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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 보(族 譜)에  대 한   상 식

 

 

족보(族譜)를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보첩은 한 성씨 종족의 계통을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인데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의 원류(源流)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보첩의 종류는 다양한데 지금 이 홈페이지는 편제 자체가 한글세대를 위한 것으로 기존의 방법과 상이하여 보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 홈페이지의 내용은 일종의 향토지(鄕土誌촌) 성격으로서 박씨 일문의 삶의 터전이 된 갈산(葛山) 부락을 중심으로 역사, 문화, 지리적 배경을 기술하고 거기에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갈산 박씨 문중의 직계선조(直系先祖)의 계통을 첨가한 것이다. 따라서 홈의 명칭도 족보나 가보(家譜) 및 계보(系譜) 등의 명칭을 쓰지 않고 밀성박씨 돈제공파 갈산문중 총람(密城朴氏 遯薺公派 葛山門中 總攬)이라고 하였다. 이 홈의 내용은 향후 대동보(大同譜)나 족보 등을 편찬하는데 기초자료가 되는 역할을 충실히 할 것으로 본다. 아무튼 이 곳에서는 보첩에 대한 일반상식을 서술함으로서 우리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증진코자 한다.

 

 

 

1. 보첩의 기원  / 2.보첩의 간행 / 3. 보첩의 종류 / 4.보첩의 형태 / 5. 용어해설

 

 

 

보첩은 중국의 6조시대(六朝時代)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실에 관한 계통, 즉 제왕연표(帝王年表)를 기술한 것이다. 일반가문에서도 보첩을 갖게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선대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처음 이다.

그 뒤 위(魏) → 진(晉) → 남북조(南北朝) → 수(隨) 나라로 내려오는 동안 학문으로서 보학(譜學)을 연구하게 되었고 북송의 대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우리의 족보는 고려 제 18대왕 의종(毅宗: 1146년-1170년)때 김관의(金寬毅)가 편찬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뒤 족보를 체계적인 형태로 갖춘 것은 조선 제 9대왕 성종(成宗) 7년(서기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이고 지금과 같이 혈족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제 13대왕 명종(明宗: 1545년-1567년) 때 편찬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라고 하며 지금까지 전해 온다.

따라서 우리 박씨와 같이 특별한 가계 즉 왕계(王系) 이외는 1천년 이상의 족보를 기록 보존해 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족보는 20년 또는 30년 단위로 수정증보(修訂增補)하는 것이 보통인데 대체로 다음의 절차에 의한다.

㉮ 족보편집계획의 수립 - 족보를 새로 간행할 필요성이 대두되면 개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 종친회 및 회의개최 - 먼저 족보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족보편수(族譜編修) 세부계획을 수립, 결정한 후 종친들의 분포사항을 파악 한다.

㉰ 공고(公告) - 각 파(派)에 족보편수 계획을 널리 알려 일가의 대대적인 호응을 얻도록 한다.

㉱ 명단취합(名單聚合) -각 파별로 족보에 게재할 명단, 즉 단자(單子)를 제출 받는데 이를 수단(收單)이라고 한다. 단자에는 그 사람의 파계(派系), 출생, 사망년월일, 학력, 직업, 혼인관계, 사위, 외손 등 을 적어 보낸다. 이때 족보편찬 비용을 함께 보내는데 수단료(收單 料)라 하며 수단료는 1인당 일정한 금액을 정하는 것이 통례다. 수단료를 명하전(名下錢), 수단금(收單金), 단금(單金)이라고도 한다.

족보에 보면 특정 인물의 이름아래 단불래(單不來)라고 써놓고 그 후손들의 계통이 이어 있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단자(單子)와 단금(單金)을 내지 않아서 후손들의 이름이 빠진 것이다. 이 홈의 우리 문중 명단은 기존의 보첩내용을 정리하여 일가 여러분의 도움 을 받아 각 가정으로 하여금 확인케 한 후 필자의 컴퓨터에 수록해 놓은 것이다.

