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수록된 열선조의 비문, 묘갈, 묘표, 행장 등은 밀성박씨 습독공파 세보(習讀公派 世譜)에 의거, 신라 시조왕이하 돈재공 6세손까지를 우선 수록하였다. 번역문 중 어법이 현대와 차이가 많은 부분은 임으로 고쳤으며, 내용 중 사실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하는 부분은 주석을 달았고, 자료내용을 일부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 곳에 수록을 못한 분들은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계속 수록해 나가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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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비문, 묘갈, 묘표, 행장 ) |
원 문 보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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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숭덕전비음기(崇德殿碑陰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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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호산재중건기(狐山齋 重健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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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의정부겸(議政府兼) 영경연사(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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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筵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박공 휘 수양 묘갈(朴公 諱 守良 墓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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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시조왕릉 비명 배서(新羅 始祖王陵 碑銘 拜序) ☞ 시조왕릉 <top>
아 ! 이곳은 신라 시조왕의 묘소인데, 지나간 세종15년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웠으니, 중국 주나라에서 삼각(三閣)을 세운 뜻이나 같다. 경종 임금 3년에 사당을 숭덕전(崇德殿)이라 이름 하였으며, 우리 성상(聖上)께서 왕이 된지 27년에 사당에 모신 위판(位版)에 왕자(王字)를 쓰라 하시고 묘비를 세울 때에 관곽대신(館閣大臣)에게 묘문을 지으라 하셨으며, 신라왕의 후손 여러 박씨들이 또 다시 글을 지으라 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동국사기와 장록(狀錄)을 열람해 보니, 왕의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인데 중국 한나라 선제 임금 첫해 임자(壬子)년에 탄생하셨는데 15세 때부터 대인의 기상이 있어 6촌장들의 추천으로 임금이 되어 서천(西千)땅에 살다가 나라 이름을 서라(徐羅)라 하시니 그 때가 오봉(五鳳) 원년 여름 4월이다.
왕이 되신지 5년 되는 정월에 알영(閼英)이란 처자로 왕비를 삼으니 비의 탄생도 역시 서기가 어린 알영(閼英)이란 샘에서 용(龍)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 늙은 여인이 이상히 생각하고 길러서 샘 이름을 따라 알영이라 하였으며, 커서 왕비가 되어 어진 마음으로 내보(內報)를 잘 하자 나라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두 성인이라고 하였다. 8년에는 왜병들이 국경을 침범하였다가 왕의 신덕(神德)하심을 듣고 바로 돌아갔으며, 17년에는 왕께서 왕비와 함께 6부를 돌아다니면서 농사와 양잠을 할 것을 장려하셨고, 19년에는 변한(弁韓)이란 나라가 찾아와 항복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어지신 덕이 있기 때문이며, 21년에는 경주에 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며, 26년에 처음 왕궁(王宮)을 지었으며, 30년에는 낙랑(樂浪)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침범하다가 백성들이 밤마다 사립문을 잠그지 않으며 들에 노적이 많은 것을 보고서로가 말하기를 도덕이 있는 나라이니 우리가 침범해서는 아니된다하고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으며, 38년에는 호공(瓠公)이란 신하를 보내여 마한(馬韓)나라 왕을 초빙하려 하자 마한나라 왕이 대국을 섬기는 예법에 어긋난 일이라 하여 호공(瓠公)을 꾸지람하시니 호공(瓠公)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왕과 왕비가 나라를 다스리신 후부터 인심도 후(厚)하고 날씨도 좋아서 창고에 곡식도 많고 백성들 사이도 서로가 사양하는 정신이 생기자 진한, 변한, 낙랑, 왜인 모두가 무서워하며 존경하지만 우리 왕께서는 겸손하신 마음으로 신하를 보내어 모셔오라 하셨는데 이것이 예법에 지나친다 하십니까? 라고 하자 마한 왕이 헤치려 한데 여러 신하들이 직간을 하자 헤치지 못했다. 다음해에 마한 왕이 죽자 우리나라의 한 신하가 왕에게 말하기를 마한 왕이 얼마 전에 우리 사신을 헤치려 하였으니 오늘날 국상(國喪)의 틈을 이용하여 마한 나라를 쳐부수자고 하자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상대국의 초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니다 하시고 사신을 보내여 조문(弔問)을 하셨으며, 53년에는 동옥저(東沃沮)나라 임금이 좋은 말 20필을 받치면서 말하기를 이 부덕한 임금이 남한에 두 성인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외람되게 이 말을 바치나이다. 요즈음 삼국이 모두 다 전쟁만 힘쓴다는데 왕께서는 인의를 주장하시고 전쟁은 아니하려 하시니 원근간(遠近間)에 여러 나라들이 “왕의 덕치를 본 받아 따라온다.” 라고 하였고, 61년 갑자(甲子) 3월에 왕께서 돌아가시게 되니 나이는 73세였다. 태자 남해(南海)가 왕위에 올랐으며 시조왕은 국도(國都) 남쪽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왕께서 돌아가신지 7일 만에 왕비이신 알영(閼英)씨가 돌아가셨다. 남해왕으로부터 박씨가 10세까지 왕위를 지켰으며 석(昔)씨 김(金)씨가 서로 왕위를 지켰는데 서라(徐羅)라는 국호는 지증왕때 신라(新羅)로 고쳐졌으니 연대는 종합하여 56대에 992년이다. 오직 박씨는 지금에 와서 자손이 많아 우리나라 대성(大姓)이 되였으니 유리(儒理)왕자 때 8대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편집자 주 : 유리왕은 신라 3대왕인데 8대군은 유리왕의 왕자들이 아니요, 신라 54대 경명왕의 왕자들이다.> 큰 아들은 밀성대군(密城大君)이요, 둘째 아들은 고양대군(高陽大君)이며, 셋째 아들은 속성대군(速成大君=速咸)이요, 넷째 아들은 죽성대군(竹城大君)인데, 그 후 밀양(密陽), 고령(高靈), 함양(咸陽), 죽산(竹山)이란 파가 되였고, 다섯째는 사벌대군(沙伐大君)이요, 여섯째는 완산대군(完山大君)이요 일곱째는 강남이대군(江南大君)이며 여덟째는 월성대군(月城大君)인데 뒤에 상주(尙州), 전주(全州), 순천(順天), 경주(慶州)라는 본관(本貫)으로 고쳐 졌으니 이 8파 자손들이 가장 알려져 있는 파들이요, 그밖에 별보(別譜)들은 너무 많아서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편집자 주 : 이 부분은 여기를 참조.> 아-시조왕께서는 진실로 신이(神異)하시고 어지신 왕이었네. 왕께서 삼한(三韓)에서 처음나신 임금이기 때문에 하늘이 이상한 서기(瑞氣)를 내리시니 이는 중국의 간적(簡狄)이란 사람이 알을 입에 머금고 설(契)을 난 것과 강원(姜源)이란 사람이 신발 자취를 밟고 섭(葉)을 잉태한 것이나 같다. 어린 나이로 왕이 되어 암흑의 나라를 개척하셨으니 어지신 마음은 성인이기 때문이요, 늠름하신 기상은 왕의 위엄을 보임이요, 나라를 세울 때에 법도가 아주 견고하였으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시는데 아주 근면하셨고, 이웃 나라에 국가적 치명을 입고도 그 나라 국상(國喪)났다 하여 침범하지 않으셨고, 먼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며 자진하여 모여든 군사들이며 낙랑나라 병사들이 국경을 침범하다가 민속의 선양함에 감복되어 되돌아갔으며, 변한 나라는 왕의 덕화를 사모하여 온 나라가 찾아와 항복하는 일 뿐만 아니라, 옥저(沃沮)나라에서 양마(良馬)를 바친 것은, 중국의 월상(越裳)나라가 꿩을 바친 것이나 또는 서여(西旅)에서 여(旅)오란 개를 바친 것이나 똑같다 한다. 왕위에 계신지 60년 만에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삼왕에 못지않은 정치를 하셨고 천년동안 국운을 계승하였으니 거룩하고도 자랑스럽도다. 오늘날 왕께서 돌아가신지 오래 되였지만 산천의 웅장하고 수려함과 인물들의 많은 것은 지금도 왕의 영혼이 계심이요, 왕의 유적지(遺跡地)를 중심하여 후손들이 억(億)이나 되며 온 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왕의 내외손이니 이것이 모두 왕의 지극하신 덕화이기 때문이다.
우리 세종 임금께서는 예악(禮樂)을 잘 닦으신 성주(聖主)이기 때문에 사당(祠堂)을 지어 제사(祭祀)를 거행하게 하셨으니 크게 존경하신 마음이요, 경종때 사당 이름을 숭덕전(崇德殿)이라 하고 위판(位版)에 왕자(王字)를 써라 하심도 의(義)를 따름이요, 덕을 높이 받드는 예절이라 하겠다. 아-비(碑)를 세우고 안 세운 것이 왕의 높으신 덕과 아름다운 마음을 전하는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중국의 한유(韓兪)께서 서언왕(徐偃王)의 비문(碑文)을 쓰면서도 인정을 닦아 후세에 전했다는 미담을 기록하였는데, 하물며 신라 시조왕의 신성하신 정치사상은 언왕(偃王)에게 비할바가 아니다. 우리 성상께서 사신(詞臣)에게 명령하여 비문(碑文)을 기록하라 하심은 역사에 관계된 일이기에 돌에 각자(刻字)하여 비를 세워 뒷날 임금에게 법을 보여 줌이니 이 신라 시조왕의 비(碑)가 없어서는 아니 되리라 하고 이어서 명(銘)을 쓰기를 신라를 개척하려고 하늘은 성왕을 보내셨네. 선도산(仙桃山)에 탄생할 때 대박(大瓟)에 서기(瑞氣)있네. 어린 아이 목욕하니 온 몸이 광채라네. 조수(鳥獸)들도 기뻐하니 좋은 운명 갖고 나셨네. 나이 겨우 15세에 6부의 군장되여 성철하신 마음에서 교화가 두터웠네. 어지신 왕비도 출생하심이 기이(奇異)하였네. 내치를 잘 하시자 국인(國人)들은 이성(二聖)이라 하였네. 농사를 권장하니 의식이 넉넉하였네. 예양(禮讓)있는 풍속(風俗)이요 군대 없는 나라였네. 왜노(倭奴)들의 항복함과 낙랑인(樂浪人)의 감탄함은 이게 모두 시조왕의 인(仁)이라네. 이웃나라 초상 때에 침범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남쪽 토산(土産)도 받았네. 육기(六紀)를 지났으니 운수는 천년이라네. 어느덧 백세인데 많고 많은 자손이요, 여러 파(派)로 전해오니 시조왕의 은덕 일세. 처음으로 터를 마련하여 조용한 사당 지었으며, 이조 영조 임금은 숭덕전(崇德殿)이라 하였으니 높고 높은 집 이름이요 빛나고 빛난 왕호(王號)로다. 앞과 뒤에 법이 있어 사관(祀官)들이 아뢰온다네. 날씨가 가물 때는 백성들은 영혼의 도움을 받으니 노인들이 말하기를 아직도 혜택이 남았다 하신다네. 묘문(墓門)옆에 높다란 비(碑)는 왕명(王命)으로 세웠으니 길이길이 만년이나 전하리라. * 보국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삼관 대제학(輔國 崇政大夫 判中樞府事 三館 大提學). 세자(世子) 좌빈객(左賓客)을 겸(兼)하여 지낸 조빈(趙彬)이 지음.
