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십대왕 본기(新羅十大王 本紀)
- 한글 왕호를 클릭하면 해당 위치로 이동합니다 -
|
|
|
01세 |
|
02세 |
|
03세 |
|
04세 |
|
05세 |
|
|
|
|
28세 |
|
29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始祖王) |
|
( 南海王) |
|
(儒理王) |
|
(逸聖王) |
|
(阿達羅王) |
|
|
|
|
(神德王) |
|
(景明王) |
|
|
|
|
|
|
|
|
|
|
|||||||||
|
1대왕 |
|
2대왕 |
|
3대왕 |
|
7대왕 |
|
8대왕 |
|
|
|
|
53대왕 |
|
54대왕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婆娑王) |
|
(祗摩王) |
|
|
|
|
|
|
(景哀王) |
|
|
|
|
|
|
|
|
|
|
|||||||||
|
|
|
|
|
|
|
5대왕 |
|
6대왕 |
|
|
|
|
|
|
55대왕 |
|
|
|
|
|
|
|
|
|
|
|
박혁거세 시조왕이 신라를 건국한 이래 신라는 BC 57년~AD935년 까지 56대 992년간 계속되었으며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박씨(朴氏)는 10왕이 233년간 왕위에 있었고 석씨(昔氏)는 8명의 왕이 162년간을 김씨(金氏)는 38왕이 587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신라 10대왕 본기는 박씨왕들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역사기록이다. 여기 10대왕 본기는 서기1997년에 '밀성박씨 돈재공파' 종중서 발간한 '종중요람(宗中要覽)'의 내용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문중의 기록을 존중하여 '종중요람, 내용을 그대로 게재 하였으며 내용에 현저한 착오가 있는 부분은 홈운영자가 임으로 수정했거나 자료를 보충하였다.
|
|
시조왕 본기(始祖王 本記)
O.갑자원년(甲子元年)에 왕위(王位)에 오르다.
O.무진5년(戊辰五年)에 알영씨(閼英氏)를 세워 왕후(王后)를 삼으시니 왕후(王后)에게 성인(聖人)의 덕(德)이 있어 나라 사람이 이성(二聖) 이라 이르다.
O.신미8년(辛未八年)에 왜인(倭人)이 군사(軍士)를 이끌고 변경(邊境)을 침범(侵犯)하려다 왕(王)의 신덕(神德)을 듣고 물러갔다.
O.경진17년(庚辰十七年)에 왕(王)과 왕비(王妃)는 육부(六部)의 민정(民情)을 살피려 행차(行次)하여 양잠(養蠶)을 권장(勸奬)하고 토지(土地)를 잘다루어 생산(生産)에 힘쓰도록 하였다.
O.임오19년(壬午十九年)에 변한(弁韓)이와서 항복(降伏)하였다.
O.갑신21년(甲申二十一年)에 서울에 성(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이름 하였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는 주몽(朱蒙)이 왕(王)이 되었다.
O.기축26년(기축이십육년)에 서울인 금성(金城)에 궁성(宮城)을 세웠다.
O.계사30년(癸巳三十年)에 낙랑(樂浪)사람이 장차 습격(將次 襲擊)과 약탈(掠奪)을 하려고 변경(邊境)에 침입(侵入)하니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노적(勞績)가리가 그대로 들에 쌓아 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지방(地方)사람들은 도의(道義)를 지키는 나라다. 우리가 가만히 군사(軍士)를 이끌고 와서 습격하는 것은 도둑과 무엇이 다르리오]하고 퇴군(退軍)하였다.
O.신축38팔년(辛丑三十八年)에 호공(瓠公)을 마한지방(馬韓地方)으로 파견(派遣)하니 마한왕(馬韓王)이 꾸짖으면 말하기를 [진진이한(辰弁二韓)은 우리의 속국(屬國)인데 근년(近年)에는 조공(朝貢)을 보내지 않으니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의(禮儀)가 이럴수 있겠는가] 호공(瓠公)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聖人)이 나라를 이룩한 후(後)로 인사(人事)가 화합(和合)하고 천시(天時)가 고르고 창고(倉庫)가 충실(充實)하여 인민(人民)들이 공경(恭敬)하고 사양(謝讓)함으로 변한(弁韓) 낙랑(樂浪) 왜인(倭人)들 까지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자(者)가 없으니
우리임금께서는 겸허(謙虛)하시어서 아래신하(臣下)를 파견(派遣)하여 수교(修交)하시니 이는 과분(過分)한 예의(禮儀)라고 할 수 있겠거늘 대왕(大王)께서 도리어 노(怒)하시고 군사(軍士)로 위협(威脅)함은 어떤 뜻 입니까]라고 대답(對答)하였다. 마한왕(馬韓王)은 더욱 성을내어 호공(瓠公)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左右)에서 간(諫)함으로 죽이지 아니하고 귀국(歸國)하게 하였다.
