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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밀성)박씨 돈재공파(遯齋公派) 갈산문중 상세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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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선 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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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세 덕명 / 47세 연생 / 48세 문아 / 49세 현손,귀손 / 50세 종원, 형종, 이종, 정종, 계종 / 51세 수온, 수양(량), 수공, 수검 / 52세 사영, 사침, 사순 / 53세 상겸, 상효 / 54세 윤제,윤부,윤발,윤함,윤광,윤풍 / 55세 취장,취신,취일,취극,취익,취흥,취업 / 56세 형노 / 57세 증휘, 중휘, 덕휘 / 58세 태남, 태서 / 62세 만엽 / 63세 항용 / 63세 진용 / 63세 희용 62세 만필 / 63세 종용 / 63세 석용 / 63세 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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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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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 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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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대군(密城大君) 17 世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0 世 ① 휘(諱) : 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387 -1455 년 사이로 추정하 며 고려32대 우왕(禑王)13년 - 조선 세조 1년 무렵으로 본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이시며 묘소는 전남 장성군 황 룡면(黃龍面) 금호리(金狐里) 금호산 상정(上頂)에 부인과 함께 [合폄부左] 갑좌(甲坐)로 모시고 지석(誌石)도 묻었 다. * 숙부인(淑夫人) : 조선의 문무관(文武) 품계표와 그 부인들에 대한 관작표(官爵表)상 동반(東班)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通 政大夫)와 서반(西班)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절충장군(折衝將軍) 부인에 대한 작(爵)이다. 조선의 부인 관 작(官爵)은 왕과 세자궁 을 뜻하는 내명부(內 命婦)는 관(官)이요 왕가(王家), 왕의 종친, 문무관원의 처를 뜻하는 외명부(外命婦)는 작(爵)인데 작(爵)은 다 음과 같다. -1품 : 정경부인(貞敬夫人), 2품 : 貞夫人(정부인), 정3품 당상관 : 숙부인(淑夫人) 3품 : 숙인(淑人) 4품 : 영인(令人), 5품 : 공인 (恭人), 6품 : 의인(宜人), 7품:안인(安人), 8품 : 단인(端人),9품 : 유인(孺人) *
합폄부좌(合폄부左): 합폄은 합장(合葬)을 말하고 부좌는 부인을 남자의
좌측에 묻는 것을 말한다. 합장이라도 광중(壙中)은 따로 짓는다. * 지석(誌石) : 죽은 이의 이름, 생몰 년월일, 행적, 무덤의 좌향 등 을 적어 무덤 앞에 묻는 돌인데 조선시대는 보통 백색사기에 기록 했고 요즈음은 문화재적 가치도 있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서기 1402년(조선 태종2년)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승 의부위(承議副衛)라는 무관벼슬을 지내시고 호익순위사(虎 翼巡衛司)에서 우영부사정(右領副司正)을 벼슬을 하셨다. 공은 병사훈련과 병영생활의 군율 확립에 자질이 뛰어나 절충장군(折衝將軍) 훈련원(訓練院) 도정(都正)에 오르셨으 니 품계가 정3 품 (正三品)당상관(堂上官) 이시다. *무을과(武乙科) : 조선과거제도는 문과, 무과 잡과(雜科)로 나누는 데 무을과는 무과에 해당된다. 무과(武科)는 서울과 각도의 병영에 서 200명을 선발하는 초시(初試)를 치른 다음 서울 병조에서 28명 을 선발하는 복시(覆試)를 치르고 마지막으로 임금 앞에서 전시(殿 試)를 치루어 28명의 등급을 갑과(甲科), 을과(乙科), 병과(丙科)로 판정하여 홍패(紅牌)를 주었다. 또한 을과(乙 科)는 16인 내에 들었 음을 뜻한다. *승의부위(承議副衛): 조선시대 서반(西班)의 정 8품 품계인 무관벼 슬이다.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조선초 의흥친군(義興親軍)의 10위(衛)의 하나인 천우위(千牛衛)를 태조 4년(1395)에 고친이름이며 문종 1년 (1451) 폐지되었다. 임무는 왕의 시종(侍從)을 맡으며 두 영(領)의 군대가 있었다. *우령 부사정(右領副司正) : 호익순위사의 우령에 속한 종7품의 무 관벼슬이며 사정(司正)의 바로 아래다. *절충장군(折衝將軍) : 정3품 당상관 무반(武班)의 관계(官階) *훈련원(訓練院) :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연습, 병서와 전진(戰陣) 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 *도정(都正) : 훈련원의 제2 채임자이며 품계는 절충장군이다. 또 훈 련원의 제1 책임자는 정2품으로 지사(知事)라고 한다. *공의 계. 사. 직(階. 司. 職)에 관하여 언급코자 한다. 세보에 기록하기를 공은 우령 부사정(右領副司正) 만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배위는 숙부인(淑夫人)이라 했다. 우령 부사정(右領副 司正)은 종7품이니 부인의 품계는 안인(安人)이다. 따라서 그 기록 은 오류인 것이다. 1687년(숙종13년 丁卯)에 수보(修譜)된 태인박씨족보(泰仁朴氏族譜) 에 있는 공의 10대손 박행중(朴行中)의 서문은 공께서 무과(武科)에 출사하여 정3품까지 올랐다고 되어 있다. 또 대동보에도 관위가 정 3품까지 오르신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공의 계(階)는 절충장군 (정3품)이요, 사(司)는 서반관청(西班官廳)인 훈련원(訓練院)이며, 직 (職)은 도정(都正:정3품) 이시니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ㅇ후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본래 살던 전북 태인(泰仁) 에서 전남 장성(長城) 소곡(小谷)으로 들어 가셨다. 공의 아 들 돈재공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 모시고 가셨다. 종중 요람에 기록하기를 공께서는 만년에 장성에서 음풍영월(吟 風詠月) 하시고 효행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선군충절(先君忠 節)을 영모(永 慕) 하셨다고 했다. 우리 문중의 박씨가 장 성에 근거한 것은 이때부터 이다. ㅇ공(公)의
사적은 오산지(鰲山誌), 또는 동사열전(東史列傳) 에 기록되어 전한다.
ㅇ호산재(狐山齋) : 공(公)의 제사를 위해 전남 장성군 황 룡면(黃龍面) 금호리(金狐里)에 후손들이 세운 제각(祭閣)이 다. *재(齋) - 성균관, 사학(四學),향교(鄕校),정사(精舍), 서원(書院)등에 딸린 유생(儒生)들의 기숙사를 뜻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능(陵), 묘 (廟)등에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전각(殿閣)을 의미한다. *호산재(狐山齋)의 변천 - 1898년 무술(戊戌) :호산재를 세우고 후손 문용(汶容)이 재기(齋 記)를 썼다 - 1950년 경인(庚寅) : 6. 25 전쟁 중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 1957년 정유(丁酉) : 후손 인천(仁天)의 찬조로 복구를 하고 균수 (均洙)가 상량문(上樑文)을 썼으며 경남 의성(宜城) 김회진(金晦 鎭)이 중수기(重修記)를 썼다. - 1976년 병진(丙辰) : 후손 래설(來說), 래형(來瑩), 학래(學來)등이 다시 손질하고 래진(來鎭)의 청으로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이 증수기(增修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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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재(狐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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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역 사 ( 歷 史 ) ㅇ1388
4월 조민수(趙敏修)와 더불어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李成桂) 는
5월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했다가 회군하여 6월에 우왕(禑王)을 폐하고
창왕을 세운 후 12월에는 최영(崔瑩)을 죽였다 ㅇ이듬해 1389년 11월에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영입하였으며 1390년 조민수 등 정적을 축출하고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ㅇ1392년에는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와 주 흥(酒興)의 자리에서 하여가(何如歌)를 불러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떠보자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함으로 정 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 (擊殺)하고 7월에 들어 조준, 정도전등 신진 사대부세력과 결탁하여 수 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恭讓王)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취해 역성혁 명(易姓革命)을 단행하여 새로이 조선왕조를 열었다. ㅇ조선은 건국이념으로 3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으로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며 일본 여진 등과 우호적 교제로 평화 를 유지한다는 것과, 둘째는 숭유배불(崇儒排佛)로 고려 멸망의 원인으 로 보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 문화, 사상의 지도이념으로 한 다는 것과, 셋째는 농본민생(農本民生)으로 농업을 국가의 기간 산업으 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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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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衍 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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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18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1 世 ○ 돈재공(遯齋公) : 1 世 ① 휘 (諱) : 위와 같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405 년(태종5년 乙酉) - 1470 년(성종1년 庚寅) 사이로 추정하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2 월 8일로 전해 온다. [ 제사일은 2월 7일이다 ]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이시며 묘는 전남 담양군(潭陽 郡) 월산면(月山面) 월산리 뒷산 34번지에 축좌(丑坐)로 모 시고 부인도 함께 모셨다.(合磡)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단종(端宗 : 조선 6대왕. 제위 1453 - 1455) 임금 때 충무 시위사 대호군(忠武 侍衛司 大護軍) 벼슬을 지내셨으며 호 (號)는 돈재공(遯齋公) 이시다. *세보에는 공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기록하고 배위를 숙부인으로 적고 있는데 이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공의 관위는 원래 대호군(大護軍)이다. 조선5대왕 문종(文 宗:제위1451-1453)때 군제(軍制)를 고쳐 5위(五衛)를 두었는 데 대호군은 이 5위 도총부(五衛都摠府) 소속 종3품 무관이 며 관직품계는 건공장군(建功將軍) 또는 보공장군(保功將 軍)이고 동 반의 중직대부(中直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 와 동률이다. 공께서 벼슬을 버린 후 세조가 왕권을 잡은 다음 공에게 교서를 내려 일자급(一資級)을 더해 주어 문관 의 통정대부(通政大夫)와 동률로 대우했으니 무관으로는 절 충장군(折衝將軍)에 해 당하고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이다. 따라서 배위 역시 숙인(淑人)에서 숙부인(淑夫人)으로 되는 것이다. 대호군은 종3품 인데 절충장군으로 하고 배위 또한 숙인 인데 숙부인으로 한 것에 대하여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 충무시위사(忠武侍衛司) : 조선군제인 5위(五衛)의 하나 ①중위(中衛)→의흥위(義興衛) ②좌위(左衛)→용양위(龍양衛) ③우위(右衛)→호분위(虎賁衛) ④전위(前衛)→충좌위(忠佐衛) ⑤후위(後衛)→충무위(忠武衛) - 시위사 * 5위에는 정2품 또는 종 2품에 해당하는 장군(將軍) 12명 을 필두로 → 상호군(上護軍) 9명 → 대호군 14명 → 호 군 (10 )명 → 부호군(副護軍) 54명 → 사직(司直) 14명 →부사직 123명 →사과(司果) 15명 → 부장(副將) 25명, → 부사과(副司果) 176명→사정(司正) 5명 → 부사정 309명 →사맹(司猛) 16명 → 부사맹 483명 → 사용(司勇) 42명 → 부사용 1939명 순이며 총 3,200여명으로 조직된 군대다. ㅇ공(公)은 지혜와 용맹이 뛰어나고 지조가 있는 분으로서 단 종때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한양에 계실때 수양대군(首陽 大君 - 후일 세조)과 그를 추종하는 한명회, 권남, 신숙주, 정인지 등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 몄다. ㅇ공(公)께서는 무관으로서 비록 수양대군을 위시한 그의 추 종자들과 다정한 사이 지만 자신이 수양의 정권찬탈에 이 용되는 것이 싫어서 그들의 동참 요구를 물리치고 계유정 난(癸酉靖難 - 1453년 )때 태인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모시 고 전남 담양군 월산에 있는 사위 이 석손(李碩孫)의 집으 로 급히 낙향 하여 은둔 하셨다. ㅇ공(公)께서 서울에서 낙향 할 때 천첩(賤妾)등이 있었는데 동행하지 못하고 글(편지)을 써 주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 다. '너희는 종의 자식이기에 나를 따라 함께 갈 수가 없다. 훗 날 나를 찾는 자(관원)들로부터 너희가 꾸지람을 면치 못하 고 두려워 할 것이다. 그때 이 편지를 보여주면 겨우 모면 할 것이니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말라'이렇게 이르시고 호남 땅 담양으로 내려가셨다. ㅇ후일 세조가 공(公)의 종적을 물으며 첩(妾)을 형벌 하려할 때 공의 글(편지)을 바치니 세조가 다 읽어보고는 다시 공 의 종적을 묻지 않았는데 글의 내용은 공께서는 서울의 천첩 등과 아주 이별을 하고 세상에 은둔하여 영화(榮華)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살피건대 공께서 세 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가 너와 내가 분명히 갈라지는 혁명의 긴박한 순간 긴급히 낙향 하셨을 것으로 사료된다. ㅇ1455년(乙亥)에 세조가 왕위에 올라 4육신을 죽이고 1457년 (丁丑)에 단종 마저 돌아갔다. 세조가 다시 어명을 내려 공(公)을 찾았으나 병든 몸이라 칭하고 나가지 않으셨다. 세조실록에 의하면1458년(戊寅)에 삼등공신(三等功臣)이란 녹훈(錄勳)을 내리 고 또 다시 세조가 동궁(東宮)에 있을때 은혜가 있다하여 좌익원종권(佐翼 原從券)을 주었으나 받지않고 사위 이석 손(李碩孫)의 집에 숨어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 삼등공신(三等功臣) 녹훈(錄勳) - 삼등공신의 훈공을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함 * 좌익 원종권(佐翼 原從券) - 1455년 세조 즉위에 공을세 운 45명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좌익공신(佐翼功臣)이라 고 했고 죄익공신 보다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했다. [原從은 원래 元從 인데 태조 의 휘(諱)인 원(元)을 피해 고쳤다고 한다] ㅇ이 부분에서 종중요람 53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 으니 참고할 일이다. 수양이 1455년 왕위에 오르고 12월 27일 전지(傳旨)하기를 대호군 박연생(朴衍生)은 원종공신 (原從功臣) 3등에 록(錄)한다고 교서(敎書)를 내렸으니 교서 를 살펴보면 - 일자급(一資級)을 더해 주고 자손은 음직(蔭職)을 받고 후 세에까지 죄를 지으면 너그러이 용서한다(宥罪) - 공신가운데 통정대부 이상은 자손, 형제, 생질, 사위가운데 에서 한 사람을 자원에 따라 산관(散官) 일자급(一資級)을 더하여 주고 죽은 자에게는 각기 본 등에 의하여 시행하고 일자급(一資級)을 추증한다. -죄를 범하여 산관이 된 자는 일자급을 더하여 주어 서용 (敍用) 하며 영구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자에게는 벼슬길에 통함을 허락한다. - 고신(告身)을 거둔 자는 돌려주고 첩의 아들은 한품(限品)을 작용하지 말고 공사천인(公私賤人)은 모두 천인을 면하게 하 고 사천(私賤)은 공천(公賤)으로 보상하게 한다.
