아를 원정하였다.

ㅇ1220년에 남송이 서하와 함께 금나라를 협공했으며 이듬해 고려는 몽 고에 사신을 파견했고 1227년에 서하가 징기스칸에게 멸망되고 그해 징기스칸도 죽었다. 또한 몽고는 사신을 계속 고려에 파견하여 물품 을 요구했고 1225년에 몽고사신이 압록강 밖에서 살해되는 사건으로 국교가 악화되었으며 1226년부터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졌다.

ㅇ1231년(고종18년) 드디어 몽고군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침공하여 구성(龜城)을 포위하자 왕은 1232 년 병난을 피해 강화(江華)로 천도해 버렸다. 살리타이는 이듬해 처인 성에서 중 김윤후에게 사살되었다.

몽고병은 말들이 강화만에서 바닷물만 보면 놀라고 뛰어 강화도 점 령을 포기하고6차에 걸쳐 고려에 침범하여 국토를 유린했다.

ㅇ1234년에 몽고와 남송의 협공을 받고 금나라가 멸망했으며 몽고는 계 속 주변국을 점령하여 사상 최대의 대 제국을 건설해 나갔다. 같은 해 고려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고금상정예문(古今祥定禮文) 50권을 간행했는데 전하지는 않는다.

ㅇ한편 몽고는 고려왕이 강화로 천도하고 육지로 나오지 않자 1236년, 1249년, 1253년 등 여러 차례 침범하여 왕의 출육(出陸)과 친조(親朝) 를 권고하였다.

  43 世

 

창      밀

昌      密

-

흥     밀

興    密

 

 

○밀성대군(密城大君) 14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7 世

휘(諱) : 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252 -1312년 사이로 추정하며 고려23대 고종(高宗)39년 - 26대 충선왕(忠宣王)4년 무렵으 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시고 현승(縣丞) 을 하셨다

* 현승(縣丞): 지방 현(縣)에 소속된 관리다. 승(丞)은 고려와 조선시 대에 각 관청에 소속된 관원이며 정5품에서 종9품까지 다양한데 공의 품계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흥밀(興密): 공의 동생이며 역시 현승 벼슬을 하셨고 그 후손은 경남 남해군에 살고있다.

역 사 ( 歷 史 )

ㅇ1258년(고종45년) 몽고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 었으며 고려는 대사성(大司成) 유경(由璥) 등이 4대째 집권하고 있던 최의(崔의)를 주(誅)하고 왕권을 회복하였다. 그 해 12월 몽고에 항복 하였으며 이듬해 몽고와 화친을 하고 왕은 출육(出陸)하여 4월에는 태자를 몽고에 보냈다. 1259년 드디어 몽고가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 했으며 이후 고려는 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80여 년간 자주성을 상실 하였다.

ㅇ1270년(원종11년) 고려에서는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나 3년을 끌 었는데 이를 삼별초 항전이라고 한다. 삼별초는 최 우가 창설한 특수 부대인데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神義軍)을 뜻한다. 고종의 뒤를 이 은 원종이 몽고에 굴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대가 배중손의 지휘하에 진도에서 저항 했으며 또 일부는 김 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에 가서 항거했으나 실 패하였다.

ㅇ1271년 몽고는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이듬해 일본정벌을 위해 15,000명의 동정군(東征軍)을 보내왔으나 폭풍으로 실패했으며 1273년 에는 남송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1275년에는 서양의 마르코폴로가 원 의 세조 쿠빌라이를 만났으며 1279년에는 남송이 애산(崖山) 싸움에 서 원나라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고려는 이 해 전함 900척을 만들어 1281년 동정군을 일본에 보냈으나 역시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44 世

 

거     인

居     仁

 

 

○밀성대군(密城大君) 15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8 世

휘(諱) : 상동(上同)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1289 -1369년 사이로 추정하며 고려25대 충렬왕(忠烈王)15년 - 31대 공민왕 (恭愍王)18년  말기 무렵으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 공민왕 때 소감(少監)슬을 하시다가 인의현(仁義縣)으로 귀양 살이를 가셨는데 후에 자손이 그 곳에 살게 되어 이때부터 박씨 일문(一門)이 전라도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의현 은 지금의 태인지방이다. 공께서 처음 인의현으로 귀양오셔서 사시다가 근처 태산현(泰山縣)으로 옮겨 사셨는데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안되어 태산현과 인의현을 병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을 설치 하였다.

     * 인의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  삼국시대에 백제의 빈굴현(賓屈縣)이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빈성현(斌城縣)으로 고쳐 태산군(太山郡:泰仁)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인의현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고부군(古阜郡)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태산(太山) 감무(監務)가 함께 다스렸으며, 후에 감무가 설치됨으로써 독립되었다. 조선초인 1409년(태종 9)에 태산현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으로 개칭했다.

이후 공의 증손자 박연생이 한때 본관(本官)을 태인(泰仁)또 는 태산(泰山)이라 하여 300여 년을 내려오다가 후손들이 1831년(순조 31년 辛卯) 예조에 상소문을 올려 다시 구관 (舊官)인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 소감 : 신라 때 부터 있던 관직인데 고려의 군기감(軍器監), 비서성(秘書省)의 사재감(司宰監) 사진감(司津監), 사천대(司天 臺)의 소부감(小府監) 등의 감(監) 다음 벼슬로 4품 -5품까지 이며 동반(東班)에 속한다.

