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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갈산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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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산의 변천         갈산의 지세         갈산의 지명유래

갈산 부락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에 소속되어 있다. 역사, 문화, 행정적인 측면에서 고창군의 행정관할 하에 있는 것이다.

고창군은 고창읍을 비롯하여 고수면, 아산면,무장면,공음면,상하면,해리면,성송면,대산면,심원면,흥덕면,성내면,신림면,부안면 등 1읍(邑) 13개의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고 갈산을 관할하는 상하면(上下面)은 하장(下長), 장산(壯山), 장호(長湖), 용정(龍井), 자룡(紫龍), 석남(石南), 용대(龍垈), 검산(劍山), 송곡(松谷)등 9개의 리(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갈산은 석남리에 포함된 자연부락이다.

갈산이 소속한 상하면은 본래 삼한시대는 마한 땅이며 백제시대에는 현재의 해리, 심원, 무장 일부, 공음 일부 및 상하를 합친 상로현(上老縣)에 속해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16년)에 이르러서는 상로현(上老縣)을 장사현(長沙縣)으로 고쳐서 무령군(武靈郡)의 관할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장사현은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인근 무송현(茂松縣)을 겸임케 하였는데 무송현은 지금의 무장면, 성송면등의 지역이다.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으나 역시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16년) 무송현으로 고쳐 장사현과 함께 무령군(武靈郡)의 관할 영현으로 하였다.

그 뒤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교체된 후 1417년(태종17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병합(倂合)하여 무장현(茂長縣)으로 부르게 되었다.

즉 두 현의 첫 글자를 따서 현의 명칭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장현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현의 일을 겸임케 했는데 1423년(세종5년)에는 병마사를 고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고 뒤에 현감<고을>로 고쳤다.

* 무령군(武靈郡) : 지금의 전남 영광군이다. 백제시대에 무시이군 (武尸伊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무령군으로 고쳤고 고려조에서 영광군(靈光郡)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다.

* 감무(監務) : 고려때 현령을 둘 수 없는 작은현의 감독관인데 밀성박씨 선조분들중 감무  벼슬을 하신분들이 계신다.

* 진(鎭) : 조선때 군조직의 하나로 각 수영과 병영 아래 두었던 지방대(地方隊)의 직소(職所)인데 토포영(討捕營)이라고도 한다.

* 병마사 : 원래 고려시대 무관직(정3품)으로 동.북 양계(兩界)의  병마를 지휘했다. 조선 에 와서는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는 무관 직이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2품),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정3품),  등이 있는 데 특히 병마절제사는 각 읍의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 (軍事職) 이었다.

상하면, 해리면 등의 전신인 옛날 장사현(長沙縣)은 그 치소(治所: 관할관청)가 지금 공음면 두암리 장사산(長沙山:상하면 하장리와 경계에 있는산) 아래 장사골이고 장사산 서쪽은 하장사(下長沙)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무송과 장사를 통합한 무장현의 치소(治所)는 두 고을 중간 지점인 현 무장면 성내리 에 있었다고 전한다.

또 장사현은 서해안에 접해있어서 고려말에 왜구의 침탈이 심했다. 바다도적 왜구가 한창 설치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흩어져서 고을이 쓸쓸하게 온통 비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 내정을 닦고 왜적을 물리쳐 연변 고을의 민생이 번창함에 이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쳐 한 고을로 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변방을 굳게 지키고 두 현 중간에 성을 쌓아 백성을 살게 하고 창고와 청사와 군영이 또한 모두 자리잡게 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장사현 누정(樓亭)조에 기록되있다.

위 지리서에 의하면 장사현의 풍속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숭상한다고 했으며 산천 조에는 선운산(禪雲山),고산(高山), 대죽도, 소죽도, 세십포, 검당포, 고전포, 염정(鹽井), 금물여포(今勿樿浦),경포(景浦), 구시포(仇時浦)등이 등장하며 토산품으로는 조기, 새우, 상어,숭어,오징어,넙치,홍어,준치,부레,차(茶), 죽전(竹箭)등이 나온다고 했다. 또한 고리포(古里浦)에는 봉수(烽燧),즉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는데 이는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이나 변방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을 위한 통신 수단이었다.

고리포 봉화대는 남쪽으로는 영광군 홍농산(弘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소응포(所應浦)에 응하며 소응포는 다시 부안현 월 고리산(月古里山)에 응한다고 했다. 봉화는 밤에는 횃불을 사용하였고 낮에는 연기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소응포(所應浦)는 지금의 상하면 장산리 뒷산과 해리면 송산리에 있었다.

