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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은 선사유적의 최다 군락지(群落地)이기도 한데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이후 많은 유적이 널려있어 인간생활의 오랜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말해 주고있다. 고대
호족(豪族)의 무덤으로 지석묘(支石墓)라는 것이 있다. 지석묘는 우리
나라 강 유역과 영·호남, 제주도의 해안 지방에 많으며 고창군에도
전역에 걸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고창군은 우리 나라의 가장 조밀한
지석묘 분포지역이다. 상하면에도 하장(下長)마을 집 마당과 담장 주위에 지석묘 8기가 있고 상라대(上羅帶)마을 뒷산 산등성이 오솔길 좌우에도 2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볼 진데 갈산박씨 문중의 생활근거지인 석남리 일대도 선사시대부터 인간생활의 취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창읍 고인돌> 그러나 백제와 고려시대까지 역사적 기록이 없어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불분명하고 삼국시대 및 그 이전은 더욱 알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밀성박씨 일문이 갈산에 뿌리를 내린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로 볼 수 있으나 그래도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토대 위에 정착하였음은 자명한 것이기에 선사시대부터 이야기를 끌어 낸 것이다. 그런데 밀성(밀양)박씨 일문이 언제 어떤 경위로 갈산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밀성박씨가 우리 고장에 입향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 우선 역사적 기록물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고창군은 무장군, 흥덕군, 고창군, 등 3군이 1914년 통합되어 설치된바 있음으로 이의 전신인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의 성씨들을 문헌에 의거 시대적으로 알아본다. 다음 도표를 살피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박씨는 우리문중의 직계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여지도서의 자료에 밀성(밀양)박씨가 보이나 상하면의 전신인 장사현(長沙縣)이 소속한 무장현에 밀성박씨가 보이지 않는다.
<옛 행정구역상 밀성박씨 거주 조사결과 > 따라서
1760년까지는 지금의 상하면에 밀성박씨가 정착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여지도서
보다 33년 늦게 발간한 호남읍지에 비로소 밀성박씨가 보인다. 무장현은
무송현과 장사현이 1417년(조선 태종17년 丁酉)에 합병되었음으로 호남읍지에
나타난 자료는 1760년 이후 밀양 박씨가 장사현 소속이었던 지금의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등의 지역과 무송현 소속이었던 공음면, 성송면 등의
지역에 정착하였음을 뒷받침 해주고있다. 신라 시조왕으로부터 59세손이요 밀성대군 휘(諱) 언침(彦忱 )으로부터 30세 손이며 돈재공(遯齋公) 휘(諱) 연생(衍生)으로부터 13세손이고 습독공(習讀公) 휘(諱) 사침(士琛)으로부터 8세손인 박원양(朴元陽)이라는 분이 계신데 공(公)의 자(字)는 원일(元一)이시고 갈산문중의 직계 선조이시다.
이로서 공의 생존 년대를 1730년에서 180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밀성박씨습독공파세보(密城朴氏習讀公派世譜)에 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自興德細谷移寓長沙焉(자흥덕세곡이우장사언)
즉
공께서 '흥덕현(興德縣) 세곡리(細谷里)로부터 무장현(茂長縣) 장사(長沙)라는
곳으로 옮겨 사셨다'는 뜻인데 곧 바로 한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우(移寓)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딴 곳으로 옮겨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이다. 즉
장사에 오셨으나 얼마간 가정의 근거지는 세곡 이었는지도 모른다. 공께서
갈산에 오실 때 다른 마을에 일시 머무셨던 곧 바로 오셨던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공이 갈산에 입향 하신 것만은 사실이며 이를
부정할 다른 근거는 없다. 또 공께서 갈산에 오신 직접적인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이 문제는 다음 5절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지금의 고창군 신림면 세곡리는 공의 생존시에 흥덕현 소속의 세곡리 였다. 그 곳에서 지금의 심원, 해리, 상하지역인 장사땅으로 오셔서 갈산에 정착하신 것이다.
