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 1.창의일기 2.정충순효(精忠純孝) 탱주관일(撑宙貫日) 3.소등대교와 대천제하 지역탐방 4. 임난의사 기록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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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의일기(倡義日記) <원문과 번역문> |
편집자 주(註) |
倡義日記창의일기 萬曆二十年, 宣祖 二十五年, 壬辰正月初一日 만력이십년, 선조 이십오년, 임진정월초일일 元朝天陰風起日氣久悖心氣不安 以年事作卦則全體興師動兵之衆不勝惶恐 與隣居金判官 원조천음풍기일기구패심기불안 이연사작괘칙전체흥사동병지중불승황공 여인거김판관 得禮相對討論不覺日己昏矣 而終不判決焉 自是以後與金君日事弓馬之藝 득례상대토론불각일기혼의 이종불판결언 자시이후여김군일사궁마지예 |
* 이 창의일기(倡義日記) 내용(內容)은 밀성박씨 [학산 • 청수헌]공 양세 충효실록의 密城朴氏 [鶴山 • 聽水軒]公 兩世 忠孝實錄의 23면∼31면에서 발췌(拔萃)하고 * 학산공 13세손 박형구(朴亨求)님의 블로그 http://kr.blog.yahoo.com/scpark04를 참고 하였습니다. |
<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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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20년, 선조25년 임진 정월 초1일 <1592년> 아침에 하늘은 흐리고 광풍이 불어 일기가 사납고 심기가 불안 하여 금년의 형편이 어떨지 주역(周易)의 점괘(占卦)를 지어보니 전체가 군사(軍師)를 일으키어 군병을 움직이는 상(象)이기에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몰라서 이웃에 사는 김 판관(金 判官) 득례(得禮)와 함께 어찌하면 좋을지 토론을 하다가 날이 저무는줄도 몰랐으나, 끝내 어떤 판단을 내릴수가 없었고 이로부터, 이후(以後)는 김군(金君)과 더불어 활쏘고 말달리는 연습으로 일과(日課)를 삼았다. |
* 이 야기는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울주군(울산광역시) 을 배경으로 전개 됩니다. * 김군(金君)--김득례(金得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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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初五2월초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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曉金君得禮扣門而來握手唐遑而言昨暮逢南來之人則妖言怪說不可盡記而南寇之出迫在 효김군득례구문이래악수당황이언작모봉남래지인칙요언괴설불가진기이남구지출박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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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夕云道上之言未可必信而默料兄之元朝取得卦父心甚惶悚望須極晝籌策如何余答曰 조석운도상지언미가필신이묵료형지원조취득괘부심감황송망수극화두책여하여답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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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人臣子者世苦板蕩則何再圖生而無奮義敵愾之心乎願君勿爲妄動以爲禦變之計如何 위인신자자세고판탕칙하재도생이무분의적개지심호원군물위망동이위어변지계여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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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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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5일 새벽에 김군(金君) 득례(得禮)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 와서 손을 잡고 당황하여 말하기를 『 어제 저녁때 남(南)쪽에서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요망스러운 말과 괴이(傀異)한 풍설(風說)이 말할수 없이 많은데, 남쪽 왜국(倭國)의 침입(侵入)이 조석의 사이에 박두(迫頭) 하다고 하는데,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꼭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형(兄)의 원조(元朝)에 얻은 점괘(占卦)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음이 매우 당황(唐惶) 스럽습니다. 바라건데 그에 관한 필요한 대책을 모두 세우는 것이 어떨는지?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군왕의 신하가 된 자가 세상이 만약 어지러우면, 생명을 구차(苟且)히 바둥거리고 유지할려고, 분연(奮然)히 충의(忠義)를 위하여 일어나서 적군(敵軍)을 쳐부수려는 굳센 기개(氣慨)가 없겠느냐? 그대는 경망(輕妄)한 행동을 하지 말고 난세(亂世)의 변고(變故)를 막는 계책(計策)을 세우는 것이 어떠냐? 』고하였다. |
*형(兄) : 박언복 공이 이웃에 사는 김득례 보다 년상 이었습니다 |
四月十三日사월십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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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猝迫來釜城陷列邑尾解邦國之慘豈忍言哉吾東數千里之地山海非不固也兵甲非不足 왜구졸박래부성함열읍미해방국지참기인언재오동수천리지지산해비불고야병갑비부족 |
