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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평의사공 언상파(都評議事公 彦祥派) 선세고(先世考)

 

-보라색 휘(諱)자를 클릭하면 해당 위치로 이동합니다-

여기 선세고(先世考)는 밀성박씨(密城朴氏)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박언상(朴彦祥)으로부터 그 10 세손 덕명(德明)까지의 세보(世譜)상 전해 오는 기록인데 서기1997년에 '밀성박씨 돈재공파' 종중에서 발간한 '종중요람(宗中要覽)'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 하였으며 내용에 착오가 있는 부분은 홈 운영자가 임으로 수정했거나 자료를 보충하였다.

   01세 - 도평의사공 박언상(朴彦祥)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08세

 

 09세

 

 10세

 

 11세

 

 

 

 

 

 

 

 

 

양신(良臣)

 

 직  (直)

 

인경(仁卿

 

 검  (儉)

 

 열  (說)

 

창밀(昌密) 

 

거인(居人

 

문봉(問奉) 

 

성명(聖明) 

 

춘생(春生)  

 

 

 

 

 

 

 

 

 

  

 

  

 

  

 

  

 

  

 

  

 

  

 

  

 

성도(聖道)

 

인생(仁生)  

 

 

 

 

 

 

 

 

 

  

 

  

 

  

 

  

 

  

 

  

 

  

 

  

 

  

 

의생(義生)  

 

 

 

 

 

 

 

 

 

  

 

  

 

  

 

  

 

  

 

  

 

  

 

승봉(承奉)

 

덕명(德明)

 

연생(衍生)  

 

 

 

 

 

 

 

 

 

  

 

  

 

  

 

  

 

  

 

흥밀(興密)

 

거의(居義)

 

문봉(文奉)

 

정  (禎)

 

승생(承生)  

 

 

 

 

 

 

 

 

 

  

 

  

 

  

 

  

 

  

 

  

 

  

 

  

 

미  (楣)

 

승영(承榮)  

 

 

 

 

 

 

 

 

 

  

 

  

 

  

 

  

 

  

 

  

 

  

 

  

 

  

 

승관(承寬)  

 

 

 

 

 

 

 

 

 

  

 

  

 

  

 

  

 

  

 

  

 

  

 

  

 

주  (住)

 

승업(承業)  

 

 

 

 

 

 

 

 

 

  

 

  

 

의경(義卿)

 

  간 (侃)

 

  치  (穉)

 

동생(東生)

 

지번(枝蕃)

 

  흠(欽)

 

성술(聖述)

 

자온(自溫)  

 

 

 

 

 

 

 

 

 

  

 

  

 

  

 

  

 

  

 

  

 

지만(枝萬)

 

  선(銑)

 

성도(聖道)

 

희경(希敬)  

 

 

 

 

 

 

 

 

 

  

 

  

 

  

 

  

 

  

 

  

 

  

 

  

 

  

 

희의(希義)  

 

 

 

 

 

 

 

 

 

  

 

  

 

  

 

  

 

  

 

  

 

  

 

  

 

  

 

대연(大璉)  

 

 

 

 

 

 

 

 

 

  

 

  

 

  

 

  

 

  

 

  

 

  

 

  

 

  

 

계연(季璉)  

 

 

 

 

 

 

 

 

 

  

 

  

 

신경(信卿)

 

  행  (行)

 

 조  (調)

 

동운(東雲)

 

수경(守卿)

 

은혁(恩赫)

 

명정(明鼎)

 

구(龜)  

 

 

 

 

 

 

 

 

 

  

 

  

 

  

 

  

 

  

 

  

 

  

 

  

 

  

 

홍원(弘元)  

 

 

 

 

 

 

 

 

 

  

 

  

 

  

 

  

 

  

 

  

 

  

 

  

 

명익(明益)

 

윤(潤)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08세

 

 09세

 

 10세

 

 11세

 

 

 

 

 

 

 

 

 

 

      박언상(朴彦祥)      <top>

박언상은 밀성대군의 팔세손(八世孫)이며 검교태전을 지낸 찬행의 둘째 아드님으로 고려 문종때 분이다. 도평의사(都評議事)로 밀직군(密直君)에 봉군(封君)되고 원덕사에 배향 되었다. 우리 박씨(朴氏)는 군(君)을 중조(中祖)로 모시고 수보(修譜)를 하고 있으며 각지(各地)에서는 군(君)을 중심(中心)으로 종친회(宗親會)를 만들어 족의(族宜)의 정(情)을 나누고 있다. 군(君)의 휘하 상자(諱下 祥字)를 상(商)이나 상(尙)으로 표기(表記)된 곳도 있음을 알려 드리는 바다. 유지는 밀주, 풍각 화산에 있다.

 

<편집자 주(註)>

 

공(公)유지는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라 하나 전하지는 않고 있다.


아들 양신(良臣)은 벼슬이 소감(少監)이요.   공(公)의 손자(孫子)

 

직(直)은 감무(監務)벼슬을 했다.

