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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갈산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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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신라 선원세계   밀성박씨 세계   도평의사공 휘 언상파및 밀성박씨상계 계보

돈재공 휘 연생파 계보         산문중계보

박씨는 신라 시조왕인 휘(諱) 혁거세(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하여 모두 한 가닥에 근원(根源)을 두고 있으며 민족 가운데에서도 귀화족(歸化族)이 없는 가장 순수한 혈통이기도 하다. 

박씨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박씨선원대보(朴氏璿源大譜)등에 무려 300본(本)이상이 기록되어 있으나 중시조(中始祖)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후손이 현존하는 본관은 70여 본 정도라고 한다.

박씨중에서 밀성박씨가 80% 가량 되는데 여기서는 우리 밀성박씨계보(密城朴氏系譜)에 대하여 시대별로 총괄적인 설명을 하고 그 계보도(系譜圖)를 첨가해 갈산박씨 문중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박씨(朴氏)신라선원세계(新羅璿源世系)

  <처음으로>

이 세계(世系)는 신라 시조왕부터 29세 경명왕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말한다. 즉 신라 건국 시부터 신라 56대 경순왕(김부)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함으로서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까지이다.

시조왕(朴赫居世)이 서기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6촌장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이래 신라 초기에는 박씨들이 왕위를 세습했다.

2세 남해왕(신라2대왕), 3세 유리왕(신라3대왕)까지 세습되다가 유리왕이 유언으로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탈해가 신라 4대왕이 되었는데 그는 유리왕의 여동생 아효부인의 남편이기도 하다.

5대왕에는 다시 박씨인 유리왕의 둘째아들 검(檢)이 오르니 바로 파사왕(시조왕 4세)이다. 6대왕에는 파사왕의 아들이 올라 지마왕(시조왕 5세)이 되고 7대왕에는 유리왕의 장남이 올라 일성왕이(시조왕 4세) 되었으며 8대왕에는 일성왕의 아들이 오르니 바로 아달라왕(시조왕 5세)이다.

왕위에 오른 순위가 뒤바뀌어 있음에 유의하여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시조왕 6세부터 27세에 이르기까지는 박씨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석씨에 이어 김씨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비록 오랜 기간 박씨가 왕위를 있지 못했으나 22대에 걸쳐 모두 신라의 왕손으로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등 관위(官位) 내지는 작위(爵位)를 받았다.

 *그 명칭은 전산군(前山君),조리군(朝里君),정후(正候),도령위(都領位), 수도후(水道候),조서산후(朝胥山候),대천군(大川君),대사도(大司徒),상조(上條),낭후(浪候),낭군(浪君),예시군(禮始君),부산대군(府山大君),혜후(惠候),평후(萍候),담대후(淡大候),승후(升候),중무장(中武將),조후(條候),사현대군(思顯大君)등 다양하다.

신라 52대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시조왕 28세손이요 아달라왕(阿達羅王)으로부터 24세손인 휘(諱) 경휘(景輝)께서 912년에 53대 왕위에 추대되니 바로 신덕왕(神德王)이다.  

이때부터 다시 박씨계보가 역사에 명확히 나타나며 신라왕위가 타성으로 넘어간지 728년 만이다. 왕비 의성왕후(義城王后)는 효공왕과 남매지간이었고 신덕왕은 아버지를 선성왕(宣聖王)으로 추존하였다.  

신덕왕 때는 신라의 말기로서 후삼국이 난립하여 국운이 극도로 쇠퇴 한 시기였다. 신덕왕이 국운을 만회하지 못하고 917년에 붕어하자 아들 휘(諱) 승영(昇英)께서 왕위에 오르니 시조왕 29세손이요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이시다. 경명왕은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였으며 쇠잔한 국운을 돌리려고 중국 후당(後唐)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격퇴하는 등 심혈을 기우렸으나 끝내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붕어 하니 동생 위응(魏膺)이 55대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경애왕인데 927년 10월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취흥 할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견훤은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신라 56대왕에 앉히고 철군하니 그가 마지막 왕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국토가 줄고 민심이 고려로 향하자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고려의 서울 개경으로 가서 절차를 밟았다.