* 고니시가 인솔한 왜군 제1번대는 1592년 4월 13일 오 전 8시에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포에 침입하였고,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 발(鄭撥)은 패전하여 전사함. *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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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而使彼倭奴如入無人之境國有人乎爲人臣者死於當死則死亦何恨民皆逃竄猝無收合之 야이사피왜노여입무인지경국유인호위인신자사어당사칙사역하한민습도찬졸무수합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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策號天慟哭計無取 책호천통곡계무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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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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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 왜구(倭寇)가 갑작스럽게 처들어 와서 동래부성(東萊府城)이 함락(陷落)되고 여러 고을이 패전(敗戰) 하여 흩어지니 온 나라의 참담(慘澹)한 상황을 어찌 차마 말할수 있겠느냐? 우리나라 수천리의 지역과 산해(山海)가 견고 하지 않음이 아니요, 병사와 군장비(軍裝備) 갑옷이 부족한 것이 아니건마는, 저 왜적(倭賊)들로 하여금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 아무도 없는 지역 같이 처들어오게 하였으니 이 나라에 쓸모있는 인물이 있다고 하겠느냐? 임금의 신하가 된자가 마땅히 죽어야 할 곳에 생명을 바쳐야 하니 죽음에 또한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백성들이 모두 도망치고 숨어 버려서 갑자기 거두어 모을 방책이 없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통곡(慟哭)하여도 아무런 묘계(妙計)가 없었다. |
* 그후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3 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고. 4~5월에 걸 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함. * 4월24일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여 충주로 도망했 고,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달천에 투신함. *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평양으로 피난하고, 왜적이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자,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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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矣徐夢虎朴弘春全應忠召募勇士若干適至賈勇層生奮氣百倍 卽與金得禮合議收集勇健者 출의서몽호박홍춘전응충소모용사약간적지매용층생분기백배 즉여김득례합의수집용건자 巨南坊谷中得數十百人 거남방곡중득수십백인 |
*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17일 가토군은 함경도 까지 유린하였으며,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 로 잡히는 등 나라의 안위가 백척간두의 지경에 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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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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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때, 서 몽호(徐夢虎), 박 홍춘(朴弘春), 전 응충(全應忠)이 용사 약간명을 불러 모아 도착하니 용기가 거듭 일어나 넘쳐 흐르고 분연(奮然)히 솟구치는 적개심(敵慨心)이 백배(百倍) 하였다. 곧 김득례(金得禮)와 더불어 의논을 하여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을 모으기로 하고 남방(南坊)골에서 수백인을 얻었다. |
* <여기 까지는>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할 당시(當時) 의 나라 상황(狀况)과 학산공(鶴山公) 당신(當身)의 심경(心境)을 소상하게 적은 일기(日記) 입니다. * 남방(南坊)골--지금의 울주군 온산읍 학남리 거남마을 말합니다. |
使子仁立領軍直向權應銖陣猝遇賊兵於所等大橋之下 사자인립령군직향권응수진졸우적병어소등대교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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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謂子仁立曰以我世祿之裔當此板蕩之日誓不與賊俱生爲國死義臣子之節 今日卽 고위자인립왈이아세록지예당차판탕지일서불여적구생위국사의신자지절 금일즉 吾素取蓄積立節之秋也 오소취축적입절지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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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 이하는 소등대교(所等大橋) 전투 입니다. |
아들 인립(仁立)으로하여금 군사들을 영솔(領率)하여, 곧바로 권응수(權應銖) 장군 진영(陣營)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졸지(猝地)에 소등대교(所等大橋) 아래에서 적병(敵兵)을 만났다. 아들 인립(仁立)을 돌아 보고 말하기를 『우리집안은 대대(代代)로 나라에서 녹봉(祿俸)을 받아온 명문(名門)의 자손(子孫)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이 때 맹서(盟誓)코 적군(敵軍)과는 도저히 함께 살수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의(忠義)를 다하는 것은, 신하(臣下)된 몸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오늘이야말로 내가 평소에 축적(蓄積)해 온 충절(忠節)을 발휘(發揮)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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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리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도 이 일대의 회야강 (回夜江)을 '소들거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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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勿妄動歸全妻孥以繼先祀 