O.임인39년(壬寅三十九年)에 마한왕(馬韓王)이 죽었다. 이때 사람들이 왕(王)에게 말하기를 마한왕(馬韓王)은 전(前)날 우리나라의 사신호공(使臣瓠公)을 욕(辱)보인 일이 있아온데 그들이 국상(國喪)을 당(當)하였으니 이때 마한(馬韓)을 정벌(征伐)하면 힘드리지 않고 얻을 수 있지 않겠아오있가 하니 왕(王)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의 재화(災禍)를 다행(多幸)으로 여기는 것은 불인(不仁)한 일이로다]하시고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조위(弔慰)하였다.
O.계묘40년(癸卯四十年)이라. 이해에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온조(溫祚)가 나라를 세웠다.
O.병진53년(丙辰五十三年)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使臣)이 양마(良馬) 이십필(二十匹)을 바치며 말하기를 [과군(寡君)은 남한(南韓)에 성인(聖人)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예물(禮物)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O.갑자61년 3월(甲子六十一年 三月)에 임금이 돌아가시고 칠일(七日)이 넘어 알영(閼英妃)도 돌아가시었다.
태자 남해왕(太子 南海王)이 시조왕(始祖王)을 국도남(國都南)쪽 칠리 담암사(七里 曇岩寺)옆에있는 남정(南亭)숲 안 묘좌(卯坐)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가을 칠월(七月)에 낙랑(樂浪)군사가 금성(金城)을 포위(包圍)하거늘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말씀 하시기를 두성인(聖人)께서 세상(世上)을 버리심에 고(孤)가 부덕(不德)한 사람으로 왕(王)의 자리에 있어 이웃나라의 침략(侵略)을 당(當)하니 어찌하리오] 좌우(左右)들이 말하기를[적(賊)이 국상(國喪)있는 것을 다행(多幸)으로 여겨 군사를 몰고 침입(侵入)해오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으시리이다] 적(賊)이 과연(果然)물러가고 말았다. 고(孤) - 왕(王)이 자기(自己)를 겸칭(謙稱)한 말.
O.을축원년(乙丑元年)이 비(妃)인 김씨(金氏)를 봉(封)하여 운제(雲梯)왕후(王后)를 삼고 계비석씨(繼妃昔氏)를 봉(封)하여 아루왕후(阿婁王后)를 삼았다.
O.병인3년(丙寅三年) 춘정월(春正月)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사시(四時)에 친(親)히 제사(祭祀)지냈다.
O.무진년(戊辰年) 사월(四月)에 왕(王)은 석탈해(昔脫解)가 어질다는 말을 들으시고 맞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O.기사5년(己巳五年)이해에 백제(百濟)가 마한(馬韓)을 쳐 없애다.
O.갑술10년(甲戌十年)에 왜인(倭人)들이 해변(海邊)을 침입(侵入)하여 민가(民家)를 약탈(掠奪)함으로 왕(王)은 육부(六部)의 군사(軍士)를 뽑아 막았다. 이때에 낙랑(樂浪)에서 서라벌(徐羅伐)의 국내(國內)가 허약(虛弱)하다고 침입(侵入)하여 금성(金城)을 공격(攻擊)함으로 사세(事勢)가 위급(危急)하였다. 그런데 밤에 유성(遊星)이 적(敵)의 병영(兵營)에 떨어지니 적(敵)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알천상류(閼川上流)로 물러나서 진(陳)을 치고 돌무더기 이십개(二十個)를 쌓아 놓고 도망하였다. 이때 육부(六部)의 군사천명(千名)은 적(敵)을 진격(進擊) 하여 알천(閼川)경주(慶州)에 이르렀으나 돌무더기를 보고 아직 적(敵)들이 진(陳)을 치고 있는 것으로 착각(錯覺)하여 추격(追擊)을 중지(中止)하였다.