 

직(直)은 세아들을 두니

첫째는 인경(仁)이요,

둘째는 의경(義)이고.

셋째는 신경(信)이다.

 

삼형제(三兄第) 손이 호남, 영남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살고 있다. 전남 광주 종친 모임인 인의신회(仁義信會)는 삼조(三祖)의 이름 윗자를 따서 붙인것이라 하겠다. 삼조(三祖)의 관을 살펴보면 인경(仁卿)은 문림랑(文林郞)이요, 의경(義卿)은 창승(創承)이며, 신경(信卿)은 소감(少監)이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박검(朴儉)       <top>


박검은 휘 인경(諱 仁卿)의 아드님이오 벼슬은 내부시승(內部侍承)이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박열(朴說)      <top>


박열은 휘 검의 아드님으로 고려때 문과에 합격 문하찬성사에 오르고 시호 이정(諡號 夷靖)이다. 공(公)은 우리 가문(家門)의 초석을 다졌고 재종 박치(朴穉)는 관이 찬성이오, 재종질 동운(東雲)은 판도판서의 벼슬을 하고. 공(公)의 둘째 흥밀(興密)의 아들 거의(居義)는 판도판각이란 벼슬을 하면서 집안의 도약기를 이룩하였다. 공(公)은 밀주사(密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공(公)의 시호(諡號) 이정(夷靖)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밀주지(密州誌)에 나타나 있고, 밀성박씨 세보(壬戌 1872)와 여러차례의 족보[계사보(癸巳譜-1893, 경술보(庚戌譜)-1910]등에도 이정의 시호를 밝혔다. 그런데 밀성박씨세보(己亥 1899)와 태인박씨보(辛未 1931)등 최근에 발간된 책에 공(公)의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고증자료가 없으니 어떤일일까?

 

행여나 문자(文字)시호를 갖기 위해서는 아닐까? 사실이라면 할아버지는 물론 본손들까지 욕먹게하는 처사이니 마땅히 이정 시호(夷靖 諡號)로 통일(統一)되어야 하겠다.

(문헌)동국여지승람과  밀주지고

 

<편집자 주(註)>

 

공(公)의 시호(諡號)에 대하여 돈재공 19세손 박창구(박수창) 일가님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문정(文靖)이 맞는 것으로 사료된다.

밀성대군파 중에 박열(朴說)이라는 분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고려때 분이고, 또 한 분은 조선때 분인데 고려때 박열 할아버지가 우리의 직계 선조다, 다음은 박형구 일가님이 밝힌 내용이다.

 

"文靖公 朴說"에관한 기록내용 전문 抄

문정공   박열  에관한 기록내용   전문 초
朴氏文獻錄 卷之三   儒賢 - 密城大君派

박씨문헌록 권지삼   유현   밀성대군파

朴說

박열
          
弟 成廟朝 文科重試 弘文大提學 左贊成 御筆賜 "淸白傳家" 四字 諡夷靖.

          인제 성묘조 문과중시 홍문대제학 좌찬성  어필사 청백전가  사자  시이정

          박 열은 조선 성종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대체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고  왕이 淸白傳家 네자를 친히 써 내려 시호를 이정으로           하였다.

          ▷박열-1464(朝鮮朝 세조 10) ∼ 1517(중종 12) 자는 열지(說之), 시호(諡號)는 이정(夷靖),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사동(思東)의 아              들.1483 년(성종 14) 생원(生員)이 되고, 14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서 감찰(監察)·수찬              (修撰)등을  거쳐 1497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예조·이조의 판서,대사헌·좌참찬(左參              贊)을 역임한 후 1516년(중종 11)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위는 사문진사공파의 이정공 박열에 관한 기록입니다.

 

       
朴氏文獻錄 卷之四  卿士 - 密城大君派

박씨문헌록 권지사  향사   밀성대군파
朴說

박열
        彦祥後 內府寺丞 儉子 文科 贊成
諡文靖 見密州誌

        언상후 내부시승 검자 문과 찬성 시문정 견밀주지

          박 열은 (고려문종때 도평의사를 하신 ) 박언상의 후손이요.  내부시승벼슬을  한 박검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찬성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밀주지에 기록이 있다.

          *위는 우리 직계선조이신 文靖公 說祖에 관한 기록입니다.

