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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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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금호리 선영을 뵙고 자신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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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선산에서 돈재공 묘소를 살핀 후 박우섭 당숙의 안내로 필암서원을 지나 한참 북으로 올라가니 선조님들의 고향인 하남 아치실이 나오고 조금더 올라가니 금호리 도선산이 눈에 들어왔다. 도선산에 도착하니 선조님들을 모시는 호산재가 일행을 반기었다. 호산재에서 잠시 쉬며 선산에 모셔진 선조님들의 묘역을 경건한 마음으로 살펴보는데 나의 중간 뿌리가 이곳 장성에서 발원되었는가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호산재 바로 옆 산중중턱에 조선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의 묘소에도 가보았다. 갈산문중의 직선조는 아니나 청백리로 이름 난 분이시다. 그 묘 앞에는 명종이 하사한 백비가 서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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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재- 돈재공의 부 박덕명을 모신 제각(祭閣)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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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리 도선산을 살펴보고 다음은 황룡면 신호리 신촌 마을에 자리한 수산사로 갔다. 수산사도 호산재와 같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박씨동문들의 선조 모시는 정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산사 역시 신라 시조 왕 47세손이며 조선조에서 절충장군 충무시위사 대호군(折衝將軍 忠武侍衛司 大護軍)을 지내신 돈재공(遯齋公) 휘(諱) 연생(衍生)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1836년에 후손들이 세운 재각(齋閣)이다. 수산사에는 돈재공을 비롯하여 여러분을 모시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김개(金漑 ; 홍문관과 승문원의 종 5품 벼슬을 지냄), 박수량(명종때 호조판서), 박상의, 박상지, 박자온 등을 모셨다. 수산사를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갈산문중 가족은 고창으로 되돌아와 문중의 현안에 대하여 많은 의견교환을 하였다. 다음은 장성군청의 수산사에 대한 공식 안내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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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에서 3㎞거리인 황룡면 신호리 302번지 신촌 마을에 자리잡은 수산사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다섯분과 영광김씨(靈光金氏) 한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본 사우는 순조 33년(1833년) 향내의 여러 선비들이 돈재 박연생(朴衍生)과 교리 김개(校理 金漑)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항룡면 수산리에 창건하고 춘추향사하다 고종 5년(1868) 대 훼철 되었다. 광복 33년(1977) 3월에 유림 대표와 본손 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옛터인 수산리보다는 현지가 더 좋다는 결론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사우 3칸, 신문 3칸, 숭의당 6칸, 경제 4칸, 격양문 5칸, 고직사 4칸을 건축하고, 유론(儒論)에 따라 아곡 박수량(莪谷 朴守良), 백우당 박상의 (栢友堂 朴尙義), 눌헌 박상지(訥軒 朴尙智)등 세분 선생을 추배하고 1979년 9월 초하루 예성하였다. 그 뒤 1986년에 사론(士論)과 손의(孫議)에 따라 돈암 박자온(朴自溫)선생을 추배하여 현재 여섯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 3월 5일, 추 9월 5일에 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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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재공 박연생(朴衍生) 단종때 철충장군을 지냈으며, 단종 승하 후 담양 월산에 은거하였다. 세조가 여러차례 녹권(祿券)을 주며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 교리 김개(校理 金漑) 성종 8년, 문과에 급제해 시강원 설서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부 수찬을 거쳐 노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왔다.
★ 돈암 박자온(朴自溫) 명종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수양대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 지자 의령 자궐산에 은거하여 경서와 사기로 낙을 삼았다. * 명종은 수양대군보다 훨씬 후의 임금인데 명종때 진사를 하고 수양대군때 낙향했는 말은 시대가 역전되어 모순이다. <확실한 의견 있는분은 연락 바랍니다.> ★ 아곡 박수량(莪谷 朴守良) 김개 선생의 제자로 1513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문과급제에 대학과 예율, 그리고 효제와 청백으로 일생을 지냈다. 1552년 명종께서 99칸 을 지어 '청백당'이라 이름붙여 청백함을 포상하고 거찰을 보냈으며, 임종 후 백비를 하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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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사(水山祀)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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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사(水山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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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우당 박상의(栢友堂 朴尙義) 천문지리에 밝아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봉훈랑 행관상감 겸 교수가 되었다가 사재감주부에 이르렀다. 광해군때 철충장군이 되었으나, 벼 슬을 버리고 자연강산에 종적을 감추었다. ★ 눌헌 박상지(訥軒 朴尙智) 상의의 아우로 성리철학 사서와 심경, 근사록 등의 글을 연구해 사우 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군자감봉사와 예빈사제검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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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도선산 탐방기 - 2차 |
2001년 10월 1일은 추석날이었는데 고향 상하면에 아내와 함께 내려가 성묘를 하였다. 명절 때 성묘를 하거나 봄·가을 시제를 모시러 고창에 가면 나는 의례 작은아버님 댁에서 지낸다. 그해 추석날 저녁에는 문중 가족이 편을 갈라 윷놀이를 했는데 윷 말이 서로 잡히고 먹힐 때마다 웃음과 탄성이 교차하여 매우 흥겨웠다. |
▲장성군 황룡면 선산요도 |