 

* 고리포 봉수대지(古里浦 烽燧臺址) : 현재 이곳에는 많은 자연석재가 산재한다.

* 소응포 봉수대지(所應浦 烽燧臺址) : 일명 검산(劍山)마을 봉수대지라고도 한다. 검산마을 뒤 봉백산(烽白山) 정상에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다.

―조선초 3현의 호구(戶口)―

현 명

호(戶)

구(口)

시위군(侍衛軍)

진군(鎭軍)

선군(船軍)

무장현

356

2,300

9

90

335

고창현

164

974

9

30

191

흥덕현

260

1.051

23

52

198

위 도표는 1454년에 발간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있는 자료다. 무장현이 356가구 2,300명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지금의 상하, 해리, 심원, 무장, 공음 등에 거주하는 인구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치다. 그 당시는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선조(直系先祖)가 지금의 고창군에 입향하기 200년 전 이기도 한데 참고삼아 기록한다.

장사현과 무송현이 합해서 된 무장현은 조선말까지 그대로 계속되다가 1895년 5월 26일(고종32년) 전주부(全州府)에 무장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896년 8월4일(고종33년)에는 흥덕군(興德郡), 고창군(高敞郡)과 함께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 흥덕군 : 흥덕은 당초 백제의 상칠현(上漆縣)인데 신라 경덕왕 16 년에 상질(尙質)이라 고치고 고부군의 영현이 되게 했다. 고려에서는 장덕(章德), 창덕(昌德)이라고 했다가  흥덕(興德)으로 고쳤는 데  장(章,璋)과 창(昌)자는 충선왕(忠宣王)과 창왕(昌王)의 이름자이기에 그걸 피하느라 고친 것이라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 감무를 두었다가 현감을 두었으며 1895년 군으로 고쳤고 1914년 고창군에 병합되었다.

 * 고창군 : 고창은 원래 백제시대에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고창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의 영현이 되게 했고  고려때는 고부군(高阜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이웃 상질(尙質:흥덕)의 감무(監務)가 겸임했다가 1401년(태종 원년)에 두현에 각기 감무를 두었고 그 뒤 현감을 두어 나주진관(羅州鎭管)에 소속 되었다가 1895년 고창군으로 고쳤으며 여러 차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그 뒤 1913년 흥덕과 고창만이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고 이듬해 1914년 3월 1일 흥덕, 고창, 무장 등 3군을 병합하여 고창군을 설치하였으며 그 행정구역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1895년(고종32년) 이후 갈산 부락이 소속한 상하면의 변모를 알아본다. 무장군 시절 상하면은 상리면(上里面),과 하리면(下里面)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리면은 상용복면(上容伏面), 하리면은 하용복면(下龍伏面)에서 비롯되었는데 상하면을 두개의 용복면으로 한 것은 조선 경종4년(1723년)의 일이었다.

한편1908년 발간한 무헌비고(文獻備考)에 상용복(상리면)은 무장군에서 처음은 서쪽으로 11리 끝은 30리요 하용복(하리면)은 무장군에서 처음은 서쪽으로 15리 끝은 3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리면 소속 리(里)는 장호리, 용정리, 자룡리, 석남리(갈산을 포함), 장산리, 검산리, 송곡리였으며 하리면은 하장리, 용대리였다. 그러던 것이 1895년 이후는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타나며 석남리와 석남리에 소속한 갈산의 옛 지명인 갈오리(渴烏里)가 하리면 소속으로 바뀌어 있다.

-상리면:송림리,송정리,장기리,월곡리,상수리,상라리,검산리, 기산리,궁월리,구시포,섬포리,용산리,광촌리,장용리, 장호리,복구리,평곡리,판정리 등 18개 리(里)

 

-하리면:택동리,장수리,용대리,회정리,평정리,오룡리,하장리, 원두리, 석남리, 갈오리(渴烏里), 고리포 등 11개리 (里).

여기서 자룡리가 빠졌는데 아마도 착오인 듯하다.