㉲ 원고정리 - 명단이 취합되면 각 파별계통을 분명히 하고 내용확인을 철저히 거쳐 오류가 없도록 해야 한다.

㉳ 출판 및 배포 - 정리된 원고는 출판사에 의뢰하여 간행하는데 인쇄 단계에서 교정을 철저히 보아야 한다. 배포는 각 파별로 한다.

 

상술한바와 같이 보첩의 종류는 다양하다. 여기서는 그 유형별로 보첩의 성격을 달리 기술코자 한다.

㉮ 대동보(大同譜) - 같은 시조(始祖)이하 동계혈족(同系血族)의 원류 (源流)와 그 자손 전체의 분파(分派) 관계를 기록한 계통록(系統錄) 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시조 밑의 중시조(中始祖) 마다 각각 다른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에 종합 편찬된 족보이다. 즉 본관은 각 기 다르되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보책인 것이다.

㉯ 족보(族譜)- 관향(貫鄕)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수록한 보첩이다. 즉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가계(家系)의 연속을 실증 (實證)한 것이다. 족보는 모든 보첩의 대명사로서 쓰여지기도 한다. 우리 문중으로서 족보는 신라 시조왕 29세손으로 신라 제54대왕을 지낸 경명왕(景明王, 제위 917년-924년)의 첫 왕자 휘(諱) 언침(彦 )으로부터 시작되는 밀성박씨 보첩을 말한다.

㉰ 세보(世譜)와 세지(世誌) - 세보는 한 종파 이상이 동보(同譜) 또는 합보(合譜)로 편찬되었거나 어느 한 파속(派屬)만이 수록되었을 경우이며 이를 세지(世誌)라고도 한다. 우리 갈산문중은 밀성박씨습독 공파세보(密城朴氏習讀公派世譜)가 있다.

㉱ 파보(波譜) -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속만의 이름, 휘자(諱 字), 사적(事蹟)을 수록한 보책이다. 필자가 집필한 <밀성박씨돈제공파 갈산문중총람>은 이 계통의 성격이 강하다.

㉲ 가승보(家乘譜) -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한다.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존속과 비속에 이르기까지 이름자와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을 편찬함에 있어 그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 책 또한 가승보의 성격이 강하다.

㉳ 계보(系譜)-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낸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이 홈의  "밀성박씨 돈 제공파 갈산문중 계보 요약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의 표현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을 말한다.

㉵ 만성보(萬姓譜)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 구실을 한다. 가장 널리 참고되는 것은 1925년의 민형식(閔衡植)편과 1931 년의 윤식구(尹植九)편으로서 만성대동보가 있다.

 

보첩의 형태는 행용줄보라 일컫는 종보(從譜)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횡간보(橫間譜)가 있다. 횡간보는 5대를 1첩(疊)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며 지면을 6간식으로 꾸미는 것이 보통이다.

이 홈은 일반 족보편집 양식을 탈피하여 정리되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보면 자신의 계통과 대수, 촌수계산에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다음의 요령에 의하여 읽으면 이해가 빠르다.

○먼저 이 홈의 신라박씨갈산문중계보총설에서 신라시조왕 부터 시작되는 계통도(系統圖)를 눈여겨본다.

○이어서 "밀성박씨 돈재공파 갈산문중계보 요약도"를 보고 그다음 "밀성박씨돈재공파 갈산문중 상세보(詳細譜)"를 보면 자신에 대하여 알고 싶은 사항이 나온다.

 

㉮ 시조(始祖). 비조(鼻祖). 중시조(中始祖) - 시조(始祖)는 제일 처음의 선조(先祖)로서 첫 번째 조상이며 비조(鼻祖)는 시조 (始祖)이전의 선계조상(先系祖上) 중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 시조이전의 계(系)가 없을 경우에 한하여 시조를 정중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비조라고 말하는 수도 있다. 또 중시조(中始祖)는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 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종중(宗中)의 공론에 따라 정하여 추존한 사람이다. 따라서 자파(自派)단독의 주장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문의 시조, 비조, 중시조는 다음 과 같다.