추석 이튿날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고창 석정온천에 다녀와서 식사를 한 후 박우섭 당숙을 모시고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를 향해 떠났다. 나로부터 14대조 이상 할아버님 되시는 묘들이 대부분 모두 거기에 있는데 몇 년 전 한번 다녀왔지만 묘소를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었다. 황룡면 금호리 선산에는 많은 조상님들이 계시지만 그 중 나의 직선조 되시는 일곱 분의 묘소를 특별히 찾아 뵙기로 하였다. 박우섭 당숙께서 차를 직접 운전하여 갔다. 고창 솔재를 넘어 푸른 장성호를 끼고 남으로 내려가는데 코스모스 꽃길이 연이어 있는 초가을 벌판의 풍요로운 정경이 마음을 한가롭게 하였다. 차에는 아내와 묵동 할머님(박병섭 당숙의 모친)이 손녀를 품에 앉고 함께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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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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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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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황룡면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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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하여 황룡면 금호리에 도착하였다. 도선산 아래 지어진 호산재(狐山齋)가 일행을 반겼다. 호산재는 박덕명(朴德明) 할아버지를 주벽으로 모시는 제각(祭閣)이다. 공(公)은 담양, 장성 선산에 모신 조상님들 중 맨 위 어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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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德 明之 墓(덕명지묘) - 시조왕 46세손 밀성대군 17세손. 도평의사공 10세손.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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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장릉명신(莊陵名臣) 돈재공(遯齋公)의 아버지 되시는데 서기 1402년(조선 태종2년)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승의부위(承議副衛)라는 무관벼슬을 지내시고 호익순위사(翼巡衛司)에서 우영부사정(右領副司正) 벼슬을 하셨다. 호산재 옆에는 민가가 한 채있는데 선산을 돌보시는 분이 살고 계신다. 민가 우물에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민가에 거하는 노인 어른에게 선산을 살피러 왔다고 말하고 안내하여 줄 것을 부탁하니 좋아하셨다. 그 분은 래(來)자 항열인데 내게는 할아버지 벌되시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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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 雅 之 墓(문아지묘 )- 시조왕 48세손 밀성대군 19세. 도평의사공 12세손.돈재공2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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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황룡면과 담양 월산면에 모셔진 갈산박씨 문중의 직계 조상님들은 시조왕 46세 덕명(德明)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47세 돈재공(遯齋公) 연생(衍生:이 분은 담양군 월산면에 모셨다) →48세 문아(文雅) →49세 현손(賢孫) →50세 종원(宗元) →51세 수온(守溫) →52세 사침(士琛) →53세 상겸(尙謙) →54세 윤광(允洸)할아버지로 이어 진다. 그 뒤는 고창군 신림면 세곡에 두 분을 모셨고 이하 조상님들은 모두 고창군 상하면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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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賢 孫 之 墓(현손지묘) - 시조왕 49세손 밀성대군 20세. 도평의사공 13세손.돈재공3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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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 元 之 墓(종원지묘) -시조왕 50세손 밀성대군 21세.도평의사공 14세손.돈재공4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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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守 溫 之 墓 (수온지묘) - 시조왕 51세손 밀성대군 22세.도평의사공 15세손.돈재공5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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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 琛 之 墓(사침지묘) - 시조왕 52세손(習讀公) 밀성대군 23세.도평의사공 16세손.돈재공6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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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담양, 장성에 모신 직선조님들을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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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뵙고자 하는 묘 8기 중 문아(文雅), 현손(賢孫), 수온(守溫), 사침(士琛) 등 4기는 호산재 바로 곁에 있어서 가족들과 더불어 모두 쉽게 뵈었다. 나머지 4기는 금호산에 흩어져 계신데 산지기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찾아 뵙도록 하였다. 같이 간 식구들은 호산재에 남아 있도록 하고 나 와 아내만 먼저 호산재 북서쪽에 모셔진 박덕명(朴德明) 할아버지를 찾아 뵙고 배례를 올렸다. 나로부터 22대조를 유명지간에 뵙는 마음 역시 만감이 교차하고 감격스러웠다. 아내는 호산재로 내려가도록 하고 나 혼자 할아버지가 손짓하여준 방향으로 나머지 세 분의 묘소를 찾는데 여러 군데를 가보았으나 다른 묘소들이었다.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잘 못 가르쳐 준 것이다. 산지기 할아버지께서 일부러 그러하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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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尙 謙 之 墓(상겸지묘) - 시조왕 53세손 밀성대군 24세.도평의사공 17세손.돈재공7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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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允 洸 之 墓 (윤광지묘) - 시조왕 54세손 밀성대군 25세.도평의사공 18세손.돈재공8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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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을 찾아뵈는데는 고생을 좀 하여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뜻일 것이다. 산을 근 1시간 가량 헤매다가 다시 호산재로 내려가서 호산재 할아버지와 함께 아까 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산에 올랐다. 조선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아곡(莪谷) 박수량 선생의 묘를 지나쳐 갔다. 몇 년 전 보았던 묘 앞의 백비가 여전하였다. 백비는 청백리의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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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良之墓(수양지묘)-시조왕 51세손(청백리) 밀성대군 22세.