O.경진16년(庚辰十六年)에 북명[北溟-강릉(江陵)]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濊)를 얻어서 나라에 바쳤다. 예(濊)-고조선 부족국가(古朝鮮 部族國家))의 왕인(王印)
O.갑신20년(甲申二十年) 9월에 왕(王)이 돌아가심으로 태자 유리(太子 儒理)가 되어 남해왕(南海王)을 선왕(先王)의 능(陵) 언덕 안쪽 묘좌(卯坐)에 장사(葬事)하였다. 왕(王)이 장차(將次) 돌아가시려고 할때 유리(儒理)와 탈해(脫解)에게 이르기를[내 죽은 뒤에 너이들 박석(朴昔)두 성중(姓中)에 연장자(年長者)나 또는 덕(德)있고 어진이로 이어 왕(王)을 삼으라 하더니 죽음에 미쳐 유리(儒理)는 탈해(脫解)가 본래에 덕망(德望)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려고 사양(辭讓)하니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신기대보(神器大寶)라 하는 왕위(王位)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바가 아닙니다.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智慧)로운 사람은 치(齒)가 많다 하니 시험(試驗)해 봅시다 하고 떡을 물어 치(齒)를 셈하니 유리(儒理)임금이 많은 고(姑)로 군신(君臣)들은 곧 유리(儒理)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O.을유원년(乙酉元年)에 비 김씨(妃 金氏)를 봉(封)하여 명선왕후(明宣王后)를 삼았다.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을 갈고 수레로 짐을 날르며 말타는 것을 마련하고 친(親)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지냈다.
O.무자4년(戊子四年) 십월(十月)에 왕(王)이 국내(國內)를 순행(巡行)하다가 한 늙은이가 거의 얼어죽을 지경(地境)이 된 것을 보시고 옷을 벗어 그를 덮어 주시고 음식(飮食)을 마련하여 먹인 후(後)에 곧 관리(官吏)에게 명(命)하시어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독한 늙은이와 병(病)들어 스스로 생활(生活)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에 이웃나라 백성(百姓)들이 이말을 듣고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이해에 민속(民俗)이 환락(歡樂)하여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O.임진8년(壬辰八年)봄에 왕(王)은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주었다. 왕(王)은 이미 육부(六部)를 정(定)한 후(後)에 이를 두개로 가르고 왕녀(王女)두사람으로 하여금 각각(各各)부내(部內)의 여자(女子)들을 거느리게 하여 칠월십육일(七月十六日) 기망(旣望)부터 날마다 육부(六部)에 모여 질삼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罷)하고 팔월(八月)보름에 이르러 공(功)의 다소(多少)를 살펴가지고 진 편(便)에 서는 음식(飮食)을 마련하여 이긴 편(便)에게 사례(謝禮)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배(嘉排)라 하였다. <편집자 주(註)> * 이 행사를 할 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관(官)의 품계(品階)를 십칠등급(十七等級)으로 만들었으니 즉 일(卽 一)은 이벌손(伊伐飡), 이(二)는 이척손(伊尺飡), 삼(三)은 갑손(匣飡), 사(四)는 파진손(波珍飡), 오(五)는 대아손(大阿飡), 육(六)은 아손(阿飡), 칠(七)은 (一吉飡), 팔(八)은 사손(沙飡), 구(九)는 급벌손(級伐飡), 십(十)은 대나마손(大奈麻飡), 십일(十日)은 나마(奈摩), 십이(十二)는 대사(大舍), 십삼(十三)은 사지(舍知), 십사(十四)는 길사(吉士), 십오(十五)는 대오(大烏), 십육(十六)은 소오(小烏), 십칠(十七)은 조사(造士)라 하였다. <편집자 주(註)> * 손(飡)를 '찬'으로도 읽는다. * 삼국사기에서 3은 잡찬(迊湌), 10은 대나마(大奈麻), 11은 나마(奈麻), 13은 소사(小舍), 17은 조위(造位)로 기록되어 있다.