 

* 시조(始祖) -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 )

본관(本貫)의 연원을 근거로 한다. 이분은 박혁거세의 29세손인 신라 54대 경명왕의 큰아들로 밀성대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밀양 (密陽 = 密城)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 비조(鼻祖) -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

박씨 전체의 유일한 시조(始祖)가 되신다. 보통 박씨의 시조는 박 혁거세라고 말하나 본관을 기준으로 할 때는 비조가 되신다.

 

* 중시조(中始祖)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언상(彦祥)

밀성대군 8세이신데 고려때 국방 최고회의 기구인 도평의사(都 平議事)를 하시고 밀직군(密直君)으로 봉(封)하여 졌다.

㉯ 선계(先系)와 세계(世系) - 선계(先系)는 시조이전 또는 중시 조이전의 조상을 말하고 세계(世系)는 시조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계통의 차례를 말한다.

㉰ 선대(先代)와 말손(末孫) - 선대는 조상의 여러 대를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보첩에 있어서 선대는 시조이후 상계(上系) 조상을 총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말손(末孫)은 선대라는 말에 반하여 후대(後代) 즉, 하계(下系)의 자손을 말하는데 이들에 대한 보첩의 부분을 손록(孫錄)이라고 한다.

㉱ 세(世)와 대(代) - 시조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라고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로하여 올라가는 것을 대라고 한다. 따라서 자기의 조상을 몇 대조(代祖) 할아버지라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로부터 몇 세손(世孫)이라고 한다.

 

 

대(代)의 경우

①나→

②부→

③조부→

④증조부→

⑤고조부

0대

1대

2대

3대

4대

 

 

 

 

 


세(世)의경우

①나←

②부←

③조부←

④증조부←

⑤고조부

5세

4세

3세

2세

1세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조 할아버지는 나의 4대조가 되시며 나는 고조 할아버지의 5세손이 된다. 대의 경우에는 나를 빼고 세의 경우에는 나를 포함한다.

한편 세와 대는 구분 할 필요가 없다는 설이 있고,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 갈때는  나를 빼고 1대, 2대로 쓰고 내려갈 때도 역시 나를 빼고 1세,  2세로 쓴다는 설이 있다.    차제에 문중 차원의 정설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이름자 - 요즈음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호적명 하나로 통용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여러 가지로 불렀다.

·아명(兒名) - 출생 후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이다.

·자(字) - 20세가 되면 요즈음의 성년식과 같이 관례(冠 禮)를 행하는데 식을 주례하는 주례자가 예식을 거행하며 지어준 이름이다.

·항명(行名) - 항렬자에 따라 보첩에 올리는 이름이다.

·별호(別號) - 따로 행세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웃어른의 이름자를 말할 때 결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함자(銜字), 휘자(諱字)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름자 사이에 자(字)를 넣어 부르거나 글자 뜻을 풀어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함자(銜字) - 살아 계신 웃어른의 이름을 일컫는다.

·휘자(諱字) - 돌아가신 웃어른의 이름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박 천문(朴 天文)을 일컬을 때 " 천(天)자, 문 (文)자 입니다."라고 하거나 "하늘천(天)자에 글월문(文) 자를 쓰십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높여 존대할 경우 존칭사(尊稱詞)를 쓴데 그 용도가 각각 다르다.

·씨(氏) - 성명 또는 이름 밑에 붙이며 아호에는 붙이지 않는다.

·선생(先生) - 성명 또는 아호 밑에 붙인다.`

·장(丈) - 남자의 직함이나 아호(雅號) 밑에 붙여서 어른 이란 뜻을 나타낸다. 노인장(老人丈) 존장(尊丈) 형장(兄丈) 등으로 쓰인다.