2. 신라 시조왕릉 입비(新羅 始祖王陵 立碑)에 청(請) 한 글 <top> 경상도 대구 땅에 유학(幼學) 박윤광(朴胤光) 등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왕세자 저하(邸下)께 글을 올리기를, 옛날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이란 임금이 황제(黃帝)와 요(堯)와 순(舜)임금의 후손들을 찾아 삼각(三恪)을 세워 그 분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인들의 높은 덕이 끊기지 않고 이어간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장하도다! 우리 성조(聖朝)의 흠숭(欽崇)하는 아름다운 일이 주(周)나라와 같다할 수 있으니, 그것은 평양에 있는 숭인전(崇仁殿)과 마전(麻田)에 있는 숭의전(崇義殿)과 경주에 있는 숭덕전(崇德殿)들을 창설한 것은 숭보(崇報)하는 법으로 주나라 희(姬)씨가 삼각(三恪)을 두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아주 좋은 법이라 할 것입니다. 신(臣)등이 간절히 말씀 올리고자 하여 천리 길을 걸어와 구혼(九閽)의 존전에 아뢰오니 세자 저하(邸下)께서는 특별히 받아 주소서. 신라 시조왕은 하늘이 내리신 신인으로 처음 동방의 서울 경주에서 이 고장의 풍속을 만들었으니 그 공덕이 삼한의 나라에 으뜸간다는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무슨 말씀 더 하오리까? 아! 이곳 영남(嶺南) 땅은 우리 국가의 근본이기에 그 백성들은 정직하면서도 인정이 많은 것은, 시조왕의 얼을 이어 받은 것이며 뿐만 아니라, 해마다 가뭄이 올 때면 나정(蘿井)의 곁에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면 바로 신령스러운 증험이 있으니, 그것은 곧 밝고 밝으신 시조왕의 영혼이 하늘에 계셔 우리 국가를 도움심인가 합니다. 돌아가신 우리 세종 임금께서 시조왕릉의 매몰(埋沒)됨을 특별히 생각하시어 묘전(廟殿)을 지어 춘추로 제사를 올리게 하셨고 경종(景宗) 임금께서는 숭덕전(崇德殿)이란 호칭을 주어 후손들에게 참봉(參奉)이란 벼슬을 내려 지키도록 하셨으니 이는 곧 숭인전(崇仁殿)을 선천씨(鮮千氏)에게 지키도록 하는 것과 같으니 존숭(尊崇)하는 법이 이 정도이기에 더 유감이 없으나, 그러나 다시 한번 엎드려 생각하니 숭인전(崇仁殿)은 모두 다 비를 세워 아름다운 역사를 무궁한 천만년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누구든지 생각하며 우러러 보지만 숭덕전(崇德殿)만이 이렇다 할 현각(顯刻)의 비(碑)가 없어 하나의 황릉(荒陵)이 되였으니 행인들의 아쉬움뿐 입니다! 지나간 병인(丙寅)년에 도백(道伯) 김상노의 장계(狀啓)로 묘비(墓碑)를 세우라는 어명은 얻었으나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신(臣)등이 나왕(羅王)의 자손으로 아쉬운 마음 참지 못하고 요즈음 재력을 모아 비를 세우고자 하오니 이 사업은 국가에서 할 일이요, 자손들이 하지 못할 일인 줄 아오나 감히 우리들의 적은 정성이나마 다 하고자 하오니 유음(兪音-허락)을 내리옵소서. 다시 한번 엎드려 생각하니 시조왕께서 처음으로 황둔(荒屯)한 땅에서 탄생하여 동토사람들의 주인이 되셨고 성대사려(聖代沙麗-왕의 묘소)의 상서가 내외 자손들에게 많았으며 국가에서 숭봉(崇奉)하는 법도 진실로 전조(前朝)의 모든 릉(陵)보다 특별한 것은 지난 임자(壬子)년에는 관원을 보내 본전(本殿)에 제사하게 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거룩하신 성의(聖意)인가 하옵니다. 우리 모두 성은을 타인들보다 배나 감통(感通)합니다. 요즈음 법을 지킨 릉관(陵官)들이 예조로부터 발령받은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직책에 불충실하여 거의 陵의 관리를 소홀하니 이는 성조(聖朝)께서 해관호전(該官護殿)의 본의를 이행하지 못함이요, 또는 숭인전(崇仁殿) 참봉(參奉)보다 다름이 있으니 정법(正法)를 따라 그 행사를 중대히 하시어 조금도 법에 잘못 됨이 없게 하소서. 엎드려 바라오니 저하(邸下)께서는 특별히 묘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숭덕전(崇德殿)을 지킨 관원에게도 부여된 직책에 충실하게 하신다면 성조(聖朝)의 어지신 덕화가 삼각(三恪)을 세운 성전(盛典)보다 더욱 빛나리니 우리 모두 끝없이 빌고 빌면서 삼가 유음(兪音)을 듣고자 합니다. *작자(作者)는 사신(詞臣)이라 하였음.
교(橋)의 남쪽 월성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은 박씨 시조왕의 사당(祠堂)이다. 유민(遺民)들의 추모(追慕)하는 정신도 여기에 잇는가 하면 성묘(聖廟)를 높이 받드는 것도 여기에 있으며 그 설치한 규모도 숭인전(崇仁殿)과 숭의전(崇義殿)과 같은데 이 사당의 환경을 말하자면 릉(陵)은 있으며 비(碑)돌은 없으며 사당은 있으되 침실 또는 행낭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성조(聖朝)께서 미처 못 하신 일이기에 국인(國人)들 모두가 마음 아파 하든차, 다행히 김(金) 정승 상노(尙魯)씨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이 현황을 적어 조정에 올리자 계속 왕의 자손 중 전참봉(前參奉), 태운(泰運), 한명(漢明)이 자기 종인(從人) 수백 사람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 주로 이 일을 거론한 사람은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씨와 승지(承旨) 도원(道源)씨와 태의(泰議) 상덕(尙德)씨였으며 비답(批答)을 내리게 된 것은 김재노(金在魯)씨의 의론으로 윤허(允許)를 받게 되였으니 이때는 우리 성상께서 위(位)에 오른지 27년 신미(辛未) 가을철 이였다. 왕명이 내리자 즉시 이 사업을 진행하는데 비(碑)돌에 비문(碑文)은 각자(刻字)하였으나 비(碑)를 세우지 못한 것은 사력이 부족한 이유인데 비면(碑面)끝에 을해(乙亥) 립(立)이란 3자는 각자(刻字)하는 사람의 예측으로 잘 못된 각자(刻字)라 한다. 아- 신라왕의 높으신 덕과 이상한 일들은 이미 처음에 세운 비문에 모두 다 기록되었는데 왕의 자손들 마음인 즉, 누락된 사실이 있지 않은가 해서함이요, 또는 비(碑)돌에 각자(刻字)는 하였으되 세우지 못하고 제차 조정에 상소했다는 자세한 내력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여 알게 함이다. 삼가 동국사기(東國史記)를 열람해보니 고려조에 김부식이 중국에 들어가 이부(吏部)에 벼슬하다가 본국으로 돌아 올적에 중국천자가 그림 한 폭을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이 그림은 너의 나라 ?신라 시조왕의 어머니 영정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제실(帝室)의 딸이 선술에 통하여 동쪽 해상에서 놀다가 남자를 보지도 않고 잉태하여 출생한 것이 신라 시조왕이다. 그 사실을 찬(贊)하여 말하기를 선도(仙桃) 성모(聖母)가 어진 왕을 출생하여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 하니 선도(仙桃)는 이곳 경주의 산명인데 그 산 가운데 오래전부터 성모사(聖母祠)라는 유허가 있었다 하니 사씨(史氏)들의 기록을 믿어야 할 것이다. 아-혼돈한 나라를 개척하려면 신성한 인재가 필요한 것인지 처음에는 단군(檀君)이 하늘에서 내려 왔는가 하면 주몽(朱蒙)은 신포중(神胞中)의 사람이니 이는 하늘이 성모(聖母)로 하여금 이 성자(聖子)를 출생하게 하였으며 알영(閼英) 비(妃)도 용(龍)에서 출생하여 왕비가 되게 한 것도 하늘의 뜻이요, 문왕이 탄생하신 후 사씨(姒氏)가 탄생한 것 같으니 신라왕과 알영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태사(太姒)와 같으며 관휴(關睢)와 인지(麟趾)같은 경사스러움이 반드시 희(姬)씨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로되 세대가 요원하고 문헌의 증거가 없는 것이 아쉬웁고 박씨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소목(昭穆)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박씨들은 진실로 신라왕으로 비롯하여 밀양(密陽), 반남(潘南), 학성(鶴城)등 수십 곳에서 산재하면서 고을 이름 따라 본관을 삼은 자손이 천지만파(千枝萬派)라 할 수 있으되 사실상 그 자손들의 근본을 연구해 보면 모두가 신라시조왕의 후손이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성덕이 있는 사람은 아주 그 후손이 많다 하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며 더욱 경사스러운 일은 자손들 중에 우리나라 왕비가 되신 분을 말하자면 인성(仁聖)과 의인(懿仁)요, 외손으로는 오늘날 왕비가 되신 분은 인경(仁敬)과 인원(仁顯)과 인원(仁元)이시니 조정에서도 숭덕전(崇德殿)을 잘 숭봉유양(崇奉揄揚)하는 것이 특별히 3대비(三大妃)들의 추원보본(追遠報本)하신 덕에 영광될 뿐만 아니라, 우리 성상효은(聖上孝恩)의 도리에도 당연하다 하겠다. 비문(碑文)을 거의 다 마칠 적에 참봉(參奉) 원(源)이 말하기를 이제 우리 입비사업(立碑事業)은 다 되었으니 다시는 여한이 없을 것이요, 또 다시 아니해서는 아니 될 하나의 일이 있는데 그것은 시조왕께서 평소 불으시던 옥저(玉笛)가 오늘날 조령(鳥嶺)의 서(西)에 있고 금척(金尺)은 건천(乾川)의 남(南)에 있으니 왕의 큰 공과 위대한 정신은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신령한 증조와 이상한 영흠은 여러 사람들이 아는 바요, 옥저(玉笛)와 금척(金尺) 성왕(聖王)의 특별하신 사적이 아니니 이 일은 추진 할만도 하고 안할 만도 하다. 그러나 물건을 찾아보려 하는 것도 또한 자연의 이치인 것이니 저(笛)나 척(尺)이 아무리 적은 물건이지만 유민(遺民)들이 느끼고 추모(追慕)하는 데는 큰 자료가 될 것이니 나로서는 조금만 언급하고 다음날 옥저(玉笛)소리를 아는 사람을 기다리노라.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정익하(鄭益河)는 어명(御命) 받들어 기록하노라.