그리고 1914년에 3군을 통합한 이후는 상리면과 하리면을 합병하여 상하면으로 하고 장호리,용정리,자용리,석남리,장산리,검산리,송곡리,하장리,용대리등 9개 리(里)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의 구역과 같다. 9개 리에 소속한 자연부락은 약 50여 개 이며 갈산의 옛 지명인 갈오리(渴烏里)는 석남리에 속하여 오는데 1961년 5.16군사 쿠데타 후 갈산으로 지명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

 

    *갈오리(渴烏里) : 갈산(葛山)의 옛 지명이다. 지명변천의 상세 내용은  '갈산의 지명 유래'참조

 

 

 

 <처음으로>

갈산의 지세(地勢)

지세(地勢)는 자연환경의 결정적 요소로서 인간의 생활과 심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갈산박씨 문중의 생활근거지인 자연부락의 지세에 관하여 산세(山勢), 수계(水系),기후(氣候)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는데 자연과학적 방법과 풍수지리학적인 사고(思考)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1)산세(山勢)

산세는 산맥의 형상을 의미하며 기후 변동을 유발하고 행정구역을 갈라 치기도 하며 인간의 운명과 감성 및 정신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갈산은 높은 산을 등지고 형성된 취락이 아니며 북쪽의 춘봉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려간 구릉지대의 오목한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취락이다. 이러한 구릉지대는 그 근원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 이에 대하여 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살펴 보고자한다.

산맥과 강줄기는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데 세계산맥의 근원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중국 명나라 사람 주장춘(朱長春)에 의하면 곤륜산은 모든 산의 근원이며 본래 이름은 수미산(須彌山)인데 이 산으로부터 거대한 4개의 산맥이 동, 남, 서쪽으로 달리며 대부분의 산맥을 형성했다고 한다. 곤륜산 제1맥이 동해 쪽으로 뻗어 나가 유발산(儒拔山)을 일으키고 유발산이 니구산(尼丘山)을 낳아 72봉을 낳았고, 제2맥이 남으로 뻗어 불수산(佛秀山)을 낳고 불수산이 석정산(釋定山)을 일으켜 이 곳에 499봉이 솟았으며, 제3맥이 서쪽으로 흘러가서 감람산(橄欖山:올리브산)을 일으키니 이 산에 12봉이 맺었으며, 마지막 제4맥이 동방으로 쭉 뻗어 백두산에 맺히고 그 맥이 다시 남으로 흘러 금강산을 수놓아 1만2천 봉이 솟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불선(儒彿仙)과 기독교 정신이 지구의 뼈대를 이루는 산맥의 정기를 타고 생겨났음을 시사하고 있다.

 

 * 곤륜산: 티뱃 고원의 북쪽 벽을 이루고 히말라야와 천산의 두 산맥사이를 서쪽으로 뻗어 파미르고원에 이르는 아시아 최대산맥중의 하나다. 중국 황하와 양자강의 발원지이기도 한데 이 산의 최고봉은 7,723m.이며 평균고도는 6,100m이고 길이는 2,400km이나 된다.

* 주 장춘 : 명나라 신종(神宗:서기1573년-1620년)때 절강성의 오흥현 사람으로 진사(進士)에 올라 형부주사(刑部主事)에 까지 올랐다. 곤륜산 이야기는 그가 후세에 전한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의 학설을 토대로 이제 한반도의 산세를 살펴보면 우리 나라는 대체로 14개의 큰 산맥과 10개의 큰 강으로 어우러져 있다. 산중에 백두산은 영산(靈山)으로 신령스러우며 금강산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백두산 정기가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라고 하는 백두정맥(白頭正脈)을 통해 함경산맥(咸鏡山脈)에 이어지며 이는 다시 낭림산맥(狼林山脈)과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 흐르는데 이 산맥들이 동해안 쪽에 백두대간(白頭大幹)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중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등마루 구실을 한다. 백두대간으로부터 서쪽으로 마치 갈비뼈처럼 갈려 나온 여러 산맥이 있는데 그 중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분계를 이루는 산맥이 소백산맥이다.

<지리교과서 상의 한반도산맥>

이 소백산맥으로부터 서쪽으로 다시 한 줄기 산맥이 뻗어 나가는데 소백산맥을 구성하는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 있는 장안산(長安山)을 출발점으로 하여 내려오며 금강을 서쪽 군산을 지나 서해로 흐르게 하고 섬진강을 남쪽 광양만으로 흐르도록 물 줄기를 갈라친다. 그리고 서북쪽으로 향하여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을 지나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갈래는 그대로 서북쪽으로 달려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을 일으키고 다른 한 갈래는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 오는데 경각산, 모악산, 상두산, 칠보산,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方丈山), 문수산(文殊山), 구황산(九皇산), 고성산(高城山), 월랑산, 태청산, 장암산, 월암산, 불갑산 등의 여러 산을 낳으며 서남쪽으로 내리 달리니 바로 노령산맥(蘆嶺山脈)이다.