㉳ 항렬(行列)과 항렬자(行列字) - 항렬이란 같은 혈족 사이에 세계(世系)의 위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문중율법 (門中律法)이다. 항렬자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세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라 고도 한다. 같은 세대에 속하면 4촌이든 8촌이든 촌수에 관계없이 같은 돌림자를 써 형제관계를 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가 항렬자를 비교해 봄으로서 촌수와 상하관계를 알게 된다.

항렬은 장손(長孫)일수록 낮고 지손(支孫)일수록 높다. 또 항렬은 가문과 파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쓰나 대게 다음과 같다.

·십간(十干)순으로 쓰느 경우 - 갑(甲). 을(乙). 병(丙). 정(丁)을 순서 대로 쓴다.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쓰느 경우 - 자(子). 축(丑). 인(寅). 묘(卯)을 순서대로 쓴다.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 일(一). 이(二). 삼(三). 사(四)을 순서대 로 쓴다.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을 쓰는 경우 - 금(金). 수(水). 목(木). 화 (火) .토(土)의 상생변화를 순서대로 쓴다. 이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요즘 세대는 산업사회의 속성상 문중이 서로 흩어져 살고 족보에도 관심이 없어 아이들 이름 지을 때 촌수와 항렬을 무시하고 짓는 관계로 집안간에 같은 이름이 많은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 사손(嗣孫)과 사손(祀孫) - 사손(嗣孫)은 한 집안의 종사(宗嗣), 즉 계대(系代)를 잇는 자손을 말한다. 사손(祀孫)이란 봉사손(奉祀孫)의 준말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을 말한다.

㉵ 후사(後嗣)와 양자(養子) - 후사(後嗣)란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계대(系代)를 잇는 자손을 말한다. 계대(系代)를 이을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보첩의 이름 밑에 작은 글씨로 무후(无后)라고 쓴다. 양자로 출계(出系)하였을 경우는 출후(出后)라 쓰고 서얼(庶孼) 즉 첩의 자손으로서 적자(嫡子)로 들어와 입적(入嫡)하였을 때는 승적(承嫡)이라 쓰며 후사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 후부전(后不傳) 등으로 그 이유를 쓴다.

옛날에는 출계, 즉 양자하려면 예조(禮曹)에 청원하고, 자손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하여 예조에서 입안한 문서를 동지사(冬至使)가 중국 황제에게 가져가면 황제가 하늘에 고유(告由)한 다음 예조에서 허가하 였다. 그러나 큰아들은 양자로 출계할 수가 없도록 하였는데 종종 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출계 하기도 하였다.

㉶ 시호(諡號) - 시호(諡號)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국가에서 추증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 대상은 왕(王)과 종친 (宗親), 정2품 이상의 문무관(후에는 정2품 이하까지 확대됨), 국가에 특별히 공이 많은 신하, 학문이 뛰어나 존경받는 유학자 등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요 퇴계선생의 시호는 문순공 (文純公)이다.

㉷ 생졸(生卒) - 족보에는 생졸(生卒)을 틀림없이 기록하는 법인데 생 (生)은 출생을 말하고 졸(卒)은 사망을 말한다. 이 홈페이지에서는 생졸년대를 생몰년대(生沒年代)로 기록하였다. 다른 뜻은 없고 졸(卒)자 보다는 몰(沒)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관(弱冠), 즉 20세 이전에 사망 하면 요절(夭折) 또는 조사(早死)라 하여 조요(早夭)로 표시한다. 70세 이전에 사망하면 향년(享年) 00이라 기록하고 70세를 넘어 사망하면 수(壽) 00이라고 방서난(旁書欄)에 기록한다.