<배더리에서 바라본 갈산의 가을풍경> 그러나
공께서 세곡으로부터 상하로 오신 정확한 연도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지리서에 나타난 자료와 공의 생존 년대 및 습독공파세보에 기록된 내용을
검토해 볼 때 필자로서는 1750년에서 1760년 사이로 추정할 뿐이며 공께서
20세를 넘어선 때로 미루어 본다. 공(公)이하 후손들의 묘소는 거의 상하면 갈산부락 근처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상하면의 입향조(入鄕祖)가 아니신 데도 공의 아버지이신 휘(諱) 태남(台南)의 묘(墓)가 석남리 미륵골 사상등에 모셔져 있고 공의 할아버지이신 휘(諱) 덕휘(德輝)의 묘가 갈산부락 안터에 모셔져 있다. 이로 미루어 공의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문중이 갈산에 정착한 것으로 오해가 있어서는 안된다. 원양(元楊)께서 세곡 지방으로부터 모셔온 것이라고 집안 어른들께서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언제 무슨 연유로 모셔왔는지는 1998년 현재 정확히 아시는 분이 없다. 이제
갈산문중의 전신인 신림면 세곡리의 박씨문중은 언제 어디서 어느 분이
오셨는지 알아볼 차례다. 원양(元陽)의 5대조는 윤광(允洸)이시다. 이분은 신라 시조 왕으로부터 54세손이며 밀성대군으로부터 25세손이고 돈재공(遯齋公)으로부터 8세손이시다. 윤광께서는 8형제를 두셨는데 그중 셋째아들 취일(就逸)이 갈산문중의 직계 선조이시며 취일(就逸)께서 1남3여를 두셨다. 취일께서
독자로 두신 아들은 형노(亨老)이시며 원양(元陽)의
증조할아버지가 되신다. 윤광(允洸)께서는 1574년에 장성에서 태어나셨다. 그 곳은 지금의 장성군 황룡면인데 바로 윤광께서 장성으로부터 세곡으로 이거(移居)하셨다고 세보에 전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국난을 당하여 충의로운 마음에서 19세의
나이로 의병에 나아가 종군하셨다. 그때 공의 둘째 형님 윤부(允溥)는
예빈시(禮賓寺)에서 판관(判官)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훈을 세웠고 나중에 선무원종록훈(宣武原從錄勳)을 받았다. 형님이 창의(倡義)하니 동생인 윤광께서 의병에 나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할 것이다.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때 장성, 고창, 흥덕지방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윤광께서 의병활동을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각주에 나타난 내용의 범주로 보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흥덕현과도 일찍이 인연을 맺으셨을 것으로 본다. 윤광께서
63세 되시던 1636년 겨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공께서
이때도 의병에 나가려 하셨으나 병환중에 있었음으로 다만 병량(兵糧)을
모아 큰조카 취제(就悌-공의 둘째형님 윤부의 자)와 공의 넷째 아들
취극(就克)에게 명하여 흥덕으로가 의병소(義兵所)를 설치하고 군사들을
원조케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637년 1월 강화도가 함낙되고 인조가 청태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으며 흥덕에서 다시 강화도에가 종군하던 취극(就克)이 순절하고 그 부인 문경송씨(聞慶宋氏)도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공의 병환을 더욱 깊게 하여 그해 2월 22일 돌아가셨다. 윤광께서 병자호란을 계기로 취(就)자 행렬의 조카들과 자식들을 데리고 장성에서 흥덕으로 오셨으며 병자호란이 끝나고 군사가 파하자 후손들이 그대로 흥덕현 세곡(細谷)에 눌러 살게 되었다. 당시 고창지방에서 박기호란 분이 의병활동을 했는데 아마도 윤광 할아버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윤광 할아버지의 세째 아들이며 갈산문중의 직계선조인 취일(就逸)께서는
병자호란 전에 장성에서 돌아가신 듯 하다. 공의 관위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龍槐衛 副護軍)이신데 병자호란 때 생존하셨다면 고위
무관으로서 국난에 충의로운 업적이 없을 리가 없다. 취일께서 흥덕으로 오신 기록은 없다. 다만 아들 형노(亨老)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병자호란 때 아버지 항렬에 있는 분들을 따라 장성으로부터 세곡으로 왔다는 기록이 있다. 윤광(允洸) 할아버지의 손자 형노(亨老)께서 장성으로부터 흥덕현 세곡으로 오심으로서 갈산문중 직계선조가 세곡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다음은 습독공파 세보에 있는 휘(諱) 형노(亨老)에 대한 묘표(墓表)의 일부를 소개한다.
*형노께서
조실부모하여 의지하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양친에 대한 말이 미치면 곧 눈물을 흘리셨고 수명도 길게 누리지 못하셨다.
일찍이 병자호란 때 공의 종숙부 취제가 공의 숙부 취극과 더불어 작은아버지
윤광의 명을 받아 흥덕에 의병소(義兵所)를 베풀고 병량을 모아 군을
지원하였는데 청과 화친이 이루어지고 군사들도 파하게 되자 그대로
흥덕현 세곡에 눌러 살게 되었다. 공역시 장성으로부터 아버지 벌되시는