          <위와 관련하여 다른 의견 있는 분은 연락 바랍니다>


박창밀(朴昌密)         <top>


박창밀은 문정공(文靖公) 열(說)의 큰아들로 려조에 문과하고 벼슬이 현승(현승)이다. 아우 흥밀(興密)도 형(兄)과 같은 현승의 벼슬을 했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박거인(朴居仁)        <top>


박거인은 창밀의 아드님으로 관은 소감(少監)이다. 인의현(人義縣), 지금의 태인으로 귀양하여 삼대(三代)가 살았다. 큰아들 문봉(問奉)은 정오품(正五品)에 이르고 후손이 제주와 양산에 산다고 적혀있다. 둘째아들은 승봉(承奉)이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박승봉(朴承奉)       <top>


박승봉(朴承奉)은 호(號)가 의재(義齋)다. 공(公)은 지기(志氣)가 청백하고 위엄이 출중하며 벼슬은 소윤(小尹)이다. 고려가 망하자 대대(代代)로 내려오는 집의 아들로 절의를 지켜 형 문봉(兄 問奉)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경서에 마음을 담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닦으니, 중국의 백이, 숙재와 도연명을 사모하였다 하였으니, 공(公)의 평생 닦으신 학문이 진실로 고인(古人)들에게 부족함이 없었으며,   왕씨(王氏)가 혁명을 당한 뒤 이조 섬기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세상(世上)사람들이 모두 의사라하더라. 슬프다 !  공은 참으로 글을 바르게 읽으신 의사(義士)라 하리로다.

중조(中祖)부터 의재공(義齋公)까지 자세한 사적과 생졸 묘소가 밝혀지지 않으니 가슴 아픈 마음 달랠길 없도다.

(문헌)문헌당호보 및 조선강헌록


박덕명(朴德明)        <top>


덕명(德明)은 의재공승봉의 외아들로 천부적인 용품이 일당천(一當千)의 기질과 불굴초지로 무술을 연마하고 학리를 탐구하며 태종(太宗) 2년 임오(1402) 무을과(武乙科)에 합격(合格)하여 처음 벼슬이 승의부위 호익순위사 우령부사정이다. 공(公)은 병사훈련과 영병생활의 군율확립에 재능과 능력이 썩 훌륭하여 삼품상(三品上)에 이르니 절충장군(折衝將軍) 훈련원(訓鍊院) 도정(都正)이요,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婦人)이다.

공(公)은 관(官)을 떠나 시입장성(始入長城)하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고 효(孝)에 불타(不惰)하여 선군충절(先君忠節)을 영모(永慕)하였다.

(문헌) 세보고 (世譜考)


묘는 장성군 황용면 금호리 산 33에 갑좌(甲坐)로   배와 합폄(合)이다. 지석(誌石)을 묻고 상망석(床望石)을 세웠다. 후(後) 1898년 무술(戊戌) 호산재(狐山齋)를 장성 황용  금호 대지(垈地) 10번지에 세우고 후손 문용(汶容)이 재기(齋記)를 썼다.

 

1950년(경인-庚寅  )에 6.25 난으로 재실(齋室)이 소각되어 1957년(정유-丁酉)에 후손 인천(仁天)의 찬조로 석축으로 중수하고, 상양문을 손 균수(孫 均洙)가 쓰고, 선성 김회진(宣城 金晦鎭)은 중수기(重修記)를 썼다.

 

1976년(병진-丙辰)에 다시 손질하고 화산 권용현(花山 權龍鉉)의 중수기(重修記)를 남기고, 1986년(병인-丙寅  ) 19세손 인천 부인(仁天 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하여금 묘갈명(墓碣銘) 비(碑)가 세워졌으니, 성균관  총무처장(成均館  總務處長) 진주인  강정희(晋州人  姜程熙)가 짓고 썼다.

또 1991년 3월 본재(本齋)와 별각(別閣)을 바로잡고 고전미(古典美)를 갖추어 다듬으니, 인천실인 전주이씨(仁天室人 全州李氏)의 봉선(奉先)하는 정신(精神)을 진심(眞心)으로 환영하는 바다 . 공(公)이 묻혀있는 산이 우리 도선산(都先山)이오, 도선산(都先山)에 세워진 재실이 호산재(狐山齋)임을 알려 드리는 바다.

 

휘 덕명 선조(諱 德明 先祖)의 계사직[(階司職) - 계(階)는 품계(品階)요, 사(司)는 관청(官廳)이며, 직(職)은 직위(職位)]을 정리하면,

승의부위(承義副尉)는 정팔품(正八品)이요,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는 십위(十衛)의하나요, 부사정(副司正)은 종칠품에 해당되는 관직이니 배위(配位)는 품으로 보아서는 단인(端人)이오 직(職)으로 봐 안인(安人)이다.

 

그런데 배 숙부인(配 淑婦人) 이라했다. 지금(只今) 보책(譜冊)이나 비문(碑文)에 기록(記錄)된 계사(階司職)이 전혀 맞지 않으니 바로잡아 정정 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1687년(숙종 14 丁卯)에 수보(修譜)된 태인박씨족보(泰仁朴氏族譜)의 십대손 행중 서(十代孫 行重 序)를 살펴보면 덕명(德明)은 무과사지(武科仕至) 삼품(三品)이라 했다. 고(故)로 계(階)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정삼품상(正三品上()이오, 훈련원(訓鍊院)은 서반 관청(西班 官廳)으로 사(司)이며 도정[(都正)-삼품상(三品上)은 직위(職位)]이다. 그래서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婦人)이 되는 것임을 밝혀둔다.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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