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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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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보편화된 가치와 합리주의 및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의 전통 문화만을

고집할 수는 없으며

완벽하게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고유의 소중한 문화를 외면한 체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자라나는 세대들을

전통과 인습의 굴레로

구속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조들의 체취와 얼이 서린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가야 할 것이다.

 

 

 

 

선조의 흔적(痕迹-陵墓)를 찾아서  

 

고향을 떠난 30여 년간 서울에서 직장생활이 바쁜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선조의 유적을 찾아가 뵙고 수 천년간 면면이 이어 내려 온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한없이 신비스럽고 나 자신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 동안 선조의 유적을 찾아가 본 소감을 서술하고 그림자료를 게재하니 신라박씨 갈산문중 가족 모두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3위성조(三位聖祖)를 그리며

 

2002년 0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아내와 함께 강화도 마니산(468m) 정상에 있는 참성단을 참배하기로 하고 오전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다. 박씨의 조상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이시나 민족의 조상은 단군왕검이시다. 단군께서 하늘에 제를 올렸던 참성단에 올라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돌이켜 보며 지금을 반성하고 후일을 기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곧 바로 검문소에서 급히 좌회전하여 해안도로도 들어가니 육지는 온통 푸르고 바다는 한가로워 보였다. 강화역사관, 광성보, 덕진진을 지나 초지진을 들렀다가 차를 돌려 전등사로 향했다. 전등사에서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식당 안에서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여자 종업원에게 물으니 수년 전부터 청개구리 한 마리가 들어와 나가지 않고 식당 안에 있는 화분을 여기저기 건너다니며 살고 있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다.


   

▲ 단군성조 영정

전등사를 떠나 화도면에 있는 마니산으로 달렸다.
마니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참성단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 있는데 두 방향이었다. 그 중 계단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가파른 계단 길을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마니산을 찾은 등산객은 의외로 많았다. 이윽고 마니산 정상에 올라 경건한 마음으로 참성단을 살펴보고 강화도 전역과 서해바다를 내려다보며 단군왕검께서 상제(上帝)께 천제(天祭)를 지내던 모습을 그려보았다.

마니산은 단군성조 이래로 민족의 혼과 정신이 서린 곳이다. 아내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가정과 나라의 평안을 비는 것 같았다.

마니산에서 백두산 천지 가는 거리와 한라산 백록담 가는 거리는 직선으로 똑 같다고 한다. 또 마니산에서 솟아나는 지기(地氣)는 우리 나라에서 으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내는 등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니산 정상에 올라 참성단을 대하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참성단은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었다.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간직한 제천단이다.

자연섭리의 이치대로 단군 왕검께서는 이 제단을 쌓고 자손 만대의 무궁 번영을 위하여 봄, 가을로 하늘에 천제(天祭)를 올리셨던 것이다. 단군 조선 내내 1천여 년간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제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 유리왕과 백제의 비류왕도 몸소 이 곳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매년 열리는 전국체육대회 개최지의 성화대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이 참성단에서 채화되어 대회장으로 점화 봉송되고 있다.

성화 채화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 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인화하거나 궂은 날에는 부싯돌을 이용해 성화를 점화한다.

또한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 하실 때 신녀(神女)가 합 그릇을 받들었다고 하는데서 7선녀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니산 참성단에서 오래 동안 경건한 상념에 젖어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그리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다가 하산할 시간이 되어 다시금 아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니산을 내려왔다.

          

▲ 성화를 채화하는 7선녀들

석양의 강화도를 뒤로하고 차를 몰아 귀가하면서 환국→ 배달국→고조선으로 이어진 민족의 원류 삼위성조시대를 음미하여 보았다.

삼위성조 시대는 환인천제(桓因天帝) →환웅천황(桓雄天皇)→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이어지는 우리민족의 옛 역사시대를 말한다.

환인천제(桓因天帝) 시대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전 천산(天山)의 동방에 위치한 광명의 나라 환국(桓國)이 있었고 7세의 환인이 나라를 12개의 환국으로 나누어 3301년 간 다스렸다.

환웅천황(桓雄天皇)시대는 환국(桓國)의 문명권이 동서 4대 문명권으로 분기해 나갈 때 환국의 통치자 환인(桓因)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桓雄)에게 인간을 널리 구하라는 명(命)을 내리어 동방의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환웅은 환인이 내려준 천부인 3개와 동방문명 개척단 3,000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여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해 수도를 신시(神市)에 정하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열었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웅천황들이 1565년 간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리다가 단군시대 고조선으로 이어졌다.  단군왕검(檀君王儉)시대는 1세부터 47세 고열가(古列加)단군에 이르기까지 2096년 간 지속된 고조선 시대다. 단군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며 어머니는 웅씨(熊氏)왕녀다.

  또 왕비는 비서갑(斐西岬)에 사   는 하백(河伯)의 여식(女息)인데   이름은 낙빈(岹嬪)이요 탄신일   은 7월 16일이다.

▲ 참성단 향로 앞에 선 필자

환국 →배달국으로 이어온 고조선은 전 영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서기전 238년에 망하고 이후는 열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열국시대는 -북부여, -남삼한(마한, 진한, 변한), -최씨 낙랑국, -동옥저로 발전하다가  사국시대로 접어드는데 바로 -고구려, -백 제, -신라 , -가야를 말한다. 이 사국시대로 접어들어 비로소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탄생하여 신라의 시조왕이 되었다. 다음은 신라의 서울이던 경주로 가서 박씨 신라왕들의 유적을 살필 차례다.

참고로 단군조선 47대 단군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단군 47대>

 

제1세- 단군왕검(檀君王儉), 제2세- 부루, 제3세- 가륵, 제4세- 오사구, 제5세- 구을, 제6세- 달문, 제7세- 한속, 제8세- 우서한, 제9세- 아술, 제10세- 노을, 제11세- 도해, 제12세- 아한, 제13세- 흘달, 제14세- 고불, 제15세- 벌음, 제16세- 위나, 제17세- 여을, 제18세- 동엄, 제19세- 종년, 제20세- 고홀, 제21세- 소태, 제22세- 색불루, 제23세- 아홀, 제24세- 연나, 제25세- 솔나, 제26세- 추로, 제27세- 두밀, 제28세- 해모, 제29세- 마휴, 제30세- 나휴, 제31세- 등올, 제32세- 추밀, 제33세- 감물, 제34세- 오루문, 제35세- 사벌, 제36세- 매륵, 제37세- 마물, 제38세- 다물, 제39세- 두홀, 제40세- 달음, 제41세- 음차, 제42세- 을우지, 제43세- 물리, 제44세- 구물, 제45세- 여루, 제46세- 보을,

제47세- 고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