ㅇ공은 본관을 아예 태인(泰仁)으로 고쳐버리고 밀성(密城)이 란 본관을 쓰지 않았다. 이는 명리에 뜻이 없음을 나타낸 것 이며 의롭지 못하게 왕위를 찬탈 한 무리들과 함께 어울 리기 싫었던 것이다. *태인의 유래 : 공의 증조할아버지 거인(居仁)께서는 고려 말에 소감(少監) 벼슬을 하시다가 전라도의 인의현(仁義 縣)으로 귀양을 가셨다. 인의현(仁義縣)에 인접하여 태산현(泰山縣)이 있었는데 거 인께서 그곳 태산현으로 옮겨 2대를 살면서 본관을 태산 (泰山)으로 고쳤다. 공의 할아버지 승봉께서는 고려가 혁 명을 당하자 은둔하셨으며 공의 부친 덕명(德明)께서 태종 2년(1402)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3품 벼슬에 까지 올 랐다. 조선왕조는 국초에 전라도의 태산현과 인의현을 합 하여 태인현(泰仁縣)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그래서 오늘의 태산박씨는 태인박씨의 별칭이 되었다. 공의 아버 지 덕명께서 3품벼슬에 올랐다가 태인으로 낙향하여 다시 공과 더불어 전남 소곡(小谷)마을로 들어 가셨고 공은 대 호군 벼슬을 하시다가 수양대군을 주축으로 한 신진정치 세력과 뜻이 맞지 않아 그들을 피해 장성 사위 집으로 낙 향, 은둔함으로서 충의를 지켰던 것이다. ㅇ공이 담양땅 서쪽 월산(月山)아래 사위 이 석손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그곳에 장사하고 장성군 호산에 있는 아버지 (德明)의 무덤 아래 장사지내지 않았다. ㅇ공이 돌아가신 후 300여년 만에 대동보(大同譜) 사업을 시 행할 때 본관을 다시 구관(舊官─→密城)으로 하였다. 공에 대한 사적은 동사열전(東史烈傳)과 오산지(鰲山誌) 담 양지(潭陽誌) 창평지(昌平誌) 등에 기록되어 전한다고 한 다. ㅇ돈재공에 대한 사적 .후손 동직(東稷)이 공(公)의 사적과 인적사항을 기록한 지 석(誌石)을 묻었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이있다. |
<돈재공지묘( 遯齋公之墓 )>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
◎장능명신 돈재선생 전(莊陵明臣 遯齋先生 傳) <top> -9세손 매간(梅幹) 행중(行中)이 공(公)의 사적을 기록하고 세손익찬(世孫翊贊) 벼슬을 한 황 윤석(黃胤錫)이 썼다. *장능(莊陵)→ 단종 임금의 능을 뜻한다. *세손익찬(世孫翊贊) → 세손은 왕의 손자를 말하며 익찬 (翊贊)은 조선때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아보던 정6품 의 관직이다. *이 "전(傳)"을 쓴 연대를 '숭정 3년 을사 5월(崇禎 三年 乙巳 五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숭정은 청나라 의종 (毅宗)때 연호며 숭정 3년은 경오(庚午)년 이며 인조 8년 이요 서기 1630년이다. 따라서 기록에 착오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 황윤석은 언어학자로서 1729년(영조5년)에 나서 1791(정조15년)에 돌아갔다. 그가 1766년에 익찬벼 슬을 했으니 전(傳)을 쓴 년대는1766년 이후가 아닌가 싶 다. ◎장능절신 돈재선생 묘갈명(莊陵節臣 遯齋先生墓碣銘) -면암(勉庵) 최 익현(崔益鉉 : 1833 - 1906 ) 선생이 썼 다. 면암은 조선말 문신 학자며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 조약을 반대하고 전라북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 과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잡혀서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 사(斷食死)하였다. 저서에 면암집이 있다 ◎돈재박선생 사상(遯齋朴先生 事狀) -수남(秀南) 장흥(長興) 고 석진(高石鎭)이썼다. ◎1934년(甲戌)에 담양 월산에 재실을 세우고 한용(漢容), 균상(均庠)이 재기(齋記)를 썼다. ◎후손 동복(東福)이 특단의 관심과 노력으로 경주이씨 문 중으로부터 선산을 되돌려 받았다. ◎1971년(辛亥)에 영용(英容), 균옥(均玉), 학구(鶴求), 일구 (鎰求), 경구(暻求), 래설(來說)등이 석봉(石封), 비갈명(碑 碣銘), 문무석(文武石), 수석(獸石), 석등(石燈)을 격에 맞 게 세워 단장하였다. ㅇ 수 산 사 (水 山 祠) 1836년(헌종2년,丙申)에 창건 하였다. 공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교리(校理: 홍문관과 승문원의 종5품) 김개(金漑)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해 유회(儒會)의 결의에 따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수산리에 세웠다. 노사(蘆沙) 기 정진(寄 正鎭)선생 이 상량문(上樑文)과 축문(祝文)을 쓰고 부사(府使) 홍 영섭 (洪永燮)께서 예성축문(禮成祝文)을 섰다. [종중요람에는 1833년(순조34년 癸巳)에 창건했다고 기록됨)
<수산사 전경><top>
-1868년(고종
5년 ,戊辰) 국가 영(令)으로 수산사가 철폐되 었다.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할 때 47 개소만 남기 고 나머지 모두 없앤바 있다. -1979년(己未)
사론(士論)에 따라 장성 황룡면 신호리 302- 2에 석손(石孫) 래설(來說)
주최로 훼철된 수산사를 복 원했다. 그리고 돈재공외에 아곡 박수량(莪谷
朴 守良), 백우당 박상의(柏友堂 朴尙義), 눌헌 박상지(내訥軒 朴尙
智) 세분을 추가로 모셨다. 1986년(丙寅)에 돈암 박자온(遯 庵 朴自溫)을
다시 추가하여 모셨다. -예성축문(禮成祝文)과 상향 : 축문(常享祝文)은 산암(汕巖) 변 시연(邊 時淵)선생이 썼다. *
변 시연 : 전주대학교 교수인 박 하 섭의 장인이시다. ㅇ월 산 재 (月 山 齋) 1934년(甲戌)
봄 월산제를 짓고 후손 한용(漢容)과 균업(均 業)이 제기(齊記)를 썼다.