4. 신라왕자 밀성대군(密城大君) 제단비(祭壇碑)에 새긴 글 <경남 무안군 하서면 무안리에 있다> <top> 대군(大君)의 이름은 언침(彦忱)인데 신라 경명왕의 큰 아들이요, 밀성(密城)은 대군을 봉(封)한 고을 이름이다. 대군께서 돌아가신 그 날이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릉묘(陵墓)를 알 수 없어, 대군을 봉한 밀성 고을 무안마을에 단(壇)을 세웠다. 삼가 박씨의 보첩을 살펴보니 시조 혁거세(赫居世) 왕은 하늘에서 내려와 성(姓)은 박(朴)이라 하시고 나라 이름은 신라(新羅-徐羅)라 하셨으니 성덕의 큰 업적이 진실로 우리나라에서 으뜸간다 하겠다. 시조왕을 이어 왕이 되신 분은 남해(南海)왕이요 남해를 이어 왕이 되신 분은 유리(儒理)왕이요, 유리왕 다음에는 파사(婆娑)왕과 지마(秪摩)왕과 일성(逸聖)왕과 아달라(阿達羅)왕인데, 시조로부터 아달라(阿達羅)까지는 모두 대수는 5대요 왕은 7왕이며 아달라(阿達羅)왕 이후 23대 때 신덕(神德)왕이 또 다시 김씨를 가름하여 왕이 되였으니 이는 하늘이 성조의 옛 물건을 다시 성조의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하겠다. 신덕왕을 이어 왕이 되신 분은 경명(景明)왕인데 경명왕께서 아들 8형제를 두었으니 큰 아들은 바로 대군이요, 차자는 고양대군(高陽大君)인데 이름은 언성(彦成)이요, 3자는 속함대군(速咸大君)인데 이름은 언신(彦信)이요, 사자는 죽성대군(竹城大君)인데 이름은 언립(彦立)이요, 5자는 사벌대군(沙伐大君)인데 이름은 언창(彦昌)이요, 6자는 완산대군(完山大君)인데 이름은 언화(彦華)요, 7자는 강남대군(江南大君)인데 이름은 언지(彦智)요, 8자는 월성대군(月城大君)인데 이름은 언의(彦儀)다. 경명왕이 왕립에 계실 때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무리들이 제아무리 서상지경(西上地境)에서 난리를 일으켰지만 나라가 이처럼 견고하였다. 대군(大君)이 경명왕의 큰 아들로 왕의 계통을 이어 받지 않고 고을 하나를 받아 산수를 즐기며 천명대로 건강하시게 살다가 세상을 마치시니 과거에 한번도 포석정(鮑石亭)같은 재앙과 또한 여교(麗郊-고려에 항복)같은 행동이 없었고 자손을 위하여 끝없는 업적을 마련하였다. 아-대군(大君)의 지극하신 덕망과 높으신 절개는 중국 주나라 태백(泰伯)과 오(吳)나라 계찰(季札-季子)와 같다고 하겠다. 고대의 신라와 고려는 역사가 누락된 곳이 많아 대군의 역사적 자료가 전해 온 것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대군의 후손으로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욱(郁)이란 분과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 란(瀾)이란 두 분도 또한 공덕이 현저하다 하여 단의 동편과 서편에 제사를 모신다. 그 후 태사(太師) 벼슬을 한 언부(彦孚)와 도평의사(都評議事) 벼슬을 한 언상(彦祥)과 복야(僕射)벼슬을 지낸 언인(彦仁)과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 한 양언(良彦)과 판도판각(版圖版閣) 벼슬을 한 천익(天翊)과 삼사좌윤(三司左尹) 벼슬을 지낸 을재(乙材)와 사문진사(四門進仕) 벼슬을 원(元)과 밀성군(密城君) 척(陟)과 규정공(糾正公)이신 현(鉉)과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中)과 미령동정(美令同正) 원광(元光)과 정국군(靖國君) 세(歲) 이 분들이 밀성으로 본관을 하는 12파 중조들이요. 또는 진원군(珍原君)이신 희중(熙中)과 창원부사(昌原府使)이신 령(齡)과 구산군(龜山君)이신 천(蕆)과 태안군(泰安君)이신 원의(元義)와 은풍군수(殷豊郡守)이신 치온(致溫) 이 분들이 밀성(密城)에서 나누어진 명문 중 중조들이요, 반남(潘南)과 진주(晋州)와 문의(文義)와 강진(康津)으로 本貫을 하신 분들도 모두 밀성대군으로 중조를 삼으니 오늘날 전 세계에 밀성대군 자손을 찾으면 무려 수십만이나 된다니 이는 밀성대군의 인자하신 마음과 많은 덕으로 이렇게 많은 자손을 두게 된 것이다. 경전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후손이 많다 하였고 덕망이 있는 분은 반드시 대대로 제사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은 진실로 밀성대군에게 알맞은 말이라 하겠다.
인조(仁祖) 갑술(甲戌)년에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밀성대군의 외손(外孫)으로서 본손(本孫) 또는 사림(士林)들을 모아 영남루(嶺南樓)에서 제사들 올리고 말씀하시기를 ‘사자(祠字)를 세워 봉안하자는 의논이 대대로 발의 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홍문관(弘文館) 시독(侍讀)이신 해철거선(海徹居先)이 대중 앞에 맹서하되 공덕 있는 조상을 위하여 제사 올리어야 할 것이며 부조들의 발의를 성공해야 하리라, 하고 을축(乙丑)년 중동(仲冬)에 착공하여 정묘(丁卯)년 계동(季冬)에 준공을 마치자 단 이름을 경덕단(景德壇)이라 하였다. 명(銘)에 왈
정묘(丁卯)년십이월 일 후손(後孫) 승훈랑(承訓郞) 홍문관(弘文館) 시독(侍讀) 시 룡(時龍) 근찬(謹撰) 후손(後孫) 통정(通政)홍문관(弘文館)시독(侍讀) 해 철(海徹) 근명(謹銘) 방후손(傍後孫) 승훈전참봉(承訓殿 參奉) 죽산후(竹山后) 전 필(銓弼) 근서(謹書)
통정(通政)농공상부 국장(農工商部 局長) 해주(海州) 오 세창(吳世昌) 전(篆)
5. 고려의사 박공 승봉 전(高麗義士 朴公 承奉 傳) <top> 박공(朴公)의 이름은 승봉(承奉)인데 고려 말의 한 늙은이다. 그분의 선대를 말하자면 신라 경명왕의 아들 8형제에게 고을을 나누어 살게 하여, 장자를 밀성(密城) 땅에 봉(封)하고 대군(大君)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역사에는 기록이 없으며 여러 박씨들의 본관을 오늘날 모두 다 알 수 없으나 대부분 8대군의 자손이다. 편집자 주(註) * 우리문중의 보첩에 “고려유로(高麗遺老)”를 “고려 말의 한 늙은이”라고 해석하여 놓았는데 이는 잘 못이다. 유로(遺老)의 사전적 의미는 - 살아남은 노인(老人). 선조(先朝) 또는 망국(亡國)의 구신(舊臣)을 뜻한다. 따라서 승봉께서는 이미 망해 버린 고려의 옛 신하였다는 뜻 이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했으나 공께서는 고려의 옛 신하로 남았을 뿐 조선의 신하로는 출사하지 않고 의를 지켰다는 의미가 있다.