도평의사공 15세손.돈재공5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금호산33-1) <공은 박수온의 동생으로 갈산문중의 직계는 아니나 호조판서를 지냈고 청백리로 유명하신 분임으로 특별히 묘소를 게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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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할아버지를 따라 30 ∼40분 가량을 오가며 나머지 묘를 찾아 뵈었다.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안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호산재 할아버지께서 산자락 여기저기를 다니며 묘를 가르쳐 주면 나는 묘비를 확인한 후 메모를 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누런 노트를 상석 곁에 놓고 묘소에 대한 사진촬영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할아버지와 함께 천천히 호산재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에게 막걸리 사 드시라고 3만원을 드렸다. 아내도 나보다 앞서서 3만원을 드렸다고 하였다. 나중 이야기인데 내가 혼자 묘를 찾을 때 묘를 못 찾고 헤매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께 대포 값을 드리면서 도와달라고 했다한다. 묘를 찾는데 6만원이 들어간 셈이다. 하기야 그 한적한 곳에서 7순 가까운 노인 분이 얼마나 적적할까! 자손들이 호산재를 자주 찾아가 위로를 해드려야 될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더러 다음에 한 번 더 오라는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상과
같이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도선산에 계신 갈산문중 직계 조상님들에 대한 유택을 신라 시조왕의 내림차순 계통에 따라 소개하고
다음은 고창 세곡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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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도선산의 호산재 바로 옆에 모셔진 조상님들 유택 |
위는 장성 호산재 바로 곁에 있는 4기의 선조님들의 유택이다. 원래는 수온지묘와 사침지묘만 있었으나 문아지묘와 현손지묘가 다른데서 이장되어 와 4기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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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산재 선산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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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습독공 사침지묘(갈산문중 직계) 3-정혜공 수량지묘. 4-윤광지묘(갈산문중 직계) 5-세명지묘. 6-취제지묘 7-태중지묘 8-상겸지묘(갈산문중 직계) 9-윤부지묘.
위는 밀성박씨습독공파세보에 나와 있는 장성 호산재 선산 묘도다. 지금하고는 묘소의 위치가 다르지만 후손들에 대한 고증자료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면을 게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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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세곡에서 조상에 대한 연민의 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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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8일 오전에 고창군 신림면 세곡 마을을 찾아갔다. 고창 상하면에 사는 고모님의 아들 결혼식이 오후에 있는데 참석 차 전날 서울에서 내려 와 고창읍내 작은아버지 댁에서 하루를 지내고 시간이 있어서 세곡에 있는 조상님들 묘소를 뵈러 간 것이다. 박우섭 당숙이 길을 안내하고 아내와 사촌동생 정호가 동반하였다. 고창읍내서 전주 쪽으로 조금 가다가 우회전하여 좁은 포장도로를 2km정도 들어가니 방장산 산골 좁은 곳에 자리한 세곡 마을이 나왔다. 세곡에는 아래 두 분의 조상님들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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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就 逸 之 墓 (취일지묘) - 시조왕 55세손 밀성대군 26세.도평의사공 19세손. 돈재공9세 (전북 고창군 신림면 세곡리 여소개<如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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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亨 老 之 墓 (형노지묘) - 시조왕 56세손 밀성대군 27세.도평의사공 20세손.돈재공10세 (전북 고창군 신림면 세곡리 호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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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분은 갈산박씨 문중의 직계이나 세곡에 사는 일가들이 위토에 농사를 짓는 대신 매년 4월 시제를 모신다. 시제 때 갈산 문중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하니 불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세곡 마을 야산에 이 두 분이 계실까? 형노께서는 조실부모하여 의지하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수명도 길게 누리지 못하셨다. 일찍이 병자호란 때 공의 종숙부 취제가 취극과 더불어 작은아버지 윤광의 명을 받아 흥덕에 의병소(義兵所)를 베풀고 병량을 모아 군을 지원하였는데 청과 화친이 이루어지고 군사들도 파하게 되자 그대로 흥덕현 세곡에 눌러 살게 되었다. 공 역시 이때 장성으로부터 아버지 벌되시는 분들의 항렬(취제, 취극 등)을 따라 세곡으로 이사오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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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섭 당숙을 따라 방장산 자락 대나무 숲 속에 모셔진 형노(亨老)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묘소를 두루 살피고 비문에 쓰인 내력을 읽어보니 문 듯 슬픈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발길을 돌려 취일(就逸)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야산 중턱에 외롭게 모셔져 있었다. 조그마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이름 석자정도다. 이처럼 외진 곳에 모셨다가 자손들이 묘를 잊어버리거나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세곡에 모셔진 두 분 할아버지 묘소를 살피고 고창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묘한 그리움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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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신림면 세곡리 선산 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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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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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신림면 세곡리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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