분들의 항렬(취제, 취극)을 따라 세곡으로 이사오셨다. 이 내용으로 보아 형노의 부친 취일께서는 병자호란 전에 장성에서 어린 아들을 두고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윤광께서는 흥덕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사료되나 묘는 장성에 모셔져 있으며 취일(就逸)께서는 장성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사료되나 묘는 고창 여소개(如所介)에 모셔져있다. 취일(就逸)의 생존 년대는 기록이 없으나 공의 바로 아래 동생 박취극(朴就克)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35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했는데 그의 생몰 년대가 1602년(선조35년 壬寅) ∼1637년(인조15년 丁丑)1월 22일로 정확하므로 이로 미루어 공의 생존 년대는 1600년∼1650년 사이로 추정할 수가 있다. 한편 휘(諱)형노(亨老)의 묘는 신림면 세곡리 호암산에 모셔져 있다. 갈산박씨 문중의 근거지는 두 다리 건너 이제 장성으로 올라갔는데 그러면 장성에 밀성박씨가 정착한 것은 언제인가 다시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알아본다. 고려 후기에 사신 분으로 박거인(朴居仁)이 계신다. 공(公)은 신라 시조왕 44세손이요 밀성대군 15세손인데 공께서 소감(少監)벼슬을 하시다가 인의현(人義縣)으로 귀양을 가셨다. 인의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지방 인데 거기서 3대가 살았다. 공의 아들 박승봉(朴承奉)은 소윤(少尹)벼슬을 하시다가 고려가 조선에 혁명을 당하자 형님 문봉(問奉)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경서(經書)에 마음을 담았다. 승봉께서는 갈산문중의 직계며 문봉의 후손들은 경북 양산과 북제주군 구좌면에 산다고 하는데 현재 태인 박씨라고 칭하는 자들은 우리와 같은 돈재공파다. 중조(中祖) 밀성대군으로부터 이분들까지 16세에 걸쳐 생몰년대와 배위가 전하지 않는데 참으로 유감이다. 공의
손자 박덕명(朴德明)은 1402년(조선 태종2년 壬午)에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에서 우영부 사정 (右領副司正) 벼슬을
하시다가 사직하고 태인으로 낙향하였다. 공의 증손자가 박연생(朴衍生)이신데 바로 그 유명한 돈재공(遯齋公)이시다. 돈재공은 신라 시조왕 47세손이며 밀성대군18세손인데 조선6대왕 단종(1453-1455)때 충무시위사 대호군(忠武侍衛司 大護軍)벼슬을 하셨다. 수양대군이
한명회, 신숙주등의 무리들과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할 무렵 그들과 정치적 이념이 엇갈렸던 돈재공은 황급히 서울을
떠나 고향 태인에서 아버지 덕명(德明)을 모시고 장성 아치실(지금의
황룡면 : 일명은 河南)로 옮기셨다. 그 뒤 공은 다시 독신으로 지금의 담양군 월산면에 사는 사위 이석손의 집에 아예 은신하셨다. 후일 세조가 '대호군(大護軍) 박연생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록(錄)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병든 몸이라 칭하고 받지 않고 본관(本貫)까지 태인(泰仁)으로 바꾸어 버렸다. 세속에 "내 성(姓)을 갈아버리겠다"라는 말이 있다. 세운(世運)의 흐름이 불의(不義), 불충(不忠)하여 내 뜻과 같지 않아 분통이 터질 때 하는 말이다. 돈재공께서 조상의 혈통(본관)까지 바꾸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행위를 못 마땅해 하고 분통하게 여기며 추상같은 절개와 태양같은 충의를 지키셨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한동안 태인박씨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전말이 장성에 돈재공의
후손이 뿌리를 내리게된 계기가 된 것이다.
○1453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후-- 돈재공이 은둔하면서 본관 을 태인으로 개칭. ○1687년(숙종13년丁卯)-- 태인박씨(泰仁朴氏) 족보(族譜)를 돈재공 휘 연생(遯齋公諱衍生)의 9세손 매헌처사(梅軒處士) 박행중(朴行重)이 서문(序文)을 써 발간. ○1831년(순조31년
辛卯)--조선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로 유명한 정혜공(貞惠公) 박수양(朴守良)의
9세손 박규혁(朴圭爀)등이 "밀성박씨에서 태인박씨(泰人朴氏)로
개관(改貫)한 것을 다시 밀성박씨(密城朴氏)로 복관(復貫) 한다"는
상소문(上疏文)을 예조(禮曹)에 올려 우리는 다시 금 밀성박씨가 되었다.
*당시 예조의 답통(答通)내용---"귀씨족은 밀성(密城)으로 초봉(初 封)되었으나 돈적시(遯跡時)에 권의상 일시 태인(泰仁)을 사용한 것 이니 밀성으로 복관(復貫)함이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박수양(1491년-1554년)
: 갈산 우리문중의 직계선조는 아니지만 장 성 아치실(황룡면)문중을
비롯한 돈재공파 문중이 청백리로서 존경 해 마지않는 정혜공 박수량은
돈재공의 5세손이다. 이분의 본관이 역사서나 대백과사전에 '태인'으로
나옴을 유의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갈산박씨문중이 갈산부락에 정착하여 후손이 번성하게된 경위를 알아보았다. 이 경위를 다시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말 신라시조왕 44세손이며 밀성대군 15세손인 거인(居 仁)께서 소감벼슬을 하시다가 인의현(지금의 태인지방)으로 귀양 ○시조왕 47대손이며 밀성대군 18세손이요 거인(居仁)의 증손자 이신 돈재공께서 대호군(大護軍)을 하시다가 1453년 계유정 난을 피해 태인에서 부친 덕명을 모시고 장성(황룡면)으로 낙향. ○돈재공 8세손 윤광과 윤광의 손자 형노께서 병자호란 (1636-1637년)을 계기로 장성에서 흥덕현 세곡으로 이거. ○윤광의 6세손 원양께서 1750년대-1760년대 사이 세곡에서 갈산으로 입향.
한편 고창군지(高敞郡誌)에 의하면 고창군에 밀성박씨가 이 분들을 통해 입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밀성박씨 돈재공파가 고창현에 입향(入鄕)한 것은 15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갈산문중 직계가 흥덕현과 인연을 맺는 것은 임진왜란(1592년)때 윤광 할아버지에 의해서라고 추상되며 직접적인 계기는 병자호란 때다. 다음은
고창군에 입향한 밀성박씨들의 입향조에 관하여 고창군지를 인용해 참고삼아
소개한다. 돈재공파-돈재공은
갈산문중의 직계선조이시다.