목은(牧隱) 이선생 색(穡)의 기록을 보면 8대군중에서도 오직 밀성 박씨가 알려졌다 하시고, 이익재(李益齋) 선생 재현(齊賢)의 기록에도 밀성 박씨들은 모두가 신라 중엽에 대장군 욱(郁)이란 분이 요동(遼東) 독포사(督捕使) 난(瀾)을 낳으셨는데 이 분부터 24세는 보첩에 기록이 없으며, 밀직군(密直君)이란 벼슬은 한 언상(彦祥)으로 시작되는데 이분은 고려 문종 때 태사 벼슬에 계신 언부(彦孚)의 아우다. 소감(少監) 벼슬을 하신 양신(良臣)과, 감무(監務)를 하신 직(直)과, 문림낭(文林郎)을 하신 인경(仁卿)과, 내부시승(內府侍丞)을 하신 검(儉)과, 찬성사(贊成事) 문정공(文靖公)이신 열(說)과, 현승(縣丞)을 하신 창밀(昌密)과, 또는 거인(居人)이란 분으로 전해 오는데, 거인(居人)이란 분은 고려 말에 벼슬을 아니 하다가 인의현(仁義縣)으로 귀양가서 살다가 태산현(泰山縣)으로 옮겨 살았다. 그 후 인의현은 우리나라가 개국하면서 태산현과 합하여 태인(泰仁)인이 되자 그 때부터 본관을 태산(泰山)이라 하여 삼백여년을 내려오다가 다시 구관(舊貫)으로 고쳤으니, 박공 승봉은 거인의 작은 아들이다. 지기가 청백하여 위엄이 출중하더니 고려가 망하자 대대로 받은 집 아들로 마음 못마땅하여 형 문봉(問奉)과 함께 벼슬길을 버리고 경서(經書)에 마음을 담고 성현의 학문을 닦어, 더욱 중국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도원량(陶元亮)을 사모하였으니, 공의 평생 닦으신 학문이 진실로 고인들에게 부족함이 없었으며, 왕(王)씨의 혁명을 당한 후 이조 섬기기를 부끄러워하자 친지들은 모두 의사(義士)라 불렀다. 의사께서 돌아가신지 이미 오랜 세월이기 때문에 의사의 언론과 출입과 또는 생졸(生卒)과 배위(拜位)에 자상한 증거는 없으나 특별한 사적(史蹟)은 대강 자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의사의 아들 덕명(德明) 이란 분이 처음으로 장성고을 소속(小谷)마을로 집을 옮겨 태종 임금 임오(壬午)에 무을과(武乙科) 16인 중에 합격되여 벼슬이 승의부위(承義副衛)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우령부사정(右領副司正)으로부터 3품까 올랐으며, 돌아가시자 그 고을 호산(狐山) 자좌(子坐)에 장사하였고, 그분의 아들 연생이란 분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충무 시위사(忠武侍衛司) 대호군(大護軍)이란 벼슬을 하여 단종 임금을 섬길 적에 지혜와 용력이 뛰어났다. 세조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적부터 왕위를 빼앗으려는 마음을 알고 미리 벼슬을 버리고 월산에 숨었는데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이라는 녹훈(錄勳)을 내렸으나 병든 몸이라 하시고 담양 땅 월산마을 사위 이석손(李碩孫)의 집에 숨어 자신이 나는 태산박씨(泰山朴氏)라고 하시고 살다가 별세하셨고, 그 후 2세에 내려와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종원(宗元)이란 분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큰 아들 수온(守溫)이란 분은 벼슬이 선교랑 경기전 참봉(宣敎郞 慶基殿 參奉)이요, 둘째 아들 수양(守良)이란 분은 진사 시험을 거쳐 문과에 합격하셨는데 문학가로서 예율(禮律)에 밝으시며 효근(孝謹)하시고 청백하시니 김(金) 십청(十淸) 세필(世弼)이란 분이 여러 번 천거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여 중종, 인종, 명종 임금 때 유명한 신하라 하여, 생존 시에는 잔치 자리도 마련해 주셨고 돌아가시자 제문(祭文)과 많은 곡식을 내리셨다. 임종하실 때 자손들에게 시호(諡號)도 청하지 말 것이며,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셨는데, 하서(河西) 김문정(金文正) 선생이 공의 묘지문(墓誌文)은 썼다. 수온(守溫)이란 분의 손자 상겸(尙謙)이란 분은 수(壽)로 중추(中樞)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사후에 도승지(都承旨) 벼슬을 증직으로 받았으며 상의(尙義)란 분은 가정살림에 돈독하여 아우와 우애하심이 옛날 중국 설포(薛包)와 같았으며 성기(星氣)의 학문으로 온 세상에 이름이 높자, 중국에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이(李) 월사(月沙) 연구(延龜)의 추천으로 조정의 법에 의하여 관상감겸(觀象監兼) 교수(敎授)에 임명 되셨고, 당시 여러 생원, 진사, 학사대부들 중에서 최고로 상수(象數)의 학에 통달(通達)하신 분으로 피선(被選)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를 역임하셨다가, 80에야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셨으며, 송암(松巖) 기건익(奇揵翼) 선생이 비문은 기록하였고, 상지(尙智)란 분은 효심과 우애성이 독실하여 승사랑(承仕郞)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라는 벼슬을 하셨고, 수양의 아들 사우(思愚)라는 분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진안현감(鎭安縣監) 벼슬을 하셨고 사노(思魯) 라는 분은 승사랑(承仕郞) 풍저창(豊儲倉) 봉사(奉仕) 벼슬을 하셨으며, 사우의 아들 상근(尙근(謹))이란 분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거창현감(居昌縣監) 벼슬을 하셨고, 세대(世代)라는 분은 송암(松巖)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친구 간에 존경을 받았으며, 상겸(尙謙)의 아들 윤부(允簿)라는 분의 호(號)는 외암(畏菴)인데 무과(武科)에 합격되여 조산대부 예빈시 판관(朝散大夫 禮賓侍 判官) 벼슬이 되였는데, 선조임금 때 임진왜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자 선무원종록훈(宣武原從錄勳)을 받았으며 그 분의 아들 취제(就悌)의 호(號)는 절재(節齋)인데 인조 임금 병자호란 때 평민으로 의병(義兵)의 깃발을 높이 들고 기공(奇功)을 세웠으며, 상겸의 손자 취극(就克)의 호는 우헌(迂軒)인데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 벼슬로 병자호란 때 한강 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상의(尙義)의 아들 윤감(允鑑)은 선무랑 행 군자감 참봉(宣武郞 行 軍資監 參奉) 벼슬을 하였고, 윤감의 아들 행중(行重)의 호는 매헌(梅軒)이신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기(奇) 송암(松巖)의 외우(畏友)였으며, 우암(尤庵) 송(宋) 문정(文正)선생의 사숙(私淑)이었다. 박의사(朴義士) 승봉(承奉)의 10세손인 매헌공(梅軒公)께서 아주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 모신 예절 보첩 등을 손수 만드시고, 묘문(墓文)은 송암(松巖)에게 얻어 내셨으니, 사우(師友) 관계로 보아 매헌공(梅軒公)을 어진이라 하겠다. 그리고 매헌공(梅軒公)께서 간단히 의사공(義士公)의 행장문(行狀文)을 기록하시고, 이어서 시 한수 쓰시기를 아-우리 중조(中祖)께서는 살아서 난리를 만나셨네, 서산(西山)에 고사리는 캐지 못했으나 율리(栗里)의 정신을 전하셨네. 경서(經書)를 보아 마음을 밝히고, 술을 걸러 기분을 내셨네. 만일 주부자(朱夫子)가 계신다면 천추의 일이라도 공필(公筆)를 잡으시리라 [호차아중조(呼嗟我中祖) 생제난리중(生際亂離中) 미채서산궐(未採西山厥) 유전율리풍(猶傳栗里風) 완경심자득(玩經心自得) 쇄주의방융(灑酒意方融) 약우주부자(若遇朱夫子) 천추사발공(千秋事發公)] 라고 쓰셨으니, 이 시는 왕노재(王魯齋)의 시(詩)에 “뉘가 특필(特筆)로 진경사(晋慶士)를 기록하여 천년의 마음을 일조(一朝)에 밝힐까” 라는 시구(詩句)와 같다. 의사공께서 비록 시대가 좋지 않아 숨어 살으셨지만 충의의 보답으로 매헌공(梅軒公) 같은 어진 자손이 많이 나셨네. 앞으로 학자들이 연구하여 힐 것이요. 큰 사실이 나타나 분명하니 자세한 것은 기록할 수 있으나 줄인 것이 좋을 것 같도다. 월송외사 황윤석이 말하되 우리 태조대왕이 왕씨를 가려 나라를 둠은 하늘이 주고 사람이 돌아옴이라 성하고 성하도다. 저 일시의 구름이 일고, 용이 변하여 산과 하늘을 두고 맹세하고, 이름을 솥과 종이에 색인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권근 같은 학자와 황희와 허주는 유관같은 인문들이 앞뒤로 준망이 되여 다 등용 이되니 어찌 하늘이 주심이 아니리요. 이때에 몇몇의 충신열사들은 혹은 죽고 혹은 살아 자취는 비록 다르나 마음만은 한가지라. 데약 참약 왕씨를 배반치 못함은 무슨 까닭이나 슬프다. 왕씨 500년에 치도의 덕택을 입은 바다. 신라 백제도 되놈이요, 몽고도 또한 오랑캐라 그 풍교명절에는 전력을 못했다하나, 오히려 너그럽고 또 간약하여 본질이 없어지지 안한 고로 일조(一朝)에 나라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무디무디 본성을 잃지 않고 절개를 지키니, 정포은과 이목은과 길야은 모든 선생같은 이는 말할 것 없고, 최공 영과 김공 종연과 우공 현보와 정공 지와 빈공 안일이 또한 위대한분이요, 나머지 조한산 인벽과 남사천 을진과 조송 산견과 박도은 문빈과 윈운곡 천석과 서빈 당견과 김농암 주와 이석탄 양중과 최판 륙양과 조건 곡유와 이금은 양소와 임감 무탁과 전감무 영층과 김광산 약시와 권입 사정과 김리촌 자진과 중에 나옹과 혜근 같은 이가 개성일부의 두문동과 불조현에 서로 머리를 대고 죽고, 혹은 누구인줄도 모르게 남자는 장사차림으로 여자는 삿갓을 쓰고 세세로 높은 담안에서 하늘의 해를 보지 아니하고 지내니 더욱 슬프고 공경할 일이로다. 요새 세상에 옛일을 널리 아는 선배가 있어 그 사실을 상고하여 춘추전의전신의 법으로 다스리면 뜻이 좋고 말이 곧으나, 사람마다 말이 다르니 좋은 말이 되지 못한다. 반듯이 전하는 사람이 믿은즉 한사람이라 야군자가 의심을 하지 아니하니 이가 또한 역사의 일례라 슬프다. 사람의 마음이 하늘에 뿌리하고 공의가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백세의 아래라도 어제 일같이 나타난다. 나 박의사(朴義士)의 유사를보니 매헌(梅軒)같은이가 뒤에 나서 송암(松巖)에게 배우고 우암을 사모하여 글도 있고 시도 있으니 절대로 사실 없는 선조를 허찬 하실 분이 아니다. 이약간의 몇 말이지만 충효와 문학이 모두 구비 되여 한번보아 의심이 없으니, 참어지신분의 말이로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상고하니 고려 왕씨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는 이가 어찌 다 관계없이 했으리요. 요컨대 또한 문무의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다. 호을로운곡과 금은 같은 이는 한 계급의 벼슬도 없고 진사의 한사람이다. 이 박 의사(朴義士)는 무슨 과거에 무슨 벼슬을 지냈든가 구극해서 말하자면 세녹을 먹든 한 후손이다. 또 녹이 끊어진지 이세라 평민으로 차처하여 이씨조선 처음정치의 빛을 보더라도 혹 그리 안 될 일은 아니로되, 새 이씨를 반대하고 구 왕씨를 따라가서 남들은 양양이 즐거 하나 나는 망망이 싫어하니 그 마음에 저가 심히 볼만하고 이가 심히 편안한자라. 옛적 송나라가 망하자 호일계와 오징이 다 과거에 나서고 다 큰 선배들이다. 호씨는 한번도 나서지 안했어도 학자들이 높혀 쌍호선생이라 하고 오징은 일곱 번이나 나갔으되 사씨들이 사기에 쓰기를 임천군공이라 하니 공(公)이 이두사람 가려 살핀바가 있도다. 후래에 시국이 바로잡혀 시비가 뒤집힘을 공이 어찌 처음부터 생각했으리오마는, 천리가 근본 곧음은 뻔한 일이라 슬프다. 공은 참으로 글을 바르게 읽으신 의사(義士)라 하리로다.