이씨 문중에 한때 빼앗겼던 선산 (先山)을 후손 금파(錦波), 동복(東福)이
되찾았다 ⑤
역 사
: 48세 문아(文雅)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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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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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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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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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19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2 世 ○ 돈재공(遯齋公) : 2 世 ① 휘(諱) : 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420 - 1480년 사이로 추정하며 조선 세종 2년 - 성종11년 무렵으로 본다. 공의 제사일은 음역 4월 29일 이며, 배(配)는 음역 2월 29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이시고 묘소(墓所)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상정(上頂)에 있으며 사정공(司正公)의 묘 우편 아래 3 층 계단에서 제1위 계좌(癸坐)다. 부인과 함께(合磡捽左) 모시고 비(碑) 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사정공(司正公) → 공의 조부 덕명(德明)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은
조선 성종때 어모장군(禦侮將軍)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 벼슬을
지내셨다. * 어모장군(禦侮將軍) : 조선 서반의 관계급으로 정3품 무관중 당하관을 칭하는 말 이다. 당상관은 절충장군(折衝 將軍)이다. * 호분위(虎賁衛):조선군제인 5위의 하나인데 5위는 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槐 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를 일컫는 말이다. *
대호군(大護軍): 돈재공(遯齊公)편 참조 ㅇ공은
또 사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수찬관(承政 院
左承旨兼 經筵修撰官)벼슬을 증직(贈職)으로 받았다. *증직(贈職):
종2품 이상 관원의 직계존속이나 충신, 효자, 학행이 높은 사람에게
그의 사후에 관작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80세가 넘는 관원과 90세가
넘는 백 성에게 주는 벼슬을 수직(壽職)이라 한다. ㅇ공의
여동생이 이석손(李碩孫)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석손은 돈재공(遯 齊公)의
사위가 된다. 돈재공께서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 (癸酉靖難)을
피해 장성으로 낙향할 때 바로 사위인 이석손의 집으로 급히 내려가
은둔하셨다. * 이석손 : 본관(本官)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사언(士彦)이요 호는 돈 암(遯庵)으로 벼슬은 사직(司直)에 올랐다. .사직(司直) - 조선군제의 5위(五衛)에 딸린 정5품의 군관이다(대호 군→부호군→사직→부사직의 순이다) 그는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 켜 단종 이 손위하자 장인 돈재공과 함께 담양 월산에 은거했으며 후일 숙 종때 월산사(月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좌빈객(左賓客) - 조선때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이서 근무한 관 원의 품계 인데 종1품, 정2품, 종2품등이 있다. 그는 또 고려말의 문신이요 학자인 익재(益齋) 이재현(李齋賢)의 후 손이기도 하다. 또 그의 아들은 이현동(李賢同)이며 손자에 이윤온 (李允溫)진사와 이윤양(李允良), 이윤공(李允恭)등이 있다. ·이재현
- 전집15권(益齋集)이 전하며 1911년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과 합본하여 발행된 바 있다. ⑤ 역 사(歷史) ㅇ47세 돈재공과 48세 문아(文雅)께서 살던 때는 조선 개국 초에서부터 조선 9대왕 성종 초기쯤으로 추상된다. 세종이 1397년에 출생하고 돈재공 출생을 1395년으로 추정하는바 위 두 분은 세종 - 성종 시대를 사신 것으로 본다. ㅇ1418년 22세에 영특한 청년군주로 등극한 세종은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많은 치 적을 쌓아 민족문화 창달과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1442년에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케 하였으며 혼천의, 해시계, 물시 계 등 각종 천문 과학기구를 발명케 하였다. 1443년에 훈민정음 28자를 제정, 1446 년에 이를 반포하여 오눌 날 한글이 있게 하였다. 다양한 서적편찬 사업이 활성화 되어 활자와 인쇄술이 발전하고 밀성박씨 박연은 국악을 종합, 정리하였다. 당시 북방정책에도 힘써 4군과 6진을 개척했으며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 하게 하여 영토확장과 주권확립을 꾀하였다. ㅇ한편
7대왕 세조는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니
이 난을 피해 돈재공이 장성으로 낙향함으로서 박씨 일문이 장성에 뿌리를
내리는 계 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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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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賢 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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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손 貴 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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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20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3 世 ○ 돈재공(遯齋公) : 3 世 ① 휘(諱) : 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445년 - 1505년 사이로 추정하며 조선 세 종27년 - 연산군11년 무렵으로 본다. 공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1월 17일 이며 배(配)는 음역 5월 15일 이다. (대동보에는 5월이 9월로 되어 있음)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이시고 묘소(墓所)는 전남 장 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에 있으며 공의 부친 승지공의 묘 아래 계좌(癸坐)다. 부인과 함께(合磡捽左) 모시고 비(碑)와 망주석(望柱石) 이 있다. * 정부인 : 2품 벼슬을 한 관원 부인의 품계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은 선략장군(宣略將軍)이시며 공의 사후에 손자 박수량(朴守良)의 관직이 고귀하여 나라에서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 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벼슬을 증직(贈職)하였다 ㅇ후손 재일 장복씨(在日 章福氏)가 문아, 현손 2대조의 묘역을 품계에 맞게 단장하여 묘비를 세웠고 비문은 황주 변시연(黃州 邊時淵)선생과 광산 이병현(光山 李炳玹)선생이 썼다. *선략장군 : 조선시대 종4품의 무관을 상,하로 나누어 상(上)을 정략장군, 하(下) 는 선략장군이라 하였다. *가선대부 : 종2품 벼슬의 관원의 품계 *동지사(同知事) :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등에 속한 종2품 벼슬로 보통 동지 00 사로 불렀다. *종중요람에는
이조참판을 병조참판으로 기록했는데 오류로 본다. ㅇ귀손(貴孫)-
공의 동생으로 관(官)은 참봉(參奉)이며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울산
김씨(蔚山金氏)이시다. 본손은 없고 외손이 번창했다. 사위는 김환(金丸)이요
외손 은 김영(金齡) 김기(金耆) 김질(金珫)이다. ⑤
역 사(歷史) -
50세 종원(宗元)참조 |
50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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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 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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亨 宗 형 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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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宗 이 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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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 宗 정 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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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 宗게 종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1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4 世 ○ 돈재공(遯齋公) : 4 世 ① 자(字) : 자간(子幹)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출생년대는 1470년으로 추정하며 돌아가신 해는 1527년 음역 3월 25 일로 중종 22년(丁亥)이며 명나라 가정(嘉靖) 6년이다. 배(配)의 출생년대 역시 1470년경으로 보며 돌아가신 해는 1542년 음역 3월 12일로 중종 37년(壬寅)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시고 묘소(墓所)는 전남 장성 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호산재(狐山齋) 서쪽 잣나무 비탈에 간좌(艮 坐)로 모시고 지석(誌石)을 묻었으며 비(碑)와 망주(望柱),상석(床石)을 세웠다. 부인은 공의 묘 위에 간좌(艮坐)로 함께 모시고 황주(黃州) 변 시연(邊時淵)선생이 묘문(墓文)을 찬(撰)하였다. * 정부인 : 2품 벼슬을 한 관원 부인의 품계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의 둘째 아들 박수량(朴守良)의 관직이 고귀하여 나라에 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동지의금부사(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同知 義禁府事) 벼슬을 증직(贈職)하였다. *지사(知事) : 의금부,성균관,춘추관등에 속한 정2품 벼슬로 보통 동지 00사로 불렀다. *동지(同知) : 지사(知事)의 보좌관으로 종2품관직. *종중요람에는 이조판서를 병조참판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註) : 공께서 처음 받은 교지에는 1537년(중종 32년-丁酉)에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셨는데 종중의 족보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동지의금부사로 기록되어 있다. <확인을 요하는 사항이다> ㅇ공은
5형제중 장남인데 동생분들은 형종(亨宗),이종(李宗),정종(貞宗), 계종(繼宗)등
이다. *형종:자손이 남원 식정(植亭)에서 살고 있다. *이종:자손이 고창과 광산 연동에 살고 있다.(밀성박씨 돈재공파의 고창 입향조 다) *정종:지손이 고창과 구례에서 살고 있다. *계종:자손이 경북 봉화와 안동에 살고 있다. 공은 조선시대 유명한 문신이요 학 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스승이신데 이황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 켰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도산서원을 창설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⑤ 역 사(歷史) ㅇ49세 현손과 50세 종원의 시대는 1445년경부터 1527년까지 인데 세종27년부터 중종 22년 사이다. 9대왕 성종과 10대 연산군 11대 중종시대를 약술한다. ㅇ성종(재위1469-1494)때는 유학을 장려하고 세조때 편찬한 법률 및 제도의 기초 서적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1474년에 완성하였다. 여지승람(與地勝覽), 동국통 감(東國通鑑), 악학궤범(樂學軌範)등을 편찬, 간행하고 두만강 변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사림파 (士林派)에 속한 인물을 과감히 등용하는 등 조선초기 문물 제도가 거의 이때 완성되었다. ㅇ연산군4년(1504년)에 유자광 등의 무고(誣告)로 김 일손등 많은 신진사류(新進士 類)가 처형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으며 1504년에는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사건과 관련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을 처형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 났다. 1506년 성희안 박원종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강화로 유배하고 진성 대군을 옹립하니 이가 중종이다. ㅇ중종(재위
1506-1544) 때는 조광조등 신진사류를 등용 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했
으나 반정공신인 훈구파들의 반발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이 후 간신들이 판을쳐 정국이 혼미하여 뚜렸한 치적이 없으나 소학(小學),
이륜행 실(二倫行實), 등 다방면의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
51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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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 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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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량 守 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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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공 守 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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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검 守 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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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女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2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5 世 ○ 돈재공(遯齋公) : 5 世 ① 자(字):군직(君直)이며 별호(別號)는 하남처사(河南處士) 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나 1488-1558년으로 추정하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8월 12일 이다. 공의 바로 아래 동생 수양(守良)의 생몰연대가 1491년(성종22년 辛亥)-1554년 1월 19일(명종9년 甲寅)로 분명하니 이로 미루어 공의 생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배(配)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7월 6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의인(宜人) 담양전씨(潭陽田氏)이시며 묘소(墓所)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증조부 승지공(承旨公 - 48世 文雅)의 묘 좌변에 부인과 함께(合磡捽左) 계좌(癸坐)로 모셨다. 지석(誌石)을 묻었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7대손 생원 봉장(鳳章)이 묘의 지석(誌石)을 지었다. * 의인(宜人) : 6품 벼슬을 한 관원 부인의 품계. 공께서는 9품 참봉 벼슬을 하셨으니 부인의 품계는 유인(孺人)이 맞으나 세보에 의인으로 되어 있으니 그대로 기록한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은 하남처사(河南處士)로서 학식과 덕망이 있다하여 나라에서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공은 실제로 출사하지는 않신 것으로 전한다. 공의 사적은 오산지(鰲 山誌)와 호남지(湖南誌)에 기록되어 있다.
ㅇ한편
세손(世孫) 익찬(翊贊) 벼슬을 한 황윤석 선생이 쓴 고려의 사 박공
승봉전(高麗義士朴公承奉傳)에는 공(公)을 선교랑(宣敎 郞) 경기전참봉이라
기록 하고있는데 승봉(承奉)은 고려말 분으로 47세 돈재공의 조부이시다.
*경기전(慶基殿):전북 전주시에 있는 루전(樓殿)으로 1442년(세종24년)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안치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임진난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년)에 전라도 관찰사 이경동이 증건 하였다. *경기전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 사적 제339호. 경역은 태조의 영정(보물 931)을 봉안한 경기전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당초의 전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한 것이다. 1771년(영조 47)에는 조경묘를 세워 이한 부부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경기전 정전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이다.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장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을 하였다. 이 첨각 기단의 동 ·서 ·남면에는 각 1개씩 계단을 두어 벽돌을 깐 보도와 연결하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있고,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과 조산(造山)을 만드는 등 광범위한 것이었다 *참봉(參奉):조선시대 원(園), 릉(陵), 내의원(內醫阮) 등에 속해 있던 종9품 벼슬이다.
ㅇ이분은 수온(守溫)의 바로 아래 동생이시다. 돈재공파 갈산문중의 직계 선조는 아니지만 장성 아치실을 근거지로한 박씨 문중의 청백리로 이름난 분이시며 세기를 초월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다. 또한 각종 백과사전에 청백리로 소개됨은 물론 국사(國史)의 주요인물 생몰(生沒) 연대표(年代標)에도 나오는 중요한 분이시기에 자세히 기록 한다. ㅇ생몰년대 : 1491년(성종22년 辛亥)에 나서 1554년(명종9년甲寅) 1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부인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나 돌아가신 날은 음역 4월 3일이다. 공이 돌아가신 해에 풍기 군수를 했고 백운동서원을 세웠던 주세봉 (周世鵬)도 세상을 떠났다. ㅇ배위 및 묘소: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무송유씨(茂松庾氏) 이시며 묘소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선조묘에서 청룡방향 산 기슭에 부인과 함께 축좌(丑坐)로 모셨다. 묘소 앞엔 조선 13대왕 명종이 청백리라 하여 내린 백비가 있고 망주(望柱),상석(床石)이 있다. 금호리에 있는 호산제(狐山齋)에서 보면 공의 묘는동쪽에 위치하는데 묘역 안에는 전라남도에서 세운 백비에 대한 문화재 안내문이 있어서 공의 일대기를 간략히 알아볼 수 있는바, 여기에 소개한다. <top>
금호리 백비(金狐里 白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105 호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이 비(碑)는 조선 명종때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로 이름난 정혜공 박수량 선생(1491 -1554)이 서거하자 명종께서 서해안의 암석을 골라 빗돌을 하사하였는데 비에 글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함을 잘못 전하는 결과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그대로 백비 (白碑)만 세웠다고 한다. 정혜공
박수량은 중종8년(151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8년간 참판, 판서등의 많은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청백리로 뽑혀 초자(超資)를
받았다. 뒤늦게 그의 청백함을 알게된 명종은 이곳 하남골의 양지바른 곳에
99칸짜리 집을 지어주고 청백당이라 하였으나 정유재란때 소실되고 백비(白碑)만
그대로 남아 있다.]