卽挺身 突出直向賊陣大呼曰 蠶甭倭奴速受我刃 여물망동귀전처노이계선사 즉정신 돌출직향적진대호왈 잠용왜노속수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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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卽前僉正朴彦福 오즉전첨정박언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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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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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지말고 집으로 돌아가서 처자식(妻子息)을 잘 보전(保全)하여 선조(先祖)의 뜻을 이어받고 제사(祭祀)를 잘 받들도록 하라. 』 하고는 몸을 솟구쳐 돌격(突擊) 하여 나가서 곧바로 적진(敵陣)을 향하여 크게 호령하기를 『작은 벌레 같은 왜놈 오랑캐들아! 속히 나와서 나의 충의(忠義)에 불타는 복수의 칼을 받아라! 나는 전첨정(前僉正) 박언복(朴彦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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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爾醜賊視若蚊蟲直入賊陣左右衝突若刈草菅然斬首數百銃氣益壯橫行四圍 여이추적시약문충직입적진좌우충돌약예초관연참수수백총기익장횡행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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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見其銃勇方欲散去之際>忽被賊丸卽時殞絶軍中皆號哭失聲 <적견기총용방욕산거지제>홀피적환즉시운절군중개호곡실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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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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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같은 추악(醜惡)한 도적(盜賊)은 마치 모기나 등에와 같은 작은 벌레들로 본다. 』고 하고 적진(敵陣)으로 바로 뛰어 들어가 좌우(左右)로 찌르고 돌진(突進)하니, 마치 풀줄기를 베는 것 같았으며 수백의 많은 적군(敵軍)을 죽이니 그 날래고 씩씩한 용기는 더욱 장해지고 사방을 마음대로 달렸다. <적군이 그 날랜 용맹을 보고 바야흐로 흩어져 도망칠려고 할 때> 홀연히 적의 총알을 맞아 즉시 운명(殞命)하니 진중(陣中)이 모두 실성(失聲)하도록 울부짖었다. |
*등에-- 파리의 일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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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全應忠金洽朴孫方向兵營見仁立抱父屍而號天如地歎曰恨不與同事而失一忠義之士也 시전응충김흡박손방향병영견인립포부시이호천여지탄왈한불여동사이실일충의지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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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與仁立藁葬山阿同 赴兵營至大川堤下卽七月十一日也 잉여인립고장산아동 부병영지대천제하즉칠월십일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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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 이하는 대천제하(大川堤下) 전투 입니다. |
그 때 전응충(全應忠), 김흡(金洽), 박손(朴孫)이 병영(兵營)으로 향해 가다가 보니, 인립(仁立)이 부공(父公)의 시신(屍身)을 끌어 안고 하늘에 호소하며 땅을 치고 울부짖고 있었다. 탄식(嘆息)하기를 더불어 적군을 무찌르는 일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한탄 하였더니, 뛰어난 충의(忠義)의 선비를 잃었다고 하고, 인립(仁立)으로 더불어 시체를 짚과 거적에 싸서 산 언덕에 임시로 매장을 하고는 병영(兵營)으로 달려갔는데 대천제하(大川堤下)에 이른 것이 곧 7월 11일이었다. |
* 대천제-- 지금의 "울주군 청량면 상남리"에 있는 저수지의 방축(防築=방죽)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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忽見賊兵蔽夜而至仁立謂三義士曰父絲於國子死於父一也 昨日大橋之戰我豈畏死以未收 홀견적병폐야이지인립위삼의사왈부사어국자사어부일야 작일대교지전아기외사이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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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屍故耳今日之賊卽昨日之賊仍挺刃大呼曰我是昨日大橋下死節人之子也 부시고이금일지적즉작일지적잉정인대호왈아시작일대교하사절인지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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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死於國子死於父人倫之大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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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어국자사어부인륜지대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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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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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忽然)히 많은 적병(敵兵)들이 들판을 덮을 듯이 공격(攻擊)해 오는 것을 보고, 인립(仁立)이 삼의사(三義士)에게 말하기를, 『부공(父公)이 나라를 위하여 죽는것과 자식이 아비를 위하여 죽는 것, 곧 충(忠)과 효(孝)는 같은 일이다. 어제 대교(大橋)의 전투(戰鬪)에서 내 어찌 죽음을 겁냈겠느냐? 부공(父公)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적군이 곧 어제의 적군이다 』 하고는 이어서 몸을 솟구쳐 날려 큰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 나는 어제 대교하(大橋下)에서 충절(忠節)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사람의 아들이다. 신하(臣下)가 나라를 위하여 죽고 자식(子息)이 부모(父母)를 위하여 죽는 것은 인륜(人倫)의 큰 법도(法度)이다. |