이로서 신라는 56대 992년만에 천년사직을 닫았는데 박씨가 10왕에 235년간, 석씨가 8왕에 173년간, 김씨가 38왕에 584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밀성박씨 세계(密城朴氏 世系)

 

<처음으로>

박씨의 세계(世系)는 시조왕 4세인 일성왕과 파사왕대에서 큰 줄기로 갈라졌다.

파사왕계(破娑王系)는 뒤에 영해(寧海),면천(眄川),강릉(江陵),해주(海州),비안(比安),이산(尼山),구진(邱津),계림(鷄林),노성(魯城)으로 분적(分籍)되었다.

일성왕계(逸聖王系)는 시조왕 5세 아달라왕(阿達羅王)에서 28세 신덕왕(神德王)에 이어진후 29세 이르러 경명왕계(景明王系)와 경명왕 동생 경애왕계(景哀王系)로 갈라졌으며 이중 밀성박씨는 경명왕계에 속한다.

시조왕29세손이요 신라 54대왕인 경명왕(景明王)은 9명의 왕자를 두셨다. 이 9명의 왕자들로부터 계보가 다양하게 갈라져 나가는데 그중 첫 왕자 휘(諱) 언침(彦 )을 밀성군(密城君)에 봉(封)하였음으로 그분을 밀성대군이라 부르며 그 후손을 밀성대군 언침파라고 칭한다.

그리고 9왕자들의 계보가 갈려나간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ㅇ밀성대군 및 그외 8 왕자들의 계파

 

─ 밀성대군(密城大君) :휘(諱)는  언침(彦 ),시조왕 30세손  

  오늘의 밀양박씨(密陽朴氏)다

진원(珍原),문의(文義),봉산(鳳山),영암(靈岩),창원(昌原), 구산(龜山), 태안(泰安), 의흥(義興), 진주(晋州), 나주(羅州), 선산(善山), 여주(驪州), 문주(文州), 인제(麟蹄), 고성(高城), 언양(彦陽), 운봉(雲峰), 강진(康津), 은풍(殷豊)

<편집자 주(註)> -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가 사문진사공파 지길(之吉)의 자(子)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반남박씨 대종회의 주장을 수용하여 삭제한 바 있다.

─고양대군(高陽大君):휘(諱)는 언성(彦成)

   오늘의 고령박씨(高靈朴氏)다. 참석(三陟), 군위(軍威)

─ 속함대군(速咸大君):휘(諱)는 언신(彦信)

   오늘의 함양박씨(咸陽朴氏)다.

   (대군을 일함대군(逸咸大君)이라 칭하는 문중도 있다)

─ 죽성대군(竹城大君):휘(諱)는 언립(彦立)

   오늘의 죽산박씨(竹山朴氏)다.  음성(陰城),고성(固城),평산(平山)

─ 사벌대군(沙伐大君):휘(諱)는 언창(彦昌)

   오늘의 상주박씨(尙州朴氏)다

   상산(商山),상주(尙州),충주(忠州),평택(平澤),남원(南原)    

─ 완산대군(完山大君):휘(諱)는 언화(彦華)

   오늘의 전주박씨(全州朴氏)다. 무안(務安),순창(淳昌)

─ 강남대군(江南大君):휘(諱)는 언지(彦智)

   오늘의 순천박씨(順川朴氏)다.춘천(春川),여수(麗水)

─ 월성대군(月城大君):휘(諱)는 언의(彦義)

   오늘의 경주박씨(慶州朴氏)다. 월성(月城)

─ 교 순(交舜):고려때국상공(國相公). 울산(蔚山)등으로 관적(貫籍)됨.

