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泰仁)박씨와 밀성(밀양) 박씨 돈재공파와의 관계

  

태인박씨(泰仁朴氏)의 유래

 

태인박씨는 우리 밀성(밀양)박씨 돈재공파와 같은 일가 인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 공민왕 때 박거인(朴居仁) 할아버지께서는 소감(少監)벼슬을 하셨다. 공(公)은 신라 시조왕으로부터 44세손이요, 밀양(밀성)박씨 시조 밀성대군 박언침(朴彦 )의 15세손이며, 우리의 중조(中祖)로서 고려문종때 도평의사(都評議事)를 하시고 밀직군(密直君)에 봉군된 박언상(朴彦祥)의 8세 손이시다.

거인(居仁)께서는 고려 공민왕 때 소감(少監) 벼슬을 하시다가 화를 입고 전라도의 인의현(仁義縣)으로 귀양을 가셨다. 공(公)께서 유배된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는데  공은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인의현(仁義縣)에 인접하여 태산현(泰山縣)이 있었다. 거인(居仁)께서 그곳 인의현에서 태산현으로 옮겼으며 그후 2대를 살았다. 공은 문봉(問奉), 승봉(承奉) 두 아들을 두셨는데 승봉께서는 고려가 혁명을 당하자 은둔하셨다.

공의 손자 덕명(德明)께서 태종 2년(1402) 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3품 벼슬에 까지 올랐다가 태인으로 낙향하였으며. 조선왕조는 국초에 전라도의 태산현과 인의현을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지금의 정읍, 태인지방이다.

거인(居仁)의 증손자 연생(衍生)은 조선 단종(1453-1455)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 (忠武侍衛司 大護軍)벼슬을 하였는데 이분이 바로 돈재공(遯齋公)이시다.   돈재공(遯齋公) 연생(衍生)은 수양대군을 주축으로 한 한명희, 권남 등 신진정치 세력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이를 개탄하여 그들을 피해 태인으로 내려가 아버지 덕명을 모시고 전남 장성 하남(河南)으로 은신(隱身) 하였다. 후일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불응하고 다시 담양(潭陽) 월산(月山) 사위 이석손의 집으로 은둔 함으로서 충의를 지켰으며 본관마저 태인으로 바꾸어버렸다.

돈재공(遯齋公)께서 밀성(密城) 본관(本貫)을 태인박씨(泰仁朴氏)로 바꾸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박거인(朴居仁) 할아버지를 1세조로하여 태인박씨(泰仁朴氏)라 칭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학자 김개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수량(守良)은 대호군 문아(文雅 : 연생의 아들)의 증손으로  승문원 정자와 지평,헌납 등을 거쳐 나주목사, 호조참판을 지내고 한성부 우윤을 역임했으며, 명종이 즉위하자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그는 효성이 뛰어나 노모봉양에 지극했으며 상을 당하자 3년간이나 여막을 지켰다. 1553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선정을 베풀어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38년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좋은 집한채가 없을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관을 지낸  취극(就克)과 재화(再華)·세언(世彦)을 비롯하여 중추부사 내용(乃容)이 유명했고, 참판을 역임했던 순용(順容)은 비서감정 균종(均宗), 좌승지 동욱(東旭),우용(雨容),  중추부사 지춘(知春)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687년(숙종 13년 :丁卯)에 태인박씨(泰仁朴氏)  족보( 族譜)를 돈재공의 9세손 박행중(朴行重)의 서(序)로 처음 간행하였고 이로부터 144년 뒤 정혜공(貞惠公) 휘(諱) 수량(守良) 9세손 박규혁(朴圭爀)등이 1831년 (순조 31 辛卯)에 밀성(密城)에서 태인(泰仁)으로 개관(改貫)한 것을 복관(復貫) 밀성(密城)한다는 상소문(上疏文)을 예조(禮曹)에 올려 답통을 받아 다시 밀성박씨가 될때까지 돈재공 후손은 태인(泰仁) 박씨였다.