O.정유13년(丁酉十三年) 겨울에 고구려(高句麗)가 낙랑(樂浪)을 쳐서 멸(滅)하니 낙랑(樂浪)사람 오천인(五千人)이 대방(帶方) 사람으로 더부러 와서 항복(降伏)함으로 육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O.임인18년(壬寅十八年)에 이서국(伊西國)을 쳐 없애다. 이해에 수로김씨(首露金氏)가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다.
O.정사33년(丁巳三十三年) 십월(十月)에 왕(王) 돌아가시니 선능(先陵)언덕 안쪽 묘좌(卯坐)에 장사(葬事)하였다. 왕(王)이 병환(病患)에 신음(呻吟)하시며 신하(臣下)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탈해(脫解)는 그몸이 국척(國戚)에 관련(關聯)되고 벼슬이 보신(輔臣)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번공(功)을 세워다. 짐(朕)의 두아들은 재능(才能)이 훨신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한 선왕(先王)의 명(命)이 있어 이르기를 아들과 사위를 논(論)할 것 없이 연장자(年長者)나 어진사람으로 위(位)를 이으도록 하여 먼저 과인(寡人)이 임금이되고 짐(朕)이 죽은 뒤에 마땅히 탈해(脫解)를 세워 선왕(先王)의 유훈(遺訓)을 잊지 말하 하시니 이에 이르러 석탈해(昔脫解)를 세워 임금을 삼었다.
O.신사원년(辛巳元年)에 비 김씨(妃 金氏)를 봉(封)하여 사성왕후(史省王后)를 삼았다.
O.임오2년(壬午二年)에 령(令)을 내리기를 지금(只今)창고(倉庫)가 비고 군기가 둔하여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萬若)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들고 변방(邊方)으로 적(敵)들이 침입(侵入)을 하면 어떻게 막으리오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命)하여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권(勸)하고 군사(軍士)를 훈련(訓練)하고 전구(戰具)를 마련하여 불의(不意)에 대비(對備)하도록 하시고 친(親)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하였다.
O.갑신4년(甲申四年)에 크게 풍작(豊作)을 이루어 길가는 행인(行人)이 양식(糧食)을 싸들고 가는 준비(準備)가 필요(必要)없게 되었다.
O.정해7년(丁亥七年)에 가소(加召). 마두(馬頭)의 두 성(城)을 쌓았다.
O.경인10년(庚寅十年)에 왕(王)은 사자 십팔명(使者 十八名)을 각(各)고을에 파견(派遣)하여 주주(州主), 군주(郡主)로서 공사(公事)를 게을리하여 전지(田地)를 황폐(荒廢)하게 한자를 살피게 하고 이런 주군주(州郡主)는 관직(官職)을 파하게 하였다.
O.계사13년간(癸巳十三年 間)에 고령자(高齡者)를 위문(慰問)하여 곡물(穀物)을 하사(下賜)하였다.
O.갑오14년(甲午十四年)에 가야왕(伽倻王)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包圍)함으로 아손(阿飡) 길원(吉元)을 파견(派遣)하여 이를 치게 하니 군사 천명(軍士 千名)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敵)을 격파(擊破)하였다.
O.병신16년(丙申十六年)에 가야(伽倻) 사람들이 남(南)쪽 변방(邊方)을 침범(侵犯)함으로 왕(王)은 성주(城主) 가소장세(加召長世)를 파견(派遣)하여 이를막게 하였는데 패(敗)하여 피살(被殺)되었다. 왕(王)은 크게 노(怒)하여 친(親)이 날랜 군사(軍士)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적(敵)을 패주(敗走)시키니 가야왕(伽倻王)은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사죄(謝罪)하였다.
O.신축21년(辛丑二十一年)에 금성동남(金城東南)에 새궁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왕(王)이 이거(移居)하였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가 와서 아복(阿伏)하였다.
O.계묘23년(癸卯二十三年)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서로 지경(地境)을 다투다가 왕(王)에게 와서 판결(判決)을 구(求)하였으나, 왕(王)께서 이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연노(年老)하고 지혜(智慧)가 많으나 그를 불러 묻자 하시고 수로왕(首露王)을 초빙(招聘)하니 이를 음즙벌국(音汁伐國)에 소속(所屬)도록 하였다
O.을사25년(乙巳二十五年)에 백제(百濟)가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화친(和親)을 청(請)하였다.