     (국상공 교순을 경애왕의 왕자로 소개하는 문중도 있음)

밀성대군께서 경명왕의 첫 왕자임에도 왜 왕위를 숙부 위응(魏膺)이 이어 가도록 하고 밀성고을 하나를 받아 유유자적하였는지 필자로서는 명쾌히 알 수가 없다.

이 문제는 다음 나오는 <갈산문중 상세보>의 밀성대군편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밀성박씨 세계는 밀성대군으로부터 밀성대군 7세 언부(彦孚),언상(彦祥), 언인(彦仁)까지 계보며 고려시대다. 2세 욱(郁)은 삼한벽공도 대장군(三韓碧空都 大將軍)을 하셨으며 3세 난(瀾)은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이시다. 난(瀾)의 대에 이르러 밀성박씨계통이 많이 실전(失傳)되었다고 전한다.

4세는 영정(永禎), 영희(永禧), 영기(永基), 영구(永垢혹은永乭),영지(永址)등 5형제며 여기서 밀성박씨 후손이 급격히 분파 해 간다.

그중 영정(永禎)은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되는 분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를 하셨다. 5세 기세(基世)는 합문지후(閤門 候)를 하셨으며 6세 시주(施做)는 보문각대제(普門閣大制), 이부시랑(吏部侍郞)을 하시고 7세 찬행(讚行)의 관위(官位)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전명하시중(檢校太傳明下侍中)이다.

찬행께서는 언부, 언상, 언인등 3형제를 두셨다. 밀성대군 8세손인데 이분들의 관위(官位)는 역사적인 문헌에 명쾌히 나온다. 이 부분은 단원을 바꾸어 다음에 설명코자 한다. 

다른 문중의 자료에는 대군이 경애왕의 아들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 문중의 자료대로 하였다.   경명왕의 아들에 대하여 인터넷 자료마다 상이하다. 어떤 사이트는 8분이라 하고 혹은  이사이트 처럼 9분으로 게재하고 있다.  
즉 국상공 교순은 경명왕의 동생 경애왕의 첫째 왕자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직계인 경명왕은 8왕자와 1공주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문중을 포함해서 여러 자료에  국상공 교순을 경명왕의 9번째 왕자로 기록하고 있다. 홈 운영자도 아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실제 국상공의 후손이 있다고 하는바, 다른 문중의 기록을 여기에 게재하여 후일 고증하고자 한다.

* 경애왕 ---- 1왕자 금성대군 교순(金城大君 交舜)

                     2왕자 계림대군 입순(鷄林大君 立舜)

 

 

         

     도평의사공 휘 언상파(都評議事公諱彦祥派)

        밀성박씨 상계 계보(密城朴氏 上系 系譜)

  <처음으로>

밀성박씨 상계계보는 앞서 설명한 밀성박씨세계와 우리갈산문중의 직계인 도평의사공 언상파계보를 포괄하는데 고려시대 전체에 해당한다.   

밀성대군 4세는 영정(永禎), 영희(永禧), 영기(永基), 영구(永垢혹은永乭),영지(永址)등 인데 이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해 나아갔음은 상술한바와 같다.

그중 영정(永禎)께서는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이며 후손이 제일 많이 번창하였다. 특히 그 후손은 밀성대군 8세인 언부, 언상, 언인 대에 이르러 화려하리 만큼 현저하다.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공 휘(諱)언상(彦祥)은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의 중시조(中始祖)이다. 고려 문종(1046丙戌-1082壬戌)때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지내고 밀직군(密直君)에 봉군(封君)되었다.

2세 양신(良臣)은 소감(少監)을 하였고 3세 직(直)은 감무(監務)를 하였다.

직(直)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도평의사공 4세 인경(仁卿), 의경(義卿), 신경(信卿)이다.

인경은 문림랑(文林郞), 의경은 창승(倉丞), 신경은 소감(少監)을 하였다.