 

태인박씨(泰仁朴氏)에서 다시 밀성박씨(密城朴氏)로 복관(復貫)한 사실

 

태인박씨는 돈재공 13세손이요 정혜공(貞惠公) 휘(諱) 수량(守良) 9세손 박규혁(朴圭爀)등이 1831년 (순조 31 辛卯)에 밀성(密城)에서 태인(泰仁)으로 개관(改貫)한 것을 복관(復貫) 밀성(密城)한다는 상소문(上疏文)을 예조(禮曹)에 올려 답통을 받아 다시 밀성박씨가 되었다.

돈재공(遯齋公) 후손들은 조선말에 이르러 왜 태인박씨에서 밀성박씨로 되돌아 갔는가?

그 원인은 본관제도의 변천사에 따른 조선말 사회분위기를 알아봄으로서 대답이 가능하다고 본다.

본관(本貫)은 원래 시조(始祖), 혹은 중시조의 출신지(出身地), 또는 씨족의 세거지(世居地)를 근거로 설정하는 것인데,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對民)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이르러 향촌농민 사회의 분해가 심화됨으로서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同姓)은 처음에는 동본(同本)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姓貫)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姓貫)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改貫)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姓貫)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군소 성관(姓貫)들이 동성의 유력본관을 따라 개관하고, 사족(士族)들이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는 사회현실 속에서 태인(泰仁)박씨도 다시 밀성(密城)박씨로 개관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의 21세기 초 사회가치관으로 볼 때는 태인박씨 그대로 있었던 것이 오히려 본관의 정체성이 뚜렸하고 바람직한데 밀성박씨로 되돌아 간 것은 참으로 아쉽다 할 것이다. 아무튼 19세기 초(1831년)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당시 사회환경에 걸맞게 하기 위하여 예조에 복관(復貫)상소를 올려 제음(題音)을 받고, 조선말 대유학자인 홍직필(洪直弼)로부터 '밀성복관(密城復貫)'이 지당하다는 답사(答辭)를 받아 이로부터 우리는 다시 밀성(밀양)박씨가 되었다. 따라서 그 과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원문 및 번역문  

편집자 주(註)

1. 密城朴氏遯齋衍生時 改貫泰仁을 復貫密城 上疏文과 飜譯文  

*1831년(순조31년-辛卯)에 돈재공의 13세손

   밀성박씨돈재연생시 개관태인을 복관밀성  상소문    번역문

 박규혁 등 문중원이 밀성박씨에서 태인박씨로

<辛卯 禮曹公文 >

 개관한 것을 다시 밀성박씨로 복관한다는 상소

신묘예조공문

 문을 예조에 올렸던것이다.

全羅道 長城 儒生 幼學 朴圭爀等 謹上書于 大宗伯閤下

*幼學(유학) -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전라도 장성 유생 유학 박규혁등 근상서우 대종백합하

*大宗伯(대종백) - 우두머리  

전라도 장성 유생 유학 박규혁 등은 예조판서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 閤下(합하)- 정1품  관직에 있는 사람을 높이

伏以 氏族之重本貫 其來尙矣 或以 別子 封君 或以 功臣錫號未有無 自而然者也

 어 부르는 경칭  

복이 씨족지중본관 기래상의 궐 혹이 별자 봉군궐 혹이 공신석호미유무 자이연자야

 

엎드려 고하건데 씨족의 중대함은 본관인데 그 내력을 귀히 여기는 것이며 특별한 사람으로서

*돈재공께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분개히 여겨

봉군을 하거나 혹은 공신의 시호를 받음으로서 본관을 정하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이

은둔할 당시 본관을 태인으로 바꾼 것은  일시

아닙니다.