O.병오26년(丙午二十六年)에 왕(王)께서 압독(押督)을 순행(巡幸)하시어 빈궁(貧窮)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였다.
O.무신28년(戊申二十八年)에 비지(比只) 창령(昌寧), 다벌(多伐) 대구(大邱), 초팔(草八) 초계(草溪), 세 나라를 쳐서 병합시켰다.
O.기유29년(己酉二十九年)에 황재(蝗災)가 있어 겁해(劫害-곡식의 피해)가 심(甚)함으로 왕(王)은 널리 산천(山川)에 제사(祭祀)를 드려 재해(災害)의 지식(止息)을 빌었는데 황재(蝗災)가 없어지고 풍년(豊年)이 들었다.
O.임자32년(壬子三十二年) 십월(十月)에 왕(王)이 돌아가시니 태자(太子)인 지마(祗摩)가 왕(王)이 되어 파사왕(破娑王)을 선능(先陵)언덕 안쪽 묘좌(卯坐)에 장사(葬事)하니 이를 오능(五陵)이라 한다.
O.계축원년(癸丑元年)에 비 김씨(妃 金氏)를 봉(封)하여 애례왕후(愛禮王后)를 삼고 왕(王)은 친(親)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지냈다. 봄에 백제(百濟)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수교(修交)해 왔다.
O.을묘3년(乙卯三年)에 가야(伽倻)군(軍)이 남(南)쪽 변방(邊方)을 침범(侵犯)해왔다. 칠월(七月)에 왕(王)은 친(親)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정벌(征伐)에 나셨다. 황산하(黃酸河) 낙동강 하류(洛東江 下流)를 건널때 적의 복병(伏兵)에게 포위를 당(當)하였으나 왕(王)은 군사(軍士)를 격려하여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회군(回軍)하였다.
O.을축13년(乙丑十三年)에 말갈(靺鞨)사람이 북변(北邊)에 침입(侵入)하고 가을에 또 대령책(大嶺柵)을 습격(襲擊)하고, 니하[泥河-강릉(江陵)]를 지나 계속(繼續)침략해 옴으로 왕(王)은 백제(百濟)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백제(百濟)에서 오장군(五將軍)을 파견(派遣)하여 돕겠다고 하자 적(敵)들은 이말을 듣고 물러갔다.
O.갑술22년(甲戌二十二年)팔월(八月)에 왕(王)이 돌아가시고 후사(後嗣)가 없어 유리왕(儒理王)의 장자 일성(長子 逸聖)이 왕(王)이 되어 지마왕(祗摩王)을 국도남(國都南)쪽 십리(十里) 포석정 건지동 을좌(飽石亭 乾池洞 乙坐)언덕에 장사(葬事)지냈다.
O.을해원년(乙亥元年)에 석씨(昔氏)로 왕비(王妃)를 봉(封)하고 왕(王)은 친(親)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지냈다. 계비허씨(繼妃許氏)는 정안왕(正安王)의 딸이다.
O.정축3년(丁丑三年)에 말갈(靺鞨)이 장령[長嶺-강릉부근(江陵附近)]에 침입(侵入)하여 오책(五柵)을 태워 버렸다.
O.무인4년(戊寅四年)사월(四月)에 정사당(政事堂)을 금성(金城)에 설치(設置)하였다.
O.기묘5년(己卯五年)에 말갈(靺鞨)이 장령(長嶺)을 습격(襲擊)하여 백성(百姓)이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목책(木柵)을 장령(長嶺)에 세워서 방비(防備)하였다.
O.갑신10년(甲申十年)에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제방(堤防)을 수축(修築)하고 전야(田野)를 개척(開拓)하게 하였으며 또 한 백성(百姓)들이 금은주왕(金銀珠王) 쓰는 것을 금지(禁止)하였다.
O.무자14년(戊子十四年)에 박아도(朴阿道)를 봉(封)하여 갈문왕(葛文王)을 삼았다.
