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 충의사(忠 義 祠)

 

1. 충  의  사(忠義祠)               2. 울산 임란의사 향제 봉행            3. 경주임난의사 추모공원

 

산 사람들의 호국충정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충의사(忠義祠)는 울산광역시 학성공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봄- ‘춘향대제’와  가을-‘추향대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몸바쳐 왜적과 싸운 선열의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당초 춘향제는 울산 임란 전투중 병영성을 탈환한 날인 5월 7일에 봉행하고, 추향제는 도산성의 왜병이 철수한 날인 11월 18일에 봉행하기로 했으나,

전국에 있는 원, 사, 당, 제에서는 춘 • 추 제향으로 봉행하고 있으므로,   울산 충의사에서도 이에 준한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춘 • 추 제향일을 봄과 가을 절후에 맞게 4월 15일과 10월 15일로 정해 2005년부터 봉행하고 있습니다.

충의사에는 227위의 임란공신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훈등 1등, 2등, 3등의 공신록권을 받은 분들과, 임란때 현저하게 공이 많은 의사분들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그 분들에 대한 명칭은 통칭으로 의사(義士)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충효사에 임난의사 박언복  공과 그 아들 박인립공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그 분들은 명종때 호조판서를 하셨으며  청백리로 유명한  박수량 선생의 손자와 증손자가 되십니다.

이제 충의사에 가서 두 의사분들을 뵙고  지극한 충성(精忠)과 , 순수한 효성(純孝)을 기려보시기 바랍니다.

 

 

 ▲ 충의사 출입문과 비각 입니다.

 

 

 ▲ 창의문(彰義聞)인데 맨 처음 접하는 출입문 입니다.   top

 

 

 ▲ 창의문을 지나면 우측에 자료실이 있고 상충문(尙忠門)이 나옵니다.    top

 

▲ 상충문을 지나면 바로 충의사(忠義祠) 앞마당에 이릅니다.     top

 

 ▲ 선무원종 3등공신 박언복 공의 위패입니다.(중앙)    top

 

 ▲ 선무원종 1등공신 박인립 공의 위패입니다.(중앙)    top

 

▲ 충의사가 있는 울산광역시 학성공원 위치도면입니다.   top

 

     2. 울산 임란의사 향제 봉행  

▲ 2005년 4월 15일 충의사 춘향제 봉행 장면입니다.      top

 

 

울산 임란의사 ‘춘향대제’를 열며

 

 

 400여년전 임진의사들이 이념과 상관없이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때 자발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나라사랑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두고두고 기려야 할 기본정신이다.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올리는 제의가 이들 의사들이 쌓은 공을 숭상·전승하는 한편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충의사는 임진왜란때 왜적 대군이 처들어온 길목인 울산 고을의 의사들이 난 초에 창의(倡義)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 전공(戰功)을 세운 의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그 충의를 추모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왜적대군이 부산포로 침범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차례로 함몰시키니 관군(官軍)은 적세에 겁을 먹고 흩어져 도망하여 울산도 차례로 점령 당했다.
왜적의 만행에 비분강개한 울산지방의 의사들은 분연히 창의하여 신라 때의 옛 성인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4월 23일에 결진하여 편대하였고, 이어 경주지방의 의병과 신흥사 승군(僧軍)도 찾아와 합진하였다.
그리하여 병영성을 점령하여 둔거하고 있는 적을 기습으로 시작한 항왜토적(抗倭討賊)은 선조 31년 11월 18일 최후로 왜적을 도산성(島山城)에서 격퇴할 때까지 전후(前後) 11진(陣)하여 21전(戰)한 전공으로 군(郡)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는 은전(恩典)이 내리고 울산 의사들의 전공을 치하하고 위무하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기록이 20여 회나 등재되었다.
울산광역시는 선조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997년 7월 사당건립에 착수하여 2000년 6월에 6,013㎡의 경역(境域)에 사당외 9동(棟)과 홍살문을 완공하여 충의사(忠義祠)라 이름하였다.
사당에는 울산 의사 227位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특히 이름없이 산화(散華)한 의사들을 위해 무명제공신위(無名諸公神位)를 함께 봉안 하였고 매년 봄·가을에 울산광역시민은 정성을 다하여 제향을 올리게 됐다.     
  top
                                                                                                                         - 서 진길   임란의사숭모회 이사장 - 

 

      