노령산맥은 고창군의 남동쪽을 지나며 등마루 구실을 하는데 방장산에서 시작하여 문수산, 구황산, 고성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고창군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산줄기로부터 여러 작은 산맥이 북쪽 내지는 서쪽으로 갈려 나갔으며 갈산 부락이 소속한 상하면(上下面)과 직접 관련있는 산은 구황산(九皇山)이다.

구황산에서 3가닥의 산줄기가 갈리는데 그 중에 한 줄기가 삼태봉(三台峰)이 되고 여기서 다시 갈라진 한 줄기가 북쪽으로 가다 또 갈라지는데 한 가닥은 망치봉을 이루고 한 가닥은 왕제산(王帝山)이 되었다.   

 <대간과 정맥으로 바라본 한반도 산세>

다시 왕제산을 지나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 가닥은 무장읍내를 지나 한제산에 이르고 여기를 지나 또 두 갈래로 갈려 하나는 비학산을 거쳐 구황봉을 낳고 다른 하나는 청룡산에 이르며 청룡산에서 두 갈래로 갈려 한 줄기는 선운산을 거쳐 경수산에 이르고 다른 한줄기는 이상산, 황학산을 거쳐 계명산에 이른다.

왕제산을 지나 다른 한 줄기는 공음방면과 해리방면으로 갈라져 나갔다.  해리 쪽으로 간 줄기는 송림산(松林山)을 일으키고 가다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조시산(鳥矢山)으로 나간 가닥이며 또 하나는 상하면으로 들어서 서쪽으로 달리며 검산리 봉백산(烽白山)→장암부락 장군봉(將軍峰)→고산부락 춘봉산(春峰山)→석남리 석남산(石南山:일명은 왕제산)→고리포 봉수대(烽燧帶)로 이어져 서해바다에 이르며 해리면과 경계를 이룬다.

송림산에서 무장, 해리, 상하면이 갈라지고 남으로 내려간 줄기는 상하의 주산(主山)인 장사산(莊沙山)을 일으키며 공음면과 상하면의 경계를 이룬다. 또 상하면 서남쪽으로는 넓은 농경지가 전라남도 영광군 홍롱면과 경계를 이룬다.

 

 * 장자산(莊子山) 과 장사산(莊沙山): 상하면사무소 뒤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사람들은 혼돈하여 부른다. 원래는  장사현(長沙縣)을 대표하는 산으로 장사산(長沙山)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성지(城址)조항에 장사 고현성(長沙 古縣城)이 나온다. 문헌비고에는 장사산(長沙山)이 장자산(莊子山)으로 나오는데 필자가 어려서부터 이 산을 장자산으로 익히 들어온 바다. 그러나 상하면사무소 공부에는 장사산(長沙山)으로 되어있으니 장사산을 장자산으로 불러서는 않될것이다.

장사산 정상에는 옛 장사성지(長沙城址)가 있었으며 현재 이 성(城)  부근에 많은 자연석재(自然石材)들이 산재해 있다. 따라서 장사성(長沙城)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었다.

갈산부락은 장자산 쪽에서 서해바다로 달리는 산줄기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완만한 구릉지대의 오목한 가장자리에 바로 자리잡고 있다.

필자가 멀리 중앙 아시아로부터 상하면 서해 바닷가에 이르기 까지 산맥줄기를 끌고 온 것은 천지의 산하기령(山河氣靈)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가문의 혈통 또한 그와 같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바이다.

갈산부락의 근거지가 되는 완만한 구릉은 고산부락 뒤에 있는 춘봉산(春峰山)으로부터 남쪽으로 쭉 뻗어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무성한 칡넝쿨이 힘차게 땅위에 뻗어 가는 형국이며 물새 한 마리가 물가에 날라와 막 앉으려는 형상이기도 하다.

고창군의 지세는 노령산맥을 동남쪽으로 업고 있어서 대체로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으나 상하면의 지세는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이 낮다. 그리고 갈산은 상하면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거의 평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갈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을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옥답을 지나 장사산의 너그러운 자태가 마치 봉황새가 남북으로 한가로이 나래를 펼친양 뻗어 있고 북쪽을 바라보면 인격자의 아름다운 이마처럼 보이는 춘봉산의 인자한 기운이 스르르 내려오고 있거니와 춘봉산 우측으로 장군봉, 봉백산 자락이 동으로 장사산을 향해 힘차게 이어 있다.

<갈산 마을앞에서 바라본 장사산>

서쪽은 평평한 야산으로 갈산부락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으며 그 너머로는 춘봉산으로부터 석남산, 고리포 봉화대가 서해로 연이어 있어 갈산을 겹으로 감싸는 듯 하다.