O.갑오20년(갑오이십년)이월(二月)에 왕(王)이 돌아가시고 태자 아달라왕(太子 阿達羅王)이 서서 일성왕(逸聖王)을 국도남(國都南)쪽 칠리(七里) 해목령(蟹木嶺) 아래 의전동 묘좌(醫田洞 卯坐)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O.을미원년(乙未元年)에 석씨(昔氏)를 왕비(王妃)로 봉(封)하고 친(親)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지냈다. 십월(十月)에 아손 길선(阿飡 吉宣)이 모반(謀反)하려다가 사전(事前)에 발각(發覺)되어 다라났다.
O.정유3년(丁酉三年)에 영일현(迎日縣)을 설치(設置)하였다.
처음에 동해빈(東海濱)에 영조랑(迎鳥郞)과 세조랑(細鳥郞)이란 부부(夫婦)가 있어 동거(同居)하더니 영조(迎鳥)가 해빈(海濱)에서 약(藥)을 캐려다가 은연(隱然)히 한 바위가 있어서 지고 일본(日本) 작은 섬으로 들러가 왕(王)이되니 세조(細鳥)가 남편을 찾으려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 또한 지고 돌아가기를 전(前)과 같이 하니 세워 귀비(貴妃)을 삼았다.
때에 신라(新羅)에서 해와 달이 광신(光神)을 파견(派遣)하여 일광(日光)을 구(求)했더니, 영조(迎鳥)가 말하기를 [내가 이 땅으로 건너간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것이나 이제 어찌 돌아가리오]. 인(因)하여 세초(細초)를 주면서 말하되[이것은 짐(朕)의 비(妃)가 짠것이니 이것으로 써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라]고 하거늘, 사자(使者)가 돌아와 아뢰고 제사(祭祀)지내는 날에 달이 예와 같아 졌다 한다. 그래서 초(초)를 간직했던 어고(御庫)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부르고 하늘에 제사(祭祀)지낸 곳을 이름하여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O.정미13년(丁未十三年)에 백제(百濟)가 기병(起兵)하여 서(西)쪽에 이성(二姓)을 습격하여 백성(百姓)인 남녀(男女)들을 천명(千名)이나 잡아갔다. 왕은 일길손 길선(一吉飡 吉宣)에게 군사 이만(軍士 二萬)을 주어 백제(百濟)를 정복하도록 하고 왕(王)이 또한 친(親)히 팔천(八千)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싸움터에 이르니 백제(百濟)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사로잡아간 백성(百姓)을 돌려보내고 화친(和親)을 요구(要求)하였따.
O.갑자30년(甲子三十年)삼월(三月)에 왕(王)이 돌아가시고 후사(後事)가 없었으나 국도남(國都南)쪽 십오리(十五里) 배일산(拜日山) 묘좌(卯坐) 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편집자 주(註)>
O.계유원년(癸酉元年)하사월(下四月)에 선고(先考)를 추존(追尊)하시어 선성왕(宣聖王)을 삼고 어머니는 정화태후(貞和太后)로 삼고 비 김씨(妃 金氏)로 왕후(王后)를 봉(封)하고 승영(昇英)을 세워 태자(太子)를 삼았다. 이해에 동해용왕(東海龍王)이 옥적(玉笛) 한 쌍(雙)을 바치니 황옥(黃玉)과 청옥(靑玉)으로 된 것이다. 그 길이가 한자 아홉치요 그 소리가 맑고 밝아서 역대(歷代)에 보배로 간직된 보배였다. 려왕(麗王)이 구경하고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취(取)하여 가져오게 하여 조령(鳥嶺)을 지나가다가 소리가 나지 않음으로 려왕(麗王)이 그 신물(神物)임을 알고 돌려 보냈다 한다.
O.정축5년(丁丑五年)칠월(七月)에 왕(王)이 돌아가시고 태자 경명왕(太子 景明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신덕왕(神德王)을 아달라왕능(阿達羅王능)과 같은 언덕 묘좌(卯坐)에 장사(葬事)하였다.
O.무인원년(戊寅元年)에 석씨(昔氏)로 왕비(王妃)를 봉(奉)하고 왕제(王弟) 이손(伊飡) 위응(魏膺)을 화등(火等) 대아손(大阿飡)을 삼고 공자(公子)를 봉(封)하니 맞은 밀성대군(密城大君)이오 버금은 고양대군(高陽大君)이오 셋째는 속함대군(速咸大君)이오 넷째는 죽성대군(竹城大君)이오 다섯째는 사벌대군(沙伐大君)이오 여섯째는 완산대군(完山大君)이오 일곱째는 강남대군(江南大君)이오 여덟째는 월성대군(月城大君)이다.