★입향조
-박이종(朴李宗)
이분의 자(字)는 자진(子珍)이며 신라 시조왕 47세손인 돈재공(遯齋公) 연생(衍生)의 증손으로 성종11년(1480년)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이분이 장성으로부터 고창읍 노동(蘆洞) 으로 이거하여 정착했고 손자 박개(朴漑)는 지릉참봉(智陵參奉)을 하고 현손 박기호(朴奇琥)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고창읍, 아산, 고수, 등지에 살고 있다. 박이종(朴李宗)이
1480년 생이니 그 분이 장성에서 고창으로 온 것은 1500년대 초가 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의 직계선조인 윤광과 손자 형노께서 장성으로부터
세곡으로 오신 때보다 100여 년 가량이 앞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은산군파(銀山君派)
★입향조
-박서봉(朴瑞鳳) 이분의 자(字)는 성미(聖微)요 호(號)는 양오(陽梧)인데 은산군 박영균(朴永均)의 후손으로 세조8년(1463년)에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1504년)에 스승 김종직과 친척이 피화(被禍)하고 일가가 화를 면치 못하게 되자 처음 무안으로 피신했다가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 은거 13대째 내려온다. 후손들이 아산면 줄곡, 고수면 월계, 장두리 등에 살고있다. 박서봉의
출생년이 1463년이니 그분이 고창에 정착한 것은 1500년대 전후가 될
것으로 보아 우리 갈산문중이 세곡으로 입향한것 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할
것이다.
밀성군파(密城君派) ★입향조
-박태동(朴台東) 이분의 자(字)는 중형(仲亨)이요 호는 정재(正齋)며 관위(官位) 품계(品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다. 여기서 밀성군은 은산군파 각주에서 설명한 언인(彦仁)을 지칭한다. 박태동은 밀성군의 후손 척(陟)의 16대 손으로 효종10년(1659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했다. 벼슬에 뜻이 없어 한적한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공음면 덕암(德岩)에 안착하여 11대를 살고 있는데 후손이 공음덕암, 영광등에 분포한다. 박태동의
출생년이 1659년이니 그 분이 고창에 입향한 연대는 1600년대 말기로
보아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선조가 세곡에 입향한 것보다 40-50년 정도
늦다할 것이다. 청제공파(淸劑公派)
★입향조
-박연호(朴淵浩) 이분의 자(字)는 설장(泄章).호(號)는 둔제(遁齋). 관위(官位)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다. 청제공의
14대 손으로 금산 질곡(秩谷)에서 출생하여 고창 수곡(水谷:현재 고수면)으로
이거 했는데 후손이 고수면 청계, 월계, 고창읍 등에 살고있다. 기타
고창에 입향한 다른 관향의 박씨로는 순천(順天)박씨, 죽산(竹山)박씨,
충주(忠州)박씨. 함양(咸陽)박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밀성대군의
동생 분들로부터 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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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왕
59세손이요 돈재공 13세손인 원양(元陽)께서 1750년대 -1760년대 무렵
상하에 오심으로서 밀성박씨 돈재공 후손의 한 갈래가 갈산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3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自興德細谷移寓長沙焉 (자흥덕세곡이우장사언)
이 말은 다른곳에서 언급했으나 재론하면 공께서 장사(상하)에 오신 것은 분명한데 세보에 기록된 위의 내용대로 곧바로 갈산부락에 오시지 않고 다른 마을에도 일시 머무셨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원양께서는 왜 장사(상하면 갈산)에 오셨으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못 궁금하다. 원양(元陽)께서 생존하신 시기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만나고 영조, 정조등 중흥 군주들의 등장으로 일시 국세를 회복하고 문물이 화려하게 꽃피던 때였음으로 전쟁이나 민란(民亂)등으로 세운(世運)이 불안하여 이우(移寓)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경제적인 부(富)를 이루기 위해서 세곡의 좁은 산골로부터 나오셨을 것으로 추측함이 옳을 것이다. 공께서는 처음에 장사(상하)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손수
노동이나 장사를 하셨을 가능성이 크다. 세보에 기록된 내용이 식구들을 세곡에 일단 두고 먼저 오셨다는 의미도 있음으로 오시자마자 정착하여 아랫사람들을 부리며 안정된 생활을 하셨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이나 장사를 하셨다면 어떤 것을 하셨을까? 물론 이에 대한 해답이 꼭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갈산박씨문중을 탄생시킨 선조들이 무슨 생활을 했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후손으로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장사현(상하면, 해리면, 심원면등)의 경제적 여건을 돌아보고자 한다. 벼농사는 백제 시대 1세기초부터 이미 이 지방에 전래되어 보편화되어 쌀을 주식으로 했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상하면은 평야 지대가 없고 당시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이 많아서 벼농사의 여건은 열악하였다. 허지만 지금의 고창군을 형성하고 있는 흥덕현, 고창현, 무장현 중 상하를 포함하고 있는 무장현의 농경지가 다른 두 현보다 훨씬 많았다.