적인 것이며 영속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임

今生等之 朴本出密城而之麗李國初有 諱承奉 不仕

 

금생등지 박본출밀성이지여이국초유 휘승봉 불사

*승봉께서는 고려가 혁명을 당하자 은둔하셨

이제 생 등의 박씨본은 본래 밀성인데 고려 말 이조 초에 승봉이란 분이 벼슬을 하지 않고 태인

으며 돈재공의 할아버지가 되심

逃隱于 泰仁縣 子孫因居而至諱衍生以 大護軍當 世廟初 棄官 歸隱

 

도은우 태인현 자손인거이지휘연생이 대호군당 세묘초 기관 귀은

 

현으로  은둔하였고  자손이 인하여 살면서 연생이라는 분이 세종초에 대호군 벼슬을 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살면서

 

遂以 泰仁爲貫至玄孫諱守良以 碩德宏望爲 中仁間名臣官之八座  昆季子侄蔭資淸宦皆 

*곤계(昆季)-형제 *자질(子侄)-아들과 조카 

수이 태인위관지현손휘수량이 석덕굉망위 중인간명신관지팔좌  곤계자질음자청환개

*음자(蔭資)-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을 얻음

드디어 태인으로 본관을 하였는데 그 현손인 수양에 이르러 석덕으로 덕망이 있었고

*청환(淸宦)-규장각,홍문관,선전 관청 등의

중종 인조간에 명신과 벼슬한 사람이 여덟이나 있었으며 곤계와 자질에서 음자(蔭資)와

 벼슬.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켰으며

泰仁之朴顯於世

 지위와 봉록은 낮으나 뒷 날 높이 될 자리임.

태인지박현어세

 

청환(淸宦)이 나니 모두 태인박씨로 세상에 현달했습니다.

 

至再居辛酉 自密城修大譜凡朴之出于 密者不遺焉 生等 因復貫于密城固其反本事勢也

*신유(1801)년에 밀성박씨 대동보를 수찬할 때

지재거신유 자밀성수대보범박지출우 밀자불유언 생등 인복관우밀성고기반본사세야

 태인박씨에서 밀성박씨로 복관하여 참여하려  

신유(1801)년에 이르러 두 번째 밀성박씨 대동보를 수찬할때도  범 밀성박씨계에서 빠지게

 했으나 밀성 대종회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되었으나 생등은 인하여 본관을 밀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의미가 있슴.

至於今年 修密城派譜 其自密而泰自泰復密之由雖有敍述而 不可無 公家 文蹟玆敢仰訴伏乞

*공가 -권위있는 국가 기관 

지어금년 수밀성파보 기자밀이태자태복밀지유수유서술이 불가무 공가 문적현감앙소복걸

 

금년(1831년)에 이르러 밀성파보를 수찬하는데 밀성으로부터 태인으로 태인으로부터 다시

 

밀성으로 복관하는 이유에 대하여 국가의 서술이 있어야 겠기에 깊이 우러러 호소합니다.

 

參商敎是後 特爲題下以 爲不泯之案幸甚.

*참(參)이란 서쪽의 별, 상(商)이란 동쪽의 별로

참상교시후 특위제하이 위불민지안행심

두 별이 서로 동시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참상지탄(參商之歎)의 가르침을 주신 후 특별히 글을 내려 불민지안(不泯之案)으로  삼게 하여

이말은 흔히 혈육, 친구를 오래도록 만나지

주시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못하는 것을 말함. 보통은 사이가 나쁜 형제 또

 

는 감정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임.

즉 밀성대종회와 태인박씨의 관계를 말함.

 

2. 예조답통문과 번역문

 

    禮曺答通文    飜譯文

 

                                                              該曹題音

*예조에서는 박규혁 등의 상소문을 받아들여

해조제음

제음(題音)을 내려 주었다.

                                                        예조에서 내리는 글

 

此非京司之所可題給而事 季氏族密是初封 自本貫泰爲遯跡時權宜  則復貫爲密固 無不可向事.

