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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재공파(遯齋公派)  선세고(先世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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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선세고(先世考)는 밀성박씨(密城朴氏) 돈재공파(遯齋公派) 1세 박연생(朴衍生)으로부터 그 7 세손까지의 세보(世譜)상 전해 오는 기록인데 서기1997년에 '밀성박씨 돈재공파' 종중에서 발간한 '종중요람(宗中要覽)'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 하였으며 내용에 현저한 착오가 있는 부분은 홈 운영자가 임으로 수정했거나 자료를 보충하였다.

 

      01세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연생(衍生)

 

문아(文雅)

 

현손(賢孫)

 

종원(宗元)

 

수온(守溫)

 

사영(士瑛)

 

성번(成蕃)

 

 

 

 

 

 

(遯 齋 公)

 

  

 

  

 

  

 

(河南處士公)  

 

사침(士琛)

 

상겸(尙謙)

 

 

 

 

 

 

 

 

  

 

  

 

  

 

  

 

(習讀公)↑

 

상효(尙孝)

 

 

 

 

 

 

 

 

  

 

  

 

  

 

  

 

사순(士珣)

 

상의(尙義) (栢友堂)

 

 

 

 

 

 

 

 

  

 

  

 

  

 

  

 

  

 

상지(尙智) (訥軒公)

 

 

 

 

 

 

 

 

  

 

  

 

  

 

수량(守良)

 

사우(思愚)

 

상경(尙敬) (鰲山)

 

 

 

 

 

 

 

 

  

 

  

 

  

 

 (貞惠公)

 

(淸節堂)

 

상근(尙謹) (閒適堂)

 

 

 

 

 

 

 

 

  

 

  

 

  

 

  

 

  

 

성남(成男)

 

 

 

 

 

 

 

 

  

 

  

 

  

 

  

 

  

 

상남(尙男)

 

 

 

 

 

 

 

 

  

 

  

 

  

 

  

 

사노(思魯)

 

상원(尙原) (松岩)

 

 

 

 

 

 

 

 

  

 

  

 

  

 

  

 

  

 

언복(彦福) (鶴山)

 

 

 

 

 

 

 

 

  

 

  

 

  

 

  

 

전      (全)

 

인호(仁虎)

 

 

 

 

 

 

 

 

  

 

  

 

  

 

  

 

  

 

정린(廷麟)

 

 

 

 

 

 

 

 

  

 

  

 

  

 

  

 

평      (平)

 

정인(廷燐)

 

 

 

 

 

 

 

 

  

 

  

 

  

 

  

 

효남(孝男)

 

  

 

 

 

 

 

 

 

 

  

 

  

 

  

 

  

 

숙남(叔男)

 

  

 

 

 

 

 

 

 

 

  

 

  

 

  

 

(木牛堂公)

 

종남(終男)

 

  

 

 

 

 

 

 

 

 

  

 

  

 

  

 

수공(守恭)

 

사운(思雲)

 

상남(尙男)

 

 

 

 

 

 

 

 

  

 

  

 

  

 

  

 

  

 

상겸(尙兼)

 

 

 

 

 

 

 

 

  

 

  

 

  

 

(四季堂公)

 

  

 

상묵(尙默)

 

 

 

 

 

 

 

 

  

 

  

 

  

 

수검(守儉)

 

영호(永浩)

 

평옥(平玉)

 

 

 

 

 

 

 

 

  

 

  

 

형종(亨宗)

 

수영(守影)

 

토거(土居)

 

  

 

 

 

 

 

 

 

 

  

 

  

 

  (秋溪公)

 

  

 

토검(土檢)

 

상례(尙禮)

 

 

 

 

 

 

 

 

  

 

  

 

  

 

수무(守武)

 

토량(土良)

 

상호(尙昊)

 

 

 

 

 

 

 

 

  

 

  

 

  

 

  

 

토찬(土贊)

 

상운(尙雲)

 

 

 

 

 

 

 

 

  

 

  

 

이종(李宗)

 

수영(守英)

 

개      (漑)

 

인제(仁悌)

 

 

 

 

 

 

 

 

  

 

  

 

  (盧亭公)

 

  

 

  

 

인효仁孝)

 

 

 

 

 

 

 

 

  

 

  

 

  

 

수웅(守雄)

 

운경(雲慶)

 

안국(安國)

 

 

 

 

 

 

 

 

  

 

  

 

  

 

  

 

운서(雲瑞)

 

광국(匡國)

 

 

 

 

 

 

 

 

  

 

  

 

 (普軒公)

 

  

 

운상(雲祥)

 

유봉(攸奉)

 

 

 

 

 

 

 

 

  

 

  

 

정종(貞宗)

 

맹손(孟孫)

 

명길(命吉)

 

계영(桂英)

 

 

 

 

 

 

 

 

  

 

  

 

계종(繼宗)

 

효손(孝孫)

 

반좌(潘佐)

 

순경(順敬)

 

 

 

 

 

 

 

 

  

 

귀손(貴孫)

 

  (野塘公)

 

  

 

  

 

 

 

 

 

 

 

 

      01세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박연생(朴衍生) <top>


박연생(朴衍生)은 휘덕명의 아드님이다. 호(號)는 돈재(遯齋)이니 지혜와 용력이 보통사람과 다르고, 늠늠한 자세와 높은 지조는 우러러 볼만하여 단종때 충무시위사 대호군(大護軍)으로 계실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위엄이 날로 높아지자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권람과 정인지등 모삿군이 수양의 처소를 드나들며 왕위에 오르기를 논의하였다.

 

공은 수양과 절친한 사이 이나 수양의 부르심을 거절, 남하 할 것을 결심하고 천첩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라 하시고, 고향 태인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장성 아치실로 옮긴 뒤, 다시 공은 독신으로 담양 월산 사위 이석손 집에 은신한 것이다.

수양이 1455년 왕위에 오르고 12월 27일 전지(傳旨)하기를 '대호군 박연생은 원종공신(原從功臣) 삼등(三等)에 녹(錄)한다' 드디어 교서(敎書)를 내렸으니 살펴보면,

 

“일자급(一資級)을 더해주고 자손은 음직(蔭職)을 받고 후세에까지 유죄[(宥罪)-죄를 지으면 그 죄를 너그러히 용서하는 것]한다.

공신 가운데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자손, 형제, 생질(조카), 사위,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원에 따라 산관[(散官)-자급만 받고 보직을 받지 못한 관리은 일자급을 더하여 주고, 죽은자에게는 각각 본등에 의하여 시행하고 일자급을 추증한다. 죄를 범하여 산관이 된자는 일자급을 더하여주어 서용(敍用)하며, 영구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자에게는 벼슬길에 통함을 허락한다.

고신(告身)을 거둔자는 돌려주고, 첩의 아들은 한품(限品)을 작용하지 말고, 공사천인(公私賤人)은 모두 천인을 면하게 하고, 사천(私賤)은 주인에게 공천(公賤)으로 보상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병든 몸이라 핑계하며 개관(改貫)하고 불취(不就)하니, 이때부터 우리는 태인박씨(泰仁朴氏)가 된 것이다.