<고창 지방의 전결현황(田結現況:1870년경)-고창군지자료> 다음은 문헌에 나타난 지역특화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검토해 보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의 자료-1530년> 장사현은 해변가이니 당연히 고기잡이가 성했을 것이다. 영광
굴비는 조기의 대명사인데 토산품에 장사현과 영광군이 모두 조기잡이가
1위로 되어 있다. 조기는 반상의 구별 없이 만인이 좋아하고 제상에는
필수적이다. 또 전라도 명태(明太)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고창 지방의
특산물로 유명했다. 음역 2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 호남 칠산탄(七山灘)에서 서해 연평도까지 어장에서 어획(漁獲)되고 지과망(地戈網)을 사용하는데 대어 시는 1회에 수십만 마리 어획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생업은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어업도 가장 돈벌이가 되는 것은 조기잡이 였을 것이다. 한편 장사현에는 바닷가에서 소금을 구어 각지방에 공급하는 일이 성해 이익을 많이 남겼다. 금당포에
염정(鹽井)과 염분(鹽盆)이 있어서 소금을 생산하였다. 갈산지역 하고는
거리가 머나 갈산도 소금구이와 관련이 있고 실제로 소금을 생산하였다.
염정은 소금을 만들 바닷물을 모아 두는 웅덩이를 말하는데 바다로 2리 남짓 들어갔다. 조수가 물러가면 다투어 바다로 들어가 길고(桔嗔:물 푸는 기구)를 써서 길러다가 다려서 소금을 만든다. 소금 굽는 곳을 염분(鹽盆) 또는 염창(鹽倉), 염부(鹽釜)라 하는데 염부(鹽釜)는 바닷물을 고와 소금을 만드는 가마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바닷물을 다려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소금장수-소금생산를 업으로 삼는 사람(소금 생산자) ◇소금장사-소금을
사서 파는 일. 문헌상 지역의 경제적 여건과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흥덕 세곡으로부터 상하로 오신 선조들께서는 대체로 위와 같은 농업, 어업, 제염업(製鹽業)등의 직종에 종사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원양(元陽)께서
좁은 산골 세곡으로부터 상하로 오신 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2세 문진(文眞)→3세
성수(成秀)→4세 만엽(萬燁), 만필(萬弼)→5세 종(종)자 행렬에 이르는
동안 갈산에서 가업의 기반을 닦아 선산(先山)을 마련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1750년 무렵 장사현에 입향하여 1800년 말에 이르러서야
자손들이 갈산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고 갑자기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부터는 선조들이 갈산에 입향한 이래 갈산의 경제권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알아본다. 선조들의 갈산 입향당시 갈산에는 양씨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오씨도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1793년에 발간한 호남읍지에의 장사현조에는 양씨 오씨가 조사되어 있지 않지만 고창군지에 의하면 장사현에 입향한 양씨와 오씨들이 조사되어 있다. 남원양씨(南原梁氏)
양택하(梁澤夏)가 1688년(숙종14년) 남원에서 출생하여 1730년(영조6년)
공음면 장재에 입향해서 후손이흥덕면 오도리에 정착했다고 하나 갈산하고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제주양시(濟州梁氏)
양운하(梁雲夏)가 1716년(숙종42년) 영광 백수면 천정리에서 출생하여
공음면 선동리로 이거하여 해정(海井)에 터를 잡아 10대를 내려오고
있다. 갈산의 욕오동에 이씨와 양씨들의 산소가 있는데 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영광 백수 사람들이 지금의 욕오동 산소에 시제를 모시러 오곤
했다고 하는바 갈산에 살았다는 양씨들은 이들의 지파가 아닌가 싶다.
오씨는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세영(吳世英)이 1487년(성종18년)에 나서 1506년 아산면 죽산으로 이거 했는데 후손 일부가 심원면 연화에 살고 있고 해주오씨(海州吳氏) 오도찬(吳道贊)이 1680년(숙종6년) 익산 용안에서 출생하여 심원면 다수동에 정착 12대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갈산과 인연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장사현에 입향한 우리의 선조 원양(元陽)께서는 1730년(영조6년 庚戌)에 출생하셨다. 양씨와 오씨의 장사현 입향조들의 출생 년대가 원양공보다 빠른 것으로 보아 박씨가 장사현에 이들보다 늦게 입향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또 세보에 기록된 내용도 원양께서 곧바로 갈산에 입향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바 크다. 함종어씨(咸從魚氏)가 박씨 다음으로 갈산에 입향하여 지금도 살고 있는데 시조는 동정공(同正公) 화인(化仁)이다. 어명덕(魚明德)이 1784년(정조8년) 속리면(俗離面) 봉비리(鳳飛里)에서 출생하여 자손을 보기 위해 갈산으로 입향했다. 양씨들이
갈산에서 경제권을 쥐고 있을 때 갈산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상술한
바 있다. 지금의 용대저수지는 물론 오룡앞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
그런데 양씨들이 지금의 욕오동(浴烏洞)에서 송라까지 약 500m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여 바닷물을 막고 현재 그 길 중간에 있는 다리 부근에 수문을 설치하여 밀물 시 바닷물을 막고 썰물 시에는 민물을 배수하였다. 제방을
축조하기 전까지는 농경지가 부락근처 천수답뿐이었으나 제방축조 후에는
갈산앞 배더리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제방에 가까운 일부는 1930년대까지