인경의 자(子)인 5세 검(儉)은 내부시승(內部侍丞), 6세 열(說)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까지 올라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7세 창밀(昌密)은 현승(縣丞), 8세 거인(居仁)은 공민왕 때 소감(少監)을 하였는데, 인의현(仁義縣 :지금의 태인지방)으로 귀양하여 3대가 살았다.

9세 승봉(承奉)은 벼슬이 소윤(少尹)이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형 문봉(文奉)과 함께 은둔 했으며 승봉(承奉)은 오늘날 도평의사공 후 돈재공파의 직계이다.

10세 덕명(德明)은 조선 태종3년(임오:1402)에 무을과에 등과하여 벼슬이 승의부위(承義副衛)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우령부사정(右領副司正)에서 단종조에 절충장군 훈련원 도정(折衝將軍 訓鍊院 都正-정3품)까지 올랐으나 수양대군(세조)의 위세가 오르자 낙향 하였다.

 

 11세 연생(衍生)은 호가 돈재(遯齋)이신데 연생(衍生)이하는 돈재공파(遯齋公派)라 한다. 수양대군이 단종 2년(1453:癸酉)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임금을 내몰 때 돈재공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충무시위사(忠武侍衛司) 대호군(大護軍) 벼슬을 버리고 태인으로 낙향하여 부친을 모신 채, 장성 아치실로 들어간 뒤 다시 독신으로 담양 월산 사위 이석손(李碩孫)의 집에 은둔하였다. 세조가 등극(1455 : 乙亥)한 그해 12월 27일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三等)에 녹(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사양하고 다시 세조4년(1458 :戊寅)에 이등(二等)으로 녹훈을 내렸으나 병든 몸이라 핑계하며, 본관을 태인(泰仁)으로 개관(改貫)하고,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돈재공 후손들은 공민왕 때 소감(少監)을 지낸 거인(居仁)을 1세조로 하여 태인박씨라 칭했다. 그러나 순조 32년(1831:辛卯)에 이르러 장성 유생 박규혁등이 예조(禮曹)에 상소(上疎)하여 태인박씨에서 다시 밀성박씨로 복관(複貫)하였다. 신라박씨 대종회나 밀성박씨 대종회에서는 거인(居仁)이하를 태인박씨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간 대종회와의 소통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탓으로 돈재공파문중과 협의하여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도평의사공에 관하여는 고려사, 여지승람(與地 勝覽) 신라 2천년사 등에 기록되어있고,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 구용리(九龍里) 원덕사(遠德祀)에 밀성(밀양)박씨 12중조의 한 분으로 배향(配享)되어있으며, 유적은 풍각 화산(豊角 化山)이라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전국 각지(各地)에서는 이분을 중심으로 인의신회(인경, 의경, 신경)등 종친회를 만들어 족의(族誼)의 정을 나누고 있다.

 

* 도평의사(都平議事) 국방 최고회의 기구이며, 합의 기관으로 고려 문종 때 정착된 병마사(都兵馬使)가 충렬왕 5년(1279)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고쳐졌으며 나중엔 국방뿐만 아니라 일반정치와 서무(庶務)도 관장 하였다. 수장인 판사(判事)는 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중에서 겸했다.


 

          

 

 

 

 

  돈재공 휘 연생파(遯齋公 諱 衍生派)

  <처음으로>

돈재공은 시조왕 47대손이요 밀성대군 18세손이시다.

이분이하 후손들은 대개 돈재공파라 칭한다. 하남처사공파(河南處士公派), 습독공파(習讀公派)등로 다시 갈려 가지만 모두 돈재공파의 범주에 속함은 물론이다.

우리 갈산문중은 하남처사공파나 습독공파 모두에 속한다.