ㅇ공의 자(字)는 군수(君遂),호(號)는 아곡(莪谷)이시다. ㅇ공은 1513년(중종8년 癸酉) 22세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한 이래 1551년까지 38년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며 9품 말단에서부터 정2품 정승까지 승진하신 전형적인 행정관료이신데 공께서 거친 관직은 다음과 같다. - 주(註) : 아래 자료는 혹 순서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이견이 있으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1513년 진사시 합격 *1514년(중종9년甲戌) 문과(소과)급제(2명중 합 격)→승문원의 정자(承文院 正字; 외교기관의 정9품)→박사(博士;학 술전문직 정7품)→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호서도사(湖西都事; 충청남북도 관할 외직 종5품) *1522년 지평(持平;사헌부의 종5품) *1525년 고부군수(高阜郡守;지금의 전북 고부)→헌납(獻納;사간원의 정5품)→장령 (掌令;사헌부의 종4품)→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사간(司諫;사간원의 종3품)→사도(司導) - 주(註) : 사도(司導)는 궁중의 미곡과 장(醬)의 공급을 맡은 사도시(司導侍)를 뜻하는 것 같은데 공께서 거기에 근무하셨다면 종3품인 부정(副正)의 직(職)으로 사료된다. →사성 (司成;성균관 종3품) *1531년
보성군수(寶城 郡守)→통정대부 좌승지(通政大夫,
左承旨 ; 승정원정3품) *1534년 함경도 경차관(咸鏡道 敬差官) →공(公)께서 함경도 경차관(敬差官) 시절 지방관아를 순시중 안원보(安原堡) 권관(權管)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된 기록이 있음(인명록과 백과사전등에 보임) *1536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봉해지고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敎-정3품 당하관) 겸(兼)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종4품 ~정3품 당하관까지), 함경도 찰리사(察理使)로 나가 견항(犬項) 축조공사 감독 - 주(註) : 당시 견항(犬項)과 의항(義項) 공사가 있었음. *15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 정3품 당상관) 승진→ 의주(義州) 별전위사(別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 →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정3품 당상) → 좌승지(左承旨-승정원 정3품 당상관)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 종2품 :오늘날 재무부 차관), *1538년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공조참판(工曹參判)→예조참판(禮曹參判) <top> *1546년(명종1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官事 -춘추관의 종 2품) →중종 실록, 인종실록을 편찬. 동년에 청백리(淸白吏)가 되심. *1550년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건설장관)→호조판서(戶曹判書;정 2품 행정자치부장관)→예조판서(禮曹判書;교육부 장관) *1551년 담양부사 걸양(潭陽府使 乞養):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연 고지 부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 - 이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으로 노모를 봉양키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용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에 전직되어 노모를 봉양. *1552년 우참찬(右參贊)에 재임 - 주(註) :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아래 좌찬성(左贊成)의 바로 다음인 정2 품 벼슬이다. *1553년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 漢城判尹;정2품 서울시장)→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호조판서→형조판서(刑曹判書;법무장관)
ㅇ1805년(순조5년 乙丑)에 왕께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겸 지경연 수찬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 정혜(資 憲大夫 議政府 左參贊兼 知 經筵 修撰官, 五衛都摠府 都摠管 贈 貞惠) "라는 어서(御書)를 내리 셨다. 정(貞)은 청백수절 왈 정(淸白守節 曰 貞)이요,혜(惠)는 애민호여 왈 혜(愛民好與 曰 惠)라는 뜻이다. ㅇ정혜공은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초가집 하나 남기지 않은 청백리였다.명종임금께서 이를 아름답게 생각하시고 특별히 집을 지어주고 셈이름도 어정(御井)이라 내리셨다. 오로지 백성만을 사랑하는 마음과, 청렴결백한 공의 고결한 정신이야말로 가히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공직자들의 사표(師表)가 아닐 수 없다. ㅇ수공(守恭) * 공의 호는 목우당(牧牛堂)이며 1500년(庚申)에 출생하여 1561년(辛酉) 10월 15일에 돌아가셨다. 관은 참봉(參奉)이고 증직(贈職)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이시다.묘는 장성에서 영광으로 이전했는데 염산(鹽山) 한우산(寒牛山) 마을 뒤 건좌(乾坐)요, 방손(傍孫) 익구(謚求)가 묘문(墓文)을 지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1502년(壬戌) 출생하셨고 기(忌)는 8월 10일이며 묘는 공과 합폄(合窆)되었다. ㅇ수검(守儉) *관은 참봉(參奉)이시고,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광산김씨(光山金氏)며 묘는 장성군 황룡면 금호산(金狐山) 앞 기슭에 합장(合葬) 하였으며 상석(床石)이 있다. ㅇ여(女) *금성박씨(錦城朴氏) 신추(信樞)에게 출가 하셨다. 박신추는 진사(進士)며 자에 박단난(朴瑞鸞)은 문도사(文都事)이고, 박단봉(朴瑞鳳)은 문전적(文典籍)이다. ⑤ 역 사 : 53세 상겸(尙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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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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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 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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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침 士 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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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순 士 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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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女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3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6 世 ○ 돈재공(遯齋公) : 6 世 ○ 습독공(習讀公) : 1 世 ① 휘(諱): 사침(士琛)이며 자(字)는 도윤(道潤)이시다.(대동보에는 군윤 (君潤)으로 됨)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513년 - 1583년 사이로 추정하며 조선 중종8년 - 선조16년 무렵으로 본다. 공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12월 22일 이며, 배(配)는 음역 2월 14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상주박씨(尙州朴氏)이시고 묘소(墓所)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선조묘 아래 계좌(癸坐)로 부인과 함께 (合磡捽左) 모시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황주 변시연 (黃州 邊時淵) 선생과 광산 이병현(光山 李炳玹) 선생이 묘표명비(墓表 銘碑)를 썼다. * 숙인 : 정3품 당하관의 부인 품계 ④ 족칭(族稱) 및 유사(遺事) ㅇ공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訓練院) 습독관(習讀官)을 하셨는데 정3품 당하관 품계로 보다 낮은 직책인 습독관을 하셨 음으로 어모장군 행 훈련원 습독(禦侮將軍 行 訓練院 習讀)이라 칭한다. 품계는 높고 관직은 낮을 때 행(行)자가 들어간다. *훈련원 : 군사의 시재(詩才),무예연습,병서와 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 *습독관 : 훈련원, 사학(四學)등에서 강습하던 관원. ㅇ장성에서 갈라져 나간 각처의 문중에서 공을 파조(派祖)로 하여 1984년에 밀성박씨 습독공파 세보(密城朴氏 習讀公派 世譜)를 발간한 바 있다. ㅇ사영(士瑛) * 자(字)는 덕윤(德潤)이시며 참봉(參奉)을 지내셨다. 묘는 장성군 황룡면 호산동 해좌(亥坐)이다. 배위(配位)는 인제이씨(麟帝李氏) 애종(愛宗)의 여(女)이고 묘는 용적동(龍積洞)에 있다. ㅇ사순(士珣) * 자(字)는 옥윤(玉潤)이고 관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시다. 기(忌)는 정월 8일이며 묘는 장성군 북상면 용문동(龍門洞) 혹은 칭수보(稱水洑) 또는 칭도곡(稱道谷) 한주봉(閒柱峰) 아래 정좌(丁坐)다. 지석(誌石)을 묻고 수비(竪碑)를 했으며 망주상석(望柱床石)을 두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연일오씨(延日吳氏) 세심(世諶)의 여(女)이며, 기(忌)는 6월9일이며 묘는 공과 합부(合祔)이다. ㅇ여(女) * 선산유씨(善山柳氏) 연개(沿漑)와 결혼 했다. 유연개는 진사(進士)이며 이조정랑(吏曹正郞) 벼슬을 한 취암(鷲岩)유성춘(柳成春)의 아들이고 미암(湄岩) 희춘(希春)의 질(姪)이다. 자에 광운(光雲), 광문(光文)이 있다. ⑤
역 사 :
53세 상겸(尙謙) 참조 |
53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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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 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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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효 尙 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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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24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7 世 ○ 돈재공(遯齋公) : 7 世 ○ 습독공(習讀公) : 2 世 ① 휘(諱): 상겸(尙謙)이시고 자(字)는 백익(伯益) 이시다.[종중요람에는 자가 백개(伯盖)로 되 있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서기 1538 - 1608년 사이로 추정하며 조선 중 종33년 - 선조41년 무렵으로 본다. 공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2월 12일 이며 배(配)는 음역 9월 9일 이다. (대동보에는 공의 돌아간 날이 3월 22일로 기록됨)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이시고 묘소(墓所)는 전남 장 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선조묘 남쪽 기슭에 자좌(子坐)로 부인과 함께(合磡捽左) 모시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숙부인 : 정3품 당상관의 부인 품계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은 정3품 당하관인 통정대부겸 지 중추부사(通政大夫兼 知 中樞府 事)를 수직(壽職)으로 받았다. ㅇ공의
둘째 아들 윤부(允溥)가 종4품인 조산대부(朝散大夫)로서 종5품 이 맏는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을 했고 윤부는1562년(명종17년) 3 월 8일에
출생하여 1647년(인조25년) 11.4일에 가셨다. 후에 윤부(允 溥)의 충공(忠功)으로
공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를
증직(贈職) 받았고 공의 사적은 오산지(鰲 山誌)에 기록되어 있다. ㅇ상효(尙孝) * 자(字)는 인화(仁化)이시다. 1555년 가정(嘉靖) 을묘(乙卯)생이며 1582년 임오(壬午) 중에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를 하시고 1614년 갑인(甲寅) 5월 6일 돌아가셨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이시며 김진경(金振慶)의 따님이다. 1559년 기미(己未)에 출생하시고 1618년 무오(戊午)에 돌아가셨다. 묘는 장선군 남면 녹진동(鹿津洞) 뒤 야산에 에 해좌(亥坐)로 공(公)의 묘와 나란히 쌍봉(雙封)으로 모셨다. ⑤ 역 사(歷史) ㅇ51세 수온(守溫)은 조선 성종, 연산군, 명종 시대를 살다가 가셨고 52 세 사침(士 琛), 53세 상겸(尙謙)은 전형적인 명종, 선조때 분이시다. ㅇ명종(재위(1545-1576년)초에는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과 이 홍윤의 옥사(獄事)등이 일어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100여명의 선비들 이 참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수차(水車)를 제조하여 농사의 편의룰 도모하였고 전함을 건조하는 등
국 방대책을 수립했으며 경국대전의 원전과 속전을 간행하는 등 상당한
업적이 있었 다. ㅇ한편 1550년에 주세봉이 최초로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 書院)에 왕이 소수서원(紹 修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고 1554년에는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가변방의 모 든 일을 의논케 하였다. 1557년 4월부터 황해도 지방에 그 유명한 임꺽정의 당이 횡행하여 치안이 어려웠으나 1562년 1월 그를 포박 살해하였다. ㅇ조선 14대왕 선조(재위 1552-1608년)때는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6년의 정유재란 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어 국난극복의 어려움이 있었다. 52세 사침(士尙琛)께서 는 선조 때 분이시나 임진왜란 직전에 또는 임진왜란 중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 된다. 선조초에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쇄신에 노력하고 유학을 장려했으나 1575년 이후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야인과 왜구의 세력이