남서쪽으로는 넓다란 들판이 시원스래 전남 영광군쪽을 향해 펼쳐있는데 아득히 시야에 들어오는 산봉우리들이 아기자기 하고 정겹기만 하다.

2)수계(水系)

고창군은 노령산맥을 등마루로 하고 있어서 동남방에 비해 서북쪽이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줄기가 서쪽 또는 북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상하면은 대체로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해바다를 향해 흐르는 수계다. 고창군은 강이라고 일컬을 만한 큰 강은 없다. 강보다 작은 천(川)이 혈관처럼 조밀하게 서해로 이어 있으며 그래도 조금 큰 천은 인냇강(仁川江)을 비롯하여 해천(蟹川-일명은 葛谷川), 해리천, 대산천, 구암천(九岩川)등이 있다.

특히 상하면은 바다와 인접하여 산으로 둘러 있는 고로 긴 강이 있을 수 없고 대부분의 물이 하장리, 송곡리, 장호리, 용정리를 제외하고는 천(川)을 따라 남진하다 곧 서해로 흘러간다. 검산리, 하장리, 용대리의 물은 용대 저수지로 흘러들어 관개 용수에 이용되고 서해로 흐르며 장산리에서 흐르는 물은 갈산부락 앞들을 통해 서해로 나간다. 또 송곡리는 해리쪽으로 흐르고 장호, 용정, 자룡리등은 곧장 바다로 흘러들고 석남리는 농수로를 따라 남진하다 곧 서해로 흐른다.

석남리는 1998년까지 농경지 정리사업이 종결되어 물줄기를 합리적으로 흐르도록 바로 잡았는데 물이 흐르는 방향은 자연적인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체로 장군봉의 물줄기가 장암부락을 지나 갈산부락 앞 들판의 인공배수로에 흘러들고 춘봉산과 장군봉 사이의 물줄기가 고산, 기산을 지나 갈산 앞들에서 합류하여 자룡과 고리포 앞 바다로 흘러들게 되어 있으며 갈산 뒤 석남 부락 쪽은 갈산을 지나는 배수로와 합류하여 역시 자룡과 고리포 앞 바다로 흐른다.

갈산이 소속한 상하면에 큰 강은 없으나 저수지가 발달하여 농사에는 지장이 없으며 서쪽에 서해 바다가 연접하여 있어서 수기운(水氣運)은 충만한 곧 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해바다의 해류는 북쪽에서 남으로 흘러 목포 앞 바다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데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부산 쪽으로 가고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중국연안을 따라 북상하다 한반도를 향해 흘러와 서해안을 따라 다시 남으로 흘러 내려온다.

현재 갈산 앞 들판은 농경지로 펼쳐 있지만 옛날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다고 한다.

갈산 앞에 길게 늘어선 구릉지대가 그 명칭이 '배더리' 인 것을 보면 이해가 간다. 배더리는 배가 닿는 곳이란 뜻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갈산에서 송라까지 500m에 이르는 둑을 쌓고 서해 쪽으로 배수로를 냄으로서 농경지로 활용되었으며 자룡에서 홍롱면에 이르는 방조제(防潮堤)를 1932년에 축조함으로서 갈산 부락 남서쪽에 광활한 농경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지금도 밀물 때가 되면 배수로를 타고 바닷물이 갈산 근처까지 올라온다.

3) 기 후

겨울-이때 우리 나라 기압골은 시베리아 쪽의 고기압과 알래스카에서 뻗어 나온 알류산열도의 북태평양 저기압세력이 발달하여 대치하는데 등압선은 남북으로 배치되며 춥고 아주 강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 두개의 기압세력이 약화되면 시베리아 고기압이 이동성고기압(移動性高氣壓)이 되어 호남지방에서 분리되어 나가는데 이때는 대체로 바람도 약해지고 추위도 덜해진다.

전자의 경우가 3일정도 계속되어 삼한(三寒)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가 4일정도 계속되어 사온(四溫)이라 하며 호남 서해안 권에 속한 상하면 일대에 흔히 나타나는 기온현상이다. 또한 이 지역은 대체로 눈이 많이 온다.