하남처사공파는 돈재공 5세손 수온(守溫)부터 내려오며 습독공파는 돈재공 6세손 사침(士琛)부터 내려온다. 이 두개의 계보는 돈재공파에서 우리 갈산문중 중심으로 포괄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돈재공2세 문아(文雅)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수찬관(承政院 左承旨兼 經筵修撰官)벼슬을 사후에 증직(贈職)으로 받았다. 공의 여동생이 이석손과 결혼했는데 이석손은 돈재공의 사위가 된다. 후일 돈재공이 장성으로 낙향한 후 담양 이석손 집에 은둔하셨다

돈재공 3세 현손(賢孫)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벼슬을 증직 받았고 4세 종원(宗元)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겸 동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 同知義禁府事) 벼슬을 증직 받았다.

*증직 : 종친(宗親)이나 종2품이상 관원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또는 효자, 충신, 학덕이 뛰어난 사람에게 공적과 덕을 가리어 그 사후에 나라에서 관직과 품계를 추증(追贈)하는 벼슬로 관직앞에  증(贈)자를 붙인다.(예 :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이 분들이 증직받은 이유는 돈재공5세 수양(守良)께서 종2품 (호조판서 등)고위관직들을 역임하신 까닭에 수양의 증조부모까지 나라에서 증직(贈職)한 것이다. 수양은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선조인 하남처사공 수온(守溫)의 바로 아래 동생되신다.

또한 박수양은 돈재공 후손 중 한국사 및 국내 대백과사전등에 분 명하게 등장하시는 분이며 조선 명종때 청백리로서 만인의 사표(師表)가 될뿐만 아니라 장성을 근거지로한 밀성박씨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돈재공4세 종원의 바로 아래 동생 되시는 이종(李宗)께서 장성으로부터 고창현 노동(蘆洞)으로 1500년대 무렵 이거 하셨는데 고창에 밀성박씨 돈재공파가 번성하게된 실마리며 공은 돈재공파의 고창군 입향조가 되는 한편, 공을 노정공(蘆亭公)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갈산문중 직계선조가 입향한 것은 그 보다 100년도 훨씬 넘은 후의 일이다. 

돈재공5세 수온(守溫)께서는 하남처사공(河南處士公)이신데 동생 수양이 판서벼슬에 나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셨으며 학식과 덕망이 있다하여 나라에서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벼슬을 내렸다.

공은 사영(士瑛), 사침(士琛), 사순(士珣)등 3형제를 두셨는데 그중 사침(士琛)은 습독공(習讀公)이시며  돈재공  6세손으로우리 갈산문중의 직계선조 되신다. 공은 훈련원 습독관(訓練院 習讀官)을 지내셨고 관위는 어모장군 행 훈련원습독(禦侮將軍 行 訓練院習讀)이다.

습독공은 상겸(尙謙), 상효(尙孝)등 2형제를 두셨다. 두 분은 돈재공 7세가 되며 상겸(尙謙)은 둘째아들 윤부(允溥)의 충공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증직으로 받으셨고 갈산문중의 직계선조가 되신다.

상겸께서는 윤제(允濟), 윤부(允溥), 윤발(允潑), 윤함(允涵), 윤광(允洸), 윤풍(允豊)등 6형제를 두셨는데 돈재공8세가 된다.

이중 윤광께서 갈산문중 직계 선조이신데  병자호란(1636년)때 큰조카 취제(就悌)와 네째아들 취극(就克)에게 명하여 병량(兵糧)을 모아 흥덕으로 가서 의병소(義兵所)를 베풀고 군을 돕게 하셨다.

*취제와 취제의 맏형 취효 및 취극은 4촌형제로 이괄의난(1624년)때는 금성(錦城-지금의 나주) 흥덕(興德)에서 의병을 모집(倡義)하여 난의 토평(討平)에 공을 세웠다.

공의 4남 취극은 다시 강화도로 가서 항전하다가 35세의 나이에 순절했으며 부인 문경송씨(聞慶宋氏)는 남편의 순절소식을 듣고 강물에 몸을 던진바 있다.

윤광께서 병자호란 때 와병(臥病)중이었으며 병자호란 직후 돌아가셨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과 4남 내외의 슬픈 소식이 공의 병환을 더욱 깊게 했을 것이다.