*삼의사(三義士)--전응충, 김흡, 박손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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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雖罔倫之賊不知爲國貞忠之士敢以殺之 父爲人臣盡臣之職 吾爲人子豈不盡子之職乎 여수망윤지적불지위국정충지사감이살지 부위인신진신지직 오위인자기부진자지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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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爾之賊當無遺類後己直入賊陣斬首數百 身被三十餘創而死 여이지적당무유유후기직입적진참수수백 신피삼십여창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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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應忠金洽朴孫繼以突進賊遂退屯馬鞭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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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응충김흡박손계이돌진적수퇴둔마편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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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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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비록 인륜을 모르는 적군들이나, 나라를 위하여 절개(節介)가 곧고 충성(忠誠)스러운 선비를 몰라보고 감히 죽였느냐? 부공(父公)은 신하(臣下)된 직분(職分)을 다하셨으니 내가 어찌 사람의 자식(子息)이 되어 자식된 직분(職分)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 같은 적은 마땅히 모든 무리들을 남김없이 소탕(掃蕩)하고야 말겠다』하고 곧바로 적진에 처들어가 수백의 적을 무찔렀으나 자신도 삼십여 군대나 부상을 하여 끝내 순국(殉國)하니 , 전응충(全應忠), 김흡(金洽), 박손(朴孫)이 잇따라 돌진하여, 마침내 도적들은 마편방(馬鞭坊)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때는 선조 25년 7월 11일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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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편방(馬鞭坊_-- 일명은 "마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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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義士收仁立之屍面貌如生兩晴不閉手不釋創怒氣不觧遂相與爲文以葬之其辭畧曰嗚呼 삼의사수인립지시면모여생양청불폐수불석창노기부해수상여위문이장지기사략왈오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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壯哉惟公父子昨殉于忠今死於孝隻手挺刃誓地號天烈烈其氣不昧者存 장재유공부자작순우충금사어효척수정인서지호천렬렬기기불매자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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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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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三義士)가 인립(仁立)의 시신을 수습하니, 얼굴 모습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두 눈은 감지 않았으며 손은 창을 놓지 않고 노기(怒氣)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로 의논하여 죽음을 슬퍼하는 조문(弔文)을 지어 장사(葬事)를 지내니 그 문사(文辭)를 간략(簡略)히 말하면 『 아아! 슬프고도 장렬(壯烈)하도다! 생각하건데 공(公)의 부자(父子)는 어제 충의(忠義)로 순국(殉國)하고, 오늘은 효(孝)에죽었도다! 두손에 칼을 배어 들고 적군을 처부술 것을 땅에 맹서(盟誓)하며 하늘에 호소(呼訴)하니, 엄숙(嚴肅)하고 용감한 기개(氣慨)는 영원히 어두워지지 않고 빛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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翌日三義士同赴兵營遍告朴仁立父子死賊之狀 蔣希春尹弘鳴柳汀李應春徐仁忠聞而歎曰 익일삼의사동부병영편고박인립부자사적지상 장희춘윤홍명유정이응춘서인충문이탄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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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鄕義士何其多也柳伯春李訥亦皆歎賞轉報招諭使 오향의사하기다야유백춘이눌역개탄상전보초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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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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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일(翌日) 삼의사(三義士)가 함께 병영(兵營)에 가서 박인립(朴仁立) 부자(父子)가 적군(敵軍)을 공격하다가 적진(敵陣)에서 전사(戰死)한 상황을 두루 알리니, 장희춘(蔣希春), 윤홍명(尹弘鳴), 류정(柳汀), 이응춘(李應春), 서인충(徐仁忠)등이 듣고 탄복하기를 『우리향토의 의사(義士)가 얼마나 많은가? 