㉸ 배필(配匹) - 배필(配匹)이란 배위(配位), 즉 배우자(配偶者)를 말한다. 우리 문중에서는 돌아가신 분은 배(配)자로 표시하고 생존한 배우 자는 실인(室人)이란 뜻에서 실(室)자로 표시한다. 그러나 이 홈페이지에서는 시조왕부터 시조왕 64세까지는 배위(配位)로 통일하여 기록하고 시조 왕 64세 균(均)자 항렬부터는 모두 처(妻)라고 표기하였다.

㉹ 분묘(墳墓) - 분묘(墳墓)는 시신을 매장하는 형태로서 시대와 나라, 지방 또는 문화상태, 계급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풍수지리설에 의거하는데 산을 뒤로 업고 남쪽을 향하며 산의 줄기는 좌로는 청룡(靑龍) 우로는 백호(白虎)를 이루고 앞에는 물이 흐르며 주산의 약간 높은 부분에 위치하고 앞은 몇 층의 단상(壇狀)을 이루면서 주위에 호석(護石)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사대부(士大 夫)의 무덤 주위에는 무덤 앞에 한 쌍의 돌기둥 즉 망주(望柱)를 세우고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 즉 석인(石人)을 배치하였으며 묘 앞에 제물을 놓기 위한 상석(床石)과 묘표(墓表) 신도비(神道碑) 또는 묘비 (墓碑). 묘갈(墓碣)을 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묘소(墓所) - 묘소는 분묘의 소재지를 말하는 것이다. 보첩에는 묘(墓)자만을 기록하고 반드시 좌향(坐向), 즉 묘의 방위를 기록하며 석물(石物)이 있는 경우 이를 표시하며 합장(合葬)의 여부 등도 기록한다. 좌향은 대개 ○좌(○坐)로 표시하는데 예를 들어 자좌(子坐)인 경 우 자(子)는 오행으로는 수(水)요 방위는 정북(正北)이며 색깔은 흑색 이다. 따라서 방위상 정북을 등졌다는 뜻이므로 이 묘는 정남방(正南 方)을 바라보고 있다. 또 간좌(艮坐)의 경우는 동북방을 등졌음으로 서남방(西南方)을 바라보게 된다. 또 좌우는 사자(死者)를 중심으로 하는바 묘를 바라보는 사람의 좌우(左右)에는 정반대가 되며 좌는 동쪽 우는 서쪽이 된다.

보첩에서 합봉(合封), 합묘(合墓), 합폄(合) 등으로 기록한 것은 부부 를 한 봉분으로 합장(合葬)했다는 뜻이고 쌍봉(雙封)은 같은 묘소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두 봉분을 나란히 만들었다는 뜻이다.

·묘비(墓碑)와 비명(碑銘) - 묘비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돌에 새겨서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의 총칭이며 비명(碑銘)이 란 비(碑)에 색인 글로서 명문(銘文) 또는 비문(碑文)이라고 도 하는데 여기에는 고인의 성명, 본관, 원적, 성행(性行), 경력 등의 사적(事蹟)을 시부(詩賦)의 형식으로 운문(韻)을 붙여 서술(敍述)한 것이다.

·묘표(墓表)와 묘지(墓誌) - 묘표(墓表)를 표석(表石)이라고도 한다. 죽은 자의 관직, 이름과 호(號)를 전면에 새기고 후면에는 사적을 서술하여 새기는데 후면에 새긴 글을 음기(陰記)라고 하며 표석에는 운문(韻文)을 쓰지 않는다.

묘지(墓誌)는 지석(誌石)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원적, 사적 등을 금속판 및 돌에 새기거나 도판(陶板)에 구워서 무덤 앞에 묻어 두는데 이는 천재지변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묘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비한 것이다.