팽창했음에도 국방정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하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 을 당했다. 한편 명종, 선조 시대는 유학의 거장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고봉 (高峯) 기대승(奇大升), 율곡(栗谷) 이이(李珥)등이
살다갔고 이순신 장군, 송강 정 철, 토정 이지함 선생 등도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
54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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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允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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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부 允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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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발 允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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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함 允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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允 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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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풍 允豊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5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8 世 ○ 돈재공(遯齋公) : 8 世 ○ 습독공(習讀公) : 3 世 ① 자(字) : 양흠(良欽)이시고 호(號)는 동광(東光) 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출생 연대는 1574년(선조7년甲戌)이며 돌아가신 날은 1637년(인 조15년丁丑)
음역 2월22일 이다. 배(配)는 1575년(선조8년 乙亥)에 출생 하시고 1637년
음역 4월20일에 돌아 가셨다. 두분 모두 병자호란(인조 14년)이 일어난
다음해에 가신 것이다. (대동보에는 공의 돌아간 날을 6.21로 기록했는데
오류인듯 하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제주고씨(濟州高氏)이시며 고응정(高應井)의 여식(女息)이 다. 묘소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선영 아래 부인과 함께 자좌(子坐)로 모시고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때 공은 18세 어린나이였다. 국난을 당하여 충의로운 마음이 있어 나이 비록 어렸으나 예빈시(禮賓 寺) 에서 판관을 하고있는 둘째 형 윤부(允溥)의 근무처에 가서 종군 하였다. 윤부는 무과에 합격하여 조산대부 행 예빈시판관(朝散大夫 行 禮賓寺 判官)에 제수 되었는데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선무원종록훈(宣武原從錄勳)을 내렸다. * 예빈시 : 외교사절과 종친(宗親) 및 재신(宰臣)들을 접대하던 관아(官衙) 이다. * 판관(判官) : 종5품 벼슬
ㅇ1636년(인조14년)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나라가 위태로웠 다. 공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데 공은 이때 병환 중에 있었다. 공께서 거병(擧兵)하려 했으나 병으로 결과를 보지 못하고 다만 군량미를 모아 큰조카(長姪)인 취제(就悌- 공의 둘째형님 윤부의 자)와 공의 넷째 아 들인 취극(就克)에게 명하여 흥덕(興德)으로 가서 의소(義所)를 배풀고 군사들에게 양식을 원조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성에서 박씨 일문 이 흥덕 세곡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의소(義所) : 국난을 당하여 의병과 군량미를 모집하여 국난에 대처하던 곳. *취극(就克) : 공의 7형제 중 4째이며 1602년(선조35년 壬寅)에 출생했다. 공(公)은 효우충량(孝友忠諒)으로 대유절기(大有節氣)하신 분이라고 세보(世譜)에 전한다. 1624년 갑자(甲子)에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 토평(討平)에 참여 했고 1627년(인조5년 丁卯)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종5품)를 하시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만났다. 최명길등 화친론자와 결사 항전론자인 홍익환, 윤집, 오달재 등 3학사의 주장이 엇갈렸을 때 비밀히 병량(兵糧)을 모집 3학사와 더불어 청나라 군사(胡寇)를 막 기 위해 서북변경수비(赴防)를 한 관계로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기록되었고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종5품)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1637년 1월 강화가 실함 되었다. 이때 우의정 김상용, 전공조판서 이상길
등 관원이 자살했는데 취극(就克)도 정월 22일 그들과 함께 순절(殉節)했고 많은 부녀자들이
따라서 순절했다. 공(公)의 기록은 동사열전(東史烈傳)과 오산지(鰲山誌)
및 초산여지(楚山與誌)에 나와 있다. 후에 조정에서 순절(殉節)한 이들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강도순절인
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한편 공의 배(配) 숙부인(淑夫人) 문경송씨(聞慶宋氏)는 사로잡혀(被俘
-피부)
사내로부터 남편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듯고 역시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습독공파 세보에는 이일 가리켜 '제익야야(第翌夜也) 구불묘(俱不墓)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불묘(俱不墓) 란 두 분 모두 묘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 인데 자세한
내역은 알 수가 없다. 이 같은 난리 속의 감춰진 이야기는 나주(羅州)의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가 지은 비문(碑文)에 있다는데 박씨 일문의 강개 하면서도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ㅇ병자호란을 계기로 공과 공의 아들들이 장성으로부터 흥덕으로 이거 하 게 되어 지금의 고창군 신림면 세곡에 박씨 일문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ㅇ윤제(允濟) * 후손이 없으시다. ㅇ윤부(允溥) * 자(字)는 경흠(景欽)이요, 호(號)는 외암(畏庵)이시다. 1562년 가정(嘉靖) 임술(壬戌) 3월 8일생이며, 효우겸직(孝友兼直) 하시고 이행예규(履行禮規) 하시니 당시 인사들이 함면기덕(咸眠其德)하셨다. 등무과(登武科) 배 조산대부 행 예빈시판관(拜 朝散大夫 行 禮賓시寺判官)이시니 여지승람 (與地勝覽) 및 오산여지(鰲山與誌)에 기록이 되어있다. * 1647년 인묘(仁廟) 정해(丁亥) 11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86세 이셨다.배위(配位)는 영인(令人) 밀양손씨(密陽孫氏) 경오(景伍)의 따님이다. 1561년 신유(辛酉)에 출생하셨고 졸(卒)한 년대는 미상이나 기(忌)는 10월 12일 이다. 묘는 장성군 황룡면 호산(狐山)의 부모님의 묘가 있는 곳에 쌍봉(雙封)으로 모셨고 상망석(床望石)을 두었다. ㅇ윤발(允潑) * 초휘(初諱)는 인수(仁秀)요, 자(字)는 자어(子淤)이며 장성(長城)으로부터 나주(羅州)로 처음 입향(入鄕)하셨다. * 1566년 명종(明宗) 병인(丙寅)에 출생하시고 기(忌)는 2월1일이며 묘는 광산군(光山郡) 삼도면(三道面) 내산리(內山里) 산 289-1 대봉산촌(大鳳山村) 북록(北麓)에 신좌(辛坐)로 모셨다. 배위(配位)는 나주임씨(羅州林氏) 충언(忠彦)의 따님이며 묘는 공(公)의 묘와 합부(合祔)이다. ㅇ윤함(允涵) * 자(字)는 경행(景行)이고, 1568년 무진(戊辰)에 출생하시어 1630년 경오(庚午) 7월 5일 돌아가셨다. 배위(配位)는 의성김씨(義城金氏)요, 기(忌)는 5월12일이며 묘는 장성군 황룡면 호사동(狐寺洞)에 임좌(壬坐)로 공(公)의 묘와 합부(合祔)하였다. ㅇ윤풍(允豊) * 자(字)는 한문(漢文)이시다. 1590년 만력(萬曆) 경인(庚寅)에 출생 하셨으며 1654년 갑오(甲午) 9월 13일에 돌아가셨다. 배위(配位)는 고흥유씨(高興柳氏) 보태(寶泰)의 따님이며 1591년 신묘(辛卯)에 출생하시고 1657년 정유(丁酉) 8월 21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정읍(井邑) 부암(富岩)에 상하(上下)로 모셨으며 묘좌(卯坐)이다. ⑤
역 사
: 생 략 |
55 世 |
취장就章 |
- |
취신 就信 |
- |
就 逸 |
- |
취극就克 |
- |
취익 就益 |
- |
취흥就興 |
- |
취업就業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6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19 世 ○ 돈재공(遯齋公) : 9 世 ○ 습독공(習讀公) : 4 世 ① 자(字) : 자언(子彦)이시고 호(號)는 동강(東岡) 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출생 년대는 미상이나 공의 바로 아래 동생 취극(就克)의 정확한 생존 년대를 참고하면 1600년-1660년경으로 추정하며 선조33년(庚子)- 현종1년(庚子)무렵으로 본다. 또한 공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11월24일 이고 배(配)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2월17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남평심씨(南平瀋氏)이시며 직장(直長:종7 품) 심부(瀋浮)의 여식(女息)이며 묘소는 전북 고창 여소개(如所介)에 갑좌(甲坐)로 부인과 합장했다(公兆合捽) * 숙부인 : 종3품 관원 부인의 품계 ④ 족칭(族稱) 및 유사(遺事) ㅇ47세 돈재공(遯齊公)의 후손으로서 48세 문아(文雅)에서 54세 윤광(允 洸)까지 선조들의 묘소가 모두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모셔져 있다. 공의 묘소가 고창에 있는 것을 보면 공의 대에 장성으로부터 고창으 로 이거(移居)하여 고창 세곡(細谷)에 박씨의 한 지파가 뿌리를 내리 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보(世譜)에도 공의 형제들이 장성에서 흥덕 세곡으로 이거 했으며 공의 자 형노께서 숙부들을 따라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의 자 형노 께서 조실 부모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공께서 장성에서 돌아 가셨는 지 흥덕 세곡에서 돌아 가셨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아무튼 이때 우리 갈산박씨의 직선조가 세곡에 정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ㅇ공의관위(官位)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槐衛) 대호군(大護軍) 이시다. *대호군 : 정3품무관직,품계는절충장군 ※습독공파세보(世譜)에는
대호군을 부호군(副護軍)으로 기록했는데 절충장군과 품계가 맞지 않아
대호군으로 기록한다. ㅇ취장(就長) * 자(字)는 진옥(鎭玉)이시다. 1595년 선조(宣祖) 을미(乙未)에 출생하셨다. 1624년 갑자(甲子) 괄난(适亂-이괄의 난)에 돈적(遯跡)하여 금성산중(金城山中)으로 내거(仍居)하셨다. 증직(贈職)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이시다. 배위(配位)는 정부인(情夫人) 최씨(崔氏)이시며 묘는 나주 노안면 우산촌(牛山村) 뒤 우산등(牛山嶝)에 해좌(亥坐)로 모셨으며 공(公)의 묘와 쌍봉(雙封)이다. ㅇ취신(就信) * 자(字)는 여창(汝昌)이요,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요, 기(忌)는 8월 15일 이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며, 기(忌)는 9월 9일이다. 묘는 장성군 황룡면 호사동(狐寺洞) 산록(山麓)에 자좌(子坐)로 모셨는데 공(公)과 합부(合祔)이다. ㅇ취극(就克) * 7형제 중 4째이며 1602년(선조35년 壬寅)에 출생했다. 공(公)은 효우충량(孝友忠諒)으로 대유절기(大有節氣)하신 분이라고 세보(世譜)에 전한다. 1624년 갑자(甲子)에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 토평(討平)에 참여 했고 1627년(인조5년 丁卯)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종5품)를 하시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만났다. 최명길등 화친론자와 결사 항전론자인 홍익환, 윤집, 오달재 등 3학사의 주장이 엇갈렸을 때 비밀히 병량(兵糧)을 모집 3학사와 더불어 청나라 군사(胡寇)를 막 기 위해 서북변경수비(赴防)를 한 관계로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기록되었고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종5품)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1637년 1월 강화가 실함 되었다. 이때 우의정 김상용, 전공조판서 이상길
등 관원이 자살했는데 취극(就克)도 정월 22일 그들과 함께 순절(殉節)했고 많은 부녀자들이
따라서 순절했다. 공(公)의 기록은 동사열전(東史烈傳)과 오산지(鰲山誌)
및 초산여지(楚山與誌)에 나와 있다. 후에 조정에서 순절(殉節)한 이들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강도순절인
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한편 공의 배(配) 숙부인(淑夫人) 문경송씨(聞慶宋氏)는 사로잡혀(被俘
-피부)
사내로부터 남편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듯고 역시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습독공파 세보에는 이일 가리켜 '제익야야(第翌夜也) 구불묘(俱不墓)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불묘(俱不墓) 란 두 분 모두 묘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 인데 자세한