     임진왜란과 울산 의병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가와 민중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울산지역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남해안에 주둔한 가또오군과 최전선에서 맞서야 했던 지리적 여건 때문에 그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지역의 농·어민 등 백성들은 이런 어려움을 굳건히 이겨내며 왜군에 항전하였다.
유생 등 지도층 인사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지역의 요새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왜적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에는 도산성에서 농성하는 가또오군을 공격하는 관군에 협력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였고, 마침내 적이 물러가게 하였다.
고난을 극복한 울산지역의 군민(郡民)은 국왕으로부터 각별한 칭송을 받았고 많은 인사들이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울산은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후기 내내 그 읍격(邑格)이 높아진 영광을 안았다. 향토와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선조들의 영령은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오늘날에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관군이 일거에 무너진 울산에서는 선조 25년 4월 23일에 처음으로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의병에 결집하였다. 이들은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삼고, 좌익장에 박응정(朴應禎), 우익장에 장희춘(蔣希春), 좌위장에 고처겸(高處謙), 우위장에 이봉춘(李逢春), 찬획에 심환(沈渙), 종사관에 이한남(李翰南), 운량호군에 이경연(李景淵) 등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 후 5월 5일에는 경주에서 유정(柳汀), 유백춘(柳伯春)등이 5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5월 7일 밤에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병영성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고 군기 군량을 노획하거나 불지르고 산성으로 개선하였다.
이로써 울산 의병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이외에도 인근 각지에서 울산 의병에 의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에서도 울산의 공암(孔巖), 달현(達峴), 사자평(獅子坪), 관문성(關門城), 이견대(利見臺)와 경주의 문천(汶川),
소등(所等)과 대천제(大川堤) 전투 등은 후세에 이르도록 각종 문집과 실기 등에 남아 전해져오고 있다. 이 전투들은 대체로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치러졌고, 울산 의병의 용맹을 떨친 것이었다.
울산지역 의병장으로서 전술이 뛰어나 관군에 편입된 인물 중 특히 수전에서 많은 공을 세운 서인충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고, 장희춘은 울산군수의 군관으로, 이겸수(李謙受)는 좌병사 군관 북부주부(北部主簿)로, 김언복(金彦福)은 경상방어사 군관 주부로 제수되었다. 특이하게 울산의 백정(白丁) 장오석(張五石)같은 천인에게도 반드시 관직을 주라 한 기록이 있다.

왜군들은 정유재침시에도 왜란초기인 선조 25년과 26년에 후퇴한 후 동남해안에서 축성하여 농성하던 방식 그대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동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수성(守城) 작전에 들어갔다.


가또오는 결국 선조 31년 11월 18일에 울산성을 불태워 버리고 퇴각하였다. 서생포성까지 모두 빈 성으로 남겨 둔 채로 철군해 버린 것이었다.
전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자들을 엄격히 심사하여 세 종류의 공신들을 선정 포상하게 된 것은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르러서였다.
경상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울산읍민들이 왜적 토벌의 공이 가장 많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조 31년 12월 21일에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부사(府使)를 임명하였다.
이어 병영과 언양현을 울산부에 합속시키고, 동 33년(1600)에는 부사 아래에 판관(判官)직을 증설하였다. 판관은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할 때 그를 보좌하는 문신 막료이므로 당시에는 병마절도사가 울산부사를 겸했다는 뜻이 된다.
이 중 언양은 광해군 4년(1612)에 현으로 환원되었고, 판관도 동 9년(1617)에는 혁파되었다.


선조 31년 여름에 영남지방을 순회한 안무어사 이상신(李尙信)은 울산과 경주 의병들의 공로를 위로해 달라고 건의 하였다. 이에 따라 선조는 경상도관찰사 한준겸(韓浚謙)에게 명하여 주효와 포목 등을 갖추어 선무어사가 도착하는 날에 반급하고 호향(濠饗)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12월 27일에 선무어사 윤휘(尹暉)가 경주에 이르러 선유기사(宣諭記事)를 반포하고 의병 위로잔치를 열었다.
울산과 인근지역에서 선무원종공신으로 확인된 공신은 1등공신 7인, 2등공신 34인, 3등공신 53인 등 합계 94인이었다.
이 외에도 명장(明將) 마귀가 썼다는 창표당안(蒼表堂案)에 등재된 인물이 있고, 1971년 간행된 ‘울산울주지’에 실린 인물이 있는가 하면 ‘선조실록’, 박진남(朴震男)의 ‘회암실기(悔巖實紀)’, 서인충의 ‘망조당유사(望潮堂遺事)’에도 이름이 실린 인물이 있다.
그러나 이 명단도 정확한 것은 아니며,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따라 더 늘어날 수 있다.
여기에다 광해군 원년(1609), 현종 13년(1672), 숙종 13년(1687), 동 25년(1699)의 울산호적대장에 선무원종공신이라는 신분 표기를 최근 발견하여 공신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모두 94명이다. 이들 공신 혹은 의사들은 2000년 9월에 개관한 충의사(忠義祠)에 227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충의사  전경           

▲ 충의사에서 바라본 울산시내인데, 가운데에 태화강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3. 경주임난의사 추모공원  

 

경주시 황성공원에 임난의사 추모탑을 세우고 임난의사 추모식을 거행해 오고 있는데, 거기에도 의사(義士)박언복 공과 그 아들 박인립 공을 모시고 있습니다. 필자가 현장을 가보지 않았음으로  양세(兩世) 의사(義士) 본손 박형구님의 블록그 자료를 옯겨왔습니다.

 

▲ 경주임난의사추모탑전경(지난 6월9일 경주임난의사추모식에서)

 

▲ 이 공원의 위치는 황성공원 남단 옛 비행장터인데 "임난의사추모공원"이라 명명했습니다.   top

 

 

 

 

 학산공파(鶴山公派) 고(故) 박성규님(좌)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돈암공(遯庵公) 휘(諱) 자온(自溫) 후 종문회장

                         박용철님(중)과 학산공파 박일수님이 함께 헌화하기 위하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top

 

 

 

 

 
 

 

 Copyright(c) 밀성(밀양)박씨 돈재공파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