 

<편집자 주(註)>

 

공(公)께서 태인박씨로 개관 한 이후, 1687년(숙종 13년 :丁卯)에 태인박씨(泰仁朴氏)  족보( 族譜)를 돈재공의 9세손 박행중(朴行重)의 서(序)로 처음 간행하였고, 이로부터 144년 뒤 정혜공(貞惠公) 휘(諱) 수량(守良) 9세손 박규혁(朴圭爀)등이 1831년 (순조 31 辛卯)에 밀성(密城)에서 태인(泰仁)으로 개관(改貫)한 것을 복관(復貫) 밀성(密城)한다는 상소문(上疏文)을 예조(禮曹)에 올려 답통을 받아 다시 밀성박씨가  되었다.

 

공(公)은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고 돌아가시니, 제사는 2월7일, 묘는 담양월산(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산 34번지 축좌(丑坐)이다. 배 숙부인(配 淑夫人)의 묘는 공(公)과 합폄(合窆)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과 동이열전(東吏列傳)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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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동직(東稷)이 지석(誌石)을 묻다. 9세손 매헌 행중(梅軒 行中)께서 사적을 적고, 수남 장흥 고석진(秀南 長興 高石鎭)선생이 사장(事狀)을 짓고, 세손 익찬(世孫 翊贊) 황윤석(黃胤錫)선생이 전(轉)을 쓰고,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선생은 묘갈(墓碣)을 썼다. 1934(甲戌)년에 재실을 담양 월산에 세우고 후손 한용(漢容), 균상(均庠)이 재기(齋記)를 썼다.

 

후손 동복(東福)의 특단의 관심과 노력으로 경주이씨 문중으로부터 선산을 되돌려 받고, 1971(辛亥)년에 전 종친의 힘으로 석봉(石封), 비갈명(碑碣銘), 문무석(文武石), 수석(獸石), 석등(石登)을 격에 맞게 단장하였다.

 

1833년(순조34 -癸巳)에 공(공)을 주벽(主壁)으로 교리(校理) 김개(金漑) 두분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유회(儒會)의 결의에 따라 수산사(水山祠)가 장성 황룡 수산리에 창건되고,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선생의 상양문과 축문, 부사 홍영섭(府使  洪永燮)의 예성문이 있다.

 

1868년(고종6 戊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西院撤廢令)에 훼철된 수산사(水山祠)를 1979년(己未) 사론(士論)에 따라 장성 황용 신호리 302-2에 복설(復設)하고, 아곡 박수양(莪谷 朴守良), 백우당 박상의(栢友堂 朴尙義), 눌헌 박상지(訥軒 朴尙智),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1986년(丙寅)에 돈암 박자온(遯庵 朴自溫)을 다시 추배하니,  황주 변시연(黃州 邊時淵)의 예성문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이 기록되었다.

본사복설(本祠復設)에는 후손 래열(後孫 來說)의 공헌이 다대(多大)하고, 순보씨(順甫氏)와 일구씨(鎰求氏)의 숨은 공 또한 적지않다.


박문아(朴文雅) <top>


박문아(朴文雅)는 돈재공(遯齋公) 연생(衍生)의 아들이다. 조선 성종때 어모장군(禦侮將軍)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승지(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다. 묘(墓)는 삼층계(三層階) 계좌(癸坐)이며, 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과 합폄(合窆)이고 기(忌)는4월 29일이다. 돈재공의 여(女)는 경주이씨(慶州李氏)에 출가하니. 사위 이석손(李碩孫)의 자(字)는 사언(士彦)이요 호(號)는 돈암(遯庵)이다.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단종이 손위하자 장인(돈재공)과 함께 담양 월산에 은거 숙종때 월산사(月山祠)에 제향(祭享)하다.

(문헌)세보고 (世譜考)


박현손(朴賢孫) <top>


박현손(朴賢孫)은 선약장군(宣略將軍),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 의금부사(同知 義禁府事)이다. 기(忌)는 1월 17일, 묘(墓)는 선고(先考)밑 계좌(癸坐)에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와 합부(合)이다.

옛 석물이 낡어 후손(後孫) 재일 장복씨(在日 章福氏)의 남다른 위선하는 마음으로 문아, 현손(文雅, 賢孫) 이대조(二代祖)의 묘역(墓域)을 품계에 맞게 단장하고 묘비를 세우니, 황주 변시연(黃州 邊時淵)의글과, 광산 이병현(光山 李炳玹)글씨이다.

현손(賢孫)의 동생 귀손(貴孫)은 참봉(參奉)으로 본손은 없고 외손(外孫)이 번창하였으니 사위 김환(金丸)은 본(本)이 울산(蔚山)이요, 아들은 김영(金齡), 김기(金耆), 김질(金)이다.

(문헌)세보고 (世譜考)


박종원(朴宗元) <top>

 

휘 종원(諱 宗元)은 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 현손(賢孫)의 오남중(五男中)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자간(子幹)이오, 차자(次子) 수량(守良)의 귀(貴)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이다. 공(公)은 5남1여를 두고 1527년(중종22- 丁亥  3월25일) 졸(卒)하시니, 묘(墓)는 호산서 백모등 간좌(艮坐)이다. 배 정부인 이씨(配 貞夫人 李氏)는 1542년(중종 37년 3월 20일) 돌아가시니 공의 묘위 간좌(艮坐)이다. 지석(誌石)을 묻고 비상망석(碑床望石)이 있다.

문헌(세보고) (世譜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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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변시연(黃州 邊時淵)이 지은 묘표명에 “ 공(公)께서 산림속에 살면서 비록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의리로서 아들을 가르쳐 돌아가신 뒷날까지 영화를 누리시니 넉넉히 한 집안의 명조(名祖)가 되실만한 분이다. 이분 묘 앞에 지나는 사람 뉘 감히 공경하지 않으리오. 이와 같은 말을 기록하여 뒷세상에 알리고저 한다.

 끝으로 명하기를 호남의 밀성박씨는 아치실이 최고로다.  이분의 큰 덕망을 자손들이여 잊을손가!   이 사적을 돌에 새겼으니 백세토록 걱정마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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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네분은 뒤에 자세히 기록하고자 한다. 딸은 금성(錦城) 박문(朴門)으로 출가(出嫁하니, 진사(進士) 박신구(朴信柩)는 사위요, 진사(進士) 박서란(朴瑞鸞), 문도사 박서봉(文都事 朴瑞鳳)은 외손이다.

공(公)의 오형제손(五兄第孫)과 아들 사형제손(四兄第孫)은 한결같이 마음을 모아, 1992년 12월에 밀성박씨돈재공파종회(密城朴氏遯齋公派宗會)라 이름하고 행의청심(行義淸心)의 종훈(宗訓)아래 대동단결(大同團結)하고 있음은 조상(祖上)에 대한 부끄러움을 덜어주는 일이라 하겠다.

문헌(세보고) (世譜考)


하남처사공(河南處士公) <top>


하남공(河南公) 수온(守溫)은 자(字)가 군직(君直)이오, 하남처사(河南處士)는 호(號)이다. 부(父)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증직(贈職)하신 종원(宗元)과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4남1여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공(公)은 선천적으로 품행이 단정(端正)하고 아담하며 총명한 지혜가 과인(過人)하여 일찍 학문에 나아가 경전에 통달하여 선교랑(宣敎郞) 경기전(慶基殿) 령(令)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이름이 널리 세상에 드러남을 바라지 아니하고 림천(林泉)에 묻혀 몸을 닦으며 학문에 전념하고 감지봉양(甘旨奉養)하며 형재우애로써 분수 지키는 것을 천명으로 여기니 송북(宋北)의 사마광(司馬光)에 다름이 없다하였다.