』하였고 류백춘(柳伯春), 이눌 (李訥) 등도 또한 탄복칭찬하고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시 보고(報告)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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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사(招諭使)-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하는 일을 맏은 임시 벼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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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소들거랑 즉, 회야강 부근과 대천제 사이에 "소등대교" 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아직 그 소등대교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함이 유감입니다., 또 기록상 시신을 가매장하고 바로 달려간 것으로 표현했으나 학산공파보의 기록은 부자의 망일이 10일과 11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는 소등과 대천제 사이가 불과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둔 아주 가까운 거리이지만 장례를 치르는데 적어도 하룻밤을 지새다 보니 망일이 하루의 격차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여하간 사림(士林)과 문중에서 저술한 "충효록(초본1863)"이 모든 자료에 우선하는 것이며 수많은 자료마다 표현이 다 다르긴 하나 크게 본질을 벗어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다만, 충효록 이후에 출간된 "울산읍지"상에 기록된 "1593년 7월 13~14일" 은 여러 자료를 입체적으로 상고하여 보아도 수긍할 수 없는 바, 편찬과정에서의 착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학산공 13세손 박형구(朴亨求) |
*양세(兩世) 의사(義士)가 순절한 날이 1592년 7월 10~11일인데, 울산읍지 등에 1593년 7월 13~14일로 기록된 것은 착오라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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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 |
忠 |
純 |
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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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
충 |
순 |
효 |
지극한 충성과 순수한 효성이 |
撑 |
宙 |
貫 |
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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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 |
주 |
관 |
일 |
우주를 떠받들고 태양을 꿰뚫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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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1862년[철종13년 임술(壬戌)] 10월 임난의사(壬亂義士)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인 박언복(朴彦福) 공(公)에게 증가선대부 병조참판(贈嘉善大夫 兵曹參判)에서 증자헌대부 병조판서(贈資憲大夫 兵曹判書)로 가증(加贈)하고, 임난의사 선무원종공신 1등인 박인립(朴仁立) 공(公)에게는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贈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에서 가선대부 병조참판자(嘉善大夫 兵曹參判者)자로 가증(加贈)하면서 왕이 교지(敎旨)로 내리신 예찬문(禮讚文) 입니다.그 후 1863년[철종14년 계해(癸亥)]10월 박인립(朴仁立) 공(公)은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에서 증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자(贈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官者)로 다시 증직(贈職)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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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손(本孫)이 소장(所藏)한 교지(敎旨)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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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박언복을 자헌대부병조판서자로 |
교지 - 증 정부인 이씨를 정경부인자로 가증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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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 함. 동치원년 10월<1862년> |
동치원년 10월 <18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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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증 병조참판 박인립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
교지 - 증 정부인 김씨를 정경부인자로 가증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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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위도총부 도총관자로 가증 함. 동치2년10월 <1863년> |
