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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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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월산면의 돈재공을 뵙고 충신의 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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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갈산박씨문중의 직계선조님들에 대한
유적을 알아보았는데 전해지는 바가 미미하여 극히 일부였다. 그 계통을
시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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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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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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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시대로 넘어와 시조왕 46세손이요 밀성대군 17세 손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 박덕명(朴德明)부터 찾아뵐 차례다. 공(公)이하 상당수 후손들이 장성군 황룡면에 모셔져 있는데 오직 공(公)의 아들 박연생(朴衍生)께서 전남 담양군 월산면에 홀로 모셔져 있음으로 그 곳을 먼저 찾아가 보고 이어 장성으로 가기로 한다 |
▲고창, 장성, 담양 요도 |
어느 해 4월 5일 고창군 상하면 고향에 내려가 봄 시제를 지내고 고창읍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 하루를 쉰 다음 고향 어른들을 모시고 전남 당양군 월산면으로 향했다. 신라 시조왕 47세손이며 밀성대군 18세손인 돈재공(遯齋公) 박연생(朴衍生) 할아버지를 뵈러가기 위해서다. |
공(公)의 묘역은 고창 박우섭 당숙께서 익히 잘 아시므로 길 안내를 맡으셨다. 고창에서 동쪽으로 호남고속도로를 향해 출발하면 바로 솔재를 넘는다. 방장산에서→문수산을 지나가며 전라남도와북도를 갈라 치는 노령산맥인 것이다. 솔재를 넘어 광활한 명경수 같은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담양군으로 들어섰다. 길가에 죽 늘어선 담양의 대나무 밭은 장관이었다. 남쪽으로 한 시간쯤 내려가니 월산면 사무소 소재지가 나왔다. 거기서 좌회전하여 북쪽으로 10분쯤 달리니 월산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꾀 큰 마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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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리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월산재를 먼저 가보았다. 공(公)에게 후손들이 제를 모시는 곳이다. 1934년에 후손들이 세운 재각(齋閣)으로 규모가 있었으나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재각을 살펴보고 월산리 뒷산에 모셔진 공(公)의 묘역을 찾아갔다. 묘역은 깨끗이 잘 관리되고 있었 는데 봉분의 석축과 주위에 배치 |
▲월산재(月山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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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석물의 자태가 위엄이 있어 보였다. 가히 조선왕조 초기의 고위 무관출신 다운 풍모를 그려볼 수 있었다. 공(公)은 단종(조선6대왕: 재위1453∼1455)때 대호군(大護軍) 벼슬을 하고 계셨는데 수양대군(조선7대왕세조)이 그를 추종 하는 무리들과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자 그에 가담치 않고 담양군 월산에 사는 사위 이석손의 집으로 급히 내려 오셔서 은둔 하셨다. |
후일 세조가 벼슬을 내려 출사하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은 충신으로 전해지는 분이며 이름하여 장릉명신(莊陵名臣) 또는 장릉절신(莊陵節臣)이라 부른다. <주 : 장릉은 단종 임금의 능을 뜻한다> 돈재공(遯齋公)께 문중가족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배례를 올렸다. 그리고 공(公)의 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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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가는길(월산리 뒷산 능선 중간에 위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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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公)으로부터 22세손이다. 진지한 마음으로 공(公)에 대한 비석문을 읽어보고 석물을 모두 찬찬히 살펴보았다. 난생 처음돈재공(遯齋公)의 묘소를 뵙고 나서 일행은 백양사로 행했다. 백양사에서 점심을 드는데 소나무 숲 사이 여기저기에 백설 같은 목련화가 활짝 피어 이채로웠다. 박우섭 당숙께서 식구들 의 식대를 모두 부담하였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일행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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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공지묘(遯齋公之墓) 시조왕47세손, 밀성대군18세손. 도평의사공11세손. 돈재공1세 <참석자>:박래초 대부, 박래창 할아버지, 박래숙 대부(사진촬영 중), 박우섭 당숙 내외,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박정진 모친, 박판섭 모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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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를 떠나 장성으로 향했다. 다시 장성호가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역시 맑고 아름다웠다. 이윽고 장성읍을 지나 우회전하여 황룡면으로 접어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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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공지묘(우측면) |
▲돈재공지묘(좌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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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공지묘 석물군-조선시대 무관의 위용을 엿볼 수 있다. |
아래 도면은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돈재공 묘도이다. 습독공파 세보에 나와 있는 그림을 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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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지역과 돈재공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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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창
돈재공지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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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지역과 돈재공지묘 상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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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월산면의 돈재공 탐방기-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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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4일 오후 경주시에서 성모사와 오릉원을 탐방하고 14경에 급히 88올림픽도로로 차를 몰아 전남 담양군 월산면으로 향했다. 월산리에 있는 돈재공 재각 월산재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쉬지 않고 운전을 하여 갔으나 월산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월산재를 찾아가니 재각은 석양의 햇빛을 반사하며 나를 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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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재직이가 거주하는 별당이 있었는데 헐어 버리고 월산재 앞 마당에 무성한 대나무도 모두 베어냈다. 그리고 재각만 홀로 남겨둔 체 마당을 모두 콘크리드 포장을 해 놓았다. 월산재를 바라보며 조용히 돈재공 할아버지를 흠모하는데 단청을 하지 않은 재각의 모습이 쓸슬하게 보여 돈재공파가 분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돈재공의 재각과 묘소를 문중에서 잘 관리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 세상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바쁜 가운데 혼란스럽고 세태와 인정 또한 조상을 공경하기 어렵게 돌아가니 그 또한 걱정이다. 4월 2일 전주에서 종손 박내영 대부씨와 박경열 종숙 및 박하섭 당숙을 만나 저녁을 들며 문중의 내력과 현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데 시급히 시정해야 할 점들이 많았다. 월산재를 돌아보고 나와 돈재공의 묘소를 살피려 했으나 날이 어두어져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4월 5일이 고향 선산 시제일 이므로 참석을 위해 다시금 어둠 속에 차를 몰아 고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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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공 사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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