*京司-京各司(서울 소재 관아의 총칭)의 준말. 

차비경사지소가제급이사 계씨족밀시초봉 자본관태위돈적시권의 즉복관위밀고  무불가향사

* 季 : 상대방을 높여 그 아우를 부르는 말

이는 경사(京司)에서 다룰바 일은 아니지만, 귀씨족은 밀성으로 초봉되었으나  태인에

 (박씨문중을 높여 상소인들을 부르는 말)

돈적시(遯跡時) 권의상(權宜上) 일시에 사용한 것이니, 마땅히 곧 밀성(密城)으로 관향을

 

복귀하여 향사에 참상지탄이 없도록 하라.

 

 

 

 

* 題音(뎨김-제음)에 대하여

제음(뎨김)은조선시대 백성이 관청에 제출한 소지(所志)에 대하여 관청이 내린 처분이다.

백성이 소지를 내면, 해당 관청에서는 그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을 이용하여 처리 내용을 적고

관인()을 찍어 제출자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관청의 확인이므로 이 뎨김을 받은 소지는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므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이러한 뎨김은 ‘이문성급()’처럼 간단하게 처리되기도 하였으나 각종 소송관계의 뎨김은 뒷면을 이용하여 쓰거나 별지를 첨부하여 쓰기도 했다.

 

 

3. 梅山 洪 文敬公 直弼 答辭

 

         매산 홍 문경공 직필 답사

 

 

 <남양홍(洪)씨 직필(直弼)에 대하여>

象萬之生與世變滅而 所傳而 不可盡變者獨姓氏猶存然自 漢唐以來 或更於世主之賜 或以避飢而易

 

상만지생여세변멸이 소전이 불가진변자독성씨유존연자 한당이래 혹경어세주지사혹이피범이역

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긍필(兢弼).

或以避嫌而易 或以爲客而 易 如改越改勃 冒朱冒鄭 敬唐之石 知遠之劉者 不可勝數而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호는 매산(梅山).

혹이피혐이역 혹이위객이 역 여개월개발 모주모정 경당지석 지원지유자 불가승수이

시호는 문경(文敬).서울 출신. 판서 이간

 

(履簡)의 아들이다.

旣變貫 往往自絶 本根波流 雲散罔有止極何異乎

뛰어난 재질이 있어 7세 때 한자로 문장을 지

기변궐성병역궐관 왕왕자절 본근파류 운산망유지극하이호

었으며,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飛空之鳥 走壙之獸 聚散無恒而 人道或幾乎熄矣 尊門改貫 則靡所挾雜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비공지조 주광지수 취산무항이 인도혹기호식의 존문개관 칙미소협잡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

 

시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서 실패

始因遯世自靖而中焉 復貫者亶出於樂所生不忘 其本名有精義存焉 今又改貫於百年之後者

하고,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시인둔세자정이중언 복관자단출어낙소생불망 기본명유정의존언 금우개관어백년지후자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

 

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恐欠愼重仍舊密城 是爲從先祖之義也 百年間帳籍及祠板陷中許多 文牒有難遽改舍

1845년 성균관좨주를 비롯하여 1851년(철종

공흠신중잉구밀성 시위종선조지의야 백년간장적급사판함중허다 문첩유난거개사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1852년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

泰從密所乃處變事而 不失其正也 密是所自出 則原始要終統宗會元 不爲得義理之安平乎

았다. 그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곧

태종밀소내처변사이 부실기정야 밀시소자출 칙원시요종통종회원 거불위득의리지안평호

죽었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

見乃爾未敢自信幸博詢而栽處焉

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고견내이미감자신행박순이재처언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

 

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

 번  역  문

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우주만상(宇宙萬象)이 세상(世上)에 낳아 변멸하고 소전(所傳)하는 것이니 진변자가 유독 귀씨족만이 아닌 것이 허다(許多)함이니 한당이래(漢唐以來)로 혹은 군주(君主)의 사성(賜姓)으로 혹은 기근(飢饉)을 피하고저 혹은 혐의로 혹은 부치고 바꾸고 모정모주(冒鄭冒朱)와 경당지석(敬唐之石)과 지원지유자(知遠之劉者)등이 불가승수(不可勝數)니 이미 그 성(姓)을 바꾸고 본관(本貫)까지 바꾸어서 스스로 끊기는 일이 왕왕 있는 일이다.