동치2년 10월<18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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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등대교(所等大橋)와 대천제하(大川堤下) 전투지역 탐방 <소등대교는 어느 곳일까?> 왜란이 일어나자 일찍이 서몽호, 박홍춘, 전응충 등이 일어나 의병의 소집에 나섰고, 이를 알게된 남면의 박언복 공은 분기백배하여 김득례 등과 의론하여 거남리(남방골)에서 수백명의 의사들을 규합하게 된다. 박언복 공은 아들 인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 의병장 권응수의 진으로 향한다. 이 때 소등의 대교밑에서 졸지에 적을 만나게 된다. <소등이라 함은 "소들"로서 이는 온양면 망양리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도 이 일대의 회야강을 소들거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박언복 공은 뛰어나와 크게 "왜노들은 속히 내칼을 받아라. 나는 전 첨정 박언복이다"라 불으짖으며 적진에 돌진하여 좌충우돌 마치 풀을 베듯 도적들의 목을 벤다. 이를 본 도적들은 겁에 질려 흩어지려 할 때, 박언복 공은 그만 유탄을 맞아 전사한다. 이렇게 되자 군중은 모두 통곡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 전응충, 김흡, 박손 등 3의사가 병영을 향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감탄하여 같이 합류하게 된다. <울산임난사 -1999년12월 울산문화원 > 이상은 임진년(1592년) 7월 10일 지금의 울주군 관내에서 벌어진 소등대교 전투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지역이 어떠한 곳인지 울주군청의 공식자료와 더불어 현지 사진 및 도면을 게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비록 박언복 공께서 왜적을 격퇴하다 순절하신 정확한 지역은 알 수 없으나 대채로 어느 지역범위인지는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소등대교와 대천제하 전투 지역도면 -01 ▲ 소등대교와 대천제하 전투 지역도면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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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학인결과 소등은 울주군 온양읍 망양리와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울주군 온양읍> 자료를 알아 봅니다. 자료 학인결과 소등은 울주군 온양읍 망양리와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울주군 온양읍> 자료를 알아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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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울주군 청량면 자료를 알아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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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들거랑 : 소들거랑은 양동들 앞에 있는 회야강 하류에 있다. 청량면, 온양읍, 온산읍 사람들에게는 이 회야강변이 서들거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선 영조 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을 소등(所等)이라 하였는데, 소등이 변하여 서들이라 불러온 것이라 짐작된다. 지금은 하천 상류에 회야댐이 생겨 물의 흐름이 늦고 아름다운 경관도 사라졌지만, 이곳은 옛날부터 경치가 좋았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흥여승람』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미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전국에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물놀이를 즐기면서 시조를 읊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위 자료를 고찰해 보면 소들거랑은 소등(所等)과 같으며 <지역도면-02>의 양동들(A→B) 일원이라 할 것입니다. 한편 필자가 현지를 탐방할 때 동행하셨던 박언복 공의 본손 박일수님께서는 <지역도면-02>의 원동리에서 회야강 건너 양동들을 가리키며 "내가 어려서부터 저 곳을 어른들이 소등들 이라 불렀어요. 그런데 (전투가 벌어진 곳이)확실한지는 모르겠어요"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역도면-02>의 A지점에서 →B지점을 향해 찍은 사진입니다. 들판이 바로 청량면 양동들이며, 박언복 공의 본손 박일수님께서 말씀하신 곳이고, 우측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곳은 회야강과 온양읍 망양리에 있는 소등(망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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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면 양동들 : 우측 강변지역을'소들거랑'이라 부름.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하여 소등(所等)지역을 추정하면 <지역도면-02>의 A→B→C에 이르는 회야강 양안(兩岸 )일대로 여겨 집니다. 한편,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소등대교는 A→B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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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야강을 남북으로 가로지는 동천교(원동교), 좌측-온양읍, 우측 청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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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제는 어느 곳일까?> 박언복 공은 그만 유탄을 맞아 전사한다. 