 

동생 수양(守良)이 재기가 비범하여 장차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 될것임을 굳게 믿고, 수학(修學)의 길을 돕고 서자(書資)를 제공,   형설(螢雪)의 공을 세우니 동생 수량은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에 이르고,   청백리(淸白璃)에 피선되고, 시(諡) 정혜(貞惠)이니 공(公)의 성력 뉘 아름답다 하지 않으리!.

 

배 의인 담양전씨(配 宜人 潭陽 田氏)와 3남1여를 두니 장방 휘 사영(長房 諱 士瑛), 차방 사침(次房 士琛), 삼방 사순(三房 士珣)과 1여[선산인(善山人) 유연개(柳沿漑)에 출가]이다.

 

공(公)과 배(配)의 기(忌)는 8월12일과 7월6일이다. 묘(墓)는 증조고(曾祖考) 승지공조(承旨公兆) 왼쪽 계좌(癸坐)이며, 지석(誌石)이 묻히고 비망주석(碑望柱石)이 있다.   7대손 생원 봉장(生員 鳳章)이 묘지(墓誌)를 묻다.   배(配)와 합부(合祔 )이다. 석물(石物)이 오래되어 14세손 인천부인(仁天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세운 묘표명비(墓表銘碑)는 성균관(成均館) 총무처장(總務處長) 진주 강정희(晋州 姜程熙)가 글을 짓고 썼다.

 

하남처사(河南處士) 휘 수온(諱 守溫)의

장방 사영(長房 士瑛)은 자(字)가 덕윤(德潤)인데 뒤가 끊기고

 

차방 사침(次房 士琛)은 자(字)는 도윤(道潤)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訓鍊院) 습독(習讀)이다. 공(公)의 떳떳한 말씀과 행실(行實)이 대수(代數)가 멀어 알기가 어려우나, 하서(河西), 미암(眉巖) 두선생과 척분(戚分)이 되고 사의(査誼)가 되어 서로 멀지 아니한즉, 공(公)께서는 기문(其門)에 출입(出入)하였으니 반듯이 훈도[(薰陶)-덕으로써 남을 가르쳐 감화시킴]가 없지는 아니 할 것이다.

(문헌) 세보. 오산 및 호남지고 (世譜. 鰲山 및 湖南誌考)


습독공 사침(習讀公 士琛) <top>


공(公)의 기(忌)는 12월22일, 묘는 선조하(先祖下) 천상등 계좌(泉上嶝 癸坐)이고, 배 숙인 박씨(配 淑人 朴氏)와 합부(合祔)하고, 서기 1984년 (甲子)에 15세 종손(宗孫) 래영(來濚)의 주간하(主幹下)에 공(公)을 파조(派祖)로 밀성박씨습독공파세보(密城朴氏習讀公派世譜)를 펴고 옛것 옆에 상망석(床望石)과 묘표명비(墓表銘碑)가 서 있으니 황주 변시연씨(黃州 邊時淵씨)의 글과 광산 이병현(光山 李炳玹)의 글씨이다.

 

                큰 아들 상겸(尙謙)은 자(字)가 백개(伯盖)이다. 수(壽)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상]의 증(贈)이요, 차자(次子) 윤부(允溥)의 충공(忠功)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를 증직(贈職) 받았다. 배 숙부인(配 淑夫人) 김씨(金氏)는 9월9일 졸하다. 묘는 호산남록 자좌(狐山南麓 子坐)로 합폄(合窆)이며 망상석(望床石)이 있다.

 

                    휘 사침(諱 士琛)의

                둘째아들 상효(尙孝)는 자(字)가 인화(仁花)이고 서기 1555년(명종11 乙卯)에 출생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로 1614년(광해7 甲寅) 5월6일 졸하니 배 의인 광산김씨 진경여(配 宜人 光山金氏 振慶女)와 일남을 두고, 묘는 장성 남면 녹진동 후(後) 해좌 쌍봉(亥坐 雙封)이다.

여(女)는 문과(文科)한 김담(金湛)의 처로  아들 김여중(金汝重)은 문과(文科)에 김덕룡(金德龍)은 무과(武科)에 합격(合格)했다.

 

하남처사(河南處士) 휘 수온(諱 守溫)의

삼방 사순(三房 士珣)은 자가 옥윤(玉潤)이다. 관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기(忌)는 5월8일, 묘(墓)는 장성 북상 용문동 혹(或)은 수복(水洑) 또는 도곡 한주봉(道谷 閒柱峰)밑 정좌(丁坐)로, 지석(誌石)을 묻고 비(碑)와 망주상석(望柱床石)을 세웠다. 배 숙인 연일오씨(配 淑人 延日吳氏) 세심(世諶)의 딸과 2남 2녀를 두니 묘는 공과 합부(合祔)다.

 

                     휘 사순(諱 士珣)의                   

                     일남 휘 상의(諱 尙義)는 자가 의보(의보)요 백우당(栢友堂)은 호(호)이다. 1538년(중종33-무술) 7월4일 장성 황룡 아곡 보룡산기슭 하남에서 태어났다. 공이 어릴적 거리에서 놀 때 어떤사람이 보고 공의 용모와 행동이 기이(奇異)하다며, '훗날 천하(天下)에 이름을 낼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그뒤에 진원(珍原)고을 생원 박원순(生員 朴元恂)이라는 분에게 공부(工夫)할 때, 총명한 재주가 보통사람과 달라 날마다 삼백여줄의 글을 외우며 동문생(同門生) 변망암(邊望菴)과  여러 학우들이 복종하지 아니함이 없더라 하였다. <top>

 

공은 선비되기를 싫어하고 자신(自身)이 고금상수책(古今象數冊)에 관심을 두어 공부(工夫)하니 사람들이 소강절선생(邵康節先生)이라 하였으며 더욱 청결한 지조로 가산(家産)에 욕심이 없었다. 동생 상지(尙智)와 우애가 돈독하여, 분가(分家)하는때 좋은 논밭과 건강한 종들을 동생에게 돌려 보내고, 동생은 조카가 장성(長成)하니 옥토(玉土)를 돌려 주었다. (오늘날) 부모(父母)의 전답(田畓)을 형제간(兄第間)에 송사함은 무슨 이치란 말인가?

 

공의 이름은(공의 이름에 대하여 말하자면 ),    임란(壬亂)이 되어 중국(中國) 장수 양호(楊鎬)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당신 나라에 '청의(靑衣)입은 적(賊)이 동대문(東大門)으로 들어오리라'고 예언(豫言)한 사람이 누구인지 만나 보았는지요?" 하자 이 공(李 公)이 수소문하여 공을 만나 보았다. 공께서 몇 년전에 그런말을 하였으나 공의 말씀을 믿어주지 아니하여 이때야 비로소 공의 말씀에 탄복하게 되었다.