근본(本根)이 파류(波流)함과 운산(雲散)이 망유지극(罔有止極)함과 어찌 다르리오. 공중(空中)에 날으는 새와 넒은 산야에 뛰어다니는 짐승은 취산(聚散)이 무항(無恒)한 것이고 인도(人道)야 혹은 거의 없어지기도 하는데 존문(尊門)의 개관(改貫)은 협잡한바가 아니고 오직 돈세자정중(遯世自靖中)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복관(復貫)함을 기꺼히 여겨 소생(所生)에 불망기본(不忘基本)하고 각자가 정의(精義)를 보존(保存)함에서 뜻이 있으니 복구밀성(復舊密城)하여 선조(先祖)의 의(義)를 따름이니라 .

백년간(百年間)의 장적(帳籍)및 사판(祠版)에 함중(陷中)이 허다(許多)하고 문첩(文牒)에 난거(難遽)가 있겠으나 태인의 관을 버리고 밀성으로 복관하는 것은 일시(一時)의 처변사일뿐 이는 오직 정의를 잃지 않음이니라. 밀성에서 자출(自出)한 바이니 원시조(原始鳥)를 주요(主要)히 여기면 어찌 의리(義理)에 평안(平安)하지 않으리오.


홍  직  필

 

 

조선시대 학파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대별되는데 홍직필은 19세기 대유학자로서 이항로와 함께 기호학파의 거두였으며 국론결정에 영향력이 지대하였고 말년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조선말에 순조 → 헌종 → 철종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는데 1849년 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상왕(上王)헌종은 철종의 조카였다. 왕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지 않고 조카에서→아버지 항렬인 숙부를 향해 변칙으로 계승되었다. 이때 예론(禮論)에 문제가 있었는데 홍직필은 안동김씨 편에 서서 변칙적인 왕위계승의 확고한 이론을 제공했다. 예를들면 <철종은 헌종에 대해 훌륭한 조카라는 뜻에서 '황질'을 칭하고 헌종비에 대하여는 '황질비'라고 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여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는 그에 따른 것을 들 수 있다.

 

장성 박규혁 등이 신묘년(1831년)에 복관상소 할  당시, 홍직필은 55세였으며 대학자일 뿐, 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홍직필로부터 답사(答辭)를 받을 때가 1831년이라면 홍직필은 관리의 신분으로 답사(答辭)를 한 것이 아니라, 대 유학자의 신분으로 답사(答辭)를 한 것이었다.

홍직필은 우리문중에 대하여는 제3자적인 인물인 동시에 대학자요 국가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으로부터 <태인박씨에서 밀성박씨로 복관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는 글을 받아냄으로서 밀성박씨 복관의 객관적 타당성과 종론(宗論)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문중의 <태인박씨에서밀성박씨로의 복관>은 예조에 상소하여 국가권위로부터 행정상의 인정을 받고, 대유학자에게 질의 응답하여 예론상(禮論上) 학문적 권위로부터 뒷받침을 받은 것이다.

한편, 1831년 복관상소를 주도한 박규혁(朴圭爀) 할아버지의 계통은 다음과 같다.