이렇게 되자 군중은 모두 통곡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 전응충, 김흡, 박손 등 3의사가 병영을 향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감탄하여 같이 합류하게 된다. 이에 양군이 합세하여 병영으로 가는데 대천못 밑에 이르러 다시 왜적때를 만난다. 이 적들을 보니 온 들판을 가리우며 오는데 박인립 공은 3의사에게 말하기를 "아비는 나라를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으니 하나이다"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몸으로 적중에 뛰어든다. 이렇게 하여 적을 베기 수백하였으나 몸은 30여의 상처를 입고 죽으니 전응충, 김흡, 박손 등이 연달아 돌진하여 마침내 도적들은 마채(마편방)로 퇴각한다. < 대천제는 청량면 상남리에 있는 옛못이며, 마채는 온산면 용암리 오대의 동편일대의 외황강 상류를 말함인데 이곳은 소금으로 이름이 있었다> <울산임난사 -1999년12월 울산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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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임진년(1592년) 7월 11일 지금의 울주군 청량면 관내에서 벌어진 대천제하(大川堤下) 전투를 요약한 것입니다. 비록 박언복 공께서 순절하신 소등대교의 정확한 지역은 알 수 없으나, 박인립 공께서 순절하신 지역은 그 범위를 한정하여 볼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지역도면-02>에 표기된 대천제가 바로 그 곳입니다. 전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메워지고 조그마한 연못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대천못에서 북쪽으로 바로 보면 500m 정도의 거리에 박언복, 박인립 양 의사(兩 義士)의 묘역이 있습니다. 다음은 대천제하(大川堤下)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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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못 -건너편은 좌측은 울산 시내방향, 우측은 온산읍 공업단지로 가는 방향(온산로가 지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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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못 - 온산로에서 촬영, 우축은 제방. [1592년 7월 10일 박언복 공이 의병을 모집, 아들 박인립으로 하여금 의병장 권응수 장군의 휘하로 집결하기 위하여 가려던 중 박언복 공은 소등대교에서 왜적 때와 전투시 순절하시고, 이튿날 박인립 공이 대천제(大川堤-위사진)부근에서 왜적 을 만나 수백을 참시하고, 수백의 부상자를 낸 전과를 올렸으나 애석하게도 30여 군데 왜적의 창상을 입고 쓰러진 그 역사의 현장인데,그 때가 바 로 1592년 7월11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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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제에서 소등(所等) 방향으로 가는 길. ▲ 대천제에서 소등(所等) 방향으로 가는 길(좌측 사진 청색건물 뒤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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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제에서 양의사(박언복, 박인립)의 묘역을 바라본 그림입니다. 산소는 좌측 야산 먼 부분에 모셨습니다. (울주군 청량면 상남리 산14, 오측 도로는 온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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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울주군에 전해지는 대천못 전설입니다. 대천못 전설 청량면 상남리 성남부락 대천산 동쪽에 대천못 둑이 우뚝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못을 막기 위해 둑을 모으면 당일 밤에 둑이 무너져 흩어지고, 또 모으면 그 날 밤에 둑이 무너지고 이렇게 수십 번 실패하였다. 그 당시 못 막는 경비(비용)는 동양(시주)을 모아서 하였다고 한다. 행사 책임자가 이상하여 부정이 아닐까 생각하고 시주 나간 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혹 이상스러운 일이 없었는지 물은 즉, 그 중 노인 한 분이 나와 말하기를 시주 도중 어느 외딴 집에 들어가 시주를 요청하였는데, 그 집 안주인이 대청에서 아기를 어루는 소리가 “동양을 줄까요, 아님 우리 대천이를 줄까요? 동동 귀염둥이 오대독자 귀염둥이 우리 대천이를 줄까요?” 이렇게 하면서 아기만 어루고 시주는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은을 주고 살라요? 금을 주고 살라요?”하면서 이 늙은이를 애태우는 것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책임자가 그 집을 찾아가 요구대로 은과 금을 주고 아기를 바꾸어 와서 못 둑을 막는 밑자리에 묻고 공사하였더니 그 후에야 못 둑은 잘 막아졌다하며, 그래서 못 이름이 아기 이름을 따서 대천못과 대천산이 되었다 한다. 한편, 대천산 꼭대기에는 아흔 아홉 골짜기가 잇는데, 백 골짜기에 한 골짜기가 부족하여 용이 득천(得天)하지 못하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울주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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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지명(地名)에 대하여> * 남방(南坊)골- 지금의 울주군 온산읍 학남리 거남마을 말합니다. 박언복 공께서 김득례 등과 의론하여 수백명의 의사들을 규합한 곳인데 <지역도면-02>에 표기된 '거남리' 지역입니다. 다음은 거남마을에 대한 공식자료입니다. <거남은 조선조 제8대 임금인 예종(睿宗) 때까지는 학남(學南)이라 했으나, 이후로는 현재의 청량면(靑良面) 상남리(上南里) 대천(大川) 못 아래까지를 거남리(巨南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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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편방(馬鞭坊) - 일명은 "마채"라고 합니다. 