-날씨가 대체로 맑고 따뜻하며 생활하기 좋은 계절이다. 시베리아 고기압과 알류산열도의 저기압 세력의 배치가 없어지면서 시베리아 고기압으로부터 분리된 이동성고기압이 자주 지나며 뒤따라 이동성저기압이 지난다. 3∼4일 주기로 나타나는 기후 현상으로 때로는 날씨 변덕이 심하며 대륙의 영향으로 종종 이상 기후가 발생하고 중국으로부터 황사가 편서풍을 타고 날라 들어 부안, 고창, 영광권에 속한 상하면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시력장애 및 농작물에 장애를 주기도 한다. 특히 우리문중이 4월5일 안터 선산에서 시제를 지낼 때는 서해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세차다.

여름-우리 나라 전체가 그렇듯이 갈산이 속한 고창군 일대도 장마 권에 들어간다. 동서로 뻗친 장마전선이 남에서 북으로 이동할 때 호남서해안을 통과하며 많은 비를 내리는데 연중강수량의 40% 이상이 온다. 7월 하순경부터 장마전선이 만주로 북상하면 장마가 끝나고 완전히 북태평양고기압 세력권에 들어가 남동 또는 남서풍이 불며 남쪽 해양성 열대기단에 의해 불볕 더위가 계속되고 비올 때는 우뢰를 자주 동반한다.

 * 고창군 지방의 강수량 : 6,7,8,9월의 4개월 동안에 720mm 가량 오는데 1년간의 강수량 1,107mm에 대비하면 61%에 상당하다. 또 7,8월의 강수량이  1년 전체의 40%에 이른다.

가을- 봄철과 비슷한 이동성고기압(移動性高氣壓)의 영향으로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날씨 속에 들판의 황금 물결과 더불어 아름다운 고장이 된다. 또한 9월이 지나 10월에 접어들면 점차 날씨가 하강하게 된다.

 

 

 <처음으로>

갈산의 지명유래(地名由來)

<갈산 뒤 천룡에서 바라본 갈산과 장사산>

갈산(葛山)의 앞들은 옛날에 서해 바닷물이 들어와 고깃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배더리, 갯말, 샛등, 갯논, 갱본, 등 바닷가와 관련된 순 우리말들의 잔형이 남아 있다.

*배더리: 갈산 앞까지 배가 드나들어 배를 정박하던 곳을 의미한다.갈산 앞 들판 건너 길게 송라쪽으로 뻗어간 구릉 지대를 일명  배더리 라고 한다. 즉 그 지역에" 배를 댄다" 해서 그대로  배더리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갯 말: 바다의 갯가 마을이란 뜻인데 줄여서 갯말로 불렀다.70년대에 갈산 아래편에 10여 가구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이주하여 집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샛  등: 옛날에 선조들이 커다란 소금 가마를 걸고 바다물울 길러다 부은 다음에 불을 집혀 소금을 생산했다. 샛등은 바닷물을 가두던 장소다. 1960년대까지 여기저기에 샛등터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논이 되었다.

*갯  논: 바다를 막아 개간한 논을 일컫는다.

*갱  본: 바닷물이 드나드는 광활한 갯벌 판을 일컫는 사투리다.

갈산(葛山)이란 지명은 바닷가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명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갈산의 명칭은 1960년대 새로 지은 명칭이요 원래 지명은 갈오리(渴烏里), 가라지, 가로지 등으로 불렀다. 또 지금의 송라(松羅)는 소라지, 소라리 등으로 불렀다. 바닷가 마을에는 대개 포(浦)자가 들어간다. 상하면에도 고리포, 구시포, 섬포등의 부락이 있다. 갈산은 비록 바닷물이 드나들어도 부락이 내륙 쪽 깊숙이 있어서 포(浦)자를 사용해 지명을 취할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들판 농로에서 바라본 갈산>

그러면 갈산의 원래 명칭인 갈오리(渴烏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갈오리는 춘봉산으로부터 구릉지대가 남쪽으로 완만하게 뻗어 내려온 가장자리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동래를 둘러싼 야산의 구릉지대 형국에 대하여 이르기를 마치 목이 마른 새(渴鳥)가 물가를 찾아와 물을 먹고 목욕을 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래의 명칭을 갈오지(渴烏地)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발음(發音)이 변하여 "가라지" 또는 "가로지"로 부르기도 했고 한자어의 명칭을 갈오리(渴烏里)라고 한 것이다.

목마른 새는 갈조(渴鳥)라고 해야 옳은데 왜 하필 목마른 까마귀인 갈오(渴烏)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미가 불분명하다.