 

양호(楊鎬)장군이 공(公)의 언론(言論)에 크게 기뻐하며 군중(軍中)에 모시고 모든 행사(行事)를 공에게 물어 결정(決定)하였는데, 어느날 군대(軍隊)가 출전(出戰)하려 할때 공중(空中)에서 솔개가 날아간 것을 보고, 징조를 물은즉 대답하기를 '이(利)와 불리(不利)함이 없다' 하시니 과연 공의 말씀데로 되었다. 양(楊)장군이 더욱 기이(奇異)하다고 칭찬하자 그때부터 지리학술(地理學術)이 더욱 알려져 대신(大臣)들 까지도 공의 학술을 사용하여 신(神)이나 다름없다 하였다.

 

이 월사(李 月沙) 정승이 최초(최초)에 공을 알아 보시고 추천하여 1598년(선조32  戊戌)에 사재감 주부(司宰監 主簿)에 임명되고, 1617년(광해10 丁巳)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讓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top>

1621년(광해14 辛亥) 2월6일 고향땅 초가집에서 돌아 가시니, 향년(享年)은 팔십사세며 공께서 점(占)하신 장성읍 북쪽 용문동(龍門洞)마을 선산 계좌(癸坐)에 장사하였다.

지석(誌石)을 뭍고 비망주상석(碑望柱床石)이 세워졌다. 송암(松岩) 기정익(奇珽翼)께서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이재익찬(齋翊贊) 황윤석(黃胤錫)선생이 전(傳)을 기술(記述)하고, 매헌(梅軒) 행중(行重)께서 사적(事蹟)을 기록(記錄)했다.

장성 수산사(長城 水山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숙부인(淑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부호군(副護軍)의 딸이요 하원군(河源君) 문절공(文節公) 충현(忠玄)의 손녀(孫女)로 기(忌)가 9월15일 묘는 공과 합부(合祔)이다.

(문헌) 세보(世譜), 선조실록(宣祖實錄)


                   휘 사순(諱 士珣)의

                   이남 휘 상지(諱 尙智)는 자가 (簡叔)이오 눌헌(訥軒)은 아호(雅號)이다.

공은 1543년(중종38 癸卯)에 장성땅 아치실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하서,우계(河西,牛溪) 양 선생 문하(門下)에서 변망암(邊望庵), 기금강(奇金江)과 진사 서태수(進士 徐台壽)와 교유(交遊)하고, 벼슬은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에서 예빈시(禮賓寺) 제검(提檢)에 이르렀다.

공게서는 성리철학(性理哲學), 사서(史書)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글을 연구(硏究)하여 난의(難疑)한 곳을 문답(問答)할 때 마다 사우(師友)들이 공의 깊은 공부(工夫)에 칭찬 하였다. 공이 저술(著述)한 경훈편(競訓編)과 외신록(外身錄)은 후인(後人)들의 지표(指標)가 될만한 책인데 난리속에서 잃어 버렸다.  

 

형제간(兄第簡)의 우애(友愛)가 독실(篤實)하여, 형과 고락을 같이하고 형으로부터 받은 논과밭을 조카에게 돌려주니, 주위에서 사리에 밝은 일이라 하였다. 이러한 아름다운 행실(行實)이 유미암 선생(柳眉巖 先生)의 일기(日記)와 황이재 선생(黃齋 先生)의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되었다.

공은 1587년(선조21 丁亥) 6월16일 돌아가시니, 묘소(墓所)는 선산(先山) 백목등 자좌(栢木嶝 子坐)이며 비(碑)와 망주상석(望柱床石)이 세워있다.

 

장성(長城) 수산사(水山祠)에 배향(配享)됨. 배 의인(配 宜人) 풍산홍씨(豊山洪氏)는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 연(連)의 딸로 기(忌)는 9월17일이며, 배 의인(配 宜人) 광산정씨(光山鄭氏)는 예판 계준(禮判 季俊)의 여(女)인데 공과 합폄(合窆)이고, 전배 홍씨 묘(前配 洪氏 墓)는 재우(在右)이다.

(문헌)세보(世譜) <top>


정혜공(貞惠公)

 

公의 휘(諱)수량[(守良) -1491~1554]은 자가 군수(君遂)요 호는 아곡(莪谷)이며 정혜(貞惠)는 시호(諡號)이다.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휘 종원(諱 宗元)과 증 정부인 이씨(贈 貞夫人 李氏)와의 사이에서 2남으로 전남 장성 황룡 아곡에서 태어나, 고향의 학자 김개(金漑)에게 배우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지평(持平), 헌납(獻納), 장영(掌令)을 역임(하고),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지방관아를 순시중 안원보(安原堡) 권관(權管)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로 기용되어 찰리사(察理使)를 겸했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 전위사(錢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했으며 함경도 관찰사, 4조[(四曹)-형,공,호,례(刑,工,戶,禮)]판서와 한성판윤(漢城判尹),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除授)되어, 중종(中宗),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오위도총관(五衛都總官)을 거쳐 지경연(知經筵),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좌우참찬(左右參贊)에 승임(陞任) 하였다.

- 주(註) : 나주목사에 기용되어 찰리사를 겸했다는 내용은 인명사전, 백과사전, 국어대사전,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등에 나타나 있으나 중종실록을 확인한 결과 사실무근이니 참고바랍니다.

노모의 봉양을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한해(旱害)로 흉흉한 인심을 진무(鎭撫)케 하기 위하여 전라도 관찰사에 전직되고 노모를 봉양하다가 다시 우참찬(右參贊)에 재임됐다.

公은 학자로서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청백리(淸白吏)로서 이름 높은 주세붕(周世鵬)과 이황(李滉)과도 교류하면서 정논(政論)을 나누기도 하였다.

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재임중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손들에게 자기를 고향에 묻혀 두되 묘를 작게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公의 부음(訃音)을 들은 명종은 "청백한 사람이 죽었으니 대단히 슬프다"면서 사람을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또한 가정형편상 고향으로 운상할 비용이 없다는 보고를 접하고 모든 비용을 마련해주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예장(禮葬)으로 모시게 되었고 생전에 공적을 칭찬하는데 말로 다 할 수 없다하여 백비(白碑)를 하사하게 된 것이다. 이 백비(白碑)는 공(公)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하겠다.

공(公)의 인품(人品)이 신중하고 치밀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했을 때 예를 다하였고, 시묘할 때 묘려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제사는 재계하여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관에 있을 때 선정을 다하여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벼슬 38년에 귀(貴)가 경상(卿相)에 이르렀으나 좋은 집한 채 없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문헌)중(中), 인(仁), 명종실록(明宗實錄), 인물고(人物考) [국조] 등 <top>

 

공(公)은 통정대부 부사직 유옥로(庾玉輅)의 딸 정부인 유씨(貞夫人 庾氏)와 이남(二男)을 두었다.

묘(墓)는 장성 금호산 선영밑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비위(位)와 합부(合祔)이다. 호남(湖南)의 거유(巨儒) 김인후 선생(金麟厚 先生)이 글을 지어 세운 묘지명(墓誌銘)은 백비[(白碑)-지방문화제 201호] 우측(右側)에 서 있고, 문인석(文人石), 망주상석(望柱床石)이 넓은 벌 안에 있고 묘는 둘레석으로 말끔히 단장되었다. 은진 송병선 선생(恩津 宋秉璿 先生)이 짓고 월성 최익현 선생(月城 崔益鉉 先生)의 서(書)와 완산 이용원 선생(完山 李容元 先生)이 전자(篆字)를 쓴 신도비(神道碑)는 호산재(狐産齎) 입구(入口) 길옆에 세워져있다.