내역은 알 수가 없다. 이 같은 난리 속의 감춰진 이야기는 나주(羅州)의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가 지은 비문(碑文)에 있다는데 박씨 일문의 강개 하면서도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ㅇ취익(就益) * 자(字)는 여삼(汝三)이시다. 1612년 만력(萬曆) 임자(壬子)에 출생하시고 기(忌)는 11월 10일 이다. 묘는 장성 직소동(直所洞) 사좌(巳坐)이다. 배위(配位)는 남평반씨(南平潘氏) 현(現)의 따님이다. 1624년 갑자(甲子)에 출생하시고 기(忌)는 5월21일이며 묘는 공(公)의 묘 좌측에 손좌(巽坐)이다. <편집자 주 : 두 분의 나이 차이가 12년으로 너무 많다. 할머니의 출생은 혹 1614년 갑인(甲寅)으로 봄이 옳을지도 모른다. > ㅇ취흥(就興) * 자(字)는 등년(登年)이요, 호(號)는 풍곡(豊谷)이시다. 1623년 인조 계해(癸亥) 생이시며 1686년 병인(丙寅) 3월 6일에 돌아 가셨다. 묘는 어등산(魚登山) 서등구(西登區) 남방제봉(南方祭峰) 자좌(子坐)이다. 배(配位)는 제주양씨(濟州梁氏) 일수(逸秀)의 따님이시다. 을1625년 축(乙丑)년에 출생하시어 1688년 무진(戊辰) 4월 10일 돌아가셨다. 묘는 운제등(雲祭嶝) 계좌(癸坐)이다. ㅇ취업(就業) * 세보(世譜)에 기록이 없다. ⑤ 역 사 : 56세 형노(亨老)참조 |
56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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亨 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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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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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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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
○ 밀성대군(密城大君) : 27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0 世 ○ 돈재공(遯齋公) : 10 世 ○ 습독공(習讀公) : 5 世 ① 자(字) : 백수(伯未)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생몰년대는 미상이나 1640-1700년으로 추정하며 인조18년(庚辰)-숙종 26년(庚辰) 무렵으로 본다. 또한 공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7월 5일 이고 배(配)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10월 15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유인(孺人) 해주오씨(海州吳氏)이시며 묘소는 전북 고창 군 신림면 세곡리(細谷里) 앞에 있는 호암산(虎岩山) 아래 묘좌(卯坐) 로 부인과 각각 모셨다(公兆雙封)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은 참봉(參奉)의 직위를 가지신 것으로 되어있는데 참봉은 조선 때 각 관청에 소속된 종9품으로 최하위직이다. ㅇ부인은 통덕랑(通德郞: 정5품 문관직) 오명윤(吳命尹)의 여식(女息)이 며 부인의 조부는 오치순(吳致舜),증조부는 오황(吳璜)이다. 또 사인 (舍人) 선경(先敬)의 후손이며 현감(縣監:종6품)을 지낸 완산(完山) 김 협(金協)의 외손이시다. *사인(舍人) : 조선시대 의정부 소속 정4품 벼슬이다. ㅇ공은 3명의 누이가 있다. 세보에 공이 어려서 조실부모했다는 기록이 있는바, 공은 아마도 막내로 출생하신 듯 하다. 다음은 습독공파 세보에 있는 휘(諱) 형노(亨老)에 대한 묘표(墓表)의 일부를 소개한다. (묘표는 공의 10세손 갈산의 박 학래께서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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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君以 早失筐恃(父母) 爲至痛 語及親 輒流涕 壽亦不遐... |
부군이 조실호시 위지통 어급친 첩유체 수역불하 |
嘗於丙子亂 從叔 就悌 叔父就克以 仲父 允洸命 設義所于興德 |
상어병자란 종숙 취제 숙부취극이 중부 윤광명 설의소우흥덕 |
垮成罷兵仍居于 興之細谷 府君亦自長城 從 諸父而移寓於玆... |
구성파병잉거우 흥지세곡 부군역자장성 종 제부이이우어자... |
*형노께서
조실부모하여 의지하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양 친에
대한 말이 미치면 곧 눈물을 흘리셨고 수명도 길게 누리지 못하셨다. 일찍
이 병자호란 때 공의 종숙부 취제가 공의 숙부 취극과 더불어 작은아버지
윤광의 명을 받아 흥덕에 의병소(義兵所)를 베풀고 병량을 모아 군을 지원하였는데
청과 화친이 이루어지고 군사들도 파하게 되자 그대로 흥덕현 세곡에 눌러
살게 되었 다. 공역시 장성으로부터 아버지 벌되시는 분들의 항렬(취제,
취극 등)을 따라 세 곡으로 이사오셨다. ⑤ 역 사 (歷史) ㅇ55세 취일(就逸)과 56세 형노(亨老)께서는 조선 15대 광해군 때 부터 19대 숙종시 대를 사셨다. ㅇ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에 광해군 때는 교묘한 등거리 외교로 전란을 피할 수
있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난 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및 당쟁의 격화로 인해 국력이 쇠잔하였다. 그러나 대동법과 양전(量田)이
실시되 고 우암 송시열등이 배출되어 성리학의 전성기가 마련되었다. ㅇ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8년간이나 인질로 잡혀가 있던 효종은 1649년 즉위하자 북 벌계획을
진행했으나 재위 10년만에 돌아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현종(재위 1660-1674년)때는
인조의 계비(繼妃) 상복(喪服) 문제로 당론이 엇갈려 많은 유신 (儒臣)들의
희생이 있었다. ㅇ숙종(재위1674-1720년)때는
인조때부터 실시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토 지개혁을 완성하였고
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조정에서는 남인,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었고 서인은 또 노론,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숙종의 왕비 민 중전과
장희빈의 희생도 당파 싸움의 산물이었다. |
57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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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 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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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휘 重 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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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휘 德 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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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28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1 世 ○ 돈재공(遯齋公) : 11 世 ○ 습독공(習讀公) : 6 世 ① 자(字) : 경칠(敬七)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년대는1686년(숙종12년 丙寅)-1760년(영조36년 庚辰)이며 공 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10월 3일 이고 배(配)의 생몰 년대는 1683년(숙종 9년 癸亥)-1765년(영조41년 乙酉)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10월 15일 이다. *세보에는 공의 출생 연도를 현종 무인(戊寅)생으로 기록하고 배위(配位)는 계미(癸未)생 으로 기록 했는데 연대표와 맞지 않아 위와 같이 수정하였다. 현종조에는 무인(戊寅)년의 간지가 없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장택고씨(長澤高氏)이시며 묘소 는 전북 고창 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부락 안터 야산에 정좌(丁坐)로 부인과 함께 모 셨다(公兆合捽) 묘는 가막셈(烏井)을 향해 있으며 망주(望柱)와 상석 (床石)이 있다. *의인(宜人): 6품 관원의 부인 품계 ㅇ공의 묘는 손자 원양(元陽)께서 고창 세곡으로부터 상하로 모셔 왔다고 전 한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공의 관위(官位)는 사헌부(司憲府)의 정6품 관직인 감찰(監察)이시다. ㅇ매년 식목일인 4월 5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 (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ㅇ공의 장자 태남(台南)이 공의 큰형님 증휘(增輝)에 양자를 가 계보상 (系譜上) 출계(出系)된 것으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가계(家系)를 본래대로 바로잡는다. *
대동보인 밀성박씨 세보에는 시조왕 57세 이하의 계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57세 증휘(增輝) 57세 중휘(重輝) - 58세 태동(台東) - 59세 원양(元陽) - 60세 사진(思眞) - 61세 성백(成白) 57세 여(女).......... 김익명(金翊明)에 출가하여 아들 김세덕(金世德)을 둠. *
그러나 76년(丙辰)에 발간한 밀성박씨 도평의사공파 대동보에는 시조왕 57세
이하의 계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57세 증휘(增輝) 57세 중휘(重輝) 57세 덕휘(德輝)- 58세 태남(台南) - 59세 원양(元陽) - 60세 문진(文眞) - 61세 성수(成秀) ㅇ 증휘(增輝) * 자(字)는 여옥(汝玉)이시며 돌아가신 날은 음녁 6월3일 이고 배(配)의 돌아 가신 날은 음역 8월5일 이다. *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시며 정태영(鄭泰英)의 여식이다. 묘소는 백양동(白羊洞) 서쪽 산기슭에 자좌(子坐)로 위 아래에 각각 모셨다(公兆上下封). 대동보에 큰 부인이 나오는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최 명징(崔命徵)의 여식이며 역시 손이 없다. 손이 없음으로 공의 둘째 동생 덕휘(德輝)의 장남 태남(台南)으로 하여금 양자가도록 하였으나, 후 일 태남(台南) 후손들은 직선조인 덕휘(德輝)의 묘를 현세거지인 상하면으로 이장(移葬)하여 모시면서 증휘(增輝)의 묘는 모시지 않는다. 갈산문중 위토를 경작하는 신림면 세곡 일가들이 모시는 것이다. ㅇ중휘(重輝) * 자(字)는 명숙(明淑)이요, 기(忌)는 7월25일이다. * 배위(配位)는 창령성씨(昌寧成氏) 초벽(楚壁)의 따님이며 기(忌)는 9월 10일 이다. 묘는 흥덕남록(興德南麓) 용추동(龍湫洞) 뒤 노적봉(露積峯) 중앙에 사좌(巳坐)로 공(公)과 합부(合祔)이다. ⑤
역 사:
60세 문진(文眞)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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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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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 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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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서 台 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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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29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2 世 ○ 돈재공(遯齊公) : 12 世 ○ 습독공(習讀公) : 7 世 ① 휘(諱) : 상동(上同)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연대는 1712년(숙종38년壬辰)-1774년(영조50년甲午)이며 공 의 돌아가신 날은 음역 2월 3일 이고 배(配)의 생몰 년대는 1713년(숙종 39년 癸巳)-1774년(영조50년甲午)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3월 4일 이 다. 두 분이 같은 해에 1개월 사이로 돌아 가셨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이시며 김덕일(金德一)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궁월촌(弓月村) 왼쪽 산기슭 사장등(射場嶝)에 신좌(辛坐)로 각각 모셨다(公兆雙封). 또 8세손 박래 성(朴來性) 등이 망주(望柱)와 상석(床石)을 세웠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매년 식목일인 4월 5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 (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 박씨 후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ㅇ공의 묘혈(墓穴)은 활터에서 활을 쏘는 무관혈(武官穴) 이기에 후손들 이 전쟁에 나가도 전사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황해(黃海)를 등지 고 있기도 한데 산등성이 바로 아래에 가려져 있어서 황해로부터 바람 이 세차게 불어와도 일단 묘소에 당도 하면 바람이 없고 안온(安穩)하 다. ㅇ공은 장남이지만 출계(出系)하여 백부 증휘(增輝)의 뒤를 이었다. 옛날 에는 출계 하려면 예조(禮曹)에 청원하고, 자손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 이라 하여 예조에서 입안한 문서를 동지사(冬至使)가 중국황제에게 가 져가면 황제가 하늘에 고유(告由)한 다음 예조에서 허가하였다. 그러나 큰아들은 양자로 출계할 수가 없도록 하였는데 종종 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출계 하기도 하였다. ㅇ태서(台西) * 자(字)는 공숙(公淑)이요, 1714년 숙종 갑오(甲午)생이며 기(忌)는 4월5일이다. 묘는 고창군 신림면 세곡 선영(先塋) 아래 묘좌(卯坐)다. *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1722년 임인(壬寅)생이며 기(忌)는 9월 6일이고 묘는 공(公)과 합폄(合窆)이다.