세손익찬(世孫翊贊) 이재(頥齋) 평해(平海) 황윤석(黃胤錫) 지음.
6. 호산재중건기(狐山齋 重健記) ☞ 호산재 <top> 오산(鰲山-장성) 고을 서쪽 호산 양지 편,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바로 우리 박씨 선조들의 장지(葬地)인데, 경대부(卿大夫)의 무덤과 사군자(士君子)의 묘소가 여기 저기 계신다. 제사(祭祀)를 모실 때 제실(祭室)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제실을 지었는데 그 제실이 제목과 기와가 부패되어 견디기 어려웠다. 문중 의논이 모두 하나가 되여 다시 짓기로 계획 할 적에, 전번 제실 터가 구복(龜卜)과 적(笛)점한 결과 모두 좋다 하기에, 무술(戊戌)년에 목공과 토수들이 기능을 다 하더니, 몇 달이 못 되여 제실의 모양이 잘 단장 되였다. 간수(間數)는 7간인데 따스한 방과 서늘한 방을 반반으로 나누었다. 후세의 자손으로서 누구든지 힘쓰지 않으리요 만은 만승(萬升)씨와 의용(義容)씨가 독특한 공로가 있는 분인데, 이 사업이 크기 때문에 내부 단장을 못 마치고 두 일가 분들은 갑자기 영원한 천고의 사람이 되였다. 이에 대하여 염려한 나머지 문중 어른들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사람은 화용(華容)씨요, 마음과 힘을 다 하여 유사(有司)로서 잘 협조할 사람은 덕용(德容), 형용(亨容), 태구(泰求) 등이 적임자라 하여 임원(任員)으로 선정 되였다. 을묘(乙卯)년 여름에 말끔히 공사를 마치자 자손들이 찾아와 제사를 대단히 잘 모셨다. 제사를 마치는 날 필자(筆者)로서 의사를 밝힌다면 후손으로서 선세사업(先世事業)을 계승하는 길은 조상의 얼을 이어 받아 닦는 데 있으며, 조상의 얼을 닦는 방법은 학문을 가르치는데 있다. 옛날에도 양서(痒序)라 하는 집은 인륜을 가리킨 곳인데 말세(末世)가 되자 양서(痒序)는 폐허가 되고 학문을 닦지 아니한다. 우리나라 서원(書院)집은 양서(痒序)집과 비슷한 곳인데 보존된 곳이 몇 군데나 되는가? 그리하여 생각해보니, 묘아래 제실이란 것은 제사모신 후에는 비어 있는 집이니, 학문에 뜻이 있는 자손이 있으면 부형들이 서로 도와 이곳에 있게 하여, 시와 서를 외우게 하고 예의를 강습하여 큰 선비 되여 한 평생 용 됨이 없는 자손이 된다면, 선조의 영혼이 생각하기를 나도 후손이 있어 이 터를 버리지 아니한다 하시리니, 이 방법이 어찌 선조를 모시는데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모두들 힘쓸지어다. 공사를 마치는 날 제실 세운 사실을 기록하면서 말미에 권학의 뜻을 말했는데 나 자신도 배움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말을 했을까? 이는 농관(農官)으로서 자신은 농사를 아니 지으면서 사람들에게만 농사를 권한 것 같으니 학문하는 고인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 같다. 도리어 부끄럽기만 하도다.
을묘(乙卯)년 초가을 말일에 후손 문용(汶容) 지음.
7. 장릉명신 돈재 선생 전(莊陵名臣 遯齋 先生 傳) ☞ 돈재공 묘소(전남 담양) <top> 박공의 이름 연생(衍生)은 밀성(密城)박씨로 신라에 유리이사(儒理尼師)가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석탈(昔脫)의 두려운 바가 될까봐 외읍을 나누어 주면서 살게 하였다. <편집자 주 : 아들 8형제를 둔 신라 박씨 임금은 54대 경명왕 이시다. 유리왕은 신라 3대왕이니 시대가 맞지 않다> 큰 아들은 밀성(密城)을 차지하셨는데 요즈음은 밀성부(密城府)라 한다. 가끔 대관(大官)들이 출생 되었는데 고려 시대에는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요.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신 열(說)이란 분과, 그 분의 아들 창밀(昌密)은 벼슬이 현승(縣承)에 끝났으며, 그 분의 아들 거인(居人)은 보첩에 기록되기를 벼슬을 사양하다가 인의현(仁義縣)에 귀양살이 하고 거기서 이대를 살았다 하였고, 이분의 아들 승봉(承奉)은 벼슬할 마음을 버리고 경서(經書)를 습독하여 서산(西山)과 율리(栗里)를 사모하시니, 사람들은 의사(義士)라 부르며, 이분의 아들 덕명(德明)은 건문(建文) 임오(壬午)년에 무을과(武乙科)에 합격되여 호익부사정(虎翊副司正)이란 3품 벼슬이 되셨는데, 인의현(仁義縣)이 이조(李朝) 국초에 태산(泰山) 고을과 합하여 태인(泰仁) 고을이 된 후, 그 땅으로부터 장성(長城) 땅으로 오신 분이다. 공께서는 옛날 양반의 아들로 지혜와 용력이 보통 사람보다 많아 늠름한 자세와 높은 지조는 타인이 우러러 볼만하다. 돈재공께서는 단종(端宗) 임금 때 절충장군 행 충무시위사 대호군(折衝將軍 行 忠武侍衛司 大護軍)이란 벼슬로 서울에 계실 때,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지자, 하늘의 명령과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돌아갔음을 아는 모사군 신숙주, 한명회, 권남, 정인지 등이 수양의 처소에 출입하면서 임금님 자리에 오르시기를 논의하였다. 공께서도 역시 수양과 아주 친절한 처지이지만 수양의 부르심을 마다하시고 호남 땅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 뒤 천첩(賤妾) 등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종의 자식이기 때문에 나를 따라 함께 갈 수 없다. 다음날 나를 찾는 관원들에게 너희들이 꾸지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 편지를 내어 보여 주면 겨우 모면할 것이니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말라” 하시고 공께서는 호남 땅으로 내려가셨다. 첩(妾)은 공의 말씀대로 의복 속에 간직해 두었는데 세조가 과연 첩(妾)을 불러 공의 종적을 물으면서 형벌하려고 할 때, 공의 편지를 내어 바치니 세조께서 다 읽어 보시고 다시는 공의 종적을 묻지 않으시니 공께서 쓰신 편지의 내용이 첩(妾)과는 아주 이별하였고 영화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을해(乙亥)년에 왕위를 이어 받자 6신들은 죽었으며 단종(端宗) 임금께서는 영월로 옮기셨다. 정축(丁丑)년에 단종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차례 세조가 어명(御命)을 내려 찾았으나, 공께서는 병든 몸이다 하시고 나가지 않으시니, 무인(戊寅)년에 이등공신(二等功臣)이란 녹훈(錄勳)을 내리고 또다시 동궁(東宮) 때에 은혜가 있다하여 좌익원종권(左翼原從券)을 주었으나, 끝까지 담양 땅 서쪽 월산(月山)아래 사위인 이석손(李碩孫)의 집에 숨어 나오지 않고 돌아가시니, 그곳에 장사하고 장성 땅 호산 아버지 무덤 아래 장사지내지 안했다. 또한 태인(泰仁)으로 본관(本貫)을 삼고 밀양(蜜陽)이란 옛 본관을 쓰지 안한 것도 출세의 뜻을 감추며 자신이 슬퍼함이요. 백세후에도 영원히 숨기려는 뜻이었다. 공의 큰 사적(史蹟)이 이미 밝혀졌으니 적은 사적은 약(略)하여도 좋을 것인 즉 공이 돌아가신 연대가 기록이 없다하여 의심할 것도 없으며 2월7일이란 제사 날자가 겨우 전해 온 것도 다행할 것 없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삼백여 년 만에 대동보(大同譜)의 사업이 여러 종족들 힘을 합하여 옛 본관인 밀성(密城)으로 하였으나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공께서 아들 하나 손자 둘이 있으며 증손 때까지도 알려지지 아니하기에 이는 천리가 막혔다 하여 사람들은 가끔 천도를 의심까지 하였었는데, 이제야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 수온(守溫)과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수양(守良) 4형제분들이 진실로 가정을 창대 하게 하였으며, 수온의 손자 상의(尙義)는 마음씨와 행동이 독실하고 아우에게 우애하는 것이 옛날 중국의 설포(薛包)와 같았으며 천문지리의 학을 정통하였는데, 중국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군대에서 예법으로 대접하였고 전쟁할 때 이상한 일만 있으면 반드시 물었으며, 월사(月沙) 이정구 또한 많은 추천을 하자 천하에 이름이 높아 만년에야 조정에 천거되어 처음에 관상감겸 교수(觀象監兼 敎授)가 되였으니, 이는 조종감제(祖宗感際) 때에 법에 의하여 학사대부 중에서 천문, 일월, 왕래의 공부에 통하셨기 때문이다. 