 

시장(諡狀)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의정부겸(議政府兼)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이며 이병모(李秉模)께서 썼다. 공(公)은 모암서원(慕巖書院)과 수산사(水山祠)에 배향(配享)되고, 청백당(廳白堂)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시고 있다. 지금도 장성 하남에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그 옆에 하마석(下馬石)이 마멸되지 않고 옛 자취를 알리고 있다.

명종(明宗)께서 하사(下賜)한 백비(白碑)를 제외한 앵무배와 호박갓끝은 청백당(淸白堂)에 소장 되었으나 나머지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전해오지 못하니 슬프고도 슬픈 일이도다.   우리의 문중을 빛내주신 선조의 유업을 받들어 길이 길이 이어 나갈 것을 약속드리는 바다.

 

<편집자 주(註)>

 

* 부조묘(不祧廟) - 나라에 공훈을 세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특전[(特典)-부조지전(不之典)]으로 건립한 사당.

* 유허비(遺墟碑) - 옛 인물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이를 계기로 하여 당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 여기서 유허란 '옛터' 또는 '남긴 터'의 뜻으로 옛 어른이 태어났거나 살았고, 또는 임시로 머물렀거나 순절하였던 곳을 말함.

* 하마석(下馬石) - 하마비(下馬碑)를 말하는데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를 새긴 비.

보통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겼음.


 

정혜공(貞惠公)의

 

큰아들 사우(思愚)는 자(字)가 중민(仲敏)이오 청절당(淸節堂)은 호(號)이다. <top>

1520년(중종一15 庚辰) 5월 20일 장성 하남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미암 유문절(眉巖 柳文節), 두 선생과 뒤에는 종자매(從 姊妹)인 진사 서태수(徐台壽)와 금강 기효간(錦江 奇孝諫)과 교유하고, 1546년(명종2 - 丙午)에 진사에 입문(入文), 장예원(掌隸院) 사평(司評)에서 의금부도사(義金府都事 : 종5품)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진안현감(行 鎭安縣監)을 지냈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삼년의 시묘를 끝낸 뒤, 시(詩)를 짓고 마음을 달랬다. 초계(草溪) 정진사 종호(宗護)의 딸과 4남을 두고 1579년(선조 13- 己卯)에 돌아가시니, 묘(墓)는 승지공[(承旨公)-문아(文雅)] 우상(右上) 계좌(癸坐)이고 표석(表石)과 상망석(床望石)이 있다.

배(配)는 10월19일 졸하니 묘(墓)는 청룡등(靑龍嶝) 길위 임좌(壬坐)이다. 후손 선옥, 래욱(善玉, 來昱)의 열성으로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를 모시면서 새로히 망주상석(望柱床石)을 놓고 묘표명비(墓表銘碑)를 세우니 15대 사손(嗣孫) 종현(鐘鉉)의 글과 본손(本孫) 래해(來海)의 글씨로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사우(思愚)의

 

                장방(長房) 상경(尙敬)은 자(字)가 이효(以孝)요 호(號)는 오산(鰲山)이다. <top>

1540년(중종 35-경자)에 태어났다. 정송강(鄭松江)과 사귀고 경학(經學)이 높아 제용감(濟用監) 참봉에 제수되고, 장락원(掌樂院) 전락(典樂), 낙안도찰방(樂安道察訪)을 맡고 창평현령(昌平縣令) 재임시(在任時), 임란(壬亂)때 창의(倡義)하여 곰재에 나가 전공(戰功)을 세우고, 곽충익공(郭忠翼公) 막하(幕下)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순절(殉節)하니, 제사는 10월 12일이다. 웅치일기(熊峙日記) 및 설산동맹록(雪山同盟錄)에 나타났다. 묘는 함평 나산 연대산 정좌(丁挫)이고 비(碑)와 망상석(望床石)이 있다. 방손 봉구(鳳求)가 행장(行狀)을 짓고 참판 신좌균(參判 申佐均)이 묘갈(墓碣)을 지었다.

배 숙인(配 淑人) 창령조씨(昌寧曺氏)는 무육(無肉)하고 기(忌)는 정월 11일, 묘(墓)는 공(公)과 합부(合)이다. 배 숙인(配 淑人)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봉사 장해(奉事 長海)의 딸로 제사는 10월15일, 묘는 공(公)의 아래이다. 차배(次配)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만 기록(記錄)되어 있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사우(思愚)의

 

              차방 상근(次房 尙謹)은 자(字)가 이신(而信)이요, 한적당(閒適堂)은 호(號)이다. 서기1543년(중종 38-癸卯) 12월 15일에 태어나 김하서(金河西), 유미암(柳眉巖) 두 선생 문하에서 글을 읽어,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을 거처 진주진관(晉州鎭官) 병마(兵馬) 첨절제사(僉節制使) 겸 통훈대부 행 거창부사(通訓大夫 行 居昌府事)를 지냈다.

공(公)은 씩씩한 기상과 굽힘이 없는 기절에 체격이 크고 육중하며 성격이 정민(精敏)하여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다.

 

오래되지 않은 거관생활(居官生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임천(林川)에 뭍이니 향년(享年) 78세다. 묘(墓)는 장성 북이면(北二面) 내동안산(內洞安山) 정좌(丁坐)로 망주상석(望柱床石)이 있다.

배 숙부인(配 淑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부장 정준(部將 廷俊)의 딸로 묘(墓)가 선비조(先兆) 북변(北邊)에 임좌(壬坐)이며 상(床)이 있다. 1992년 2월에 후손(後孫) 선옥(善玉)과 래욱(來昱)의 배려로 할아버지 내외분을 함께 모시고 묘표명(墓表銘 를 세웠다. 글은 14대 사손 종현(嗣孫鐘鉉)이 짓고 후예 래해(後裔 來海)가 글씨를 썼다. <top>

 

삼가 살피건데 서기 1602년(선조 36 -임인) 3월9일 선조(先祖)의 문적(文蹟) 및 관교[(官敎)-교지(敎旨)]를 아울러 서실[(閪失)-물건을 잃어버림]하였다. 公은 창평(昌平) 에 계실 때 복거창평(卜居昌平)하고 일찍 벼슬을 사의(辭意), 외택(外宅) 기지(基地)에 집을 짓고 당명(堂名)을 한적(閒適)이라 했다. 갑짝스러운 임란(壬亂)으로 인하여 선세(先世)의 문헌(文獻)이 불에 타 없어지니, 참판공[(參判公)-휘 현손(諱 賢孫)]이상은 관계(官階), 배위(配位), 생졸(生卒)이 무전(無傳)함을 애석하게 여기며, 정혜공[(貞惠公)-수량(守良)] 이하 종통(宗統)을 이어 종현 가(鐘鉉 家)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문헌) 왕조실록(王朝實錄) 및 세보고(世譜考)


사우(思愚)의

 

                삼방(三房) 성남(成男)은 자(字)가 사윤(士胤)이다. 서기 1550년(명종 6-庚戌)생으로 벼슬이 통선랑(通善郞)이다. 1593년(선조 27-癸巳)에 졸(卒)하니 묘(墓)는 선조하(先祖下)이며, 배 공인(配 恭人) 평산신씨(平山申氏) 홍여(鴻女)의 묘(墓)는 공(公)과 합부(合祔)이다.