갈오리 뒤편 석남 쪽에 가막샘이 있었다. 물이 차갑고 맑으며 꼭 우리 나라 지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까마귀 때가 날라 들어 땅을 쪼고 있는 것을 보고 연못을 팠는데 물줄기가 좋아서 농사에 유용하게 쓰고 여름에도 옷 벗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래서 그 연못을 오정(烏井) 즉 까막샘이라 불렀는데 그런 연유로 조(鳥)자 대신 오(烏)자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오(烏)자를 쓴 연유에 대한 일설은 풍수지리 개념에 의한 것인데 갈산부락의 형국이 까마귀가 날아와 날개를 펴고 물가에서 목욕하는 형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갈산 부락 모퉁이에 까마귀가 목욕을 한다는 의미의 욕오동(浴烏洞)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실제 발음은 용오동으로 부른다. 오(烏)자를 지명에 쓴 이유에 대해서는 두 번째 설이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다.

하여튼 갈오지(渴烏地)는 목마른 새가 " 단물을 만난 형국 " (渴烏至水) 내지는 "목욕하는 형국"인데 이 말에는 목마른 새가 물가를 찾아와 물을 먹을 수 없을 경우엔 그곳을 그냥 떠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물을 먹고 목욕도 할 수 있을 지라도 조건이 충족되면 새는 떠나게 될 것이다.

새의 머리는 지금의 욕오동(浴烏洞)에 해당하며, 옛날 샘터는 새의 부리에 상당하고, 꼬리는 까막샘 부근이 해당되는데 거기를 꽁고랑 이라 부르며 동래 어귀와 갯말 쪽은 새의 양 날개에 버금 간다. 그림을 참고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동래 어른들의 말씀을 빌리면 박씨보다 먼저 들어와서 산 성씨(姓氏)는 양씨(梁氏)와 오씨(吳氏)들이라고 한다.


 *오(烏):까마귀는 몸과 눈이 모두 검정색이라서 멀리서 보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조(鳥)자에서 눈을 상징하는 한 획(一)을 빼서 오(烏)자를 만들어 까마귀 형상을 취한 글자다.

*꽁고랑 :  꼬랑지란 뜻인데 새의 꼬리부분을 의미한다.

 <풍수적으로 본 갈산의 지형>

양씨들이 갈산에 정착하면서 대물려 살다가 바닷물이 드나들던 동래 앞을 욕오동(浴烏洞)에서 송라까지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둑을 싼 이유는 갯벌판을 경작지화 하는 한편 석남 →갈산 → 송라 →용대를 있는 교통로를 개설코자 하기 위함인 듯 하다.

1932년에 자룡에서 홍농산 방면을 잇는 방조제(防潮堤)가 축조되기 전에는 갈산에서 송라를 잇는 둑길 밖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니 이 둑길을 축조(築造)하기 전에는 두 곳을 육로로 자유로이 통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후 양씨들은 갈산에서 계속 머물지 못하고 어디론가 모두 이주하였는데 이는, 풍수지리적 환경을 인위적으로 변형하여 바닷물이 드나드는 것을 막아 물이 없음으로 목마른 새가 적시에 물을 먹기 위해 물가에 왔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지금도 갈산 욕오동에 양씨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갈오지는 양씨들이 떠나고 오씨들이 살았는데 오씨들마저 떠나고 박씨들의 집성촌이 되어 대를 물려 70∼80호가 살아 왔으나 1998년 현재 박씨는 겨우 10여가 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젊은이들은 모두 도회지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거나 공부하러 갔고 노인들만 선조들로부터 물려 온 땅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 갈오지(또는 갈오리, 가라지)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어떻게 갈산 (葛山)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갈산 앞 들판에서 바라본 욕오동>

5.16 이후 동래 지명을 정할 적에 당시 상하면장으로 재직하던 박영복씨와 동래 이장이던 이희춘씨가 동래 어른들과 상의하여 "갈오지"를 갈산(葛山)으로 변경했다고 전한다.

목마를 갈(渴)자가 칡 갈(葛)자로 바뀐 것은 자룡에서 홍농까지 쌓은 방조제 덕분으로 자룡으로 부터 십자길, 용대, 갈오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벌판이 생겨 경작지로 변하다 보니 목마른 새가 물을 만난 풍수상의 형국은 이치에 맞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갈산 주변의 지형을 보다 광범위하게 살펴보면 고산의 춘봉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망태골(望泰洞), 여산동(礪山洞), 삼바래기(三發山), 머렁지, 천룡(天龍), 욕오동(浴烏洞), 꽁고랑, 가막샘, 갯말, 안터(內洞) 등에 이르기까지 지세(地勢)의 형국이 마치 칡넝쿨처럼 뻗어나 힘차게 번성하는 형상이므로 갈(葛)자를 첫 자로 하고 안정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묏산(山)자를 다음 자로 하여 갈산(葛山)으로 했다고 하는데 갈오지라는 옛 이름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이치에 맞아 보인다.