* 귀양 : 이말은 순 한글이며 원래 귀향(歸鄕)을 뜻하는 것으로 옛날 형벌의 하나다.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데 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처음에는 방축향리(放逐 鄕里)로 쓰다가 후기에 와서는 도배(徒配:徒刑에 처한 뒤에 귀 양 보냄), 유배(流配:죄인인을 귀양보냄), 찬배(竄配:단순히 죄 인을 귀양 보냄), 정배(定配:배소를 정하여 죄인을 유배 시킴) 등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공께서 귀양살이를 하셨다면 과연 공의 과실이 어느 정도로 컷는지 의문이다. 14세기 후반, 공민왕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께서 귀양을 가신 것을 보면 나라의 중요한 개혁과 관련하여 정책집행에 차질이 왔거나 정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에 가담했다가 실 패하지 않으셨나 싶다. 습독공파 세보에는 공께서 귀양한 사 실이 시산여지(詩山與地)에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태인(泰仁) :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의 합명(合名)이다. 태산현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현(大尸山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태산(太山)으로 고쳐 대산(大山)·태산(泰山) 등으로 불리우다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賓屈)·빈성(斌城)·부성(賦城)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고, 고려조에 인의(仁義)로 고쳤다가 1411년(조선 태종 11)에 태산(泰山)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고 1913년에 정읍군(井邑郡)에 합해져서 태인면(泰仁面)이 되었다

⑤ 역 사 ( 歷 史 )

ㅇ1289년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죽고 1292년에는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 코폴로가 중국을 떠났다. 1295년 고려는 탐라도를 제주(濟州)로 고치 고 1302년에는 동녀(童女)를 또 원에 바쳤다.

ㅇ1314년(충숙왕1년)에 상왕(上王)이 원의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 卷堂)을 지었다. 이 후 강성하기만 하던 원제국이 1325(충숙왕12년)년 부터는 분열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5 世

 

문     봉

問    奉

-

승     봉

承     奉

 

 

○밀성대군(密城大君) 16 世                  <top>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9 世

휘(諱) : 휘는 위와 같고 호(號)는 의제(義薺) 이시다.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326 -1396 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27대 충숙왕(忠肅王)13년 - 조선 태조 5년 무렵으로 본다.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와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종중요람에 중조부터 의재공(義薺公)까지의 자세한 사적과 생졸(生卒), 묘소 등이 밝혀지지 않으니 가슴아픈 마음 달랠 길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고려와 조선의 혁명기에 사신 분으로서 고려가 혁명을 당 하자 충의정신과 강개(慷慨)한 마음이 있어 조선에 복종치 않고 절의를 지켜 소윤(少尹) 벼슬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 다. 따라서 공을 의제공(義薺公)이라 부른다.

ㅇ세상에서는 공(公)을 의사(義士)라 불렀는데 공의 사적은 시산지(詩山誌), 오산지(鰲山誌), 평창지(平昌誌)에 기록되어 전한다. 한편 밀성박씨 습독공파 세보에의 고려의사 박공 승봉전(高麗義士朴公承奉傳)에는 공의 형님 문봉과 공께서 모두 벼슬길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익찬(翊贊) 황윤 석(黃胤錫) 찬(撰)]

* 문봉(文奉): 공의 형님으로 고려때 통덕랑(通德郞) 벼슬을 하셨다. 조선시대의 통덕랑은 정5품 문관의 품계로 조산대부(朝散大夫) 아 래며 지금의 사무관 내지 서기관급 이다. 문봉(文奉)의 후손이 경북 양산과 북제주군 구좌면(九坐面)에 살고 있다.

역 사 ( 歷 史 )

ㅇ1329년 원나라에 내분이 일어났다. 1340년(충혜왕 1년)에는 원의 호광 (湖廣)과 산뚱(山東)에 반난이 일어나 원의 조정이 쇠퇴하고 고려 여 인 기씨(奇)가 원의 제2황후가 되었다.

1350에 이르자 원의 한산동(韓山童)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고 고려 는 왜구가 크게 일어나서 이듬해까지 피해가 컸다.

ㅇ1353년(공민왕 2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군사를 일으켰고 이듬해 장사성(張士誠)도 거병 하니 원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1358년 에는 중국의 관병에게 쫏긴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였으며 1361년에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이 동북면 병마사가 되고 1363년 문익 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제배에 성공하였다.

ㅇ1367년에 중국의 주원장은 라이벌인 장사성, 방국진(方國珍) 등을 멸 하고 북벌(北伐)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듬해 황제를 칭했고 원나라 는 망하여 북으로 패주 하였다. 1369년 명 나라는 고려에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왔다.

ㅇ1370년(공민왕19년)에 지용수와 이성계가 원의 쇠퇴를 틈타 요동을 공략하여 요양(遼陽)을 점령하여 국세를 회복하는 듯 했으나 공민왕 때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우왕(禑王)때를 전후한 왜구의 잦은 침입은 국정을 크게 불안케 하고 국력의 소모를 가져왔다.

ㅇ그 후 명나라가 쌍성총관부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 한 최영은 1388년(우왕14년)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는 데 우군 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보내고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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