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그 때 그 사고 피할 수 없었나?>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20분. 아시아나항공 733편은 승객과 승무원 등 106명을 태우고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했다. 오후 3시15분 목포공항에 도착 예정이었다. 강풍과 안개로 목포 공항 기상 상태가 나빴다. 3시24분 첫 번째 착륙을 시도했다. 여의치 않자, 항공기는 3시28분 두 번째 착륙을 하려 했다. 실패. 다시 3시38분 세 번째 착륙 시도, 역시 실패했다. 오후 3시41분 “목포공항 상공 남서쪽 10마일지점에서 착륙을 위해 접근 중이다”를 끝으로 관제탑과의 교신이 끊겼다.  목포공항 레이더에서도 사라졌다.



 


 


9분 뒤 3시50분 여객기는 목포공항에서 10여 km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뒷산에 추락했다. 항공기에 타고 있다 살아난 승객 2명이 탈출해 신고했다. 마산리 등 해남군 주민 150여명과 공무원·군인·경찰 등 모두 500여명의 구조대원과 헬기가 출동해 구조작업에 나섰다. 이날 사고로 66명이 사망했다. 당시까지 국내 항공사고 중 최대 참사였다. 1990년 7월 미국 보잉사가 제작한 사고 비행기는 아시아나항공사가 1992년 구입해 목포·울산·진주·예천 등 국내 4개 노선에 투입한 기종이었다. 너비 28.9m,길이 31m,높이 11.1m의 탑승 정원 127명인 소형항공기였다.

 

생존자들은 “우천으로 5분 동안 선회하다 착륙하겠다는 기내방송이 나온 뒤 10분 정도 날던 비행기가 다시 착륙하겠다는 방송과 함께 구름 아래로 내려가다 갑자기 위로 솟구치더니 ‘쾅’ 소리를 내고 추락했다”라고 증언했다. 정부합동조사반은 기장이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운거산(해발 1,063피트)을 넘은 것으로 착각해 비행고도를 정상(1,600피트)보다 훨씬 낮은 800피트까지 낮춰 일어난 사고라고 밝혔다. 



 


 


66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날 사고는 조종사  개인 실수 뿐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도 자리 잡고 있었다. 목포공항의 열악한 시설도 사고의 한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꼽았다. 1969년 문을 연 목포 공항의 활주로 길이는 다른 공항 활주로의 절반에도 못 미쳐 베테랑급 조종사들도 항공기 이착륙에 애를 먹었다. 김포, 제주, 김해, 대구 광주 공항 등의  평균 활주로 길이가 2700m∼3000m이었다. 반면 목포공항 활주로는 길이가 1500m로 짧았다. 또 한 쪽 방향밖에 사용할 수 없고, 자동 착륙 유도 장치와 계기착륙 장치도 설치되지 않은 낡은 비행장이었다. 여행객이 없어 1972년 한 차례 폐쇄됐다가 1992년 다시 문을 열었다. 다시 문을 열 당시 착륙 항로상에 해발 200m의 야산이 있어 안전성에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게다가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안개가 잦아 결항률 1위의 공항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새 공항을 짓기보다 목포공항을 다시 열면서 사고는 예견되었다.



 


 


낡은 공항 시설 뿐 아니라 조종사들의 근무환경도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비행안전을 고려해 항공기 승무원의 최대 승무시간을 교통부장관이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있었다. 하지만 하위법령인 시행규칙에선 기준을 항공사가 스스로 정해 교통부 인가를 받도록 했다. 항공업계에서 알아서 정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사는 조종사의 최대 승무시간을 월 90시간으로 정했다. 해외 유수 항공사 승무시간 규정도 90시간이나 100시간으로 잡는다. 그러나 노스웨스트, 일본항공, 싱가포르항공 등 다른 나라 조종사들의 월평균 승무시간은 65시간이었다. 반면 국내 항공사들은 성수기 때면 조종사들이 평균 80∼85시간씩의 ‘한계승무’에 가까운 비행을 해야 했다. 고강도 비행이었다. 사고 이후 아시아나측은 조종사들의 무리한 항공스케줄을 재정비해 비행시간을 단축시켰다. 목포공항도 2007년 무안국제공항이 문을 열면서 영구 폐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