갈대밭 수렁이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양씨들이 부를 축적하였으나 경제권이 오씨한테로 넘어가고 양씨들은 갈산을 떠나갔다. 갈산의 지형이 원래 까마귀가 날아와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는 형국인데 양씨들이 욕오동에서 송라까지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았음으로 까마귀가 목욕도 못하고 물도 못 먹게 되어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박씨들은 그들에게 눌려 생활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박씨들의 경제권이 커지고 오씨들도 위축이 되어 그들마저 갈산을 떠나갔다. 갈산은 박씨들의 독무대가 되었으며 그때는 어씨가 들어와 있었다. 갈산-송라간 제방 밖 쪽으로는 1931년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미역이나 파래를 실은 배들이 지금의 갯말에 배를 대고 곡식과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당시까지
갯말앞 바다에서 바닷물을 가마에 다려 소금을 생산했는데 우리 선조의
균(均)자 행렬중 균업(均業)께서 19세기말부터 1920년대까지 소금을
구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바다 가운데에 커다란 통나무로 바닷물을 가두는 장소를 둥글게 만들고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면 그 바닷물을 길러다 가 바닷가에 설치된 벌막(작업장) 안의 가마에 붓고 불을 지펴 고아 소금을 생산하여 가마니에 담아 저장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소금장사들에 의해 사방 각처로 팔려 나갔으며 멀리 장성까지
배달되었다. 선조들 중에는 소금을 직접 팔러 다닌 분도 있다. 바닷물을 가두는 장소를 샛등이라 불렀다. 1932년 이후 소금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샛등의 통나무들을 모두 뽑아다 썼고 그 자리는 연못처럼 물이 고여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미역을 감기도 하였으나 1950년대 이후 모두 논이 되었다. 농사와 제염 업으로 당시 경제력이 있고 자손들이 번창하여 타 성씨들은 박씨들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다. 1932년에 상하면의 지도를 바꾸는 대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자룡
앞산에서 홍농면까지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송라에서 용대까지
댐을 축조하여 용대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룡앞 방조제에서 용대저수지
댐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개설하였다. 이 공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아농장에서 주관했는데 자룡앞산과 홍농면에 있는 산의 암석을 다이나마이트로 깨뜨려 사용했으며 용대저수지를 쌓은 암석도 거기에서 운반된 것이 라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그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여 돈을 벌었음을 물론이며 선조들 중에는 감독관으로 일한 분도 계신다. 용대저수지는 집중 폭우로 저수지가 넘칠 때 자연스럽게 물이 넘칠 수 있는 시설을 했는데 그 이름이 무냉기 였다. 무냉기는 물을 넘긴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공사로 인해서 상하면과 홍농면사이에 수천 수백 만평에 달하는 지역이 농장으로 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방조제 공사를 한 후 갈산에서 송라가는 둑길 수문에서 폭 10m 깊이 4m 가량의 배수로를 자룡 방조제 쪽으로 내었다. 갈산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자연히 소금 굽는 일은 자취를 감추고 농사짓는 일만 주업으로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갈산앞에
1930년대까지 갈대밭 수렁은 기산에 살던 황치만씨의 형 황판기라는
분이 공음면장 재직 시에 자기 앞으로 등기하여 논을 쳐서 어씨에게
팔았다. 박씨가 어씨의 선조를 도우며 살아 왔으나 1950년대 이후는 어씨 후손들의 경제력이 커져서 박씨들을 능가했다. 갈산의 경제력은 양씨→오씨→박씨→어씨로 돌고 돈 셈이다. 그러나 어씨들도 후손들이 선조의 부를 지키지 못했으며 일부는 갈산을 떠났다. 부의
축적이 생겼을 때는 그것을 자손에게 물려 주려만 해서는 안 된다. 없는
사람을 도와 음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一派靑山景色幽러니 前人田土後人收라 일파청산경색유러니
전인전토후인수라 後人收得莫歡喜하라 更有收人在後頭라 후인수득막환희하라
갱유수인재후두라 *한 줄기 푸른 산은 경치가 그윽하더라 저 땅은 옛 사람이 가꾸던 땅 인데 뒷사람들이 거두는 것이다 뒷사람은 차지했다 해서 기뻐하지 말라 다시 거둘 사람이 뒤에 있느니라(명심보감)
<갈산주변
지형변천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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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터의
추억 지금은 없어졌지만 욕오동 아래에 깊이가 5m, 지름이 2m 가량 되는 쌍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콘크리트로 벽면을 포장했었다. 물이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했다. 사람들이 물을 쓰지 않을 때는 우물 둘레에 파 놓은 조그마한 홈을 타고 항상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그리고 주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대여섯 그루가 있었고 활엽수도 한 그루 있었다. 남자들은 두레박을 쓰지 않고 물통을 우물에 집어넣어 직접 물을 펐다. 여인들도 우물에서 앉은 자세로 바가지로 곧 바로 우물을 퍼서 빨래를 하거나 곡식, 채소 등을 씻었다. 참으로 훌륭한 우물이었다.