<편집자 주(註)>
O.갑신7년(甲申七年)에 왕(王)이 돌아가시고 왕제 경애(王第 景哀) 왕(王)이 서서 경명왕(景明王)을 신덕왕능(神德王陵)과 같은 언덕 묘좌(卯坐)에 장사(葬事)하니 삼능(三陵)이라 하였다 상사(喪事)를 고려(高麗)에 고(告)하고 온 나라가 슬퍼 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상(弔喪)하고 제사(祭祀)하였다.
<편집자 주(註)>
O.을유원년(乙酉元年)에 석씨(昔氏)로 왕비(王妃)를 봉(封)하였다.
O.정해삼년(정해삼년)십월(十月)에 완산(完山)의 적(敵) 견훤군(甄萱군)이 교외(敎外)와 기내(畿內)에까지 핍박(逼迫)하여 침입(侵入)하였음으로 왕(王)은 고려(高麗)에게 급(急)함을 고(告)하여 원군(援軍)을 청(請)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공훤등(公萱等) 군사 만명(軍士 萬名)을 파견(派遣)하였으나 원군(援軍)이 도착(到着)하기 전(前)에 견훤군(甄萱軍)이 신라(新羅)의 서울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왕(王)은 비빈(妃嬪)종친등(宗親等)과 함께 포석정(飽石亭)에서 잔치를 베풀어 흥(興)이 한참일때 적병(敵兵)이 쳐들어오니 일행(一行)은 미쳐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고 어쩔줄을 몰랐으며 왕(王)은 마침내 왕비(王妃)와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과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숨었는데 모두 적(敵)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광경(光景)은 처참하였으며 귀천(貴賤)이 없이 모두 짐승처럼 기면서 노복(奴僕)이 되드라도 살려만 달라고 애걸(哀乞)하였다. 견훤(甄萱)은 군사(軍士)를 불러 공사재물(公私財物)을 약탈(掠奪)하고 궁궐(宮闕)로 들어가 좌우(左右)에게 명(命)하여 왕(王)을 찾게 하였다. 왕(王)은 비강(妃姜)과 숨었다가 잡히었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협박(脅迫)하여 자진(自盡)하게 하고 왕비(王妃)를 납치하니 견훤(甄萱)의 부하(部下)들은 또한 비강(妃姜)을 난행하였다.
왕제(王第) 효염(孝廉)과 재상(宰相)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子女)와 백공(百工) 그리고 병기(兵器)와 진보등(珍寶等)을 다 취(取)하여 돌아갔다. 이 때에 고려왕(高麗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상(弔喪)하고 친(親)히 정예(精銳)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공산동(公山洞)에서 견훤(甄萱)을 맞아 싸웠으나 자주 이(利)를 보지못하고 견훤군(甄萱軍)에게 갑자기 포위(包圍)되어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을 잃고 고려왕(高麗王)은 겨우 몸만 빠져 탈주 하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왕비(王妃)가 왕(王)의 표제[(表第) - 외사촌(外四寸) 금부(金傅)를 세우니 경순왕(敬順王)이다.
왕(王)이 군신(君臣)으로더부러 거상(擧喪)을 치루고 서궁(西宮)에 빈소(殯所)를 두어 통곡(痛哭)하고 경애(景哀)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삼릉(三凌)왼쪽 산록묘좌(山麓卯坐)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왕(王)의 친족(親族)인 대아손 횡교상서복아 박술홍(大阿飡 橫校尙書僕射 朴術洪)은 비분(悲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관직(官職)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서 다시 산세(山世)하지 아니하였다.
경순왕8년을미(敬順王八年 乙未)에 국력(國力)은 미력(微力)하고 형세(形勢)는 고립(孤立)됨으로써 고려(高麗)에 항복(降伏)하니 신라(新羅)는 망(亡)하였다. 박씨(朴氏)가 왕(王)이 된 것은 먼저가 일곱이요 뒤가 삼이니 이백삼십삼년(二百三十三年)을 지낸 셈이다. <top>
|
|
Copyright(c) 밀성(밀양)박씨 돈재공파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