마편방 또는 "마채"는 "울주군 온산읍 용암리 오대"의 동편 일대의 외황강 상류를 말합니다. 마채는 1592.7.11 왜적 때가 대천제하 전투에서 패하여 달아난 곳인데, <지역도면-02>에 표기된 '오대' 지역입니다. 다음은 오대지역에 대한 공식 자료입니다. <용암리는 신촌, 오천, 오대의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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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난의사 박언복 공, 박인립 공 기록문헌 (본손 박형구 소장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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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록 초본 충효록 단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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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록 창의록 | ||||
언양읍지와 울산읍지 박언복 공, 박인립 공에 대한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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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註) top 창의일기에서 박언복 공 및 박인립 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로 등장하는 분들은 14명입니다. 그 분들을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김득례(金得禮), 서 몽호(徐夢虎), 박 홍춘(朴弘春), 전 응충(全應忠), 권응수(權應銖), 김흡(金洽), 박손(朴孫), 장희춘(蔣希春), 윤홍명(尹弘鳴), 류정(柳汀), 이응춘(李應春), 서인충(徐仁忠), 류백춘(柳伯春), 이눌 (李訥) 이상 14명의 구체적인 주변 인물이 있는 것입니다. 창의일기에서는 박언복 공과 박인립 공께서 임진년 7월 10일~11일 무렵에만 의병에 참가하신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객관적 자료<울산임난사>에 의하면 위 14명의 의병활동이 4월 21일경부터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보아, 양의사(兩 義士)께서도 일찍이 이들과 함께 창의(倡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4월부터 양의사(兩 義士)께서 순절하신 7월까지 당시 울산지방 의병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울산 지방은 임진년 4월 21일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이 시작되는데 5월 7일에는 병영성을 기습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게 됩니다. 위 14명의 인물중 이 전투에 관련 있거나 직접 참가한 사람은 윤홍명, 장희춘, 서인충, 유백춘, 전응충, 김흡 등 입니다. 2) 이 보다 앞선 5월 2일 공암싸움에 위 14명의 인물 중 유정, 이응춘, 이눌 등이 큰 전과를 올립니다. 3) 5월 19일 달현전투에서는 유백춘이 83인을 이끌고 참가하여 참수 35급, 사살 57인의 전과를 올리고 왜적때를 물리치는데 이응춘도 참가합니다. 4)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결의대회를 6월 9일 경주 월성(月城)에서 가졌는데, 4,200여의 의병이 모였으며, 이를 문천회맹[蚊(汶)川會盟]이라 합니 다. 울산에서도 많은 의병이 참가했는데 위 14명의 인물 중 서인충, 장희춘, 김흡, 윤홍명, 전응충, 이응춘, 박손(도평의사공 11세손) 등이 먼 저 소개되고, 이어서 유정, 유백춘, 박인립, 서몽호가 참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천 싸움에서 유백춘, 이눌, 윤홍명, 박손, 이응춘 등의 분전이 두드러 졌고 큰 전과를 올립니다. <이상, 울산임난사-울산문화원 1999년 발행> 4)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박인립 공께서 참가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 본손 박문도님이 2007년 9월에 보낸 추가자룔에 의하면 임난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국학자료원-최효식 著) ~ 47 면에 문천회맹에 참가한 의병장들 명단이 지역별로 소개됩니다. 경주 43명, 영해 3명, 울산 25명(여기에 박손, 박인립 공이 기록됨), 영천14명, 대 구 3명, 영일10명, 장기3명, 흥해12명, 동래3명, 양산5명, 언양1명, 자인8명, 현현 2 명 등입니다. 임난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국학자료원-최효식 著) ~ 94 면에는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계속된 모화(毛火)전투에 박언복 공이 군사를 이끌고 참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과 '창의일기' 및 본손들에게 전해오는 증언을 고찰해 볼 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양의사(兩 義士)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3가지 새로운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임진년 원단에 국난이 있을 것을 철학적으로 간파하셨으며,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아시고 스스로 실질적인 대비를 하셨음으로, 주변인물들이 4월 21일부터 의병활동을 함에 따라, 박언복 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단순의병이 아닌 의병장으로서 활동을 하셨으며, 뚤째, " 박인립 공은 경주 전투 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온산으로 내려와 순절 하셨다" 는 본손 박왈수님의 증언과, 위 자료를 종합하면 박인립 공은 소등과 대천제하 전투 이전에 이미 문천(경주)전투에도 같은 밀성박씨 도평의사공파인 박손과 함께 참가 하셨으며, 셋째, 박언복 공께서 의병을 모집하여 진영(陣營)으로 인솔한 것도 2차례 이상 되지 않았나 추측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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