그런데 각 가정에서 모터 펌프를 통해 지하수를 직접 끌어쓰면서부터
샘물이 고갈되었고 농지정리를 하면서 아예 매워 버렸는가 하면 소나무
등도 베어 버려 지금은 전혀 우물터의 흔적이 없다. 한 여름밤에는 더위에 시달린 마을 사람들이 우물터에 가서 알몸으로 목욕을 했다. 옷을 벗어 주변에 놓고 바가지 등으로 물을 퍼서 몸에 부으면 물이 어찌나 찬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원했다. 남자들이 초저녁에 먼저 하고 나서 밤이 어느 정도 깊으면 여자들이 목욕을 하였다. 남녀가 목욕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목욕 시간이 겹쳐서 곤란을 본 일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목욕하면서 알몸에 물을 끼얹지는 소리가 멀리까지 시끄럽게 들렸다. 우물터 주위 텃밭에
옥수수를 심었는데 옥수수 서리를
하러 나간 아이들이 옥수수를 딸 적에 여자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맞추어
따면은 옥수수 따는 소리가 물 끼얹지는 소리에 희석되어 잘 들리지
않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에는 그 우물이 4각형으로 되어 한 개만 있었다고 한다. 청도 김씨들이 우물 근처에 몇 마지기 논을 짓는데 우물물을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고 일꾼들이 우물가에서 취사를 하는 등 불편한 짓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1941년 무렵 박씨들이 쌍 우물을 파고 콘크리트로 우물 둘레를 만든 후 넘치는 물만 홈을 타고 그 들의 논 쪽으로 흘러 나가게 했다. 그래서 쌍 우물이 생겼는데 그 우물은 꽁꼬랑 석남쪽에 있는 가막샘과 수계가 통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어서 우물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았다가 관개용수로 썼다. 물이 지표면까지
올라와 바닥으로 넘치는 우물은 흔치 않은데 그러한 명물이 없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옛날
우물터의 모습> ♠당산제(堂山祭)
갈산에는 동래를 지키는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정월 보름 무렵 제를 올리며 동래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다른 지방의 동신제(洞神祭)나 부군당제(府君堂祭)와 비슷한 것이었다. 동래 어귀에 1.5m가량의 큰 바위 돌이 서 있었고 마을길 중간에 60cm 가량의 작은 돌이 서 있었는데 이들이 음양을 이루어 동래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또 뒷동산 봉우리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마치 수호신처럼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역시 당산제를 지냈다. 뒤동산 소나무 당산은 천룡이라 부르고 마을 어귀와 동네 중간에 있는 바위돌은 당산이라 불렀다. 마을 뒤는 천룡이요 마을 어귀와 동네 중간은 당산이라 한 것이다.
어느날 작은 돌 당산은 동네 어른들이 큰 돌 곁으로 옮기로 하고 작업에 나섰다. 그런데 동네 사람 누구도 작은 돌 당산을 옮기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영험한 당산에 함부로 손을 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필자의 할아버지께서 동네 사람들의 나약함을 나무라면서 스스로 삽을 들고 작은돌 당산을 묻은 흙을 파내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함께 작업을 하여 당산을 옮겼다. 제를 지낼 때는 동래 사람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풍악을 울리며 지냈으며 지금의 천룡으로 해서 뒷동산을 한 바퀴 돌아오기도 했는데 소나무에 오색 천을 걸어 놓고 농악과 더불어 절을 하면서 동네의 변영과 안녕을 기원하였다. ♠쥐불놀이 쥐불놀이는 정월달 첫째 쥐날에 하는데 보통 보름무렵에 하였다. 쥐불놀이를 한참 할 때는 다른 마을 아이들이 쥐불놀이 하는데 가서 불을 붙여 오면 동래가 풍년든다는 속설이 있어서 불을 붙이러 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월 첫 쥐날에 들판에 불을 놓는 까닭은 쥐의 피해가 심하므로 쥐를 박멸하기 위함과 논밭의 해충을 제거하고, 또 새싹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서다. 쥐불놀이는 한 해 농사 를 준비하고 새 출발을 다짐했 던 조상의 슬기가 담겨 있는 놀이이다.♠야맹증(夜盲症)
퇴치법 야간에 밤눈이 어두워 잘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간간이 있었다. 망막에 있는 간상세포(桿狀細胞)의 능력이 감퇴하여 야간에 사물을 분별치 못하는 증상인데 후천적으로는 비타민 A의 결핍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시는 면내에 약국도
없고 별다른 처방이 없어서 주술적(呪術的)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동래 아이들에게 밀가루나 보릿가루로 개떡을 쪄 주고 밤에 야맹증에 걸린 아이를 끌고 다니며 대나무 밭에 돌멩이나 개떡 부스러기를 던지며 다음과 같은 구호를 반복하여 외쳐대게 했다. "새 눈은 깜빡 ! 우리 아이 눈은 번쩍! 우이여 ! 우이여"하며 새를 쫓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여러 곳을 이런 식으로 하고 돌아다닌 다음 야맹증에 걸린 아이를 어두운 곳으로 대리고가 혼자 두고 모두 사라져 버리면 그 아이는 무서워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비과학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다음날부터 야간에 사물을 잘 구별하였는데
지금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소꿉놀이
이상한 소꿉놀이가 있었다. 아이들 서너 명이 모이면 양쪽으로 갈라 다리를 상대방의 다리 사이에 끼고 앉는다. 3명이 모이면 다리는 6개가되고 5명이 모이면 10개가된다. 다리가 정돈되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한쪽 다리부터 집어 나가 마지막 구호에 닿는 다리를 구부린다. 그리하여 맨 마지막에까지 다리가 남는 사람이 개임에 져서 벌을 받는 것이었다. 그 구호는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의 의미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①한대 ②만대 ③청국
④대국 ⑤구러마 ⑥살짝 ⑦만개 ⑧조 ⑨털렁 -①너희 ②삼촌 ③어디
④갔냐 ⑤고사리 ⑥꺽으러 ⑦갔다 ⑧ 몇말 ⑨땄냐 ⑩닷말 ⑪땄다 ⑫옥금
⑬족금 ⑭보수 ⑮탱 ♠흔하던
도깨비불 여름밤이면 들판에 주먹만한 불덩이들이 많이 돌아 다녔다. 어른들한테 물으면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한 개가 있는가 하면 갑자기 여러 개로 변하기도 하였다. 분명히 반딧불은 아니었다. 과학적으로는 인의 성분이 밤에 날아다니며 공기와의 마찰로 불빛이 비친다고 하는데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당시에 도깨비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도깨비와 씨름도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면소재지에 나가 돼지고기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오는데 도깨비가 달려들어 자꾸 빼앗아 가려 하자 뿌리치며 돌아왔다. 집에 와서 밝은 곳에서
고기를 보니 도깨비가 만져서 고기가 시커멓게 되었더라는 것이다.지금은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됐지만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한 이야기였다.