 

사우(思愚)의

                사방(四房) 상남(商男)은 자(字)가 사순(士淳)이다.

 

정혜공(貞惠公)의

 

둘째 사노(思魯)는 자(字)가 경한(慶閒)이다.

서기 1526년(중종21-丙戌 )에 출생하여 벼슬이 풍저창(豊儲倉) 봉사(奉事)에 이르다. 1592년(선조 26- 壬辰 )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67세이다. 배 단인(配 端人) 장성서씨 진사 우영(禹寧)의 딸과 2남을 두고 돌아가시니, 공(公)의 묘는 고창 심원 연화리 서당동 묘좌(卯坐)로 배와 합장 되고 망주상석(望柱床石)이 있다.

 

정혜공(貞惠公)의

 

셋째 아들 전(全)은 벼슬이 통훈대부 행 혜민서(通訓大夫 行 惠民署) 주부(主簿)이다.

배(配)는 숙인(淑人) 완산이씨(完山李氏)며, 묘(墓)는 호산세곡(狐山細谷) 쌍분(雙墳)이며 망주상석(望柱床石)을 세웠다.

넷째 평(平), 다섯째 효남(孝男), 여섯째 숙남(淑男), 일곱째 종남(終男)은 모두 함경도 단천(端川)에 산다 一女는 박거(朴渠)이다.

(문헌)세보고(世譜考) <top>

 

(貞惠公의 둘째아들)사노(思魯)

 

                 장남(長男) 상원(尙源)은 초휘(初諱)가 언원(彦源)이고 자(字)는 장신(壯信)이며, 호(號)는 송암(松岩)이다. 1545(명종 원년- 乙巳 )에 생(生)하여 1596(선조 30- 丙申)에 졸(卒)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한옥(漢玉)의 딸이다. 묘(墓)는 고창 심원 서당동 묘좌(卯坐)로 공(公)과 합부(合祔)이다.

(문헌)세보고 世譜考)

 

(貞惠公의 둘째아들)사노(四魯)의

 

                  차(次)의 휘(諱)는 언복(彦福)이오, 자(字)는 이겸(而謙)이며, 호(號)는 학산(鶴山) 또는 동하(東河)이다. 1550년(명종 6-庚戌) 정월 20일 출생하여, 14세<만 나이>때 밀양 신기동으로 이거한 뒤 다시 울산 사방동으로 옮겼다.

1571년(선조 5-申未)에 무과에 등용되고, 1584년(선조 18 甲申)에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訓鍊院) 첨정(僉定)에 이르다.

일찍이 충의(忠義)를 마음과 행동으로 경계하며 스스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기를 일삼아왔다.

갑자기 임란(壬亂)을 당하니 아들 인립(仁立)과 전판관 김득례(前判官 金得禮)와 더불어 솔선의병을 일으켜 기공(奇功)을 세우고 마침내 7월 10일 울산대교(蔚山大橋)의 전투에서 나이 43세에 순절(殉節)하니 선무원종 삼등(宣武原從 三等)에 녹(錄)했다. <top>

 

1839년(헌종 6-己亥)에 도유(道儒)의 상서(上書)에,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贈)하고, 1862년(철종 13-壬戌)에 또, 도유(道儒)의 상언(上言)에 증 자헌대부(贈 字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에 가증되셨다. 승지 이진상(承旨 李晋祥), 경어 김판서(頃漁 金判書) 병국(炳國)이 황고유문(黃告由文)을 짓고 불사르다.

 

묘(墓)는 울산 온산면(蔚山  溫山面) 대정리(大亭里) 복내촌(伏內村) 앞 간좌(艮坐)이고, 배 정경부인(配 貞敬夫人) 청하이씨(靑河李氏)와 합분(合墳)이며 상석(床石)이다. <후에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상남리 산14번지에 있는 아들 인립의 묘 옆으로 로 이묘 함>

6대손  삼내헌(三耐軒) 참봉 사현(參奉 思賢)이 유사(遺事)를 술(述)하고, 현령 김홍운(顯令 金洪運)이 술전(述傳)하다. 성암 최세학(惺岩 崔世鶴)이 묘갈(墓碣)을 기록하고, 초노 이석정(草盧 李錫井)이 묘지(墓誌)를 짓고, 수헌 최 부정자 현필(修軒 崔 副正字 鉉弼)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10대손 기태,병근(基泰,炳瑾)이 양세(兩世-언복, 인립 부자)의 충효록(忠孝錄)을 발간(發刊)하여 세상에 알리다. 울산(蔚山) 언양읍지(言陽邑誌)에 자세(仔細)히 실려있다.

1840년(헌종 7-庚子)에, 언양(彦陽)에 반곡사(盤谷祠)를 창건(創建) 후손 호상(湖上), 진기(震琦)가 상량문(上樑文)을 짓고, 동래(東萊) 정택승(鄭宅升)이 (常享祝文)을 지었다. 1868년 국가령(國家令)에 따라 (반곡사가)훼철(毁撤)되었는데, 20년 뒤 8대손 재원(在源), 재영(在 韺)의 노력(努力)으로 사우(祠宇)가 언양(彦陽) 길천(吉川)에 중건(重建)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1년에 울산군수가 세운 학산(鶴山), 청수헌(聽水軒), 밀양박공 양대 충효비(密陽朴公 兩代 忠孝碑)와 울산군 공보실장이 세운 학산(鶴山) 청수헌(聽水軒) 밀양박공 양세 충효 추모비(密陽朴公 兩世 忠孝 追慕碑)가 상현문(尙賢門)앞에 나란히 서 있다. <top>

 

                  언복(彦福)의

 

              아들 인립(仁立)은 자(字)가 사행(士行)이요. 호(號)가 청수헌(聽水軒)이며 서기 1564년(명종19년-甲子)에 생(生)하여, 1590년(선조24 -庚寅)에 등무과(等武科)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訓鍊院) 정(正)에 이르렀다.   평소 충효(忠孝)에 자허(自許)하고 용맹이 만부(萬夫)를 가히 당 할 만했다.  임난(壬亂)을 당하여 아버지(언복)를 따라 (왜적을)토벌 하고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 대천제(大川提) 밑에서 수 백명의 적을 치고 30여 곳에 창을 맞아 순절(殉節)하니 나이 29세였다.

 

동향 의사(同鄕 義士) 전응충(全應忠), 김흡(金洽), 박손(朴孫)은 편암(遍岩)에 장례(葬禮)하고, 막부(幕府)에 글을 올려 선무원종(宣武原從)  일등(一等)에  녹(錄)했다.

 

1839년(헌종 6-己亥)에 도유(道儒)의 상언(上言)하여 이듬해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시고, 이어 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고, [공(公)께서] 자기(自己)를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와  효(孝)로 (젊은)날을 보내니(보내신데 대하여), 계해(계해-1863)에 또 증자헌대부(贈 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이 되셨다.

승지 이진상(承旨 李晋祥), 경어 김판서(頃漁 金判書) 병국(炳國)이 황고유문(黃告由文)을 짓고 불에 태웠다.