누차의 이동을 거쳐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를 역임하여 절충행 부호군(折衝行 副護軍)이 되셨고, 송암(松巖) 기건익(奇揵翼) 선생의 비문(碑文)을 썼으며, 다음 손자 상지(尙智)도 행실이 바르다 하여 여러 차례 천거가 되여 승사랑(承仕郞)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와 예빈시제검(禮賓侍提檢) 벼슬을 하였고, 수양(守良)은 진사로 문과에 합격하여 문학과 예율과 효제(孝悌)와 청백(淸白)으로 김문간(金文間) 세필(世弼)과 교서(交逝)가 좋았다. 내직(內職) 로 말하자면 성균관(成均館)과 승문원(承文院)과 사간원(司諫원) 등 3원과 사도(司導)와 내섬(內贍)과 군기(軍器)와 봉상(奉常) 등 4사와 사헌(司憲)과 도총(都摠)과 한성(漢城)과 중추(中樞) 및 의정(議政)등 5부(府)요 형조(刑曹)와 공조(工曹)와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와 호조(戶曹) 등 5조 판서(判書)를 하시면서도 때때로 경요(經遙)와 의금(義禁) 도총(都摠)을 겸하시었고, 외직으로 말하자면 황주(黃州) 땅 교수(敎授)를 거쳐, 고부(古阜)· 보성(寶城) 두 군데 군수(郡守)와 담양부사(潭陽府使)와 충청도사겸(忠淸都事兼) 춘추(春秋)와 함경도(咸鏡道)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셨으니 온 세상이 요직이라고 할만한 관직을 다 지내시니, 아버지 종원(宗元)과 증조이신 현손(賢孫)까지 3대를 추증(追贈)하였으며, 정치 생활 하실 때는 왕이 잔치상을 마련하여 포양 받았으며 돌아가셔서는 제문(祭文)을 내려 애도를 표하셨다. 수양(守良)의 아들 사우(思愚)께서는 진사(進仕)로 현감(縣監)을 지내시고, 사노(思魯)는 봉사(奉事)를 하셨으며, 손자인 상근(尙謹)은 현감을 지내셨고, 5대손 세대(世大)는 전통적인 학문을 닦은 분이요. 상의(尙義)의 손자이신 행중(行重)께서도 행동이 독실하고 예의를 좋아하여 송암(松巖)과 도의적인 교분이 있었으며 상지(尙智)의 아들 윤흠(允欽)도 학행이 있다 하여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 벼슬을 하셨다. 아-매헌공(梅軒公-行重)같은 어진 자손이 없었다면 누구가 능히 앞 어른들이 못하신 사적을 발굴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 지절을 알게 했을까? 천리(天理)라 하는 것을 여기에 의심할 것 없다 하겠다. 월송외사 황윤석이 말하되 단종의 복위는 우리 숙종대왕께서 고금에 탁월한 성사라 하리로다. 저 허목과 남구만 같은 이들이 앞뒤로 불가하다 주장함은 무슨 심사인지 대개 복위의 예가 거행되자 공의가 결정되고 원한이 다 퍼졌다. 그전에 쌓이고 쌓여 무서워 한말도 못하나가 비록 우암선생의 상소로 효종대왕이 단종을 위한 충신들의 사당을 지으라는 하교가 있은 후로 항간에서 점점 말을 하되 오히려 펴놓고는 못하다가, 이제 와서는 어느 곳에 무슨 말을 못 하리요. 간절히 생각해보면 단종임금 때에 세조임금에게 붙지 안한 분이 3대신이 있으니 충익 절제 김공 종서와, 충정 영천 황보공 인과, 충장 정공분이요, 6신이 있으니 충정 양평 박공 팽연과, 충열 단계 하공 지위와, 충문 매죽 성공 삼문과, 충간 이공 개와, 충경 유공 성원과 충목 유공 응부요, 영양 도위 정공종즉을 합해서 일곱에다 삼대신까지 합하면 십현이다. 또 생육신이 있으니 이계 조공녀와, 추강 남공 효온과, 무항 원공 호와, 매월 김공 시습과, 경은 이공 맹전과, 농은 이공 담수요, 률정 권공 절과, 감찰 정공 보를 합하면 팔현이다. 이밖에도 안평-금성 이대군과, 한남-수춘 이군과, 권자신- 송현수 이척과, 박공 중림과, 조공 극관과, 김공 문기와, 성공 승과, 조공 숭문과, 이공 보험과, 이공 징옥과, 민공 신장과, 장공 이숙과, 유공 자미와, 임공 흥도와, 윤공 혜와, 이공 안과, 이공 연손과, 및 숙의 김씨와, 후궁 권씨와, 신숙주의 처 윤씨, 무릇 이와 같은 이들이 혹은 죽음을 달게 알고, 혹은 우연이 살고 혹은 군사를 이르켜 세조임금을 죽이려고 하고, 혹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혹은 봉사로 칭탁하고, 혹은 강물에 빠져죽고, 혹은 목을 매여 남편을 기다리다 장능지 밖에도 빠진 이가 한이 없다. 이에 또 박공연생을 얻어 합해보니 대략 이분들이 천지가 번복함에 눈으로 경계하고 마음으로 슬퍼한 자라 슬프다. 일찍 신숙주와 정인지 보고 문학을 잘한다하여 세종대왕께서 집현전에 길러 우대한 한사람이 아니냐. 일조에 공을 탐내고 반역을 기화로 하여 한명회와 권람의 꾀에 넘어갔는지 나 일찍이 동으로 장능을 봉심하고 영월본부의 고이일기를 본즉, 단종임금이 돌아가시는 날에 산속 농부와 마을부녀까지 달려들어 통곡하여 말하되 정인지가 우리임금을 죽였다하고 또 문헌비고대고 야사에 이런 말이 있다. 단종왕비를 관비로 정할 때에 신숙주가 훈전과 사패로 달내여 자기에게 붙일 것을 청했다하니 그 죄가 한명회 권람에게 백배나 더 큼이 뚜렷하다. 나 젊어 대신(6신)의 사당과 묘소를 로향강남에 참배하고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선다. 만일 당시 세조훈신의 자손이 이에 있다면 반드시 이 땅을 지나가지 못하리라. 장능을 가는 길에 권람의 자손을 만나더니 그도 또한 탄식하여 말하되 백세의 공론에는 어찌할 수 없다하고, 또 장능에 있을 때에 이개전의 자손이 와서 말하되 장능의 상설을 보기만 해도 놀래여 이마에 땀이 난다하니, 하늘이 멀고멀되 저들이 오히려 그러하거든 당일 저자들의 마음이야 어떠했으랴. 숙주가 완악하여 오래 살다가 죽을 때에 탄식하여 말하되, 인생이 한번은 죽는다, 내가 만일 의에 죽었으면 어찌 오늘의 신숙주 정인지가 되겠는가하니, 그 말이 또한 늦어 후회한들 소용이 없도다. 저들이 비록 문학은 있다하나 천지간에 윈언이한 의자(義字)는 위역과 금역으로 움직이지 못함을 알지 못함이라. 이는 무부(武夫)의 유응부(兪應孚)와 아전인 엄흥도(嚴興道)를 문학사대부가 어찌 당하리요. 저 훈신들의 훈장을 휘날림은 한 웃음에 차지 않는다. 내가 전번에 징험한 바가 있다. 무항 원호가 훈신인 조카를 물리쳐보지 않고 앉으면 반듯이 영월을 행하니 그 열렬한 충의를 혼합해서 훈신에다 입록하니 이는 저명인사를 당겨나가 그 녹권을 자중코자 함이라. 사람을 속이는 방법이 이 같은지 세상이 쇠하고 도리가 없어져 사대부의 염치가 이같이 무너졌다 했다. 흰머리 늙은 내가 논두렁에 업져 있어 근심이 끝이 없다. 공(公)을 위하여 이같이 흥분하여 글을 쓰니 타일(他日) 역사의 부족한데 도움이 되려는지 끝에 광언을 붙이노라. 슬프다. 률정전설의 힘으로도 양광을 구하고, 무황원호의 훈권에 입록했어도 절의를 지키니 이에 합해보면 한가지라. 천추만세 후에 그 누가 나를 알고 나를 죄주고 거듭 나를 믿어주리. 숭정(崇禎) 3 기사(己巳) 5월에 세손(世孫) 익찬(翊贊) 황윤석(黃胤錫) <top> <편집자 주> *숭정(崇禎) 3 기사(己巳) 5월은 1749년이다. 아래 황윤석 선생의 생몰을 보면 1759년에 벼슬길에 나갔다. 따라서 황선생이 21세 때인 1749년에 전(傳)을 찬(撰)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숭정(崇禎) 3 기사(己巳) 5월. 은 '숭정(崇禎) 3 을사(乙巳-1785년) 5월' 의 오기인 것 같다. *황윤석 [黃胤錫, 1729~1791] -조선시대의 언어학자.
본관 평해(平海). 자 영수(永叟), 호 이재(頤齋). 1759년(영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순조 때 도내(道內) 사림(士林)에서 그의 사당을 세웠다. 문집 《이재유고(頤齋遺稿)》의 제25권 및 잡저(雜著)에 수록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와 제26권에 있는 《자모변(字母辨)》은 국어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실학시대의 대표 적 학자로서 자연과학 방면에도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려고 노력했으며, 정치·경제에 도 흥미를 가졌고 역법(曆法) 천문(天文) 산학(算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재유고(頤齋遺稿)는 황윤석의 시문집인데 1829년(純祖 29)에 손자 황수경(黃秀瓊)이 편집 간행하였다. 총26권 15책으로 되어있는데 이 글은 22권에 실려 있다.
이재유고(頤齋遺稿) 22권에는 행장(行狀) 2편(趙時璧, 金佑生), 從叔父秀才遺事(黃增), 記亡室生卒(淑人昌原丁氏), 烈婦李氏傳(士人林擇基妻 ), 高麗義士朴公傳(朴承奉), 大護軍朴公傳(朴衍生), 主簿朴公傳(朴尙義)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고려의사 박공전(박승봉)[高麗義士朴公傳 (朴承奉)], 대호군 박공전(박연생)[大護軍朴公傳(朴衍生)], 주부공 박공전(박상의)[主簿朴公傳(朴尙義)]이 우리 돈재공파 문중에 해당한다.