♠새댁
길들이기 다음 이야기는 갈산에서 밭을 매는 여인들 사이에 실재로 있었던 이야기다. 시골에서 밭을 맬 때는 보통 10여명 이상의 여인들이 일자로 늘어앉아 매게 된다. 어느 여름날 동래 여인들이 밭을 매는데 무섭기로 소문난 할머니 한 분이 일을 중지시키고 엄한 교육(?)을 했다. 여인들의 나이는 다양했고 거기에는 갓 시집온 새댁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무섭게 말했다. " 네 이년들!
지금부터 내 가하는 말에 양심을 속이면 안 된다. 오늘 일이 잘 안돼는
것을 보니 이중에 신랑 고추를 만진 년이 있는 것 같다. 솔직하게 손을
들면 용서하겠다. 누가 만졌느냐? 손을 들어보아라!" 그러나 손을 드는
여인은 없었다. 할머니는 화를 버럭 내며 다시 말했다. "좋다 그러면
손바닥을 모두 펴 보여라 내가 손바닥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되자 모두들 밭을 매다 말고 손바닥 검사를 받게 되었다. 한쪽부터 차례차례 세밀히 검사를 해 가는데 아뿔싸 새댁 하나가 그만 실수하여 손바닥을 펴지 않고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재빨리 약점을 잡고 "네 이년 ! 네가 어젯밤에 신랑 고추를 만졌구나 왜 만졌냐?"하며 다그쳤다. 새댁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고개를 떨구었다. 할머니는 "손바닥을 펴면 표시가 날까 봐 주먹을 쥔 것이다"고 하며 사실을 말하라고 다그쳤다. 새댁은 조그마한 소리로 "그러치 않았는데..."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밭을 매던 아낙네들이 모두 깔깔깔 한바탕 웃었다. 손바닥 검사를 한 할머니는 당초부터 이 새댁을 겨냥하고 있었음으로 새댁이 손바닥을 폈을 지라도 사실 여부는 할머니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손바닥에 표시가 난다고 하면서 우격다짐으로 자백을 받아 내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군대 가면
고참들에게 창피를 당하며 신고식을 하듯이 새댁들도 시집오면 이런
식으로 버릇을 잡았던 것이다. < 옛 이야기의 주인공들-2003년 추석날 동래앞 정자나무 아래서> ♠갓
하나 주운 노인 동래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느 건망증이 심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이 갓을 쓰고 먼길을 가는데 산중에서 갑자기 대변이 마려웠다. 양반 체면에 갓을 쓴 채로 용변을 볼 수는 없었다. 갓을 벗어서 소나무에 걸어 놓고 용변을 보고 싶으나 자신이 건망증이 심하여 그 갓을 잃어버릴까 염려가 되었다. 궁리 끝에 칡 줄기를 뜯어 한 끝은 갓을 매고 한끝은 손가락에 묶은 다음 갓을 소나무에 걸고 용변을 보았다. 용변을 다 보았을 때 그 노인은 자신이 갓을 벗어 소나무에 묶어 놓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냥 길을 가려 하자 갓이 소나무에서 떨어졌다. 노인은 갓을 집어들고 "나 갓 하나 주웠다"고 소리치며 기뻐서 춤을 벌렁벌렁 추웠다. 그런데 춤을 추다가 그만 자신이 싸 놓은 변을 밟아 발랑 넘어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니 어떤 놈이 여기에 똥을 싸 놓았나"하고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참으로 심한 건망증이다. 맹자에게 제자가 물었다."이사를 갈 때 짐을 꾸려 가면서 마누라를 잊어버리고 가는 수도 있습니까 ?" 맹자가 대답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뿌리마저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많으니라"
<2003년 추석날 고향의 박용섭 당숙 댁에서 문중이야기를 나누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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