 

묘(墓)- 울산군(蔚山郡)  청양면(靑良面) 상남리(上南里) 대천제(大川堤)아래 자좌(子坐)이고, 배(配) 증 정경부인 언양김씨(贈 貞敬夫人 彦陽金氏)는 오미(五美)의 딸로 묘가 공(公)과 쌍분(雙墳)이며 상석(床石)이 있다. <후에 언양김씨와 합폄 됨 >

9대손 기태(基泰)는 유사(遺事)를 술(述)하고 단산 김상우(丹山 金相宇)는 행장(行狀)을 기록하고, 후송 이정효(後孫 李廷孝)는 묘갈(墓碣)을 짓고, 문암 손후익(文岩 孫厚翼)은 묘지(墓誌)를 짓고, 수헌 최 부정자 현필(修軒 崔 副正字 鉉弼)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공(公)은 충효사(忠孝祠)에 배향(配享)되고 울산 언양지(蔚山 彦陽誌)에 실려있다. <top>


목우당공(木友堂公)


박수공(朴守恭)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贈)한 종원(宗元)의 셋째 아드님이다. 목우당(牧友堂)은 호(號)이니 벼슬은 참봉(參奉)으로 보서(譜書)에 가선대부(嘉善大夫)라 밝히고 (있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심경(心經)에 잠심(潛心)하고 예경에 깊은 연구가 있었는데 명리(名利)에 뜻을 아니두고 악선(樂善)하고 호의(好義)하니 독행군자(篤行君子)의 칭이 있었다.

 

<편집자 주(註)>

 

공(公)께서 하신 벼슬 참봉,은 조선시대의 종9품 벼슬로 원() ·능전(殿) 및 사옹원() ·내의원() ·예빈시() ·군기시() ·군자감() ·소격서() 등 많은 관서에 속해 있었던 관직이다. 벼슬이 침봉이라면 픔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가 아니라 장사랑(將仕郞)이요, 외명부  배(配)의 품계는 유인(儒人)이니 차후 확인을 요한다.

 

공(公)은 1500년(연산 4-庚申)에 생(生)하고 1561년명종 17- 辛酉) 10월 15일 졸(卒)하니, 묘(墓)는 도선산(都先山)밑 목과등 간좌(艮坐)이다.

1976년 2월에 후손(後孫) 균환(均煥)과 균태(均泰)의 모선지성(慕先之誠)으로 문노(門老)의 뜻과 종중회의(宗中會議)에 따라, 영광(靈光) 염산 한우산 병오용 해좌원(寒牛山 丙午龍 亥坐原)으로 이묘(移墓)하였다. 방손(傍孫) 일구(鎰求)가 찬(撰)한 묘갈(墓碣)이 있다.

 

                 아들 사운(思雲)은 자(字)가 호민(浩敏)이고 신헌(愼軒)은 호(號)이니, 관(官)은 선원각(璿源閣) 참봉(參奉)이다. 세상이 어지러지자 걱정하는 끝에 영광 서한 우산의 양지에 자리잡고 금서(琴書)를 즐기고 끝까지 이름알리기를 싫어하며 두문불출하고 세상을 마치니, 배 의인 광산김씨(配 宜人 光山金氏)와 한우산 병진용 건좌 쌍봉(丙辰龍 乾坐 雙封)에 묻히고 지석(誌石)이 있다.

               일녀( 一女)는 김사석생원(金師錫生員)(에 출가하고,) 이녀(二女)는 정사수문부사(鄭士秀文府使)(에 출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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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당공(四季堂公)


공(公)의 휘(諱)는 수검(守儉)이오 호(號)는 사계당(四季堂)이다. 부(父)는 증 자헌대부(贈 資憲大夫) 의정부 이조판서(議政府   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 종원(知義禁府事 宗元)이요, 그 넷째아들이다. 벼슬은 참봉으로 평생 남의 좋고 그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영리(榮利)를 추구(追求)하지 아니하며 구의구관(舊衣舊冠)으로 선왕(先王)의 예를 지키니 사우(師友)가 추중(推重)했다.

공(公)의 생졸(生卒)과 행적이 병화로 인하여 민멸무전(泯滅無傳)함을 개탄하는 바이다. 묘(墓)는 장성 금호리  호산(狐山) 전록 건좌(乾坐)니, 배유인 광산김씨(配 儒人 光山金氏)와 쌍봉(雙封)이며 상석(床石)이 있다. 공(公)은 1남 3여를 두니

 

아들 영호(永浩)의 자(字)는 호연(浩然)이오 묵재(默齎)는 호(號)이다. 서기 1737年(중종 32 -丁西)에 생(生)하여 장성(長城)에서 나주(羅州)로 이거(移居)하여 터를 닦고, 벼슬이 현감(縣監)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고 서기 1605년(선조 39 - 乙巳)에 돌아가시니, 묘(墓)는 나주 모계 백용산(羅州 茅界 白龍山)밑 만년동 앞 초분골 간좌(艮坐)로, 배 정부인(配 貞夫人) 금성나씨(錦城羅氏)와 합부(合祔)이다.

1녀는 진사 서태수(進士 徐台壽)(에출가 했는데) 본(本)이 장성(長城)이오.

2녀는 진사 박시영(進士 朴時英)(출가하고)

3녀는 기효간(奇孝諫)(에 출가 했는데) 본(本)이 행주(行州)요, 호(號)는 금강(錦江), 벼슬은 부사과, 증 호조참의(副司果 贈 戶曹參議)이다. 참판(參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은 기효간(奇孝諫)의 9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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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공(秋溪公)


공(公)의 휘(諱)는 형종(亨宗)이오, 자(字)는 자성(子成)이고 추계(秋溪)는 호(號)이다. 병조참판(兵曹參判) 증직(贈職)을 받은 현손(賢孫)의 둘째 아들로 (벼슬은)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동지 중추부사(同知 中樞府事)라 보서(譜書)에 나타나 있다.

공(公)은 형을 공경하고 아우를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업(先業)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고, 자손(子孫)에게 덕의를 교화시켜 규거(規居)에 벗어나지 않아 일세(一世)에 모범이 되었다. 서기 1470년(성종 2 -庚戌)에 태어나 1534년(중종 29 -甲午)에 돌아가시니, 묘(墓)는 장성 황룡 선영 우등(右嶝) 인좌(寅坐)며, 배 정부인(配 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와 합부(合祔)이다. 방손(傍孫) 균수(均洙)가 지은 묘표명(墓表銘)과 비(碑)가 세워져있다.

 

장  수경(長  守景)은 자(字)가 덕봉(德奉) 호(號)는 고정(古亭)이다. 1504년(연산 11- 甲子)에 출생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증직을 받고, 1556년 (명종12 丙辰)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52세라. 묘(墓)는 만복동 풍치등 임좌(壬坐)이다.

배(配)는 숙인(淑人) 제주 고씨(高氏)이며 묘는 공(公)의 묘와 나란히 있다.