8. 장릉절신 돈재선생 묘갈명(莊陵節臣 遯齋先生 墓碣銘) <top> 담양읍에서 서쪽으로 높이 서있는 가덕산(加德山)아래 축좌(丑坐)로 되어 있는 묘는 고(故) 대호군(大護軍) 돈재(遯齋) 박공(朴公)의 묘소이시다. 그의 후손 문용(汶容), 규용(圭容) 등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선조를 여기에 예장(禮葬)한지 400여 년이 되도록 나타난 비석(碑石)이 없어 보통 사람의 묘와 다름이 없으니 영혼이 만일 아신다면 말씀하시기를 ‘내 후손이 없다’ 하실 것인즉, 처음으로 돌을 만들어 비를 세우게 되었다”하면서 나에게 묘비명을 지어라하니 내 박씨들과 친한 분 두어 사람 가운데 만승(萬升)씨는 세상을 떠났으며 양진(揚震), 기진(起震) 두 분은 문장과 행실이 뛰어나 서로 믿음이 오래인지라 나의 문장이 천박타하여 부탁하는 성의를 감히 저버리지 못하고 그 전을 읽어 본즉, 고(故) 이재(頤齋) 황공(黃公) 윤석(胤錫)의 지은바라. 그 글에 기록되기를 공(公)의 이름은 연생(衍生)이요, 본적(本籍)은 밀성(密城)인데 중간에 태산(泰山)이라 하였고, 이름 승봉(承奉)은 고려 운명이 다함을 보고 서산(西山)과 율리(栗里)의 바람을 생각하여 벼슬을 아니 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의사(義士)라 말하고, 그의 아들 덕명(德明)은 호익(虎翼) 부사정(副司正) 무과(武科)로 3품 벼슬에 올랐으니, 이분들은 돈재공(遯齋公)의 할아버지며 아버지이시다. 공이 고가(故家)의 아들로서 지혜와 용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 누구에게나 유혹되지 않을 지조(志操)가 있으시더니, 단종조에 벼슬이 절충장군 행 충무시위사 대호군(折衝將軍 行 忠武侍衛司 大護軍)이 되어 경성(京城)에 계실 때, 세조(世祖)가 수양대군으로 영의정에 올라 위덕(威德)이 날로 높아 천명과 인심이 이미 올라감이 있는데 모신(謀臣) 한명회(韓明澮), 권남(權擥),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등이 잠저(潛邸)에 출입하여 수양대군으로 정위(正位)에 올라가라 할 제, 공도 또한 다정한 사이지만 수양대군에게 이용됨을 싫어하여 호남으로 돌아가시기를 결의하고 천첩에게 부탁한 말씀이 “너의 신분이 종자식이라 가히 나를 따라 동행하지 못할 것인즉, 후일에 나를 찾는 자 있거든 이 글을 내 보이라”면서 몇 자 적어 주시며 “이 글을 보이면 너의 형벌을 면할 것이다” 하시고는 남으로 내려 가셨다. 그 후 세조의 문초당시에 공의 글을 올리니 세조께서 공의 종적을 묻지 않으니 공(公)의 글 큰 뜻이 첩(妾)과는 영결했으며 영록(榮祿)을 불원(不願)하신다 함이라. 그 후 기해(己亥)년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사육신(死六臣)이 죽고 단종께서 영월로 옮기 시드니 정축(丁丑)년이 되자 끝내는 단종께서 승하(昇遐) 하셨다. 그 후 누차 세조의 부름이 있었지만 신병을 빙자하여 나가지 안했으며 무인(戊寅)년이 되자 이등훈(二等勳)을 내리고 또 구은(舊恩)으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을 주었으나 공은 끝까지 담양부 서쪽 월산리 사위인 이 석손(李 碩孫) 집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나시니 아 ! 슬프도다. 작(爵)도 나의 하고져 한 바요, 명의(名義)도 또한 나의 하고져 한 바이어늘, 이런일에 공께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과 땅과 같은 분명한 판단을 하셨다. 단종과 세조가 왕위를 주고받을 때에 호구배(狐龜輩)들어 영현부귀(榮顯富貴)와 의기(意氣)를 얻은 그 사람들이 죽은 날에는 온 백성들에게 칭찬 한 마디 못 들었지만, 벼슬을 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멀리 도망하여 끝까지 숨어버린 사람들이 어찌 그 운수를 한탄 하리요. <돈재공은 행의(行義)의 표상이요, 정혜공은 청심(淸心)의 표상이다> 온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나니 왜 그러느냐 하면 이는 반드시 형벌을 받지 않고도 절의를 세우며, 죽음을 따르지 않고도 죽음과 같은 것은 상하(上下), 고금(古今)을 통하여 한결같이 함이라. 공께서 비록 백세의 옛날 사람이라 하지만 그 절의(節義)가 있는 바는 가히 상상할 수 있으며, 큰일을 이같이 하셨으니 작은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으니 표덕(表德), 생졸(生卒), 관함(官啣=銜), 이력(履歷) 등의 증거 없음이 족히 병 될 바 없도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월성 최익현(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月城 崔益鉉) 지음. <top> <편집자 주> *최익현 [1833 순조 33∼1906) 2003.11.0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지사(志士)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관직에 들어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 면암집
활자본. 46권 23책. 원집(原集) 40권, 속집(續集) 2권, 부록 4권으로서 1908년(융희 2)에 아들 영조(永祚)가 수집 ·간행하였다. 원집의 권1∼2는 시(詩), 권3∼5는 소(疏), 권6∼15는 서(書), 권16은 잡저(雜著), 권17∼19는 서(序), 권20∼22는 기(記), 권23은 발(跋), 권24는 명(銘) ·찬(贊) ·고축(告祝) ·제문(祭文), 권25는 비(碑) ·신도비(神道碑), 권26∼30은 묘갈(墓碣), 권31∼34는 묘표(墓表), 권 35∼36은 묘지(墓誌), 권37∼39는 행장(行狀), 권40은 유사(遺事) ·전(傳)으로 되어 있고, 속집의 권1은 시(詩) ·서(書), 권2는 시 ·잡저 ·서(序) ·기(記) ·신도비 ·묘갈 ·묘표 등이다. 부록 4권은 모두 연보(年譜)이다.
장릉명신(莊陵名臣)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셨는데 얼굴을 감추고 자취 없이 도망하여 스스로 정(靖)한 자는 공자께서 칭한바 은(殷)나라 때 3인(三仁)의 의(義)로 미뤄 봄이, 그 공적은 비록 다르나 그 절의는 같음에 가히 차이 있게 보지 안함이라. 오직 우리 돈재 박선생(遯齋 朴先生)이 즉, 그 사람이라. 선생의 휘(諱)는 연생(衍生)이요 밀성대가(密城大家)로 장성에서 세거(世居) 하시면서 세조가 성할 줄 아르셨다. 단종조 때 벼슬은 충무시위사 대호군(忠武侍衛司 大護軍)이신데 광묘수선(光廟受禪)의 일(日)을 당하심에 그 사위 이 석손(李碩孫)과 더불어 벼슬을 버리고 용기 있게 담양 월산으로 숨으니 인하여 호를 돈재(遯齋)라 하시고 관향(貫鄕)을 태인(泰仁)으로 고쳤다. 단종이 영월로 파천(播遷)하시자 호종(扈從-임금을 수행함)했는데 승하(昇遐)하신 후, 향리로 돌아와서 자정(自靖)하시어 그 몸을 닦으시니 공적은 다르나 절의(節義)는 한 가지라. 이재 황 선생(頤齋 黃先生)의 글에 호산(狐山)의 선영(先塋)에 장사(葬事)하지 않고 관향(貫鄕)을 밀성(密城)으로 안하시니 구관(舊慣)에 스스로 슬퍼한 바 있어 자별(自別)히 운운(云云)하시더라. 순조(純祖) 병신(丙申)에 장성 수산사(水山祠) 향사(享祀)하심에 노사 기선행(蘆沙 奇先生)이 상량문(上梁文)을 지으시고 구계정응반용(舊契正應攀龍)의 글에 ‘백이(伯夷)와 숙재(叔齋)의 고표(高標)로 이에 고마(叩馬)코저 함이 뉘우침이 없다’ 운운(云云)하시더라. 부사 홍공 영섭(府使 洪公 英燮)께서 지으신 사향축문(祀享祝文)에 시둔도형처둔명창육신칠일생사미광(時屯道亨處遯名彰六臣漆一生死冞光)이라 하시고 면암 최 선생(勉菴 崔先生)께서 묘갈(墓碣)을 지음에 사대부(士大夫)의 하거비둔(遐擧肥遯)과 침윤몰(沉淪沒)한 자를 어찌 한(限)하며, 백성들이 이제까지 칭찬한 자는 그 반드시 얼굴이 있는데 의거하지 않고, 따라 죽음에는 망하지 안함은 철상하긍고금(徹上下亘古今)에 일일(一日)같은 자인즉, 공이 비록 백세가 멀더라도 그 뜻은 있는바, 대개 가히 생각한다고 하더라. 거의 후현들은 선생을 존모(尊慕)하심이 가히 지극하다 하되 지금까지 미황(未遑)함이 있으니, 숙모전(肅慕殿)에 식(食)의 벌린 자들이 어찌 천고의 성례(盛禮) 중에 성심(誠心)치 아니함이 일대(一大)의 흠전(欠典)이라. 그대 위함도 금일에 있으나 공의(公議)를 억제하고 민멸(泯滅)함을 첨군자(僉君子)의 세론(世論)의 권한(權限)이 민이(民彝)의 범(範)으로 말미암음이라. 잠깐이라도 정론(正論)을 발(發)함이 우리 돈재선생(遯齋先生)을 일체(一體)의 제사법으로 하여금 인즉 선생의 영은 항상 선왕(先王)의 좌우(左右)를 모신 평일미진(平日未盡)의 의(義)를 득중(得中)하였으니 선왕척강(先王陟降)의 영(塋)도 또한 기꺼이 방불(彷佛)하게 와겨 흠행 하실 것이다. 수남 장흥 고석진 찬(秀南長興 高石鎭 撰) <top> <편집자 주> *고석진(高石鎭) [1856∼1924]- 조선말의 의병장.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생.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팔도사민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돌려 궐기를 호소한 후,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순창(淳昌)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붙잡혔다. 서울로 압송되어 4개월간의 구류형을 선고받고 풀려나와 임병찬(林炳瓚)이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자 참모장이 되어 활약했고, 19년 전국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었다. 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고창에 사당(祠堂)이 있다. *파리장서(巴里長書) - 유림대표 곽종석(郭鍾錫) 등 157인은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에 서명한 후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金奎植)으로 하여금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제출케 함으로써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이 파리장서운동은 3·1독립선언서 발표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공포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10. 증 이조판서 박공 휘 종원 묘비(贈 吏曹判書 朴公 諱 宗元 墓碑) <top> 장성(長城) 땅 아치실은 박씨들이 대대로 사는 집터인데 부사정(副司正)이신 덕명(德明)이란 분이 처음으로 이거(移居)하여 자손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4대에 이름은 종원(宗元)이요 자(字)는 자간(子幹)이란 분이 출생하셨는데 하서(河西) 김문정(金文正) 선생의 외종조(外從祖)되신 분이다. <편집자 주> *김인후(金麟厚)[중종(中宗) 5년(1510)∼명종(明宗) 15년(1560)]- 문신이요 유학자.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김안국(金安國)의 제자, 성균관에서 퇴계(退溪) 선생과 함께 수학(修學).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향리 장성에 낙향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산수(算數)에도 정통(精通), 문묘에 배향되었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장성군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선생이 일찍이 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학문을 할 때에는 반드시 때때로 기수에 목욕하고 뜰의 파란 풀을 구경하는 생각을 가슴 속 깊이 체득하여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하서(河西)께서 정성껏 모셨으며 공이 소시부터 김교리(金校理) 개(漑)와 문학으로 사귀시고, 아들을 보내 공부하게 하여 나름대로 덕망을 쌓으셨으니 그 후부터 집안이 더욱 알려져 우리 고을 명족(名族)이 되었다. <편집자 주> *교리 김개-성종 8년, 문과에 급제해 시강원 설서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노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왔다.