공의 부인 제주고씨(濟州高氏)도 자식 내외가 죽고 공이 돌아가신 것이 병이 되어 공께서 가신지 2개월만에 공을 따라가셨으니 슬픈 일이다. 

윤광께서는 취장(就章), 취신(就信), 취일(就逸), 취극(就克), 취익(就益), 취흥(就興), 취업(就業)등 7형제를 두셨는데 이분들은 돈재공 9세가 된다.

이중 취일께서 갈산문중의 직계선조가 되시며 관위(官位)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 衛) 대호군(大護軍)이시다.

돈재공8세까지의 갈산문중 직계선조의 묘소가 모두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데 취일(就逸)공의 묘소와 공의 아들 형노(亨老)의 묘소가 고창군 신림면 세곡에 있고 이하는 상하면 석남리 갈산 지역에 있다.

윤광께서 병자호란(1636년)때 아들과 조카와 더불어 흥덕현에 들어오셔서 의병소를 배풀고 군대에 병량을 지원하셨다고 상술한 바 있는데 병자란 후에 조카와 아들이 흥덕현 세곡에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고 우리문중의 직계요 윤광의 손자인 형노께서 조실부모한 후 아버지 벌되시는 분들의 항렬을 따라 장성에서 세곡으로 오심으로서 우리문중 직계가 세곡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취일(就逸)공께서는 장성에서 어린 아들을 남겨 둔 체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되며 형노께서 장성으로부터 세곡으로 작은아버지나 당숙을 따라 이거(移居)하셨음을 알 수 있는데 1636년-1737년 무렵이고 이로부터 갈산박씨문중의 직계선조가 세곡에 뿌리를 내려 후손이 번성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곡에 갈산문중직계는 살고있지 않으며 취일(就逸)공과 아들 형노(亨老)공의 묘소만 있다.

 

 

 

 

갈산문중 계보(葛山門中 系譜)

   <처음으로>

세곡의 박씨문중계보는 병자호란 때 장성에서 세곡으로 이거 하신 윤광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나 엄밀히 말하면 윤광 할아버지의 손자 형노(亨老)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형노께서는 시조왕 56세손이요 밀성대군 27세손이며 돈재공 10세손이다.

이분은 증휘(增輝), 중휘(重輝), 덕휘(德輝)등 3형제를 두셨는데 덕휘(德輝)공이 우리 갈산문중의 직계 선조이시다. 

덕휘께서 태남(台南), 태서(台西) 2형제를 두셨고 장자 태남은 숙부 증휘께 양자를 갔다. 태남공이 갈산문중의 직계가되며 덕휘공 이하 묘소는 모두 상하면 석남리 갈산지역에 모셔져 있다. 이 홈에서의 계통도는 증휘(增輝)→ 태남(台南)으로 하지 않고 덕휘(德輝)→태남(台南)으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태남의 아들은 원양(元陽)이시다. 이분께서 1750년대에서 1760년대쯤에 세곡에서 상하로 오심으로서 갈산박씨문중이 갈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후 문진(文眞)→ 성수(成秀)→ 만엽(萬燁)· 만필(萬弼)로 대를 이어 정착해 내려오며 만(萬)자 행렬부터 급격히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갈산박씨 대문중에서 시제를 모시는 분들은 덕휘→태남→원양→문진→성수→만엽·만필에 이르는 6세조 일곱 분이다. 여기까지가 시조왕으로부터 62세손이요 밀성대군으로부터 33세손이며 돈재공으로부터 16세손이 된다. 

이하 선조들은 사문중별로 제를 모시니 설명을 생략하는 한편 시조왕 63세부터 마지막 69세까지는 상세보(詳細譜)에 자세히 나와 있음을 밝힌다.

 

<상하면 갈산문중 선산요도>

아래 자료는 2014년 3월 22일 이전 입니다.