 

*망태골 : 갈산에서 고산 부락을 가다 보면 춘봉산에 가까운 곳인데   좌측편 지형이다. 한자의 의미는 무얼 크게 바랜다는 뜻인데 지형이 농가에서 곡식등을 담기 위해 새끼줄로 짜만 든 망태처럼 둥글게 생겼기도 하다.

*여산동 : 갈산에서 고산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인데 망태동 우측 이며 동래 어귀에서 우측이기도 하다. 한자어 대로 라면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삼바래기:원래 '손바래기'라는 이름이 '삼바래기,로 되고 한자어로  삼발산이 된 듯하다. 손바래기는 손님 즉 천신이 오기를  바랜다는 뜻으로 다른 지방에도 비슷한 지명이 많다.  갈산부락을 바로 뒤에서 감싸고 있는 야산이다.   

*머렁지 : 동래 진입로 근처를 말한다. 즉 동래 어귀를 일컫는데 다른 부락도 같은 지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천 룡  : 당산(堂山)과 더불어 동래 수호신을 모시던 곳이다. 갈산  부락 북쪽으로 두툼하게 솟아난 언덕에 큰 소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 이 나무를 베어서는 안될 것이다. 동래 풍경이 허전해 지기 때문이다. 당산은 동래 바로 입구에 돌 둘을 모셨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안 터  :내동(內洞동)이라 하여 동래 안쪽에 있다는 뜻이다. 또는  안지(安址)라 하여 편안한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    

갈(葛)은 칡으로서 덩굴과 번성을 상징하는 의미이니 동래 주변에 칡을 심고 덩굴이 많은 작물을 경작하면 지명과도 합당 하여 좋을 듯 하다.(콩, 땅콩, 고구마, 포도 등)



<춘봉산으로부터 칡덩쿨이 뻗어 내려온 것 같은 갈산의 지세>

(춘봉산을 고산 사람들은 침봉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 석남리를 구성하는 리(里)의 명칭

    ①석남(石南) ②월곡(月谷) ③갈산(葛山)

◎ 석남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의 명칭

    ①석남-성남(城南) 또는 선람(船纜)이라고도 한다. 선람(船 纜)은 배의 닻줄을 의미하는데 배를 정박한다는 뜻이 있다. 석남앞까지도 옛날에는 바닷물이 드나들 었음을 뒷받침한다.

    ②왕제(王制)-석남에서 자룡을 넘어가는 지역 마을이다.

    ③갈오(渴烏)-지금 갈산의 옛 이름으로 갈오지, 갈아지 등 으로 불렀다.

    ④소라리-송라(松羅), 또는 우와리(牛臥里)라 부른다.

    ⑤수랑골-수왕골(水旺洞), 또는 궁월촌(弓月村)이라 하는데 수왕골은 수기운이 왕성하다는 말이요 궁월촌은 활터를 의미한다.

    ⑥가마못-부정(釜井.釜鼎) 또는 오정(烏井)이라고도 한다.

    ⑦기타 -약방동(藥房洞)등이 있다.

◎ 기타 갈산부락과 관련된 지명

①진쟁이-갈산앞 배더리 부근인데 수렁이 많았다. 모내기를 할 때 일꾼들이 빠지면 나오기 힘들 정도였다.

②엉컨네-갈산부락 어귀에서 오룡쪽으로 가는 길에 기산에서 뻗어 내려온 구릉지대가 있었다. 야산이기도 한데 `90년대 중반 농지정리를 하면서 깎아 없애 버렸다.

③폭 포-갈산의 처녀, 총각 사이에 은어로 쓰이던 말이다. 지금의 천룡과 욕오동에 그네 터가 있어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며 놀았다. 폭포는 이 그네 터를 가리키는 말인데 남녀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통지할 때 이 말을 썼다. 차라리 가볍게 나부끼는 모양의 표표(漂漂)란 말이 어울릴 성싶다.

④작은돔과 큰돔-작은 동네, 큰 동네란 뜻이다. 동네 어귀를 작은돔(小洞), 안쪽 동래를 큰돔(大洞)으로 불렀다.  

⑤와우(臥牛)쟁이 - 갯말 건너편 송라 쪽 논벌을 말한다. 소가 누어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뒷동산에서 바라본 갈산부락과 장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