돈재공

01세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08세

0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정혜공

 

 

 

 

01세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08세

09세

10세

 

朴衍生

文雅

賢孫

宗元

守良

思愚

尙謹

允中

龍仁

世昌

崇順

泰敬

圭爀

重文

 

박연생

문아

현손

종원

수량

사우

상근

윤중

용인

세창

숭순

태경

규혁

중문

 

태인박씨(泰仁朴氏)의 실태

 

1831년 복관상소 후 태인박씨는 거의가 밀성박씨로 돌아갔으나 일부가 아직까지 태인박씨로 잔류하고 있다. 돈재공 후손들이 복관상소(復貫上疏)

파와 태인박씨(泰仁朴氏) 잔류파로 나뉘어 공존하고 있는 샘이다.  현재 돈재공 후손들은 32,000여명으로 추정하는데  2000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 결과 태인박씨는 140가구 456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돈재공파 전체 인구의  1.4% 수준에 해당되며 지역적 분포는 다음과 같다.

지역

총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가구

140

37

2

4

4

17

4

0

31

4

3

2

8

11

3

6

4

인구

456

122

15

10

22

57

16

1

95

10

12

6

29

27

12

14

8

 

타문중에서 발표한 객관적 자료상 태인박씨 집성촌은 *전북 고창군 해리면 방축리, 신림면 덕화리  *전남 장성군 황룡면 일원   *전남 나주군 다시면 동곡리, 노안면 계림리  *전남 나주군 문평면 일원  *전남 광산군 일원   *전남 영광군 동부면 일원으로 되어 있으며 항렬표 또한 다음과 같다.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항 렬 자

行 列 子

위 항렬표에서  萬-容-均-求-來-燮으로 이어지는 계통은 우리 돈재공파와 같으나 그 이하는 다르다. 또 고려 공민왕 때 거인을 1세조로 하지 않고 고려 문종때 도평의사공을 1세조로 하여 분류하였다. 이처럼 태인박씨에 대하여 족보관련 기관이나 타문중에서는 상이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홈운영자는 돈재공 종손 박경열 종숙(宗叔)에게 돈재공 후손 중 어느 문중이 태인박씨로 남아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답변은 이러했다.

<현재 본관을 태인으로 사용하는 문중은 장성의 백우당(栢友堂) 문중이 본관을 태인으로 쓰고 있으며,백우당 종손 판기(만기-萬基)일족은 밀양으로 쓰고 있습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으나 다른 일가나 문중에서도 태인으로 쓰고있는 사례가 왕왕 있는것으로 파악 됩니다>

그렇다. 아래 도표에 나와 있는 돈재공 9세(청색글씨) 후손들 중에서 일부가 본을 태인박씨로 하는 분들이 있고 다른 문중에서도 소수(小數)가  태인박씨로 쓰고 있는 것이다. 행경(行敬) 후손은 밀성박씨로 본관을 삼는 자들이 많고, 행중(行重) 후손은 전남 장성에 세거하는 후손들만이 본관을 태인으로 삼는다고 한다.

  01세

02세

03세

04세

05세

06세

07세

08세

09세

10세

연생(衍生)

문아(文雅)

현손(賢孫)

종원(宗元)

수온(守溫)

사영(士瑛)

성번(成蕃)

이하생략

 

 

 

 

 

 

 

사침(士琛)

상겸(尙謙)

이하생략

 

 

 

 

 

 

 

 

상효(尙孝)

이하생략

 

 

 

 

 

 

 

 

 

 

 

 

 

 

 

 

 

사순(士珣)

상의(尙義)

윤함(允鑑)

행간(行簡)

정화(鼎華)

 

 

 

 

 

 

백우당(栢友堂)

 

행경(行敬)

태화(台華)

 

 

 

 

 

 

 

 

행민(行敏)

 

 

 

 

 

 

 

 

 

행중(行重)

지화(至華)

 

 

 

 

 

상지(尙智)

이하생략

 ↓

 

 

 

 

 

수량(守良)

이하생략

눌헌공(訥軒公)

 

1687년(숙종

 

 

 

 

 

수공(守恭

이하생략

 

 

13년-丁卯)

 

 

 

 

 

수검(守儉)

이하생략

 

 

에 태인박씨

 

 

 

 

형종(亨宗)

수영(守影)

이하생략

 

 

족보를 최초

 

 

 

 

 

수무(守武)

이하생략

 

 

로 발간.