·신도비(神道碑) - 신도비(神道碑)는 이수귀부(彦首龜趺)라고도 한다. 임금이나 종2품 이상 관원의 분묘가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이다. 무덤 앞 또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자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이라는 뜻이다. 원래 중국 한 (漢) 나라에서 종2품 이상의 관리들에 한하여 세워졌다. 우리 나라는 고려때 3품 이상의 관직자의 묘에 세웠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없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와서 종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세우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왕의 신도비는 건원능(健元陵)의 태조 신도비와 홍능(洪陵)의 새종대왕 신도비가 있으며 문종은 왕능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여 그 이후는 없다. 특히 이 비명(碑銘)은 통정대부(通政 大夫) 즉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찬술 (撰述)하게 마련이다. 당상관은 정3품인데 당상, 당하로 나뉘고 그 권한에 차이가 컸다.

·묘갈(墓碣) - 묘갈(墓碣)은 정3품 이하의 관리를 지낸 자의 묘 앞에 세우는데 사적을 기록하는 문체가 신도비와 같으나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으로 그 체제와 규모가 작고 빈약하다. 중국에서는 진(秦) 나라에서 시작되었고 당 나라에서는 5품 이하의 관원들에게 세웠다.

·묘계(墓界) - 묘계(墓界)는 무덤의 구역을 말한다. 서민의 묘계는 사방 10보로 제한했으나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1품은 사방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 보, 5품은 50보, 생원과 진사는 40보였다.

㉺ 사당(祠堂) -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행되었는데 조상의 신주(神 主)를 모시는 곳으로 가묘(家廟)라고도 한다. 조선초기에는 사대부(士大夫)에서만 시행하다가 선조 이후부터 일반화되고 서민들도 사당을 갖기 시작하였다. 사당에는 3년상을 마 친 신주를 모시는데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사당을 먼저 세웠다. 그 위치는 정침(正寢) 동편에 3간으로 세워 앞에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섬돌 둘을 만들어 동쪽을 조계(階), 서쪽을 서계(西階)라 하여 모두 3계단으로 하였다. 사당 안에는 신주를 모셔놓는 장, 즉 4감(龕)을 설치하여 4대조(四 代祖)를 봉안하며 감(龕) 밖에는 장(帳)을 드리우고 각 위패(位牌)마다 제상(祭床)을 놓는다. 또 제상 위에 촛대 한 쌍씩을 놓으며 최존위(最尊位), 즉 가장 윗대는 향상(香床)을 놓는다.  

·부조묘(不眺廟)- 옛날의 양반 사대부들의 집안에는 고조부 이하  부(父)까지의 위패(位牌)를 봉안하는 사당(祠堂)이 있었고 아래로 대수(代數)가 늘어나 4대를 넘어서는 5대조부터는 사당에서 그 위패를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영구히 사당에 봉안하여 모시도록 국가가 허락한 신위(神位)를 불천지위(不遷之位) 혹은  불천위(不遷位)라 하였고 그 불천지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眺廟)라 하였다. 씨족 중 그러한 조상이 많은 것을 아주 큰 영예로 여겼다.

㉻ 비각(碑閣). 정려(旌閭). 영당(影堂). 호당(湖當)

·비각(碑閣) - 비석을 보호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가로상 또는 능묘, 사찰에 짓는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정방형 모임지붕 집으로 바닥에 전( )을 깔고 중앙에 비석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크기는 일정치 않다.

·정려(旌閭) - 후세들의 귀감이 되는 특별한 행실에 대하여 나라에서 내려 주는 표창이다. 충신, 열녀, 효자 등을 표창하고 후세들이 본받게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영당(影堂) - 한 종파(宗派)를 세우고 그 종지(宗旨)를 주장한 조사 (祖師)나 한 절의 개조(開祖) 또는 이름난 인물의 화상(畵像)을 모신 사당, 즉 영전(影殿)을 말한다.

·호당(湖當) - 조선 세종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재주 있는 문신들에게 국가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수양과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던 곳으로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세조2년(1456년)에 집현전과 함께 폐지했다가 성종 원년(1469년)에 부활하여 사가제도(賜暇制 度)를 시행했으나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폐지되었다. 그후 중종 12년(1517년)에 한강변 두모포에 독서당을 신축하고 호당(湖當)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광해군 때 다시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또 없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