아래 묘소들은 2014년 3월 22일

상하면 갈산마을 앞 송라 선산에 합장되었습니다.

 

갈산박씨 대문중에서는 덕휘 →태남 →원양 →문진 →성수→만엽·만필에 이르는 6세조 일곱 분에 대하여 봄, 가을로 시제를 모신다. 덕휘지묘(德輝之墓), 태남지묘(台南之墓), 만엽지묘(萬燁之墓), 만필지묘(萬弼之墓)에 대하여는 봄에 모시며 원양지묘(元陽之墓), 문진지묘(文眞之墓), 성수지묘(成秀之墓)는 가을에 모시는데 위 도면에 표시된 위치별로 선산요도상세내역(先山要圖詳細內譯)을 밝히면 다음장의 도표와 같으니 문중가족은 시제행사에 참여시 참고하기 바란다.

 

 

 

선산 요도 상세내역(先山 要圖 詳細 內譯)

아래 자료는 2014년 3월 22일 이전 입니다.

아래 묘소들은 2014년 3월 22일

상하면 갈산마을 앞 송라 선산에 합장되었습니다.

번호

묘 문 ( 墓 文 )

망주.상석

시제일

위 치

시조왕

57 世

德輝

덕휘

감찰 밀양박공 휘 덕휘지묘 정좌

監察 密陽朴公 諱 德輝之墓 丁坐

배 숙인 장택고씨지묘 합폄

配 淑人 長澤高氏之墓 合   

상석만 있음

매년 4월5일

-식목일

갯말 안터(內 洞).가막샘쪽

<사진보기>

58世

台南

태남

참봉 밀양박공 태남지묘 좌신

參奉 密陽朴公 台南之墓 坐辛

배 숙인 광산김씨지묘 부좌

配 淑人 光山金氏之墓 附左

상석만 있음

상 동

석남부락우측 산등성 이 미륵골 사 장등

<사진보기>

59世

元陽

원양

밀양박공 원양지묘 간좌

密陽朴公 元陽之墓 艮坐

배 유인 전주이씨지묘 합조

配 孺人 全州李氏之墓 合兆

망주.상석 있음

11월

첫째 일요일

송라. 문진지 묘의 좌측(갈 산쪽)

<사진보기>

60世

文眞

문진

학생 밀양박공 문진지묘 간좌

學生 密陽朴公 文眞之墓 艮坐

배 유인 청도김씨지묘 합조

配 孺人 淸道金氏之墓 合兆

망주.상석 있음

상동

송라. 원양지 묘의 우측(용 대쪽)

<사진보기>

61世

成秀

성수

학생 밀양박공 성수지묘

學生 密陽朴公 成秀之墓

배 유인 달성서씨 합조 유좌

配 孺人 達城徐氏 合兆 酉坐

망주,상석이모두있음

상동

배드리(오룡 쪽)

<사진보기>

62세

萬燁

만엽

학생 밀양박공 만엽지묘 간좌

學生 密陽朴公 萬燁之墓 艮坐

배 유인 광산김씨 합조

配 孺人 光山金氏 合兆

배 유인 낭주최씨 합조

配 孺人 郎州崔氏 合兆

상석만 있음

매년 4월5일

-식목일

갯말,안 터

(홍롱면쪽)

<사진보기>

62세

萬弼

만필

학생 밀양박공 만필지묘

學生 密陽朴公 萬弼之墓

배 유인 광산김씨 합조 간좌

配 孺人 光山金氏 合兆 艮坐

상석만 있음

상 동

갯말,안 터

(홍롱면쪽)

<사진보기>

 ⑧

63세

宗容

종용

종용지묘(宗容之墓) - 이곳은 사문중에서 매년 제를 모신다. 그리고 그 묘우측에 공(公)의 장남 64세 균업(均 業)의 묘도 함께 있다.

없음

상 동

갯말,안터

①과 ⑥의중간

<사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