 

 

 

 

이종(李宗)

수영(守影)

이하생략

 

 

 

 

 

 

 

 

수웅(守雄)

이하생략

 

 

 

 

 

 

 

정종(貞宗)

맹손(孟孫)

이하생략

 

 

 

 

 

 

 

계종(繼宗)

효손(孝孫)

이하생략

 

 

 

 

 

 

 

 

 

 

 

 

 

 

 

밀성(밀양) 박씨(朴氏) 돈재공파의 숙제

밀성(밀양)박씨 돈재공파와 태인박씨는 한 명의 조상으로부터 뿌리가 갈려나간 것이 아니고 한 명의 조상을 놓고 후손들이 양분되어 파를 달리하고 있는 양상이다. 밀성박씨 돈재공파가 태인박씨로 다시 개관하는 일이나  태인박씨가 밀성박씨로 개관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1831년 복관상소 당시 문중이 단결하여 태인박씨에서 →밀성박씨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일부가 그렇지 못했고, 밀성박씨 대종회와의 관계에서도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여 경주 숭덕전의 신라박씨 계보나  밀양시 밀성재의 밀성박씨 대종회 계보에 아직도 돈재공 후손 전체가  고려말 박거인(朴居仁) 할아버지를 1세조로 하는 태인박씨로 분류되고 있다.

                              밀성박씨세계보(密城朴氏世系譜)  -------------- ☞

                             <돈재공19세손 박형구(박수창)일가 제공>

 

 

돈재공파가 복관상소 후 밀성(밀양) 박씨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음에도 밀성박씨 대종회에서는 현재 돈재공 후손을 태인박씨로 인식하고 있으며

태인박씨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돈재공 후손을 대표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본관을 두 가지로 사용할 수 없는 일이니 밀성박씨 돈재공파와 태인박씨 및 밀성박씨 대종회는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돈재공파는 밀성박씨(密城朴氏)임을 천명한 돈재공파 대종회의 글

 

本貫(본관)이라 함은 始祖(시조)의 出生地(출생지)를 말하는 것이 원칙이다.
一族一門(일족일문)의 數(수)가 蕃衍(번연)하여 姓氏(성씨)만으로는 同族(동족)을 區別(구별)하기 곤란하므로 本貫(본관)이 必要(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 朴氏(박씨)는 天降姓(천강성)으로 누구나 同祖孫(동조손)이니 朴赫居世(박혁거세)는 모든 朴氏(박씨)의 始祖(시조)요 新羅朴氏(신라박씨) 이다.密城(밀성) 密陽(밀양) 朴氏(박씨)의 始祖(시조)는 密城大君(밀성대군)에 封君(봉군)되신 諱彦?(휘언침)이시다.

우리는 中祖(중조) 都評議事(도평의사)로 密直君(밀직군) 彦祥以下(언상이하) 우리 朴哥(박가)가 麗末(려말)까지 密城朴氏(밀성박씨)로 居仁先祖(거인선조)께서 당시 泰山懸(태산현)으로 귀양하여 子孫(자손)이 살게되고 朝鮮朝初(조선조초)에 諱承奉(휘승봉)께서는 벼슬을 마다하시고 孫子(손자) 諱衍生(휘연생)은 世祖(세조)의 不當(부당)한 登極(등극)에 大護軍(대호군)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님 德明(덕명)을 모시고 長城河南(장성하남)으로 자리를 옮겨 隱身(은신) 하면서 여러차례의 부름을 저버리고 다시 潭陽(담양) 月山(월산) 사위집에 隱居(은거) 泰仁朴氏(태인박씨)로 本貫(본관)을 바꾸니 이로부터 泰仁朴氏(태인박씨)로 부르게 된 것이다. 西紀(서기) 一六八七(숙종 一四丁卯(일사) 정묘)에 泰仁朴氏(태인박씨) 族譜(족보)를 遯齋公諱衍生(휘연생 돈재공)의 九世孫行重序(구세손 행중서)로 처음 刊行(간행)되고 이로부터 一四四년 뒤 貞惠公(정혜공) 諱守良九世孫 (휘수량 구세손) 圭爀(규혁)등이 西紀(서기)一八三一년 (순조 三一 辛卯)에 改貫(개관) 泰仁(태인)을 復貫(복관) 密城(밀성)으로 上疏文(상소문)을 禮曹(예조)에 올리니 답통에 貴氏族(귀씨족)은 밀성으로 初封(초봉) 되었으나 遯跡時(돈적시) 권의상 이를 일시에 사용한 것