ㅇ자는 여옥(汝玉)이시며 돌아가신 날은 음녁 6월3일 이고 배(配)의 돌아 가신 날은 음역 8월5일 이다. ㅇ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시며 정태영(鄭泰英)의 여식이다. 묘소는 백양동(白羊洞) 서쪽 산기슭에 자좌(子坐)로 위 아래에 각각 모셨다(公兆上下封). 대동보에 큰 부인이 나오는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최 명징(崔命徵)의 여식이며 역시 손이 없다. ⑤ 역 사: 60세 문진(文眞) 참조 |
59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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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 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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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30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3 世 ○ 돈재공(遯齋公) : 13 世 ○ 습독공(習讀公) : 8 世 ① 자(字) : 원일(元一)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출생년대는 1730년(영조6년 庚戌)이다.돌아가신 해는 미상이나 1790년(정조14년 庚戌)으로 추정하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6월6일이다. 배(配)의 생몰년대는 1732년(영조8년 壬子) - 1795년(정조19년 乙卯)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9월9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시며 이동배(李東培)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부락앞 송라에 간좌(艮 坐)로 부인과 함께 나란히 각각 모셨으나(公兆 捽左雙封). 1999년 3월 묘소를 합조(合兆)하고 석축을 쌓았다. ㅇ공의 묘 바로 우측에 공의 자(子) 문진(文眞)의 묘와 자부(子婦) 청도김 씨(淸道金氏)의 묘가 또한 나란히 각각 모셔져 있었으나 역시 1999년 3 월 묘소를 합조(合兆)하고 석축을 쌓았다. 묘소를 단장하기 전의 모습 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갈산부락쪽 송라쪽→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 하고 있다. ㅇ밀성박씨습독공파세보(密城朴氏習讀公派世譜)에공(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自興德細谷移寓長沙焉] 이 말대로라면 공께서 흥 덕 세곡으로 부터 장사(長沙)라는 곳으로 임시로 몸을 붙여 사셨거나 아예 곧 바로 이사하여 정주 하셨다고 볼 수 있다. 공께서 세곡을 떠나 장사현으로 오신 것은 공의 출생년도로 미루어 1750년 - 1760년대가 아닌가 추측되며, 세곡은 당시 고창현 관할이 아 니고 흥덕현 관할이었다. ㅇ그렇다면
장사현(長沙縣)이 어떠한 변혁을 거쳤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 다. 우리들의
고향인 상하면은 원래 장사현에 속한 지역이다. 이 장사 현은 백제시대에
상노현(上老縣) 이었는데 통일신라에서 장사현으로 고 쳐 고려시대까지
계속되다가 1417년(조선 태종17년 丁酉)에 인근의 무 송현(茂松縣)과
합하여 무장현(茂長縣)되었다. 1530년(중종25년)에 발간 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장현의 관할에 선운산, 고리포, 구시 포, 대죽 도, 소죽도,
고산등이 나오고 1895년 이후 발간한 '신증문헌비 고'에는 심원(心元)과
현재 상하면의 장자산(莊子山)이 등장한다. 무장 현은 1895년(고종32년
乙未)에 무장군이 되고 1914년에 흥덕군, 고창군, 무장군을 병합하여
고창군으로 되었다. ㅇ우리 갈산박씨 일문이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께서 지금의 고창군 신림면 세곡(細谷)으로부터 상하로 오심으 로서 비롯된 것이나 공께서 곧 바로 갈산에 정착하셨는지 또는 장사현 의 다른 곳에 우거(寓居)하시다가 갈산에 오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갈산은 원래 양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공께서 장사현으로 오심으로서 후손이 갈산에 들어와 양씨 문중과 교체되고 박씨가 정착, 번성한 것이 다. 아무튼 공쎄서 1750년 - 1760년대에 장사현으로 오신 것으로 사료 되는바, 갈산박씨의 전통은 250년이 되는 샘이다. ⑤ 역 사: 60세 문진(文眞) 참조 |
60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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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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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31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4 世 ○ 돈재공(遯齋公) : 14 世 ○ 습독공(習讀公) : 9 世 ① 자(字) : 은진(恩眞)이시다. [대동보에 자(字)가 사진(思眞)으로 되고 호(號)는 시중(時中)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76년(丙辰)에 발간한 밀성 박씨 도평의사공파 대동보에는 자(字)만 사진(思眞)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84년(甲子) 밀성박씨 습독공파 세보 발간시에 은진(恩眞)으로 바로 잡았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출생년대는 1749년(영조25년 己巳)-1812년(순조12년 壬申)이며, 돌 아가신 날은 음녁 7월14일이다. 배(配)의 생몰 연대는 1748년(영조24년 戊辰)-1810년(순조10년 庚午)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9월28일 이다. ※ 공의 출생 년도를 습독공파 세보에는 영조 을사(乙巳)로 했으나 기사(己巳)로 바로 잡는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청도김씨(淸道金氏)이시며 김성삼(金成三)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산부락앞 송라에 부친 묘옆에 간좌(艮坐)로 부인과 함께 나란히 각각 모셨으나(公兆捽左雙封) 1999년 3월 묘소를 합조(合兆)하고 석축을 쌓았다. ㅇ공의
묘 바로 우측에 공의 부(父) 원양(元陽)의 묘와 모(母) 전주이씨 (全州李氏)의
묘가 또한 나란히 각각 모셔져 있었으나 역시 1999년 3월 묘소를 합조(合兆)하고
석축을 쌓았다. ④ 관위(官位)및 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 하고 있다. ⑤ 역 사 ㅇ57세 덕휘(德輝)→58세 태남(台南)→ 59세 원양(元陽) →60세 문진(文眞)까지의 시대 는 1686년에서 1812년 사이 이며 이 분들은 조선 19대 숙종, 20대 경종, 21대 영 조, 22대 정조, 23대 순조 시대를 살다 가셨다. ㅇ경종(재위 1720-1724년)때는 경종이 무자다병(無子多病) 하여 왕위계승 문제로 1721 년 -1722년 사이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이 실각하는 등 당쟁이 극에 달 했다. ㅇ영조(재위 1724-1776)에 이르러 당쟁의 피해를 막기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정개혁을 단행하고 낙형(烙刑), 난장(亂杖)등 악형을 금지했다. 또한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백성들의 언로를 열고 조총훈련, 총포제작, 토성수축 등 국방경영에 충실을 기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여 학자를 양성하는 등 문화사업도 활발했 다. 그러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파쟁(派爭)의 희생물이 되어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이 있었다. ㅇ정조(재위1776-1800)때 역시 당쟁의 격화를 방지하기 위해 탕평책을 계속 썼다. 초 기에 홍국영이 세도정권을 장악하여 어지러웠으나 곧 축출되었고 1791년에는 신해 사옥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최초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규장각 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량하고 서적편찬에 힘써 '증보동국문헌비고' '대전통편' '국조 보감' 등이 간행되었고 문치(文治)에 노력하여 조선후기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였 다. ㅇ순조(재위1800-1834)때는
외척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정치, 사회가 문란했 다. 외척의
쇄도정치는 국가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3정(三政) 문란이 가속화되었고 1811년 홍경래난을 비롯하여 많은
모반사건과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1815년과 1827년에 천주교 탄압으로
많은 천주교도가 순교 했으며 이 시대를 분기점으로 조선 후기의 역사는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
61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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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 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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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32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5 世 ○ 돈재공(遯齋公) : 15 世 ○ 습독공(習讀公) : 10 世 ①
자(字) :
윤칠(允七)이시다. [대동보에는 보첩명이 성백(成白)으로 되고 자(字)가
여백(汝伯)으로 되어 있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년대는 1767년(영조43년 丁亥)-1843년(헌종9년 癸卯)이며, 돌 아가신 날은 음역 10월20일 이다. 배(配)의 생몰 년대는 1766년(영조42년 丙戌)-1836년(헌종2년 丙申)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6월 14일 이다. 한편, 두 분의 돌아가신 날이 기록마다 다른데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달성서씨(達成徐氏)이시며 서기중(徐棋中)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부락 앞 '배더리 야산'(舟 橋嶝)에 유좌(酉坐)로 부인과 함께 모셨다(公兆合磡). 망주(望柱)와 상 석(床石)이 있다. ④ 관위(官位) 및 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 하고 있다. ㅇ공은 효행이 지극하여 천거로 향도에 나아갔다[ 以 孝行登鄕道薦] * 향천(鄕薦): 고을의 인재를 추천하는 일인데 주로 향교에서 향천장(鄕薦狀)을 주 었다. (당시는 무장향교) ⑤ 역 사 : 63세 참조 |
62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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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엽 萬 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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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필 萬 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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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성대군(密城大君) : 33 世 <top>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6世 ○ 돈재공(遯齋公) : 16 世 ○ 습독공(習讀公) : 11 世 |
갈산에 박씨들이 번창하게 된 것은 위 두 분들로 비롯된다. 지금부터는 후손들이 급격히 분열번창 함으로 각 계통별로 면수(面數)를 달리 지정하여 편집하였고 특히 64세부터는 주민등록개념에 의하였으니 혼동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문서가 파일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 가 지시하는 곳을 잘 클릭하여야 한다. |
만엽(萬燁) ------ ☞ 여기를 누르면 신라 시조왕 63세로 이어 집니다. |
① 자(字) : 도일 (道 一 )이시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년대는 1813년(순조13년 癸酉)-1877년(고종13년 丁丑)이며, 출생 일은 음역 9월 14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5월 3일이다. ㅇ첫 배(配)의 생몰 년대는 1815년(순조15년 乙亥)-1884년(고종21년 5甲申) 이며 돌아가신 날은 음역 10월 26일 이다.(76년 대동보에는 12월 17일 로 됨) ㅇ두
번째 배(配)의 생몰 년대는 1827년(순조27丁亥)-1899년(광무3년 己亥)
이며, 출생 일은 음역 3월 4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월 13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첫 부인이 광산김씨(光山金氏)이시며 김성술(金成述)의 여 식(女息)이고, 두 번째 부인은 낭주최씨(郎州崔氏)이시며 최준태(崔俊 太)의 여식(女息)이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부락 안터 야산에 간좌(艮坐)로 양부인과 함께 모셨다(公兆合磡). ㅇ묘소
오른편에 공의 동생 만필(萬弼)의 묘소가 나란히 있으며 망주(望 柱)와
상석(床石)이 있다. * 참고로 이 전(前의) 묘소를 기록 한다. - 공의 묘소 : 무장면 방계산(方溪山) 등성에 건좌(乾坐)로 모심 - 첫 부인 : 홍농면 망덕산(望德山) 아래 미좌(未坐)로 모심 -
둘째 부인 : 갈산부락 욕오등(浴烏嶝)에 건좌(乾坐)로 모심 ④족칭(族稱및 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4월 5일(식목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 제(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⑤ 역 사 : 63세 종용(宗容)참조 |
만필(萬弼) ------ ☞ 여기를 누르면 신라 시조왕 63세로 이어 집니다. |
① 자(字) : 대유(大有)이시며 호(號)는 송재(松齋)이시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년대는 1820년(순조20년 庚辰)-1900년(광무4년 庚子)이며, 출 생 일은 음역 9월 13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0월 14일이다.(대동보 에는 돌아가신 날이 9월 25이로 기록됨) ㅇ배(配)의
생몰 년대는 1821년(순조21년 辛巳)-1913년(일제 4년 癸丑) 이 며, 출생
일은 음역 4월 12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2월 4일 이다. [대동보에는
돌아가신 날이 1889년(己丑) 2월 3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보 기록이
맞는 것으로 사료된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이시며 김원재(金元載)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부락 안터 야산에 간좌(艮坐)로 부인과 함께 모셨다(公兆合磡). ㅇ묘소 왼편에 공의 형님 만엽(萬燁)의 묘소가 나란히 있으며 망주(望柱) 와 상석(床石)이 있다. *
참고로 이 전(前의) 묘소를 기록 한다. - 공의 묘소 : 영광군 홍농면 독고미(犢顧尾) 경좌(庚坐)로 모심 - 부인의 묘소 : 공과 함께 모셨음. ④ 족칭(族稱및 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4월 5일(식목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후손들이 시제(時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 대동보 병(丙) 2편 49면에 공의 관위(官位)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즉, 정3품 당상관 벼슬을 사후에 증 직(贈職)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인의 품계는 숙부인(淑夫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76년 대동보 기록부터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⑤ 역 사 : 63세 종용(宗容)참조 |
[62세 만엽(萬燁)]-------------------------------------------에서 계속] ↓ ↓ ↓ |
6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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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용 恒 容 |
- |
진 용 振 容 |
- |
희 용 喜 容 |
○ 밀성대군(密城大君) : 34 世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7世 ○ 돈재공(遯齋公) : 17 世 ○ 습독공(習讀公) : 12 世 |
① 자(字) : 내원(乃元)이시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년대는 1855년(철종6년 乙卯)-1916년(일제7년 丙辰)이며, 출 생 일은 음역 5월 4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2월6일이다. 배(配)의 생 몰 년대는 1856년(철종7년 丙辰)-1918년(일제9년 戊午)이며, 출생 일은 음역 5월 14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2월 19일 이다.(76년 대동보 에는 돌아가신 날이 11월 19일로 되어 있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시며 이문엽(李文燁)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 갈산부락 뒤 천용(天龍) 아래 건좌(乾坐)로 부인과 함께 모셨다. ④족칭(族稱)및유사(遺事)---희용(喜容)참조
*
대동보 병(丙) 2편 49면에 공의 관위(官位)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증 통 훈대부 사헌부 감찰(贈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 즉, 정3품
당하관 벼슬을 사후에 증직(贈職)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인의
품계는 숙인(淑人)이 되는 것 이다. 그러나 76년 대동보 기록부터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또 감찰은 정6품이 요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인데
품계와 직책이 맞지 않다. ⑤ 역 사 : 63세 종용(宗容)참조 |
진용(振容)-----☞ [직계보 64세로 연결] [62세 원위치로 되돌림] |
① 자(字) : 처원(處元)이시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년대는 1860년(철종11년 庚申)-1906년(광무7년 癸卯)이며, 출 생일은 음역 12월 13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8월 3일이다. 배(配)의 생몰 연대는 1861년(철종12년 辛酉)-1924년(일제15년 甲子)이며, 출생 일은 음역 9월 3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8월3일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영광정씨(靈光丁氏) 정태엽(丁泰燁)의 여식이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고산부락 뒤 석수동(石水洞)에 묘좌(卯坐)로 모셨 다. ④족칭(族稱)및유사(遺事)---희용(喜容)참조 ⑤ 역 사 : 63세 종용(宗容)참조 |
희용(喜容)-----☞ [직계보 64세로 연결] [62세 원위치로 되돌림] |
① 자(字) : 창원(昌元)이시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년대는 1868년(고종5년 戊辰)-1913년(일제4년 癸丑)이며, 출생 일은 음역 10월 29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7월 14일이다. 배(配)의 생몰 년대는 1869년(고종6년 己巳)-1929년(일제20년 己巳)이며, 출생 일 은 음역 11월 4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9월 13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시며 김의심(金義心)의 여식(女息)이 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망태골(望太洞)에 유좌(酉坐) 로 모시고 부인은 고창군 무장면 목우리(牧牛里) 야산에 유좌(酉坐)로 모셨다 ④ 족칭(族稱)및유사(遺事) 61세 성수(成秀)께서는 1767년 - 1843년의 기간을 사셨는데 18세기 후반부터 19세 기 전반부에 걸친 생애에 해당한다. 만(萬)자 행열(行列)인 62세 만엽(萬燁), 만필(萬弼) 두 분께서는 각각 1813년-1877 년과 1820년- 1900년의 시간대를 사셨는 바, 전형적인 19세기 분이라고 할 수 있 고, 조선 23대 순조,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때에 해당한다. 그리고 용(容)자 행열(行列)이며 63세인 항용(恒容), 진용(振容), 희용(喜容), 종용(宗 容), 석용(碩容), 기용(奇容)께서는 1844년 - 1929년 사이를 사신 분들인데 조선 24 대왕 헌종 때부터 일제시대 중기까지이며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생애다. 64세이며 행열(行列)이 균(均)자 이신 분들은 모두 열 분인데1864년- 1978 년 사이의 시간대이며 조선 26대왕 고종이 등극한 다음 해부터다. 행열(行列)이 구 (求)자이며 65세 인분들은 모두 스물 여덟 분인데 1880년대부터 사신 분들로 1999 년 현재 3분 정도가 생존해 계신다. 이하 66세 래(來)자 행열, 67세 섭(燮)자 행열, 68세 정(廷)자 행열, 마지막으로 69 세 중(中)자 행열은 1900년 이후 출생하여 이미 돌아갔거나 현재 대부분 생존하고 있는 세대다. ⑤ 역 사( 歷史 ): 종용(宗容)참조 |
[62세 만필(萬弼)]--------------------------------------------에서 계속] ↓ ↓ ↓ |
6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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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용 宗 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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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용 碩 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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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용 奇 容 |
○ 밀성대군(密城大君) : 34 世 ○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 27 世 ○ 돈재공(遯齋公) : 17 世 ○
습독공(習讀公) : 12 世 |
종용(宗容)-----☞ [직계보 64세로 연결] [62세 원위치로 되돌림] |
①자(字) : 기원(基元)이시고 호(號)는 송남(松南)이시다. [대동보에는 자 가 태원(泰元)으로 기록 되어 있다]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년대는 1844년(헌종10년 甲辰)-1900년(광무4년 庚子)이며, 출 생 일은 음역 8월 20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8월 11일이다. (대동보 와 76년보에는 돌아가신 날이 8월 21이로 됨) 배(配)의 생몰 년대는 1841년(헌종7년 辛丑)-1907년(순종1년 丁未)이며, 출생 일은 음역 10월 13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3월 7일 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시며 조희송(趙希松)의 여식(女息)이 시다. 또 중추부사(中樞府事) 조세진(趙世振)의 손녀요 청송(靑松) 심만 택(沈晩澤)의 외손이시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 안 터에 부인과 함께 유좌(酉坐)로 모셨다. ㅇ공(公)의 묘 바로 우측에 공의 장남 균업(均業) 공(公)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④ 족칭(族稱)및유사(遺事) ㅇ매년
양력 4월 5일(식목일)에 갈산에 정주(定住)하여 사는 공의 바로 직계
후손들이 묘제(墓祭)를 모시는데 전국에 진출하여 사는 갈산박씨 후손들도
참여하고 있다. 묘제는 기금을 조성하고 그 발생 이익금으로 지낸다.