공(公)의 묘소가 황룡면 호산 백목등(柏木嶝)에 있는데 오늘날 450년이 되도록 현각(顯刻)한 비(碑)돌이 없더니 후손 래설(來說)과 종현(鐘鉉)이 자기 집안 균옥(均玉), 일구(鎰求), 인구(麟求)와, 학래(鶴來), 래영(來濚)이와 비를 묘옆에 세울 적에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같은 고을에 살 뿐 아니라, 대대로 친분이 있는 사이기에 감히 글을 못한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살펴보니, 박씨들에 밀성(密城)이라 하는 분들은 신라왕으로부터 시작되어 도평의사(都評議事) 밀직군(密直君)이신 언상(彦祥)으로 중조(中祖)를 삼고 있다. 황이재(黃頤齋) 윤석(胤錫)이 지은 전(傳)을 보면 승봉(承奉)이란 분은 고려가 망할 때 이조(李朝)를 따르지 않고 의(義)를 지키셨다 하니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 되신 분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앞에 말한 부사정(副司正)하신 분이요. 증조할아버지는 이름이 연생(衍生)이며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인데 장릉(莊陵-단종)이 왕위에서 물러 나오시자 본관(本貫)을 태인(泰仁)으로 고치시고 돈재(遯齋)라 호(號)를 부르며 벼슬을 아니 하시니 사후 수산사(水山祠)에 모셨으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문아(文雅)요, 벼슬은 대호군 증 승지(大護軍 贈 承旨)며, 아버지 현손(賢孫)이란 분은 벼슬이 선략장군(宣略將軍)인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贈職)으로 받았으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이씨(贈 貞夫人 李氏)다. 공(公)의 생년(生年)은 알 수 없으나 돌아가신 날짜는 중종 정해(丁亥)년 3월 25일이다. 둘째아들(수양)의 벼슬로 인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의금부사(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義禁府事)벼슬을 증직(贈職)으로 받았으며 배위(配位) 이(李)씨는 공께서 돌아가신 후 16년 임인 3월 12일에 돌아가시니 정부인(貞夫人)의 가자가 내렸으며 공의 묘위에 장사 하였다. 아들 4남을 두었는데 수온(守溫), 수양(守良)이요, 수공(守恭), 수검(守儉)이니 큰 아들 셋째 아들 끝 아들은 모두 참봉(參奉)이요, 둘째 아들이 진사(進士)에 올라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시다가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이 되셨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등록되어 시호(諡號)는 정혜(靖惠)며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딸은 진사(進士)하신 금성(錦城) 박신추(朴信樞)에게 출가하였으며, 수온(守溫)의 아들 사영(士瑛)은 참봉(參奉)이요, 사침(士琛)은 습독(習讀)이요, 사순(士珣)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사위 유연개(柳沿漑)는 진사(進士)다. 수양의 아들 사우(思愚)는 진사하여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지냈고, 사노(思魯)는 봉사(奉事)요, 전(全)이는 주부(主簿)요, 평(平)은 참봉(參奉)이며, 효남(孝男), 숙남(叔男), 종남(終男) 3형제는 함경도로 이거(移居)하였으며, 사위는 박거(朴渠)다. 수공(守恭)의 아들은 사운(思雲)인데 참봉(參奉)이며 사위 김사석(金師錫)은 생원(生員)이요, 정사수(鄭士秀)는 부리(府吏)다. 수검(守儉)의 아들 영호(永浩)는 현감(縣監)이며 사위 서태수(徐台壽)는 진사(進士)요, 박시영(朴時英)도 진사(進士)요, 기효간(奇孝諫)의 호는 금강(錦江)이며 외손에 박서난朴瑞鸞)은 도사(都事)요 박서봉(朴瑞鳳)은 전적(典籍)이다. 증손에 주부(主簿)이신 백우당(栢友堂) 상의(尙義)와 현감(縣監)이신 상근(尙謹)은 이학(理學)과 충절(忠節)이 위대하신가 하면 정치 잘한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셨으며, 이분들 외에도 선비로 큰 이름 있는 분들이 끊기지 않았다. 아- 공께서 산림 속에 살면서 흔적이 비록 나타나지 못하였으나 의리로서 아들들을 가리켜 돌아가신 뒷날까지도 영화를 누리시니, 넉넉히 한집안의 명조(名祖)가 될 만 한 분이시니, 이 분 묘앞을 지나는 사람들 뉘 감히 공경하지 않으리요. 이와 같은 말을 기록하야 뒷세상에 알리고저 한다. 끝으로 명(銘)하기를 호남의 밀성박씨는 아치실이 최고로다. 이분의 큰 덕망을 자손(子孫)들이여 잊을손가. 이 사적을 돌에 새겼으니 백세(百世)도록 걱정마소. 병진(丙辰) 6월 일 황주(黃州) 변시연(邊時淵) 지음 <top> <편집자 주> *변시연(邊時淵) -한국고문연구회회장.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선생은 현재 호남유림의 대표적인 한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58년 착수해 1990년에 완성한 73권 분량의 문원(文苑)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문원은 서거정의 동문선 이래로 가장 방대한 문헌집이다. 「문원」에 등장하는 저자만 해도 2500명에 6000종의 문헌이 망라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의 학맥은 학봉의 15대 종손이자 퇴계의 정통 학맥을 계승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에 맞닿아 있다. 변시연이 10대 후반에 임창순과 함께 동문수학한 바 있는 충북 보은의 관선재(觀善齋)가 바로 김흥락의 손제자였던 홍치유(洪致裕)가 관장하던 학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맥으로 인해서 영남의 학봉 집안과 장성의 변시연은 밀접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장성유안(長城儒案) -1971년 발간한 책인데 전남 장성군 지역의 유지들의 명단을 적은 책. 서문은 서형도(奇衡度), 김황중(金黃中),김중천( 金重千),변시연(邊時淵) 등이 썼으며 유안(儒案)이 가지는 의의 등을 서술하였다. 본문은 각 읍면별로 명단을 수록하되 이름 본관(本貫), 생년, 자 등과 간단한 가족사항, 거주지 등을 적었다. 부록으로 유도회 장성군 지부 헌장(儒道會長城郡支部憲章)을 실었다. 장성향교(長城鄕校)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대부분 현재인 들이어서 아직은 고서로서의 의미는 없다.
12. 훈련원 습독 박공 묘비(訓練院習讀 朴公 墓碑) <top>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산에 계좌(癸坐)의 묘는 즉 어모장군 행 훈련원 습독(禦侮將軍 行 訓練院 習讀) 박공 휘 사침(朴公 諱 士琛)의 묘라. 14대 후손 학래(鶴來), 15대 후손 응섭(應燮)이가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안찰하여 지음에 공(公)의 휘(諱)는 사침(士琛)이요, 자(字)는 도윤(道潤)이요, 기선(其先)은 밀양인(密陽人)이라. 비로소 신라왕의 시조 혁거세(赫居世) 후(後) 밀성대군(密城大君) 휘(諱) 언침(彦忱)의 7대손 도평의사공 휘 언상(都評議事公 諱 彦祥)으로 중조를 하였는데 7대손 휘(諱)거인(居仁)의 벼슬은 소감(少監)이신데 숨어서 태인(泰仁)으로 세거(世居)하시고 아들 휘(諱) 승봉(承奉)은 여말(麗末)에 벼슬을 아니 하셨으니 황이재(黃頥齋)의 의사전(義士傳)에 의사(義士)로 나타났다. 아들 휘(諱) 덕명(德明)의 벼슬은 부사정(副司正)이신데 장성으로 이거(移居)하여 살으셨다. 아들 휘(諱) 연생(衍生)의 호(號)는 돈재(遯齋)요 벼슬은 대호군(大護軍)이신데 단종조에 손위(遜位)하여 벼슬을 버리시고 자정(自靖)하사 수산사(水山祠)에 향(享)하시니 공의 5세조라. 고조 휘(諱) 문아(文雅)의 벼슬은 대호군(大護軍)으로 좌승지(左承旨) 벼슬을 증(贈)하시고, 증조 휘(諱) 현손(賢孫) 벼슬은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 벼슬을 증(贈)하시고, 조 휘(諱) 종원(宗元)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贈)하심은 공의 숙부 정혜공(貞惠公) 휘(諱) 수양(守良) 할아버지의 귀(貴)로서 3대의 벼슬을 증(贈)하시였드라. 고휘(考諱) 수온(守溫)의 벼슬은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요, 비(妣)는 담양전씨(潭陽田氏)이신데 공의 생졸(生卒)년이 부전(不傳)하고 기(忌)만 12월 22일이드라. 배(倍)는 상주박씨(尙州朴氏)이신데 기(忌)는 2월14일이요, 묘는 합폄(合窆)이라. 2남과 1여 있으니 장남 휘(諱) 상겸(尙謙)의 벼슬은 첨중추(僉中樞)요, 차남 휘(諱) 상효(尙孝)는 진사(進士)요, 김담(金湛)은 1여의 서(婿)라. 휘(諱) 상겸(尙謙)의 아들 윤제(允濟)와 윤부(允溥)의 벼슬은 판관(判官)이요, 윤발(允潑), 윤함(允涵), 윤광(允洸)과 윤풍(允豊)이요, 상효(尙孝)의 아들은 금휘(今輝)라. 슬프드라 공의 떳떳한 말씀과 떳떳한 행실이 대벌 조정(朝廷)에선 사적(事蹟)이 있으신데 대수가 멀어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서미암 (河西眉巖) 양(兩)선생과 척분(戚分)이 되고, 사의(查誼)가 되여 서로 멀지 아니한즉 공이 기문(其門)에 출입(出入)하였으니 반듯이 훈도(薰陶)가 없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로서 공의 7분(七分)이나 가상(可想)할지어다. 그 누가 나의 말로서 비(碑)에 음용(陰用)으로 무각(誣刻)했다 하리요. 증거는 백세(百世)를 연(連)해 오리라. 갑자(甲子) 3월 8일 황주(黃州) 변시연(邊時淵) 찬(撰) <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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