이니 復貫密城(복관밀성)함이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라 했고


梅山 洪 文敬公(매산홍문경공) 直弼(직필) 답사에

宇宙萬象(우주만상)이 世上(세상)에 낳아 변멸하고 所傳(소전)하는 것이니 진변자가 유독 귀씨족만이 아닌 것이 許多(허다)함이니 漢唐以來(한당이래)로 혹은 君主(군주)의 賜姓(사성)으로 혹은 飢饉(기근)을 피하고저 혹은 혐의로 혹은 부치고 바꾸고 冒鄭冒朱(모정모주)와 敬唐之石(경당지석)과 知遠之劉者(지원지유자)등이 不可勝數(불가승수)니 이미 그 姓(성)을 바꾸고 本貫(본관)까지 바꾸어서 스스로 끊기는 일이 왕왕 있는 일이다. 本根(본근)이 波流(파류)함과 雲散(운산)이 罔有止極(망유지극)함과 어찌 다르리오. 空中(공중)에 날으는 새와 넒은 산야에 뛰어다니는 짐승은 聚散(취산)이 無恒(무항)한 것이고 人道(인도)야 혹은 거의 없어지 기도 하는데 尊門(존문)의 改貫(개관)은 협잡한바가 아니고 오직 遯世自靖中(돈세자정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復貫(복관)함을 기꺼히 여겨 所生(소생)에 不忘基本(불망기본)하고 각자가 精義(정의)를 保存(보존)함에서 뜻이 있으니 復舊密城(복구밀성)하여 先祖(선조)의 義(의)를 따름이니라.

百年間의 帳籍(장적)및 祠版(사판)에 陷中(함중)이 許多(허다)하고 文牒(문첩)에 難遽(난거)가 있겠으나 태인의 관을 버리고 밀성으로 복관하는 것은 一時의 처변사일뿐 이는 오직 정의를 잃지 않음이니라 밀성에서 自出(자출)한 바이니 原始鳥(원시조)를 主要(주요)히 여기면 어찌 義理(의리)에 平安(평안)하지 않으리오 라고 했다.

 

以上과 같이 復貫(복관)의 당연성을 밝인후 우리 先祖(선조)는 朴氏世譜(밀성박씨세보)와 密城朴氏評議公派譜(밀성박씨평의공파보)를 여러차례 펴 냈음은 復貫(복관)하였음을 立證(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西紀(서기)一七三一년(辛末)에 泰仁朴氏族譜(태인박씨족보)를 修補(수보)한바 있으나 宗論(종론)의 統一(통일)을 期(기)하지 않은 發刊(발간)된 任意譜(임의보)야 道德性(도덕성) 문제이니 再論(재론)의 余地(여지)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密城(밀성)의 貫鄕(관향)을 遵守(준수)하고 稱號(칭호)하여 많은 一家(일가)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한치의 의혹을 사는 일 없애길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밀성박씨 돈재공파'가 1997년에 발간한 '종중요람' 중에서 돈재공 종손 박경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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