*
대동보 병(丙) 2편 49면에 공의 관위(官位)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 嘉善大夫 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즉, 종2품 당상관 벼슬을 사후에 증직(贈職)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인의 품계는 정부인(貞夫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76년(丙辰) 대동보 기록부터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ㅇ61세 성수(成秀)께서는 1767년 - 1843년의 기간을 사셨는데 18세기 후 반부터 19세기 전반부에 걸친 생애에 해당한다. 만(萬)자 행열(行列)인 62세 만엽(萬燁), 만필(萬弼) 두 분께서는 각각 1813년-1877년과 1820년- 1900년의 시간대를 사셨는 바, 전형적인 19 세기 분이라고 할 수 있고, 조선 23대 순조, 24대 헌종, 25대 철종, 26 대 고종 때에 해당한다. 그리고 용(容)자 행열(行列)이며 63세인 항용(恒容), 진용(振容), 희용 (喜容), 종용(宗容), 석용(碩容), 기용(奇容)께서는 1844년 - 1929년 사 이를 사신 분들인데 조선 24대왕 헌종 때부터 일제시대 중기까지이며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생애다. 64세이며 행열(行列) 이 균(均)자 이신 분들은 모두 열 분인데1864년- 1978년 사이의 시간대 이며 조선 26대왕 고종이 등극한 다음 해부터다. 행열(行列)이 구(求) 자이며 65세 인분들은 모두 스물 여덟 분인데 1880년대부터 사신 분들 로 1999년 현재 3분 정도가 생존해 계신다. 이하 66세 래(來)자 행열, 67세 섭(燮)자 행열, 68세 정(廷)자 행열, 마 지막으로 69세 중(中)자 행열은 1900년 이후 출생하여 이미 돌아갔거나 현재 대부분 생존하고 있는 세대다. ⑤ 역 사( 歷史 ) 0 신라 시조 왕부터 60세까지 내려오며 역사적 사실을 약술함으로서 선조들께서 살다 가신 시대적 환경을 부분적으로나마 조명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61세부 터 마지막 69세 까지를 포괄적으로 약술하는데 년대로는 1834년부터 현재까지가 해 당된다. 그러면 18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 24대왕 헌종(憲宗)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적 사실을 63세 용(容)자 행렬(行列)에서 간략히 기술하고 이하는 끝내고자 한다. 0 헌종(憲宗:재위 1834년-1849년)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24대왕에 즉위하자 순원 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며 1839년에는 기해교난(己亥敎難) 이 일어나 프랑스 신부 3명을 포함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1841년에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삼정문란(三政紊亂)과 국정혼란으로 민생고 (民生苦)는 가중되었다. 1846년에 프랑스 세실 함대가 내항하여 프랑스 신부 살해에 대한 항의가 있었고 1847년에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 항의 서한에 회신한바 있는데 서양에 대한 첫 공식 문서였다. 0 조선 25대왕 철종(哲宗: 재위 1849년 -1863년)시대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들이 주축 이 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이 재위 14년간 여색에 빠져 결국 병사하였으며 급기야 1862년에는 진주민란이 일어 나서 각지에 파급되기에 이르렀 다. 0 조선 25대왕 고종(高宗:재위 1863년-1907년)시대는 어느 때 못지 않는 풍운의 시대 였다. 철종이 죽자 안동 김씨들은 후계자에 대한 대책이 없었고 흥선대원군이 재빠 르게 12세 된 그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섭정 하게 되니 세 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시대는 왕권강화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동양을 침범하는 서양 제국 세력에 대하 여 문을 닫고 쇄국의 길을 가느냐 개화하여 문호를 개방하느냐의 정치적 갈등 속에 서 많은 정변으로 국력이 쇠잔(衰殘)해져 가는 때이기도 했다.1866년에는 병인양요 (丙寅洋擾)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였고 1854년에 일찍이 개항한 일본은 1868년 이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는 강화도를 침범한 미국함대를 격퇴하였고 1873년에 는 민비와의 대립으로 대원군이 실각했으며 1876년에는 강화도에서 일본과 병자수 호조규(丙子修護條規)를 조인(調印)하였는데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이때부터 일본의 조선강점을 위한 책동이 가시화 되었다. 같은 해 부산항이 개항되었으며 잇따라 인 천 원산 등을 개항하였다. <top>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고 영선사(領巽使)를 청나라에 파 견하여 신 문물을 수입함으로서 개화에 기치를 올렸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일어나서 민비가 청주로 피신하고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사를 끌어들이는 계기 가 되었다. 1884년에 김옥균 등 개화당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민씨 정권이 계속되었다. 1894년에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들에 의해 동학난이 일어나 수십만의 인명살상이 있었으나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에 따른 획기적인 내정개혁과 전통적인 양반체제가 철폐되어 신분타파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학교도 들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 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청(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조선은 일본의 독무대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弑害) 되었고
이는 의 병들이 궐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연 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즉위했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 保護條約)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했으며 1907년 해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황제직 에서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0 순종(純宗:재위 1907년-1910년)이 즉위하자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군 대를 해산하였으며 1910년 8.29일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 約)이 체결됨으로서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0 이후 한반도는 36년간 일제강점(日帝强占)기에 있었으며 1914년-1918년은 제1차 세 계대전이 일어났고,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시위가 확산되 었다. 1939년-1945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주축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 본이 패하였고 한반도는 '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0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었고 독립군들의 활약이 눈부시긴 했 으나 연합군에 의해 결정적인 광복을 맞은 한반도는 38선을 가운데 두고 이북은 구 소련군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다시금 분단의 비극을 안았다. 1948년 8월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그해 9월 이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 국을 선포함으로서 한반도 는 남북분단의 시대로 접어들어 반세기가 넘도록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1950년 이후는 생략함] |
석용(碩容)-----☞ [직계보 64세로 연결] [62세 원위치로 되돌림] |
① 자(字) : 흥원(興元)이시고 호(號)는 심송(心松)이시다.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top> ㅇ공의 생몰년대는 1848년(헌종14년 戊申)-1882년(고종19년 壬午)이며, 출 생일은 음역 7월 18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2월 14일이다.(대동보 에는 돌아가신 날이 24이로 기록됨). 배(配)의 생몰 년대는 1848년(헌종14 년 戊申)-1899년(광무3년 己亥)이며, 출생 일은 음역 8월 20일이고 돌 아가신 날은 음역 8월 18일이다.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능성주씨(綾城朱氏)이시며 주인범(朱仁範)의 여식(女息)이 시다. [대동보에는 능성(綾城)이 능주(綾州)로 됨] 묘소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 갈산 부락 뒤산에 부인과 함께 묘 좌(卯坐)로 나란히 각각 모셨다.(捽左雙封) ④ 족칭(族稱)및유사(遺事) ㅇ공은 효행이 지극하여 향천장을 받으셨다.(孝行登薦) 일재(一齋) 정홍채 (鄭泓采)가 공의 행장(行狀)을 짓고 죽산(竹山) 안종선(安鍾宣)이 묘문 (墓文)을 지었다. ⑤역 사(歷史) : 63세 종용(宗容)참조 |
기용(寄容)-----☞ [직계보 64세로 연결] [62세 원위치로 되돌림] |
①자(字) : 치원(致遠)이시고 호(號)는 송호(松湖)이시다. [대동보에는 자 (字)가 치원(致元)으로 됨] <top> ② 생몰년대(生沒年代) ㅇ공의 생몰 년대는 1855년(철종6년 乙卯)-1929년(일제29년 己巳)이며, 출 생 일은 음역 4월 8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1월 4일이다. 배(配)의 생몰 연대는 1854년(철종5년 甲寅)-1925년(일제16년 乙丑)이며, 출생 일 은 음역 1월 16일이고 돌아가신 날은 음역 12월 2일 이다. (76년보에는 돌아가신 날이 10월 2일로 됨) ③ 배위(配位) 및 묘소(墓所) ㅇ배위(配位)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시며 황종호(黃鍾浩)의 여식(女息)이 며 중추부사(中樞府事) 황장원(黃墻源)의 손녀이시다. 묘소는 전남 장성 군 서삼면 취암리(鷲岩里) 송계(松溪)부락 뒤에 해좌(亥坐)로 부인과 함 께 모셨다.(合磡) ④ 족칭(族稱)및유사(遺事) ㅇ공의 관위(官位)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시다. * 가선대부 : 종2품 관원의 픔계 * 참판 : 종2품으로 오늘날의 장관아래 차관급이다. *
대동보 병(丙) 2편 53면에 공의 관위(官位)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도사승 (都事陞)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 즉, 종5품 도사(都事)에
올랐고 종2품 당상관 벼슬을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인의
품계는 정부 인(貞夫人)이 되는 것이다. 이 벼슬이 사후에 증직(贈職)한
것인지 현직에 재임 하신 것인지 확실치 않으며 76년(丙辰) 대동보 기록부터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⑤역
사(歷史)
: 63세 종용(宗容)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