 

차 수무(次 守武)는 자(字)가 무애(無涯) 호(號)는 불엄(佛嚴)이다.  1507년(중종 5 -庚午)에 출생하여 1543년(중종 38-癸卯)에 요절(夭折)하니 묘(墓)는 고산(古山) 봉대곡 월담동 축좌(丑坐)이며 배(配)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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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공(盧亭公)


공(公)의 휘(諱)는 이종(李宗)이오 호(號)가 노정(盧亭)이니 부(父)는 (정혜공)수양(守良)의 귀(貴)로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 증직(同知義禁府事 贈職)을 받은 현손(賢孫)이요, 모(母)는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이다.

공(公)은 삼남(三男)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가를 모심으로 이자(李字)로 이름하고 학문과 재주 또한 있어 마땅히 벼슬에 올라 도(道)를 행(行)하여 세상에 이름 알리기로데,   싫어하고 오직 덕행(德行)에 힘을 다하고 지낼때, 연산의 혼란(昏亂)을 만나 산림(山林)을 찾은 곳이 (전북 고창)노동 마을이다.

항상 거문고와 독서로 마음을 달래며 행의청심(行義淸心)하는 몸과 마음 갖음을 한시도 버리지 않고 조상의 뜻을 이은 것이다. 생(生)과 졸(졸)은 밝혀지지 아니하고, 묘(墓)는 고창 호동 서당골 유좌(酉坐)요, 배 임씨(配 林氏)(의 묘)는 노동 묘원(卯原)이다. 공(公)의 묘전(墓前)에 상망석(床望石)과 거창 신사범(居昌 愼思範)이 지은 묘표명(墓表銘)과 비(碑)가 서있다.

 

공(公)은 세아들이 있으니

 

장(長)에 수영(守英)은 마음가짐이 순실하고 집다스리기를 예로하여 일문일향(一門一鄕)의 칭송이 자자했다.

 

차(次)에 수웅(守雄)은 효우가 지극하여 거상(居喪)에 성력을 다하고,

 

삼남( 三男) 수호(守豪)는 대(代)가 끊겼다.

 

*주 손개(胄 孫漑)의 자(字)는 대균(大勻)인데 경서(經書)에 능달(能達)하여 지능참봉(智陵參奉)에 제수되고, 청향당(淸香堂)을 지으니 하서 김선생(河西 金先生)의 오언이수(五言二首)의 시(詩)가 있다.(노정공과 주 손개의 관계가 불분명 함 )

 

고창(高敞) 상원사(上院寺)옆에 상원재(上院齎)를 창건(創建)하고 창령(昌寧) 조석일 옹(曺錫日 翁)이 재기(齎記)를 썼다. 경인란(瓊寅亂-1950년)으로 인하여 독립가옥 철거령에 따라(철거된 것을) 1975년(乙卯) 3월 26일 노동 촌중으로 중수(重修)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한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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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註)>

 

박이종(朴李宗)

이분의 자(字)는 자진(子珍)이며 신라 시조왕 47세손인 돈재공(遯齋公) 연생(衍生)의 증손으로 성종11년(1480년)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이분이 장성으로부터 고창읍 노동(蘆洞)으로 이거하여 정착했고 손자 박개(朴漑)는 지릉참봉(智陵參奉)을 하고, 현손 박기호(朴奇琥)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고창읍, 아산, 고수, 등지에 살고 있다. (고창군지 자료)

박기호(朴奇琥)

1598년∼1678년)-자는 화숙(和叔),호는 매월헌(梅月軒) 인데 돈재공 연생(衍生)의 8세손이요 노정공(蘆亭公) 박이종(朴李宗)의 5세손이다. 병자호란을 만나 의병을 모아 군을 원조했으나 청주 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자를 지어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 편액(扁額)하고 만년을 보냈다.(고창군지 자료)


보헌공(普軒公) 


공(公)의 휘(諱)는 정종(貞宗)이오 호(號)는 보헌(普軒)이다. 부 현손(父 賢孫)의 넷째 아들로 벼슬이 선략장군(宣略將軍)인데 형조참판(刑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는 아들 맹손(孟遜)의 귀(貴)로 증(贈)한 것이다.

공(公)의 치밀한 행동과 어진 덕망이 반듯이 있을 것인데 여러차례의 난으로 인하여 알려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묘(墓)는 선고(先考)무덤아래 임좌(壬坐)로 배 정부인(배 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와 합부(合)이다. 풍산 홍석희(豊山 洪錫喜)가 지은 묘갈명 (墓碣銘)과 비(碑)가 서 있다. 공(公)의

 

큰아들 맹손(孟遜)은 자(字)가 성길(成吉)이요 근재(謹齎)는 호(號)이다. 공(公)은 성격이 순실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학문에 이해가 빠르고 탐구심이 강하여 문과(文科)에 합격, 정언(正彦)을 하시고 서호(西湖)땅 도사(都事)를 거쳐 지평찰방 낙안군수(持平察訪 樂安君守)를 지내고 호조좌랑(戶曹佐郞)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와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을 역임했다.

평생 큰뜻을 나라에 바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과 마음가짐이 청정하며 공께서 닦으신 공부를 다 펴지 못하였으나, 덕화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만년에는 강호에 살면서 도의를 지켜 깨끗이 세상을 마치니, 제사는 3월 8일이요, 묘(墓)는 선고(先考)밑 임좌(壬坐)이며, 배 정부인 금성오씨 묘(培 貞夫人 錦城吳氏 墓)는 고위(考位) 아래 임좌(壬坐)이다.

 

장흥 고재익(長興 高在益)이 지은 묘갈(墓碣)이 있다. 공(公)을 파조(派祖)로 밀성박씨(密城朴氏) 돈재공후 근재공 파보(謹齎公 派譜)를 1994년(甲戌)에 간행(刊行)하니 종친의 단합이 돈독하다.

 

둘째 수걸(守傑)은 뒤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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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공(野塘公)


공(公)의 휘(諱)는 계종(繼宗)이요, 자(字)는 학소(學紹)며 야당(野塘)은 호(號)이다. 공(公)은 5형제 중 막내다. 성종조(成宗朝)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성현찰방(省峴察訪)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에 이르다.

공(公)은 시류(時流)를 짐작하고 자연(自然)을 즐기고자, 멀리 예안, 온수동골에 들어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글을 짓고 스스로 야당노수(野塘老)라 호(號)하고, 미인금(美人昑), 독락금(獨樂昑)등이 있고, 좋은 시(詩)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만년에 연곡(燕谷)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짓고 야당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공(公)은 66세를 일기(一期)로 졸(卒)하니

 

아들 효손(孝孫)은 겨우 세살인데, 퇴계 이황선생은 一二세였다. 아들이 자라서 18세(되던) 해에 선고의 유고가 정리되어 있었는바, 손진사(孫進士) 반좌(潘佐)때 불에타 없어지고, 정자 역시 오래되어 퇴패되니, 퇴계선생 손자 동은(東恩)이 유림과 더불어 거의(擧議)하여, 계사(癸巳) 11월 19일 중수할 것을 수계하고, 옛 정자터에 착공중수하니 안동 권상규(安東 權相圭)가 중수기를 쓰고 선성 김회진(宣城 金晦鎭)이 상양문을 지었다.

 

배 남양홍씨(配 南陽洪氏)는 실전되고 공(公)과 차배 안동권씨(次配 安東權氏)는 안동시 도산면 의일동 지리곡 자좌(子坐)로 합폄(合窆)이며 묘갈(墓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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